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나는 머리 깎는 일을 정말 싫어했다.
알코올 중독으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손이 떨려 머리를 못 깎는다는 이발소 아저씨의 술 냄새가 싫었고...
더 싫은 일은 이 아저씨의 처사 때문이다.
유난히도 머리숱이 많고 뻣뻣한 내 머리털을 아저씨는 철사 줄이라며 늘 놀렸다.
놀림이야 당하면 그만이지만 이 말끝에는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진저리나게 싫은 것이다.
언제나 -내 기억으로는 한 번도 빼 놓은 적이 없다- 바리캉이 먹지 않아 머리를 집어서 비명을 지르게 했고, 잘 들지 않는
-그러나 정말 무섭고 날카로운- 칼을 가죽 줄에 비비다가 면도를 할 때 그 섬뜩한 아픔이란....
이발소를 나올 때엔 내 귀 언저리나 목덜미에 신문지를 침에 발라 동그랗게 붙인 흔적이 한두 곳은 꼭 있어야 한다.
아픔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나의 억센 머리카락의 잔재는 늘 옷 속에 남는다.
겨울에 개옷이라도 입었다면 -개옷이 맞을까? 게옷이 맞을까? 아니면 계옷? 아무튼 그 당시엔 털실로 짠 옷을 그렇게 불렀다-
봄이 올 때 까지 따끔거리고 간지러운 일을 감수해야 했다.
머리가 부드러운 사람들은 예고 된 이 아픔을 과연 이해나 할 수 있을까?
내 기억 속에 가장 가기 싫은 장소 하나를 들라면 난 서슴없이 이발소라고 말할 수 있다.
차라리 도살장에 끌려간다면 아픔은 한 번으로 끝날 것 같았으니까.
이사를 간 이후에도 이 아픔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 했던가? 새로운 장소에서 만난 이발사 아저씨도 똑같은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으니.... 컥컥.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 이발소 정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게 남아 있다.
받침대가 원형인 빨간색 등받이 회전의자 3개.
선반위에 놓인 바리캉 그리고 날카로운 가위와 면도칼, 가는 쇠 빗과 돼지털로 만든 솔... 비누를 담은 면도용 그릇. 한 쌍의 가죽 칼갈이.
사각형으로 접어서 자른 신문지 꾸러미.... 항상 크레졸 냄새가 나는 어항 같은 진열장.
타일로 붙여 만든 개수대와 단두대처럼 목을 판 나무.
-머리를 감을 때 이 판에 목을 대면 순간적으로 위에서 작두가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조금 더 커서 루이 18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이야기를 읽은 후 기요틴이란 단어의 어원을 알고 나서는 더 더욱 그랬다.-!-
그 다음 머리에 떠오르는 풍경은 정말 생뚱맞은 이발소의 액자들이다.
당시 모든 이발소에 법으로 정해진 무언가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그 때 부터 이발소는 체인으로 운영 되었던가 카르텔을 형성했었나 보다.
거울 윗부분 공간엔 풍경화가 비스듬히 매달려 있는데 어디를 가 봐도 그 그림은 한 사람이 그린 것처럼 닮았다.
혹여 대나무 밭에서 눈 큰 호랑이가 삐쭉 나오는 그림이 걸려 있는 집도 있긴 했지만....
내 기억이 맞는다면 좌측에서 부터 첫 번째 그림은 봉긋 봉긋 솟아 있는 무수한 산 사이로 유연한 S자 강이 흐르고
그 강위엔 대나무로 만든 뗏목이 하나 있다.
뗏목에는 삿갓을 쓴 사공이 노를 젓는데 가마우지 한 마리가 사공 옆에 꼭 앉아 있어야 한다.
두 번째 그림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산들이 첩첩 산중으로 그려져 있고 그 산 꼭대기에서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하얀 폭포가 실처럼 흘러내린다.
세 번째는 중요한 그림이므로 패스하고, 네 번째로 넘어가면 언제나 노란 꽃이 만개한 물레방앗간 풍경이 나온다.
이 그림을 볼 때면 4개의 그림 중 그래도 가장 내 살던 곳과 닮았다는 안온함을 느끼게 한다.
눈을 껌뻑이며 기요틴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나에게 지구상엔 존재하진 않을 것 같은 이 풍경들이 선택 불가능한
유일한 위안이었기에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발소를 나오면 싹 잊히긴 하지만 가끔씩은 이런 곳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하는 궁금증도 일었다.
나이가 들면서 이 그림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점을 확인하며 놀라게 된다.
첫 번째 풍경을 확인한 장소는 광주에서 아들을 안고 극장에 갔을 때다.
이연걸이 데뷔한 소림사라는 영화를 볼 때 너무도 이발소 액자 속 그림과 닮은 풍경을 보고 소스라쳤다.
그 장소가 바로 중국의 계림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한 참 더 이후다.
두 번째 풍경은 장가계와 황산을 다녀 온 이후, 귀주성, 구룡폭포와 마링하 대협곡에서 그 실체를 보게 된다.
이 네 곳의 그림을 합하면 영락없이 두 번째 사진의 풍경이 나온다.
앞에서도 말했듯, 네 번째 풍경은 한국에서도 어릴 때 자주 보든 풍경이다.
우리 동네에도 물레방앗간이 있기 때문에 조금 변형 된 그림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렇게 예쁜 노란 꽃밭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늘 아쉬워했다.
하지만 이 그림 보다 더 우아한 노란색 실체를 본 것은 운남성 라평이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위에 노란 물감을 확 부어 놓았다고 말해야 할까?
하긴... 라평은 너무 거대하여 그림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운남성을 여행하다 만나는 작은 시골 동네 봄 풍경에서 그 모습을 보곤 했다.
초록색 보리밭과 붉은 대지, 그리고 노란 유채밭... 정말 딱이다. 물레방아간만 곁에 있다면....
그럼 가장 기억에 남는 세 번째 풍경을 묘사해 보자...
저 멀리 하얀 설산이 보인다. 하늘엔 흰 구름이 두둥실 떠서 설산 머리를 다소 곳이 가리고 있다.
너무도 맑은 호수위에 하얀 다리가 무지개처럼 걸려 있고 그 끝엔 활시위처럼 휜 추녀를 가진 누각이 보인다.
단조로운 호수 속에 신선이 자리 잡을 만한 육각 정자도 사뿐히 내려 앉아 있다.
호수 주변엔 연두색 미루나무가 보이고 복사꽃이 만발한 시기에 그려진 춘삼월 풍경이다.
무언가를 더 그려 넣어도 안 되고, 빼도 안 되는... 조영남의 화계장터처럼 있어야 할 것은 다 있고 없을 건 없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완벽 그 자체여서 오히려 외계 같은 그림.
이 풍광을 직접 목격한 때는 바로 5년 전이다.
내가 본 그림에서 하나도 덜거나 더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
나를 아프게 한 이발소의 추억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언제부터인가 내가 이곳에 늘 존재했었다는 착각과 함께 오는
데쟈뷰 현상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잊혀진 기억 속에 묻혀있던 장소가 내 눈앞에 실체를 드러냈을 때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 할 방법이 없다.
다만 이건 필연이었고 돌고 돌아 이곳까지 오게 하려는 하늘의 뜻만 같았다.
나를 끔찍이도 아프게 한 건 이 장소들을 잊지 말라는 준비가 아니었을까?
인생 50을 되돌아보며 회한에 젖어 들 수밖에 없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고, 흐르는 눈물을 굳이 닦고 싶지도 않았다.
나의 과거를 낮선 땅에서 만나게 하는 하늘의 뜻이 그저 오묘할 뿐이었다.
다시 갔다.
5년 전 그곳으로... 이번에는 그 그림을 간직하고 싶어서다.
여행을 시작한 이 후, 번거롭다는 이유로 카메라를 무시하던 때가 바로 5년 전이다.
이제는 다르다.
어차피 그림을 그릴 재주가 없고 글로 표현할 능력이 나에게 주어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기계의 힘을 빌려 한 폭의 그림을 어슴푸레 담을 수 있다는 자체를 깨달은 것만으로도 앞으로의 지평이 열린 샘이니까.
2008년 3월 13일... 아침부터 흐린 날이 벗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옥룡설산 역시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이발소의 추억을 재현하려고 무작정 며칠을 기다릴 시간이 없다.
옛 기억이 혹시 변하지 않았을까? 제일 궁금했다.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물이 조금 탁해졌다. 옥수채가 가깝고 샘물이 나오는 곳인데 이곳도 환경파괴의 몸살을 앓기 시작하나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여행 중 늘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면 내 힘이 너무 보잘 것 없다는 것이다.
추억의 이발소 그림 흑룡담... 아쉽게도 옥룡설산이 보이지 않는다.
이 상태라면 그림의 절반만 완성 된 것이다.
다시 루구호를 다녀왔다.
오는 길에 파란 하늘이 보여 맘이 설렌다.
남문역 (신커윈쟌)에 도착하여 택시를 타고 바로 흑룡담으로 향했다.
오락가락하는 저 구름들이 조금만 참아 주길 빌면서....
드디어 추억 한 귀퉁이를 잡았다.
40년 전 이발소에서 보던 그림 한 폭을 웬만큼 재현했다.
이번 여정에서 절반의 성공을 한 샘이다.
[ 5년 전 여행기를 되돌려 보다... ]
여행을 떠나기 전, 운남성 자료를 찾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기막힌 사진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과연 이런 경관이 실제로 있을까?
어렸을 때 이발소를 가면 실제 풍광보다 과장을 하여 국적 불명의 칼라풀한 싸구려 그림을 걸어 놓은 곳이 많았습니다.
진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그런 그림 한 장이 실제로 사진에 찍혀있더군요.
눈 덮인 산, 수정같이 맑은 호수, 날아오를 것 같은 탑, 반달 모양의 다리... 절묘히 조화를 이루어 그림을 그려 놓은 듯한 모습.
그 사진의 장소가 바로 옥천공원(흑룡담)이었습니다.
고산증 때문에 비몽사몽 흔들거리며 옥천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사진이 실물보다 잘 나오는 장소가 있다는 걸 익히 알기 때문에 이런 장소를 찾을 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가는 편이죠.
실상을 알고 보면 대개는 터무니없이 규모가 작다거나, 세트처럼 겉만 번지르르 할 수도 있고,
사진이 찍힌 풍광에서 한 발자국 만 벗어나면 주변이 아니올시다 이거나, 거울 같은 호수가 속을 들여다보면 흙탕물일수도 있거든요.
웬걸요. 이곳은 입장료가 전혀 아깝지 않은, 사진만큼 실물도 아름다운 그런 곳 이였습니다.
꼭 들러서 사진을 찍어 보십시오. 구도만 잘 잡으면 그대로 엽서가 됩니다.
공원의 규모도 상당히 큰 편이고 깨끗했습니다.
돌아보실 때 주변 경관에만 신경 쓰시지 말고 호수의 물을 잘 들여다보세요.
곳곳에서 샘이 솟아오르는 신기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옥룡설산의 빙하 녹은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이곳에서 분출되는 것이랍니다.
玉泉이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 맑은 물...
이 물이 그대로 고성으로 흘러들어 간다는 걸 확인하고 리쟝이 더 좋아졌습니다.
첫댓글 인터넷세상에 "웃기는 비디오가게 아저씨(웃비야)" 라는 여행전문가가 있습니다.세계의 여행지를 동네 뒷산 가듯 하는 멋진 분이 있어 소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