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징그럽게 여김은 왜곡된 인식
뱀이 지닌 생명 의식이나 지혜는
모두가 간직해야할 덕성의 하나
올해는 ‘뱀’의 해이다. 전년도의 용은 가고 뱀이 온 것이다. 상징적으로 뱀은 용보다 작지만 ‘지혜로운’ 동물로 꼽힌다.
뱀(巳)은 12지의 여섯 번째로 육십갑자에서 을사(乙巳), 기사(己巳), 계사(癸巳), 정사(丁巳), 신사(辛巳) 등 다섯 번을 순행한다. 뱀은 시각으로는 9시에서 11시이며, 방향으로는 남남동이고, 달로는 음력4월에 해당한다.
뱀은 파충류로 일상생활에서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거나 흉물스런 동물로 배척당하지만 민속신앙에서는 신적 존재로 위해지면서 일찍부터 다양한 풍속이 전승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뱀이 크면 구렁이가 되고, 이 구렁이가 더 크면 이무기가 되며 이무기가 여의주를 얻거나 어떤 계기를 가지면 용으로 승천한다는 민속체계가 있다. 뱀의 범주에는 이무기, 구렁이, 뱀이 다 포함된다.
그런데 뱀의 이미지는 우선 무섭다. 소리 없이 다가와 바람처럼 먹이를 잡고 혀나 눈의 날카로움, 또 커다란 먹이도 꿀꺽 먹어치우는 재주(?) 때문에 그럴 것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서 뱀은 싫든 좋든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시멘트 집으로 바뀌어 드물지만 옛날 기와집이나 초가집에는 여름날 구렁이가 가끔 나타나 어른이나 아이들이 놀라고 두려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때가 많았다. 그런데도 그것이 나가면 업(業)이 나갔다고 하며 불안해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어릴 때 큰 뱀을 보았다는 것은 동네사건이었다. ‘어느 집에 큰 구렁이가 집을 떠났다’는 말이 나면, 마을사람들이 모두 그 집을 걱정하며 쑥덕거리곤 했다. 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더라는 이야기, 지붕을 헐었는데 구렁이가 있더라는 이야기, 지킴이를 해코지 한 이후로 ‘집이 안 되더라’는 이야기 등은 한국 사람이면 자주 들었던 추억담이다. 여기서 지킴이는 대체로 구렁이이다. 그 구렁이가 집을 나가면 그 집은 망한다고 했다. 사람과 함께 집을 지키고 생활하는 구렁이는 어쩌면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라 할만하다.
불교에서 팔부신중 가운데 마후라가는 사람의 몸에 뱀의 머리를 가진 신으로, 땅속의 모든 요귀를 쫓아내는 임무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인도신화에 등장하는 신으로, 크다는 뜻의 ‘마하’와 기어 다니는 것을 뜻하는 ‘우라가’의 합성어로, 곧 뱀이나 용을 말한다. 배와 가슴으로 기어 다닌다고 해서 대흉복행(大胸腹行)이라고 번역한다.
뱀의 신인 마후라가는 불교에 수용되어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이 되었다. 경전에서는 ‘불법을 즐겨 구하므로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거만한 성격을 버리고 겸손하게 기어 다니므로 복행(腹行)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팔부신중에는 천·용·야차·아수라·건달바·긴나라·가루다가 있다. 이 중 마후라가는 주로 가람을 돌면서 사찰 외부를 수호하는 가람신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집을 지키는 구렁이를 업신(業神)이라 해서 경외의 대상으로 삼아왔는데, 이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신중탱화에는 주로 머리에 뱀 모양의 모자를 쓰고 나타나고, 조각상일 경우에는 한 손에 뱀을 잡고 있는 형상을 한다. 경주 석굴암 내부에 부조로 조각된 마후라가상은 오른손에 칼을 쥐고 왼손은 가볍게 구부려 손바닥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손의 모습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복행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뱀은 겨울잠을 자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성장할 때 허물을 벗는다. 이것이 죽음으로부터 매번 재생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불사와 재생, 영생의 상징으로 무덤의 수호신이자 땅의 신이며, 죽은 이의 새로운 재생과 영생을 돕는 존재로 인식했다.
또 많은 알을 낳는 뱀의 다산성은 풍요와 재물, 복의 신이며, 뱀은 생명 탄생과 치유의 힘, 지혜와 예언의 능력, 끈질긴 생명력과 짝사랑의 화신으로 문화적 변신을 하게 된다. 우리가 뱀을 각기 문화적 맥락 속으로 상징화할 때 생긴 문화적 오해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뱀을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독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뱀이 여러 가지 좋지 않은 동물로 비유되는 예를 많이 본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와는 별개로 뱀은 세계문화사에서 불사(不死)의 존재로 이해된다. 사람들은 뱀이 동굴에 들어가 허물을 벗고 다시 껍질을 입는다는 사실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고 믿었으며 땅속에서 살기 때문에 생명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제주도 신화에는 저승 차사인 까마귀의 적패지를 받아 삼킨 후 뱀은 아홉 번 죽었다가도 열 번 살아난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삼황오제의 복희씨와 여와씨는 뱀의 몸뚱이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복희씨가 중국문화 창조의 신으로 숭앙받고 있음을 상기할 때 뱀이 가진 문화적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뱀은 최초의 인간으로 등장한다. 뱀이 꼬리를 문 둥근 몸 형태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생명, 원초적 율동으로 파악하기도 하며 생명의 윤회, 우주의 통일 생명의 지속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고대 그리스의 뱀은 지혜의 신 아테네의 상징물이며, 트로이의 패망을 예언한 카산드라는 뱀에게 예언의 능력을 받는다. 구약성서 마태복음에는 "뱀같이 신중하다"라는 말이 있고 헤브라이인에게 뱀은 인간의 친구였다. 이집트 여신 이시스의 올리브 잎의 뱀은 태양을 상징하기도 하였으며 그리스 신화에는 영생의 황금 사과나무를 지키는 수호자, 그리고 사랑의 신 에로스는 본래 땅속에 산 뱀으로 명부의 주신이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 뱀은 풍요의 상징이기도 하다. 풍요를 가져다준다는 업단지는 구렁이가 신체로서 전통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섬겼던 신앙이었다. "부잣집 업나가듯 한다"라는 속담은 부잣집에 업구렁이가 나간다는 뜻으로 풍요로움을 뱀이 몰고 나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제주도 신화인 칠성본풀이에는 집안신인 안칠성과, 농사의 신이라 할 수 있는 밭칠성이 모두 뱀이다. 사람들은 이들을 잘 모시면 풍요로움을 얻고 잘못 모시면 탈이 난다.
이렇듯 뱀은 사람들의 생활 가까이에 들어와 있는 동물이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을 시간과 관련시켜 형상화 한 것이 12지신으로, 한국 문화사에도 중요한 시간 인식의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해가 바뀌면 띠이야기를 하고 그 띠에 대한 문화적 의미를 새겨 자신의 삶에 중요한 거름으로 삼는다.
불교설화에는 뱀에 얽힌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어리석음을 뱀에 빗대어 표현한 잘 알려진 설화 하나를 소개한다.
산 속에 꼬리가 잘 생긴 뱀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이 뱀은 꼬리에 멋진 무늬가 새겨져 있어 다른 뱀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는데, 언제부턴가 이 뱀의 꼬리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유는 멋진 꼬리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못생긴 머리를 따라 다녀,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뱀의 꼬리가 머리에게 말했다. “못생긴 머리야, 이제부터는 내가 앞서 가야겠으니, 너는 뒤로 와”
그러자 머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언제나 내가 앞서 갔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무슨 소리냐?”라면서, 머리는 꼬리를 뒤에 두고 여전히 앞장을 섰다. 그러자 꼬리는 앞으로 가지 못하도록 나무를 칭칭 감으며 심술을 부렸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자, 머리는 하는 수없이 꼬리가 앞서 가도록 양보하고 말았다.
이제 의기양양하게 앞장 선 꼬리는 뒤에 붙은 몸과 머리를 이끌고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하고 돌부리에 받히고 가시덤불에 찔려 전신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결국에는 길을 잘못 들어 불구덩이에 떨어져 그만 불에 타 죽고 말았다.
이 설화는 잘난 척 하고 어리석은 자의 길잡이 노릇은 자칫 잘못하면 함께 수행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지옥도에 떨어지기 쉽다는 것을 비유로서 우리들에게 교훈을 전하고 있다.
어쨌거나 뱀이 시공간의 인식 속에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한 것은 물론, 우리네 삶의 생활 속에 구석구석 관련된 것을 알 수 있다.
올해는 계사년(癸巳年) 뱀띠해이다. 뱀이 비록 두렵고 징그럽다고 여기는 보편적이고 왜곡된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 뱀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 의식이나 지혜로움은 우리들이 간직해야할 덕성인 것이다.
앞에 열거한 뱀에 얽힌 이야기처럼 근심걱정 벗어버리고 넉넉하고 풍족한 한해가 되기를 불전에 기원해본다.
첫댓글 '뱀'하면 간사함이 먼저 떠 올랐는데... 그렇군요..반대로 생각해 보면 지혜롭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_()_
예전 고향에 살때 구렁이가 방안에도 들어와 빗자루로 쓸어냈던 기억이 납니다.
집 지킴이라고 함부로 하지마라고 하시던 어른들말씀... 다시 기억해보게 되네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