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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성(全一性)의 서정 미학
- 김동수 초기 시를 중심으로 -
라 병 훈
1.머리말
김동수 시인은 1947년 전북 남원군 주생면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초·중·고를 졸업하고 1965년 18세에 전주교육대학에 입학하여 1967년 5월 만 20세가 되던 날 초등교사로서 남원 송동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대학 시절 교내 문학 써클인 <지하수>에 소설가 박범신, 시인 강상기 등과 함께 가입하여 재학 중 개인 시화전을 교내 교수회관에서 열어 주목을 받았던 열혈 문학청년이었다. 시골 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도 문학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남달라 다시 전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후에 국어교육과로 개편됨)에 편입하여 국문학사를 취득하고, 1977년 전남 신안군 비금중학교와 전북 순창 쌍치중학교와 남원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원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 입학하여 8년 만에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모교인 전주교육대학과 전주대학교 국어교육과 시간 강사를 거쳐 1992년 신설된 백제예술대학교 초대 교무처장과 문예창작과 교수로 봉직하다 2012년 청년 퇴임하였다. 이러한 숨 가쁜 일련의 과정에서도 김동수 시인은 꾸준한 시창작과 문학이론을 심화시켜 10여 권의 시집과 3권의 문학이론을 심화시켜온 시인이요, 국문학자이다.
이러한 그의 문학적 열정과 학문적 성과를 높이 여겨 1989년 전라북도에서 수여하는 전북문화상(학술부문)과 2001년 한국비평문학회에서 수여하는 제10회 한국비평문학상, 그리고 2004년 그의 모지(母誌)인 월간 <시문학>에서 제29회 시문학상, 2016년 한국문인협회에서는 제35회 조연현문학상을 수여하였다. 뿐만 아니다. 이러한 그의 문학적 역량과 활동을 눈여겨 본 목정문화재단에서 2021년 제29회 목정문화상(문학부문)을 수여하면서 향토시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이언 김동수 시인은 시창작 뿐만 아니라 본인의 말마따나 ‘문학 전도사’란 말에 걸맞게 떼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후배 문인들에게 문예창작 지도를 열성적으로 하고 있다. 23년째 전주에서 이끌어 온 <온글문학회>를 비롯하여 고향 남원의 <춘향문학회>, 그리고 <완주문화대학>에서 문예창작 지도를 하면서도 2015년 미당문학회를 창립하여 『미당문학』 14집과 『춘향문학』 과 『완주문화』를 해마다 발간하면서 작년에는 계간 종합문예지 『씨글』의 편집주간을 맡는 등 아직도 활발하게 문학 전도사업을 활발하게 펼치면서 남녘의 고장 전주에 거주하고 있는 향토적 중견시인이다.
2. 김동수가 주목하는 시세계
본문의 이해를 위해 먼저 그러한 김동수 시인이 주목하는 시세계의 특징을 고갱이만 정리 해 보기로 한다. 첫째, 그의 시는 동양 자연주의적 文·史·哲을 융합하여 신석초-조병화-서정주로 이어지는 지성적 시문학 서정의 계보를 이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서구적 모더니즘에 편중되지 않는 채 40년 시력의 한국적인 시맥을 형성하며 시의 본향이라 할 수 있는 유기체적인 전일성(全一性) 또는 우주성이라는 선(禪)적 사유의 통찰을 지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두 줄기의 흐름이 교융(交融)하면서 시인들이 꿈꾸는 시의 뮤즈(muse)요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그리움과 어머니’라는 이상향에 안착하고 있다. 이러한 김동수 시의 서정적 노래는 「나의 시」를 통해 그가 사유하는 정신의 숲길에서 나직하게 흥얼거리는 서정의 세계와 언어를 만나볼 수 있다.
나의 시는
내 영혼의 사당(祠堂)
그 속에
전생(前生)의 내가 들어 있다
뱀이 이브를 꼬여내기 전
새끼 새 한 마리가
숲 속을 종종거리고
오래 전 무리에서 낙오된
말(馬) 한 마리가
바이칼 호(湖)의 밤하늘에서
홀로 빛나던
나의 시는
내 영혼의 칭얼거림
전생(前生)에 두고 온
내 영혼의
푸른 눈망울
- 「나의 詩」 전문, 2012
3. 김동수 시의 흐름과 평단의 공감인식
가. 시세계의 흐름
김동수의 시맥(詩脈) 40년사는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시인의 자세를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세계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1) 초기 (1982년∼2000년)에는 젊은 청춘의 중압감에서 오는 정신적 방황, 곧 자연발생적인 나(我)의 내면적인 실존의 외로움이라는 ‘고통과 신음의 칭얼거림’(2014년 대한문학상 수상소감 )을 『하나의 창을 위하여』와 『나의 시』를 통해 토로했다. 2) 중기(2001년∼2011년)에는 나(我)와 너의 문제인 주객합일(主客合一)의 시정(詩情)으로 외연이 확대되어 인생의 페이소스(phatos)에 몰입하면서 자연의 理法을 시화했던 시기로 『그리움만이 그리움이 아니다』, 『하나의 산이 되어』, 『겨울운동장』 등 왕성한 시작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3) 후기(2012년 이후)에 와서는 시를 통해 삶과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치는 경지에 도달, 마침내 몰아일체(沒我一體)의 동양적이고 선적인 세계에 몰입하는 유기체적인 전일성(全一性)의 통찰을 탐색하게 된다. 말하자면 시인의 말대로 “자연의 섭리에 따른 순응과 인위적 유위(有爲)의 틈바구니에서 발생된 실존적 길항”의 시정에 이르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말하는 나무』, 『흘러』 『그림자 산책』 등의 시집 등이 그것이라 하겠다.
나. 평단의 공감인식
한편, 그의 시집 <9권>에 서평을 참여했던 평자들이 언급한 김동수 시의 가치를 시시별로 요약해 보면, 대체로, 초기에는 ‘체험이 많은 시인,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시를 쓰는 감성 깊은 시인’(이성교), ‘시적 진실을 추구하는 뜨거운 몸부림’(이기반)과 ‘경험의 내면화와 새로운 열림’(허소라)을 추구하고 있다 평하였다.
중기에는 ‘주객합일의 마음에서 익은 손이 내미는 실존적인 따뜻한 시세계’(정일근)로 ‘시적 원형인 모성성(母性性)을 향한 여로(旅路)의 노래’(배한봉)를 완성하기 이른다. 이어 최근에 와서는 ‘불교적 사유에 심취, 무심무위(無心無爲)와 공(空),불이(不二)와 하심(下心)의 서정화 ‘(공광규)를 구축하였으며, 이로써 ’우주론적 그림자의 세계를 포용하는가 하면, 실제와 허상을 초월하는 제3의 존재론‘(나민애)적 사유의 시단(詩壇)에 오르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주요 평자들의 공감인식을 총합 해 보면 “나의 시는 내 영혼의 사당(祠堂)이라는 신념으로 전일성(全一性 )을 꿈꾸는 인간 본연의 그리움이며 거기에 내 시적 뮤즈(muse)로서 어머니가 존재한다” (시인의 말)는 김동수 시인이 고백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4. 전일성(全一性)을 향한 그리움과 어머니
이상과 같이 김동수 시의 숲 탐사에 앞서 그의 독보적인 서정의 세계와 이에 대한 평자들의 공감인식을 배경으로 그의 깊고도 심원한 시의 숲의 길로 들어가 보자. 각 작품에 나타난 전일성(全一性)의 실제이자 그가 지향하는 생명이요 영혼의 사당(祠堂)처럼 여기는 ‘그리움과 어머니’의 이미지를 먼저 보다 구체적으로 탐색하고자 한다.
가. 「새벽달」: 전일성을 꿈꾸는 시의 본향, 오 나의 어머니
김동수 시인에게 있어서 초기 시의 출발(「새벽달」)과 안착(「교룡산성」)은 바로 어머니의 품이다. 따라서 어머니란 존재는 김동수의 시적 원형이며 뮤즈(muse) 이며 궁극적으로 ‘그리움’ 으로 서정적 승화를 이룬다. 이와 관련하여 시인은 “ 시적 대상으로서의 어머니는 내 시의 알파이자 오메가며, 어머니를 통해 세상을 보고 우주를 느끼며 거기에서 나오는 허무(虛無)와 그 극복에 관한 그리움”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시가 「새벽달」이다.
누가
놓고 간 등불인가
서편 하늘 높이
千年 숨어 온
불덩인가
속살로만
타오르다 피어난
하늘의 꽃등
먼 길 가는 나그네
여기 멈추어
부드러운 네
치맛자락을 보듬고
밤을 뒹근다
별빛 마저 무색한 밤
오늘도
내 키보다 둥실
높이 떠서
끝내 눈을 감지 못하는
聖女
오, 내 어머니여
- 「새벽달」 전문 , 1978
시적 대상(달)에 대한 새로운 의미의 발견, 그것은 평범한 진리의 이면(裏面)을 꼴똘하게 응시하고 천착하여 시의 의미를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곧, ‘새벽달’을 ‘등불’→‘불덩이’→‘하늘의 꽃등’ →‘부드러운 치맛자락’ →‘성녀(聖女)’→‘오, 내 어머니’ 등의 끝없는 변용의 초월적 사유가 그것이다.
이러한 초월적 사유, 곧 인식의 전환이 +α가 되어 시적 은유로 변용시키고 있다. 이는 김동수 초기 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듯이, 내면적 실존(實存)의 그리움의 중심에 어머니가 있고, 그러한 어머니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미지를 ‘꽃등’ ‘천년 묵은 불덩이’ ‘치맛자락’ 등으로 형상화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동수 시의 시적 진실인 전통적 서정의 세계를 간취 해볼 수 있다.
나. 「비금도」: 그리움을 투망질하는 젊은 유배자
‘섬은 늘 깃 치는 소리로 떠 있다.’ 비금도(飛禽島)는 목포 신안군 최서남단의 외딴섬이다. 초등계를 그만 두고중등계 교사로 첫 부임지이자 젊은이의 열정과 고뇌로 얼룩져 방황과 그리움으로 정신적 고투를 벌이던 섬, 이곳 비금중학교에서 시인은 단 6개월 간 국어 교사로 근무했다. 물 설고 낯설은 이곳에서 고향인 전북으로 가고자하는 열망으로 그 때 이 시를 썼다고 한다.
그 때 시인은 원고지를 이젤(easel)처럼 세워놓고 바람 탄 섬을 소묘하는 것이 아니라, 비금도를 원고지 위에 눕혀놓고 그 원고지를 베개 삼아 이 시를 섰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위에 바다와 갈매기와 아이들을 불러 들여 고향을 그리워한다.
‘
포말(泡沫)’과 ‘깃 치는 파도의 물거품 소리’와 ‘섬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혼합되어 그리움과 동경의 세계에 감정의 채색을 입혀 한 폭의 실존적인 내면화를 그려 내고 있다. 풍경이 시가 되는 이미지의 포착, 회화성과 감각의 결합이 돋보인 작품이다. 소재와 배경의 특수성으로 자기감정이 드러날 위험이 많음에도 비금도의 가난한 아이들을 내면에 투영시켜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 감정의 속울음을 그리움으로 채색하는 서정적 형상화에만 몰두하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섬은 늘 깃 치는 소리로 떠 있다.
바다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시퍼런 파도를 토吐한다.
우리의 달은 어디에 있나요
빈 섬을 보채다
어둠 속에 안개처럼 웅크리고
몇 년이고 잠들지 못한 꿈
목선마다 하나 둘 불이 꺼지고
출렁일수록 가랑잎처럼
밀려만 가는
바람 탄 비금도에서
갈기갈기 헤진 일상을 투망질하던
아이들은
새벽이면 맨살로 바다로 간다.
우우 또 한 차례
몰려왔다 포말(泡沫)지는
하얀 새떼들의 울음
호드득 호드득 갈매기 되어
꿈에만 날아보던 하늘을 두고
섬은 늘 깃 치는 소리로
가난한 아이들의 울음을 건지고 있다
-
「비금도」 전문 , 1977
비금도의 해변에 닿을 내려 보자. 바람 탄 비금도, 밀려 왔다 밀려가며 포말지고 부서짐을 되풀이 하는 파도소리는 달(月)과 갈매기의 꿈을 찾아 바다로 나아가는 아이들의 희망과 절망과 절망의 대유물(代喩物)이요, 그러기에 끊임없이 그리움을 투망질하는 젊은 유배자의 비탄가(悲嘆歌)이기도 하다.
바람 탄 바다에서 돌아와 매일 시퍼런 파도를 토(吐)하며 그리워했던 ‘달’의 원형은 무엇일까? 모성성(母性性)으로서의 앞에서 언급했던 새벽달 같은 어머니의 존재다. 그러니까 ‘오늘도 내 키보다/둥실 높이 떠서 / 눈을 감지 못하는 성녀聖女 / 오, 내 어머니여’(「새벽달」)에서처럼 김동수 시인의 원시 자연이자 우주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 ‘ 인간 본연으로서의 그리움’이자 어머니요, 시의 고향인 것이다.(「문학은 나의 신화다」)
이 시에 드러나 있는 ‘맨발의 아이들’의 이미지를 통해 아직도 달과 꿈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해 이역만리 낙도에 분리되어 있는 젊은 시인의 외로움, 그리하여 아침마다 바다로 나아가 이방인으로서 이 섬을 벗어나고자 하는 현실 속 시인의 열망이 파도처럼 시리게 다가온다.
다. 「꽃뱀」: 그리움을 탐닉(耽溺)하는 본연의 푸른 몸짓
위 인용시 들에서 포착되듯, 김동수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고통과 신음의 칭얼거림이요 그리움을 찾아가는 작업”(2014년 대한문학상 수상소감 중에서)이다. 전남 신안군 비금도에서의 불과 6개월 만에 전북 오지 산골 마을인 순창 쌍치중학교로 탈출하지만 그 고통과 신음의 가슴앓이 증세는 가시지 않고 더욱 심화되어 불안한 자의식속에 빠지고 만다. 이 시는 투명 항아리 속 작은 꽃뱀의 탈출을 위한 몸부림을 자신의 내면으로 육화시켜 “밤새 속살로/ 꽃 같은 울음”을 토(吐)해야 했던 가슴앓이의 자화상을 처연한 심정으로 그려내고 있다.
꽃뱀은「새벽달」의 ‘나그네’와 「비금도」의 아이들로 병치(竝置)될 수 있으며 초기시에서 나타난 ‘그리움’이라는 시적 진실의 촉수가 서로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투명한 항아리 속에
잠겨 있었어
피리를 불며 나를
재우려 했지만
밤새 속살로
꽃 같은 울음을 울고 있었어
항아리 밖엔
이슬냄새, 서걱이는 풀섶 소리
수 없이 벽을 타올랐지만
그때마다 나의 몸짓은
손해였어
자꾸만 흐려져 가는
항아리 벽을
피가 나도록 핥고 있었어
절망은 포기가 아니었어
그것은 탈출을 향한
뜨거운 몸부림
투명한 항아리 속에서
텅 빈 공간을 타내리는
하나의
작은 꽃뱀이었어
- 「꽃뱀」 전문, 1978
고독한 산촌마을 쌍치의 「꽃뱀」을 만나러 숲속으로 들어가 보자. 항아리 바깥세상인 이상적인 원시자연인 ‘어머니’의 품으로 안기지 못하는 고독한 자아(自我)는 이슬 냄새, 풀 섶 소리의 유혹에도 그저 “탈출을 향한/뜨거운 몸부림”으로 ‘그리움’과 ‘기다림’을 삭여 내고 있다. “자꾸만 흐려져 가는/항아리 벽을/ 피가 나도록 핥으며” 밤새워 속살로 울어 대던 꽃뱀의 그리움의 원형질은 전항에서 인용한 시에서도 나타난 실존적인 자아(自我)의 투영이다.
무엇보다도 속세의 유혹에 매달리지 않고 의연하게 지향적 세계를 향해 걷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에 대한 직관적 통찰이 생기롭다. 절망은 포기가 아니고 다만 ‘탈출을 향한 몸부림'이라는 절규는 일찍이 미당이 돌팔매를 쏘면서 격렬한 어조로 원시적 욕망에 대한 충동을 토로했던 그 “꽃 대님의 배암(「화사」) ”처럼 강렬한 육성적 몸부림이 넘쳐흐른다. 그러나 “항아리 벽을/ 피가 나도록 핥고”있는 그의 뜨거운 열망과 치열성은 단지 텅 빈 공간을 타내리고만 있을 뿐이라는 자조적 전언이 마냥 안쓰럽게 들린다.
라. 「교룡산성」: 그리움 본향(本鄕), 어머니의 품으로 안착
‘그리움과 어머니’를 찾아 나선 문학탐사의 마지막 여정의 숲인 「교룡산성」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새벽달」, 「비금도」, 「꽃뱀」과의 만남에서 김동수 시인의 체험을 통해 묻어나는 ‘그리움’을 향한 구도적 여정의 몸부림을 목도(目睹)할 수 있었다.
그 의식의 저변에는 공히 그리움의 원형으로서의 ‘어머니’가 새벽달처럼 비추고 있음도 놓치지 않았으리라. 이러한 몸부림은 시인이 갈구하는 세계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기어오르지 못하는 존재론적인 외로움으로 남아 우리에게 “기다림과 희망‘에 대한 안타까움이라는 강렬한 인생의 페이소스(pathos)를 심어주고 있다.
이러한 ‘그리움의 희망 찾기’가 비로소 「교룡산성」에 와서 ‘넉넉한 산성(山城)의 품에 안겨 정서적 안정을 취한다. 그것은 비금도 외딴섬과 오지 산촌을 방황하던 젊은 시인은 그토록 갈구하던 ‘인간본연으로서의 그리움’이 자연·우주와 유기체적인 전일성(全一性)을 구현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원시의 본향(本鄕)인 어머니의 품으로 마치 연어의 회귀처럼 현상과 본질간의 존재론적 합일(合一)의 시적인 이상향을 구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희뿌연 안개 서기(瑞氣)처럼 깔리는 굴헝. 새롬새롬 객사기둥 만 한 몸뚱어리를 언뜻 언뜻 틀고, 눈을 감은 겐지 뜬 겐지 바깥소문을
바람결에 들은겐지 못 들은 겐지 어쩌면 단군 하나씨 때부터 숨어 살아 온 능구렁이
보지 않고도 섬겨 왔던 조상의 미덕 속에 옥중 춘향이는 되살아나고 죽었다던 동학군들도 늠름히 남원 골을 지나가고 잠들지 못한
능구렁이도 몇점의 절규로 해 넘어간 주막에 제 이름을 부려놓고 있다
어느 파장 무렵, 거나한 촌로에게 바람결에 들었다는 남원 객사 앞 순댓국집 할매. 동네 아해들 휘둥그래 껌벅이고, 젊은이들
그저 헤헤 지나치건만, 넌지시 어깨 너머로 엿 듣던 백발 하나 실로 오랜만에 그의 하얗게 센 수염보다근엄한 기침을 날린다
산성(山城) 후미진 굴헝 속, 천년도 더 살아 있는 능구렁이. 소문은 슬금슬금섬진강의 물줄기를 타고 나가 오늘도 피멍 진 남녘의 역사 위에
또아리치고 있다
- 「교룡산성」전문, 1982
서기(瑞氣) 깔린 『교룡산성』의 숲길을 오르자. 교룡산성(蛟龍山城)은 시인의 고향인 남원 시가지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오래된 이 고장의 사당(祠堂)같은 성터이다. 산성 후미진 구렁 속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교룡을 김동수 시인은 ‘인간본연의 그리움’이요 시적 고향으로서의 ’어머니‘로 표상하고 있다. 산문시임에도 놓치기 쉬운 응축과 시적 정서가 배면에 흐르고 있다. 그만큼 리듬과 율격이 도드라져 있어 읽어내기가 편하다. 주제는 서구 문물에 의해 날로 잃어가는 ‘우리 것 ’에 대한 안타까움과 한국적 정신의 원형을 지키고 보호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 배면에는 우리의 배달민족의 전통적인 정신세계와 그에 따른 ‘그리움’고 잔잔히 흐르고 있다. 이 시가 처음에는 「교룡산성」이 아니라 「업」이란 제목으로 1982년 『남원문학』 4집에 실렸는데, ‘업’(두꺼비나 구렁이처럼 집을 지키는 수호신:민속학)이라는 의미를 독자들이 쉽게 파악하지 못해 나중에 「교룡산성」으로 제목을 바꾸어 남원 고을을 지키는 수호신의 이미지를 살렸다고 한다.
「교룡산성」은 본고에서 다룬 김동수 초기 인용시의 교융적(交融的인) 대미(大尾)를 장식하고 있으므로 굴헝 속을 깊숙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구조상 기승전결 형태에 수미상관(首尾相關)형태로 시 정신에 맞는 격을 완성시키고 있다. 즉, 정형시와 같이 대문을 열면서 감동(수호신의 존재감)을 주고 대문을 닫으면서 여운(수호신의 기대감)을 남기는 절묘한 구조를 산문시에서도 풀어내고 있어 시적 함축과 울림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제1,4연은 바깥소문 (업業을 잃어버린 현실의 절망감과 안타까움)을 듣고 있을 수호신(능구렁이)에 의탁하고 소환하는 구원의 노래가 절절하게 흐른다. 천년의 전통적인 문화로 표상되는 수호신으로서의 능구렁이는 새롬새롬 객사기둥만한 듬직한 민속 신앙주체가 되어 교룡산성에 상서롭게 존재하고 있음을 믿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그러한 수호신은 전일성(全一性)으로서 우리의 이성과 감성속의 절대자로 남아 이 땅위의 피멍 진 역사를 어루만지고 주관하기를 기대한다. 한국적 정신의 원형과 인간본연으로서의 ‘그리움’을 복원하고 지속시켜 나가는 정신적 지주(業)가 되리라는 믿음이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2.3연은 수미상관(首尾相關) 구조의 시적완성을 위한 보조관념적인 서사로 구성하고 있다. 먼저 2연은 시의 배경인 남원지역의 ‘보지 않고도 섬겨왔던 미덕(美德)인 정신문화로서의 역사적 특수성(춘향전과 동학혁명)이 서구 문물에 의해 잊혀져가는 현실에 대해 교룡산성의 수호신마저도 안타까워하고 있음을 입체적 이미지로 확대 심화 발전시키고 있다. 3연은 기승전결 구조상의 전환부(轉圜部)라 할 수 있다. 순대국집 할매와 백발 하나씨는 ‘한국적 정신의 원형’으로 형상화 되고 있다. 그는 잃어져가는 업(業)과 전통문화의 정신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에 대해 따끔한 질책과 안타까움을 보낸다.
덧붙여 이 산문시가 지니고 있는 시문학적 가치를 상기한다면 『교룡산성』은 결국 ‘동양적 자연관’에 기저한 영적 교감을 통해 신석호-서정주 시정(詩情)의 계보를 잇는 주지적 관조의 시 세계를 차별성 있게 구축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토속적 산문시로서의 자리 메김 되리라 믿는다. 어찌 보면 만물에 영혼이 들어 있다고 보는 서구 애니미즘과 자연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동양적 사유를 겸비한 김동수 시 세계에서나 가능 할 일이 아닌가 한다.
3. 맺는말
어느덧 탐사를 마무리할 시점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현대시가 지니는 구조적인 대중성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의 하나로서 시인 김동수의 초기 대표시를 고찰함에 있어 제1시집부터 제9시집까지를 시대순에 따라 정리해 보았다. 먼저 김동수 시의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저명한 평자들의 공감적인 견해를 객관화하여 고갱이만 덧댐으로써 본장에서 다룬 초기 시에서 나타난 ‘그리움과 어머니’의 이미지를 텍스트로 삼아 보았다.
이러한 탐사를 통해 “아픔을 통해 사람은 주체성을 느낀다” 는 헤겔(Hegel)의 말처럼, 그리움을 극복하고자하는 자아인식이 철학적 고통이라면, 오늘의 탐사에서 목도(目睹)한 김동수 시인의 ‘인간본연의 그리움’을 향한 구도적인 시의 세계는 절대지향의 전일성(全一性)을 갈구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또한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작품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바람 탄 「비금도」의 가난한 섬집 아이들이 토해 놓은 시퍼런 파도와, 투명 항아리 벽을 피가 나도록 탐닉하며 핥고 있는 「꽃뱀」을 내세워 우리에게 넌지시 그의 속내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젊은 날, 타향에서의 정신적 고뇌와 방황을 통해 마지막 여정인 고향땅 남원의 「교룡산성」으로 금의환향, 인간본연의 그리움이요 시적 뮤즈(muse)인 어머니의 품에 안겨 또아리를 틀고 안착할 수 있었다. 인용한 김동수 초기시가 체험에서 우러나는 휴머니즘적인 울림이 다가온다. 재미있고 아름다운 감동을 줄 수 있어 대중적 호감을 유인할 수 있는 시적 가치를 제공 해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김동수 시인의 고백처럼 그의 시는 ‘신성(神性)을 지향’ 하고 있다. 금번 탐사 결과 우뚝 솟아 있는 남원의 교룡산성은 그의 시가 싹이 트고 꽃이 피는 신성(神性)의 텃밭이요, 영혼의 사당(祠堂)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곳은 성녀인 모성성(母性性)이 새벽달 같은 어머니로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 주고 있는 시적 태자리임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제 젊은 날의 남다른 체험을 통해 시인과 자연과 우주를 하나로 융합하는 우주적인 그리움 속에서 시력 40년 여정을 걷고 있는 ‘그리움과 어머니의 노래’는 더욱 빛나는 시업(詩業)을 자아올리게 되리라 본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