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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주스님이 1980년 6월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총무원장 자격으로 위문단과 함께 광주 현지를 방문했던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신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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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로를 비롯한 광주 시내 전역에 화약 냄새가 진동을 했습니다.” 조계종 전 총무원장 월주스님(지구촌공생회 이사장)이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31주기를 앞두고 1980년 6월 광주 현지를 방문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월주스님은 총무원장으로 재직하던 1980년 6월3일 광주시를 직접 방문해 희생자들의 유가족과 부상자들을 위로했다.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후 무력진압으로 무수한 희생자가 발생한 5ㆍ18 당시 조계종 총무원이 광주시민돕기대책본부를 구성하고, 현지를 직접 방문해 위로한 것이다. 본지는 지난 5월5일 서울 영화사에 주석하고 있는 월주스님을 직접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들었다.
“시내에 화약 냄새가 진동”
“계엄사 발표 ‘허구’ 확인”
종로서장 “광주방문 말라”
‘광주사태’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전해들은 월주스님은 종단 차원에서 광주시민들을 위로하고 돕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우선 1980년 5월24일 광주지역의 ‘소요사태 진상조사 선무단’을 급파하고, 전국 본말사에서 신도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의연금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신군부가 철권 통치하던 시절임을 상기할 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당시 <대한불교(지금의 불교신문)>에는 종단 차원의 ‘광주시민운동 돕기’를 1면 주요기사로 연속보도하며 불자들의 호응을 이끌었다.
총무원장 월주스님의 광주 현지 방문 내용을 보도한 <대한불교(現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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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주스님은 ‘광주사태’가 계엄군에 의해 무력 진압된 직후 종단 대표단을 구성해 광주를 직접 위로 방문했다. 장성을 통해 광주에 진입한 월주스님 일행은 6월3일 오전 11시 충장로 4가에 있는 관음사(당시 주지는 상인스님)에서 ‘희생자들을 위한 법회’를 거행했다. 이날 법회에는 총무원장 월주스님을 비롯해 교무부장 현광스님과 전남북 사암 주지스님과 신도 등 200여 명이 동참했다. 월주스님은 “무고하게 희생된 분들을 위해 49재를 했으면 좋겠는 생각을 가졌다”면서 “관음사에 49재 비용을 보시했다”고 회고했다.
이날 ‘광주사태 희생자 영가’라는 이름의 위패를 관음사 영단에 모시기도 했다. 광주에 도착한 월주스님과 일행은 원효사(당시 주지 법타스님)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부상자들이 입원해 있는 전남대부속병원과 국군통합병원을 방문해 환자들에게 성금을 전달하고 위로했다. 또한 전남도청에서 정시채 부지사를 면담하고, 상무대 군법당인 무각사를 참배하기도 했다.
<대한불교>에 실린 종단 차원의 ‘광주시민돕기운동’ 사고(社告). |
월주스님은 “전남대병원에 도착해 간호사의 안내로 병실을 돌아보았다”면서 “신체 일부가 절단되거나 얼굴을 다쳐 붕대로 감은 부상자들이 누워 있었다”고 기억했다. 당시 간호사가 스님에게 “옥상과 복도에 시신이 가득했다”면서 “많은 시민들이 억울하게 죽어갔다”고 목소리를 낮춰 ‘광주의 진실’을 전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일반 방송과 신문을 통해 ‘광주소식’을 전해들은 월주스님은 현지를 직접 돌아본 후 “광주시민들이 의로운 일을 하다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사태가 마무리된지 일주일이 흘렀지만, 그때까지도 시내 전역에 화약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또한 시민들은 말을 아끼고 침묵만이 도시 전체에 가득했습니다.”
당시 월주스님의 안내를 맡은 전남대 정종구 교수는 “시내 곳곳에 희생자들의 시신이 줄지어 누워 있었다”면서 “목불인견(目不忍見) 참상이었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석유 중간 도매업을 하고 있던 최선희 조계종 전남신도회장은 “시민군들에게 수십 통의 석유를 나누어 주었는데,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면서 “의롭게 죽어간 시민들의 피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월주스님에게 토로했다는 것이다.
월주스님이 총무원장 자격으로 광주를 방문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종로경찰서장이 정보과장과 함께 총무원 청사를 찾아와 만류했다. 서장은 스님에게 “위(상급기관)에서 광주에 가시지 말라고 한다”며 광주방문을 반대했다. 하지만 월주스님은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고 하는데 종교인의 한사람으로써 그냥 있을 수는 없다”면서 “시민과 군경 희생자 모두를 위로하기 위해 가는 것”이라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의로운 피 헛되지 않아”
관음사에서 희생자 천도법회
10ㆍ27법난의 빌미로 작용
또한 월주스님은 종단 차원에서 광주시민돕기 운동을 적극 전개했다. 선무단을 현지에 긴급 파견한 것은 물론 5월30일에는 총무원 청사 1층에서 직할사암주지및 산하단체장 회의를 개최해 광주시민돕기대책본부(본부장 월주스님)를 구성했다. 계엄군의 무력진압후 그 누구도 ‘광주’를 입에 올리지 못하던 시절, 조계종이 광주시민들에게는 한줄기 빛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대한불교>에 실린 광주시민돕기 기사. |
당시 회의에서 총무원장 월주스님은 “전 불자가 동체대비사상으로 한마음이 되어 광주시민을 돕자”고 당부했다. 같은 날 발표한 호소문에서 월주스님은 “이번 광주사태로 인하여 생긴 사상자와 그 유족을 위로하고 한사람도 빠짐없이 광주시민을 돕는데 앞장서자”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대한불교>는 관련 내용을 1면 주요기사로 연속보도하고, 모금 운동 사고(社告)를 게재하는 등 ‘광주시민돕기’에 발벗고 나섰다.
조계종 총무원과 <대한불교>의 적극적인 ‘광주시민돕기’는 이후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10ㆍ27법난의 여러 가지 요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정권 장악 후 무고한 시민을 희생시킨 신군부가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눈에 가시 같은 조계종을 ‘본보기’로 삼았던 것이다.
월주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10ㆍ27법난 직전 총무원을 예방한 이환의 전(前) MBC 사장이 “(정보기관에서) 직원들을 광주에 보내지 말라고 했는데, 취재를 시켜서 강제로 (사장직에서) 물러났다”면서 “스님께서는 광주에 직접 다녀오셨는데 아직까지 자리를 유지하고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불과 얼마 뒤에 10ㆍ27법난이 일어나 총무원장에서 강제로 물러나야 했다. <대한불교> 또한 법난 직후 신군부에 의해 강제폐간됐다.
월주스님은 1980년 광주 상황을 회고하면서 “당시에 계엄사령부의 일방적인 발표 내용만 듣고 진상을 몰랐는데, 현지에 가서 실상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면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정신에 의해 건국된 만큼 위정자들이 바르게 국정을 운영하지 않으면 저항해 바로잡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월주스님은 “그 같은 정신이 바로 4ㆍ19혁명과 광주 5ㆍ18민주화운동에 깃들어 있다”면서 “억울하게 희생된 광주시민들을 지금도 마음 속 깊이 천도하고 위령한다”며 합장했다.
■ 광주민주화운동(光州民主化運動)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12·12 쿠데타를 주도한 신군부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 운동. 1980년 5월 15일 민주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신군부는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들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저항에 나섰고, 신군부는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며 고립시켰다. 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며 5월27일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은 일단락되었다. 당시 김동수 대불련전남지부장이 도청을 사수하다 산화했다.
5ㆍ18은 1980년대 이후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실질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1993년 이후 김영삼 정부가 광주민주화운동을 재조사하면서 전두환ㆍ노태우 두 전 대통령은 수감되었다. 이후 5ㆍ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1995년12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년12월) 등이 제정되었다. 희생자들은 광주시 망월동의 5ㆍ18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매년 5월18일이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첫댓글 5.18광주민중항쟁은 우리나라의 수치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찌 함부로 시민의 가슴에 총을 겨눌수 있는지. _()_
5.18민주화항쟁은 민주화를 위한 고귀한 항쟁이지요. 5.17조치 이후 벌어진 시민무력진압 만행이 수치지요. 그때는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고 보니 군부가 방송과 언론을 장악했으니 진실을 알기 어려웠었지요. _()_
불교계가 동체대비 사상으로 상처를 보듬고 희생차를 위한 천도법회를 했던 것이 군부의 눈에는 이를 눈엣가시로 여겨 10.27법난을 이르키는 천인공로할 만행을 저질렀음을 알게 되네요. 5.18 민주화운동이 국가적 기념일로 제정되었음에도 일부 보수파들은 광주시민학살이 북한특수부대 600명이 내려와 저지른 일이라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_()_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분들의 명복을 빕니다.의로운 죽움앞에 역사의 외곡까지 참으로 가슴아픈일입니다. _()_
진실에 진보ㆍ보수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의 진실이 둘이 될 수는 없습니다. _()_
나무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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