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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as born Jeju island in South Korea in 1962. I can not see anything at all since 1990. At that time I was an engineer for machinary. Now, I work at the treatment of pysical, acupuncture and chiropractic that I am an acupuncturist. By hands or the chim ; not needle. It contains concept of the oriental medicine.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 주고 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잃고 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지난주 수요일
어머니 제삿날에
부평집에 갔다.
화장실 물통이 얼어붙은 단독주택.
아버지 방에 들어가
이불과 요를 마당에 가지고 가서
먼지를 털었다.
어머니와 나 자신을 위해 마루를 쓸고 또 부엌을 쓸고 물걸레질 한일 이외에는 더이상 없었다.
미리 저녁을 조금 먹어 두었다.
아버지가 어머니 젯상을 챙기면서
넋두릴 했다.
저녁 아홉시 쯤이 되어 은주가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제사 음식 준비는 동생들이 다 준비 해 온다고 했으니
젯상에는 무엇을 올려 놓았는지는 몰라도
난 민아를 봐 주면서
나 역시 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진 저녁 여덟시가 넘었는데도
제사 준비가 안되는걸
무척 안스럽게
생각하는건지, 아니면
집안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두고
자탄조로 말하는 건지 몰라도
난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맹인이 되면서부터
내 앞에서
뿌려지는 한숨 소리들.
물론 아들이 하나밖에 없으니
나도 내 처지를 잘 안다.
내가 생전에 그다지 잘 한 일은
별로 없어도
또 그다지 못한 일도 없다.
장애인이 되어서
내가 하고 싶은일 못하며
사람구실 제대로 못하며
빙빙 돌아가며
나이만 늘리고 있었더니
정말 나의 어릴적 꿈들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이십대 시절에
그렇게 하고 싶은 소망들이
기억나질 않는다.
은주가 여덟시 오십분에 왔고
춘월이 누나네가 아홉시 십분경에 왔다.
환상 모텔에 주차 했고
나랑 자형이랑 악수를 했다.
누나가 오십이니 , 자형 나이가 기억 나지 않았다.
진영이는 작은 회사에 다닌다고 하며
선영이는 올해 대학 사 학년이란다.
좀 있다
태실이 형네가 오고
열시가 넘어서 은선이네와 은숙이가 왔다.
비로소, 엄마의 젯상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고
육십이 된 부평 이모가
병원에서 일하다
오셨다.
아버지에게
태실이 형은 이왕 기다린거
자시를 지켜 열한시에
제사를 지내자고 했으며
제사때는 아버지에게
다리 아프시니 이번 제사에는
감독만 하시라며
태실이 형이 집사를 자청하고나서서
약 십일분 만에
제사를 마쳤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은주가 사온 제주산 좁쌀술을 마셨고
은선이네가 가져온 자리젓을 맛나게 먹었다.
나는 어머니 제사에 이만원 밖에 내질 않았다.
은숙이가 한달에 최하로 백팔십만원 벌고 나머지 동생들은 훨씬 수입이 좋으니...
난 작년 십이월 부터 일을 하지 않는다.
좀 쉬기로 한 것이다.
동길이가 기술고시 이차시험에 또 붙지 못했고
은정이는 일을 그만두고 병원에 다닌다는 소식을
이모가 말해 주며
일어섰고
뒤따라 춘월이 누나네와 태실이 형네도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은숙이와
은선이네도 갔다.
아버지 사촌들은 언제나 처럼
제사에 오질 않는다.
물론 아버지도 아버지 사촌 형제들 의 집안제사에 가질 않는다.
중교적인 문제가 크겠지만,
이것도 나의 탓이리라.
나는 그 다음날 아파트로 왔다.
사람들은
대부분이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똑바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미국이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해방 시켰다고 하지만, 계속 그 곳에서도 다툼이 지속된다는 뉴스는 무얼 말 하는 걸까?
이천년 전쯤에
예수, 석가, 소크라테스, 공자님 등등의 성현들이
가르침과 방향제시를 해 주었건만
사실 그 분들의 사상과 생활 실천을 한다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는것 같은데.
어쨋든 오늘보다 내일이 낫겠지.
이 시대의 마지막 맹인이고 싶다.
다윈의 진화론에서 보면,
나는 정말 이 세상의 마지막 시각 장애인이었으면 한다.
신은 왜 이 고통을 무슨 이유로,
이렇게 지속 시키려는것인가?
신의 뜻은 무엇인가?
신도 우리 인간처럼 희노애락이 있다면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무얼 생각하는 것일까?
우주 창조의 대업에 바쁘셔서
동사무소의 사회복지사를 먼저 보내 주시는 걸까?
신은 아직도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뚜렷하게 원하는게 뭐냐고 반문하시는 것인가?
난 내가 무얼 원하는지 ,
무얼 찾고 있는지 ,
무얼 기억 하고 있는지 ,
어디에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 ...
보고싶다 엄마...
가고 싶다, 엄마 곁으로...
2005 1/19
2000 년 12 월 23 (토요일) 지난주 금요일에 이은 영심이의 전화에 이어 그 다음날의 토요일의 약속에 따라 오는 오후 6 시 50 분 에 부평역 분수대 텔레비젼있는곳에서 만남 . 동행자는 서 J.H. 이고 나이는 33 세이며 강화 출신이며 영심이와는 작년에 영심이가 인천에 올라와 인천 순복음 교회에 다니면서 알게 된 것으로 말함. 7 시 5 분 경에 올해 나이 29 세의 165 센티미터의 키에 57 킬로그램의 김S.J.(한문 지움) 를 만났다. 마시다가 J.H.씨는 먼저 집으로 ( 백은역 근처) 커피를 오울드 쿨락 ( old clock ) 에서 가고 우리는 주로 가족에 대해 얘기하고 10 시 20 분에 호울드 클락 카페를 빠져나왔다. S.J.씨는 2 남 2 녀 중에서 3 번째였고 맨 위의 오빠는 34 세로 천안의 기숙사에서 있고 위의 언니는 교회에 다닌지 10 년은 되고 양친과 자기 그리고 남동생 까지 교회로 인도하였다한다. 아버지는 환갑이고 어머니는 51 세로 병원의 간병인 생활을 오랫동안 한것 같다. 태어난 곳은 경북 성주이지반 주로 인천에서 살았다한다. 남동생과 나는 12 살 차이가 나는데 S.J.씨는 쥐띠라고했다. 서울 양재역에있는 만화영화 애니메이션 회사에 다니는데 주로 밤 늦게까지 일한다고한다. 인천전문대 환경과를 졸업했다한다. 수학을 별로 못했다고 하며 부평 농협로타리의 뒤쪽에 방 3 개의 조그만 집에서 산다고 한다. 97 년에 바다를 보러 간다고 하다가 교통사고로 오른쪽 무릎을 다쳤는데 한의원에서 피도 빼고 프랬었다며 너무 아파 물리치료실로가서 치료를 다시 받았다고 한다. 가끔은 인간 기상대의 역활을 할 정도로 무릎이 시릴 때도 있다고 한다. 집 전화 539 - **** 인지 ()() 인지 ... 저녁은 마리안느 라는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레스토랑으로 가던중 지하상가의 마네킹을 넘어뜨렸다. 부주의 ! 자기는 정리를 잘하지 못한다고했다 그래서 한꺼번에 한다고 하며 그녀는 약간 덤벙거리는 스타일처럼 내비치는 인상을 내게 준것 같다. 비디오를 싸게 샀다고 내게 말했다. 꿈얘기를 몇개 했는데 하늘에 보자기같은 천이 있는대 거기서 독수리가 나다니는 것 , 고목나무에서 사람들이 기도를 드리는 것 , ... 자신의 형제들이 늦게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 나와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긔어 보겠다 ... 레스토랑에서 0 시 5 분에 나와 나를 집에까지 데려다주고 약 10 분 후에 자기도 잘 도착했다고 전화 옮. To :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 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시편 18장) 샬롬! 잘 지내시죠? 며칠 노느라고 정신 없이 보냈더니 몸살이 났는가봐요 맥을 못 추스리고 병든 꼬꼬처럼 졸려서 혼이 났어요 늦은 밤이지만 아주 시원한 귤과 고구마를 먹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어요 냠냠 J.H.언니와 전화통화도 했었는데 제가 보낸 메일은 받아보셨는지 모르겠군요 운배씨는 S.J.를 못 믿으시죠? 저를 믿지 마시고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세요 하하 지금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풀고 있는 것이겠지요 ...좀 더 가벼워 지셨으면 하는 바램이에요 모 든 어려운 짐들은 주님께 맡기고 거룩한 산 제사인 예배를 회복하는데 힘써 보시면 어떨까요 시간이 조금 지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겠죠 이런 경우에는 어떤 마음일지 저도 알아요 제가 그런 사랑을 해 봤거든요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것은 저 또한 의지할 곳이 필요하고 부족한 사람이란 것이죠 이런 노래 있잖아요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하나님께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시고 각 사람마다 장점과 단점이 있고 저마다 하나님께서 만드 신 걸작품이잖아요 우리는 똑같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똑같아요 그렇죠?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주님처럼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보도록 노력하자구 요 아 이런 인간이 다 있군하고 .. 그냥 교회에서 만나는 자매님들처럼 편하게 대해 주세요 세번 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메일 잘 보냅니다 성경에는 일흔 번에 일곱번인가 뭔가하시며 많이 참으라고 하시지만 저는 ... 잘 지내세요 또 소식 전할께요 저도 매일 컴을 쓰는 것은 아니라서.. 그럼 이만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여호수아일장오절로구절말씀) 많은 사람이 저녁식사를 하던 중 정전이 되어서 모든 사람이 허둥거릴 때 한 맹인이 말했어요 "글쎄, 그러게 눈을 보는게 얼마나 불편한 노릇이냐구..나 한사람을 빼고 이곳엔 모두가 그런 어둠의 병신들뿐이니 말이지 허허" 인간은 원래 세 가지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저 단순히 사물을 보는 육신의 눈이요 그 두번째는 생각하고 이해하는 마음의 눈입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밝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 속에 깊이 숨어있는 영혼의 눈입니다 그 영혼의 눈은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우리는 그 영혼의 눈으로써야 비로소 하나님을 보고 만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그 영혼의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난받음이 유익이라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육신의 눈을 멀게 한 것은 우리에게 그 영혼의 눈을 일찍 뜨게 하기 위함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차라리 그 육신의 암흑을 통하여 누구보다 일찍 영혼의 눈을 뜰 수 있게끔 선택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선 그런 당신이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당신의 삶이 이 세상가운데서 낮고 보잘것없는 것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그 곳에서 더욱 크게 나타내지실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 慊뼉蔓?장편소설 '낮은데로 임하소서'중) 샬 롬! 운배님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벌써 한달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군요 요즘은 봄 내음이 납니다 창가에 앉아 따스한 햇살아래 졸기에 딱 좋겠다 싶더니만 오늘은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저녁에는 눈으로 변하여 가득 내려 앉았습니다 낮은데로 임하소서 라는 소설을 읽고 감명을 많이 받았어요 살아있는 모델이 있는 소설입니다 중도시각장애인이시고 주인공은 안요한 목사입니다 그는 육신의 눈을 잃은 후 영혼의 눈을 되찾습니다 기독교와 전혀 인연이 없던 아버지가 부흥회에 다녀와서 변화를 받아 아들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당신이 너무 늦게 섬기기 시작한 하나님께 대한 참회와 속죄양으로 삼고 아이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부단히 뒷걸음질 치고 외교관의 꿈을 키우며 불어불문과에 진학하고 미8군에서 한국어와 불어 교관과 통역생활을 하며 숨은 욕망을 키워가고 있던중 시각장애를 얻어 몇 년을 방황하다가 신통한 효험이 있다는 여자 침술사에게 찾아갔는데 그 치료방법이 침구하나로 마취도 없이 등골 한마디 한마디 혈맥을 파고 부정한 피를 뽑아내는데 일백이일의 치료기간 동안 왼쪽눈의 남은 시력마저 완전히 잃어버리고 모든건강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양안완전실명, 왼쪽 귀 청력상실, 치통이 나 결핵성 질병과 상관없는 원인불명의 볼거리증세 빈발상태, 평상혈압 180이상의 이상혈압, 신경조직 손상으로 인한 좌골신경통증세 등등 ...결혼한 아내와 두 딸도 떠나고 온전히 홀로 남은 상태에서 자살을 시도하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에게 내려진 소명에 따라 어두움을 헤쳐나가는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지극히 낮은 곳에 있는 자들과 함께 하며 같은 어려움에 쳐해있는 맹인들을 위해 일합니다 장애를 얻어서 방황하는 모든 날들을 묘사한 곳에선 운배님 생각도 많이 났답니다 눈이 먼 자들에게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눈 먼 자로서 그들의 짐을 나눠지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눈을 멀게 하셨음을 깨닫고 그들의 어둠을 함께 하기 위하여 맹인사회의 개선을 위해 헌신하시고 계시답니다 저는 부족함없이 주님 은혜가운데 잘 지내고 있답니다 소설을 읽고 감상문을 잘 적어서 보내드리려다가 너무나 많은 시간을 놓쳐버렸어요 그리고 그 감상도 다 잊어버려서 대충 줄거리를 적었는데 그도 어색합니다만 ... 아래의 글을 크리스챤 가수 하덕규의 노래가사를 적어보냅니다 당신께 가까이 당신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 안에 촛불이 하나씩 켜져 이제 더 이상 어둠을 노래할 수가 없어요 얼마나 쓴 뿌리들이 내 안에 있는지 당신은 아셔도 그냥 조용히 웃으시며 내 안에 촛불 하나둘 켜지요 당신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는 처음 보는 것들을 보아요 모든 것들이 새로운 갓 태어난 어린 나비처럼 새롭게 열리는 푸른 하늘과 눈부시게 빛나는 저 태양 이제 더 이상 슬픔이 날 어찌하지 못해요 그 동안 내 속을 흘러 나의 노래가 되었던 뽀얀 눈물의 강과 내가 숲에서 입고 살았던 푸른 껍데기의 슬프고도 슬픈 무늬와 내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내 안에 이름 모를 아픔의 모습들조차 당신 앞에선 아무 것도 가릴 수 없는 벌거숭이가 되네요 때때로 철없는 뒷모습 당신께 보이며 추억이 손짓하는 옛 숲을 향해 달려보고 싶지만 그러나 이제껏 당신처럼 날 사랑하신 이가 아무도, 아무도 없었어요 아무도... 날 위해 죽으신 당신을 나는 이제 이렇게 부르죠 나 , 의, 주, 님! 운배님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오래동안 소식전하지 못해서 죄송하구요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평안하십시요 안녕 안녕하세요, S.J.씨. 무거운 옷을 입지 않아도 좋은 날입니다. 날씨가 무척이나 따뜻합니다. 보내주신 내용 잘 읽었습니다. S.J.씨의 편지는 정말로 문장력이 뛰어납니다. 지난 겨울은 눈도 많이오고 길도 미끄러워 잘 나다니질 못 했는데 이젠 사람들이 나들이하기에 좋은 계절이 되었습니다. 여기저기 전화를 해 보면 가족들이 차 안에 있는걸로 보아 틀림이 없느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도 교회에 가서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진리의 말을 잡으려 가는데 제가 마음이 열려있지 않아 그런지 조금은 힘이 들지요. 단지 저는 주일을 지키고 말씀을 들으려는데 이런것이 힘이 듭니다. 가령 친교를 한다는 것같은것이지요. 뭐 도와드릴 것 없냐고 물어보고 또 전화를 받는데 이러한 경우가 당연하지만 저는 제가 그렇게 비쳐지는 이 순간에 슬픔을 느낌니다. 해서 그럴 필요없다고 거절하는데 또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봅니다.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미는데 , 사실 그렇게 말 하는 것도 쉽지는 않지요. 어째든 저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며 또 앞으로도 그렇게 될것같지만 지금은 아니지요. 큰 교회 다니면 저같이 미약한 사람은 구석에 조용히 있다가 돌아오면 된다는 생각을 했는데 , 제 생각은 저 만의 생각이었지요. 어째든간에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 X ---------- X ---------------X ---------- X ---------- 그리고 전 S.J.씨와의 만남은 매우 소중한 추억으로만 하고싶습니다. 이 세상은 S.J씨가 원하시는 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S.J.씨의 사랑과 정열은 교회의 일과 세상을 향해서열려있고요. 전 세상에는 계급이 있고 층이 있어 그 속에 속한 사람들은 그 자신의 지위와 능력에 맞는 일을 하고 그때 그때 해야 할일을 해야 한다고 믿고있습니다. 그 시대 그 나이에 맞는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믿지요. 제가 지고가는 십자가는 없지만 S.J.씨는 저와는 사뭇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그냥 살지요. S.J씨의 메일과 그간의 만남은 좋은 추억으로만 간직하겠습니다. 그럼 , Bye. 오후 4:59 01-03-20 송운배 드림. 2000 12/29 금요일 오후 5 시 35 분시골에 가 있는 은주에게서 어머님 운명을 전화로 소식 난 지난 여름에 어머니가 밭에서 일하시다 쓰러지셔서 제주시의 한라병원에 입원하셨다. 마침 병원들이 파업에 들어섰을 때인지라 제주시에 입원을 계속하셨다. 그 뜨거운 여름 날 밭에 나가기 전에 전 날에도 속이 아파 감기인지 그래서 약도 사먹고 그랬다고 나중에 들었다. 나의 아버진 왜 상태가 안 좋은 어머닐 일하러 보내셨냐고 내가 물었더니 시골에 살면서 그만큼 안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나에게 오히려 물었다. 난 한라 병원에 3번을 갔었다. 서울과 경기도에 있는 동생들도 서로 간격을 두고 내려갔다. 내가 12 월에 은선이랑 제주에 내려 갔을 땐, 어머니는 가망이 없는 상태로 시골 온평리 집에 누운 상태셨다. 맹인 학교 다닐 때 내가 방학 때, 이현주랑 자던 방에서 나의 할머니가 돌아 가시고 또 나의 어머니도 돌아 가신 것이다. 은선이랑 갔을 때도 어머닌 나와 은선이에게 말도 못하신 것은 물론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 하신 것 같다. 그러나 그 힘 빠진 손으로도 나의 손을 잡으려고 애 쓰시는 거 같은 어렴풋한 느낌은 있었다. 난 은선이 한테 따뜻한 물을 가져오라하여 수건으로 어머니의 발과 배 그리고 손 여기저기를 닦아드렸다. 사개월 넘게 누워만 계셨으니 당연히 욕창으로 당하는 고통이야. 아버진 어머니한테 왜 얼굴을 찡그리냐는 말만 하시고 있었다. 내가 온평리 집에서 이틀을 자고 동남으로 오는 차안에서 어머니 목욕 좀 시켜드리라고 했더니 못하겠다고 그랬다. 그러면 호스피스를 얻어서 하라고 그랬더니 아버지는 못 한다고 그랬다. 내가 앞이 보여 제대로 사람 구실 하면 큰 병원에라도 모시고 좀 더 치료를 잘 해 드릴 수 있을텐데, 밭이라도 팔아서 살려내야 되지 않겠냐고 했더니 앞 안 보이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라 라고 나한테 말했다. 은선이는 아버지 트럭 안에서 은선이도 앉아 있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장애자, 집에서도 인정 안 하는데 누가 사람 대접을 해 주나. 장애자는 입을 벌려서도 안된단 말인가? 신이여, 당신이 우릴 아니 날 만들어 놓았다면 그리고 선택의 자유를 주었다면, 제발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당신이 "지금 죽을 사람, 이리로 오라" 라고 말하고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조금 더 잡아 주시길. 레미제라블의 라자드 경감은 법과 이성사이의 갈등에서 목숨을 던지는 선택을 했었다. 장발쟌도 험한 인생의 역정을 걸어갔지만 라자드 경감도 내가 어릴 땐 그를 경멸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투철한 직업 경관이라는 인물로 평가한다. 어쨋든 난 은선이의 도움으로 그 곳 벼룩 시장에 광고비 삼만원을 지불하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말대로 인천 집 전화 번호로 광고를 냈는데 제주시에서 너무 멀어선지 몇건의 문의 전화만 있을 뿐, 어머니 목욕이라도 한번 시켜야겠다는 날 실망시켰다. 나도 어머니에겐 불효자이다. 하지만 아버지도 그 병원의 대부분의 치료비를 은숙이가 내도록 보고만 있었다. 물론 땅가진 사람이 그걸 파는 마음이야 아프겠지만, 돈 많이 들어가 재산 축 날가봐서 하는 양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내가 세상을 원망해도 부모를 원망 안 하기로 했는데 내 마음을 틀어 놓는 아버지를 원망 안 할 수가 없다. 중도 장애인들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일이 많다. 자식은 부모를 원망하고 부모는 자식을 원망하는 못 난 집안이 돼 버렸다. 이렇게 살려고 그러지 않았는데 보다 넓은 마음으로 큰 세상에서 살고 싶었는데 우물 안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더니 그런 인간이 되고 말았다. 돌아가신 어머닌 할머니 상 때와 같이, 마을 청년회의 도움으로 공동묘지에 묻혔다. 물론 비석도 세우고 할머니 묘옆에 돌아가신 작은 어머니와 같이... 태익이 형이 나보고 마을 청년회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한마디 하라고 그랬다. 이때도 아버진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태익이 형이 그래도 한마디 하라고 해서 난 이렇게 춥고 궂은 날씨에 정말 고맙습니다. 라는 요지로 말했다. 내가 돈이 생기면 마을 청년회에 성의를 표해야 할텐데... 다시 온평리 집에 돌아와 앉았는데 왠 박수무단과 징치는 인간을 데리고 와서 굿을 하였다. 영심이와 하준이 엄마가 보고 있었다. 난 그 다음날 제주도를 떠났다. 날 낳아준 제주도 땅, 그로부터 백일 후에 백일 탈상을 하러 제주도로 갔다. 올라오면서 난 중얼거렸다. 이젠 제주도에 갈일은 없다. 물론 일년첫번째 제사에도 가지 않았다. 은선이가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어도. 김필년 회장님의 한문 점자 옥편 출판 기념회에 참석했는데 오길수 형과 이천수 씨가 삼만원씩 부의금으로 나에게 주었고 반딧불에서 이십만원 들어온 것 중에서 나의 제주도 여비 팔만원을 제외하고 아버지에게 드렸다. 하지만 향환이가 어머니 백일 탈상 후에 나에게 건네준 오십만원은 그 성격이 불 분명해 내가 생활비로 썼다. 2003년 봄에 이천수씨 아버님이 타계했다. 난 j형님과 함께 조문가서 삼만원을 부의금으로 냈다. ----- Original Message ----- From: "MAC62" To: ______@aatkorea.com Sent: Monday, January 08, 2001 1:03 PM Subject: It's snowy day. Dear my friend. It's too haavy snow. I feel cool and tired because of clan the yard. It's too pity that The poor child day of reamber is far away. 영문 편지를 쓰는 요령을 잊어버린 나의 두뇌는 그래도 repeat ! 향환이가 영문 편지 예문을 짧게 보내주길 바라며... God bless you !! Dear, mr, Song. Yesterday was very wet and muddy on the all road owing to the heavy snow. I always appreciate doing your best life. And I regret not to help any of your troubles. There are so many things after our teen ages. We have a lot of talks about our reminiscence. Anyway, I hope your eyes burn up the flame of the life. I believe in you. Take care of you. Bye. 안녕하세요. 평소 독서 토로회에 발전을 위하여 수고가 많으십니다. 이번 메일에서 가입신청요건인 독후감 한편을 보내드리오니 업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목 만행 화계사 하버드에서 까지. 내용 : 이번 겨울에 읽은 책중에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미국 천주교집안에서 태어나 양 부모님과 8 형제 가운데 평범하게 성장한 폴 이야기이다.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 38 세이니까 나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세상을 같이 살아가는 미국인으로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대각 캠퍼스 커플인데 그 주분은 독실한 천주교신자이다. 팔형제를 낳아서 아버지는 자식들 교육을 위하여 물론 박사학위까지 잗은 아내가 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내조를 하지만 그 돈으론 사립학교 교육비는 당할 수 없어서 직장까지 그만두고 창업까지하면서 자식들을 턴주교 계통의 학교를 선택하여 교육잗도록한다. 폴은 6 남으로 처음에는 공립학교에 갔으나 이미 그의 학업은 제나이보다 훨씬 앞서 가므로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학업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게된다. 물론 성적은 모두 언제나 에이를 놓치지 않았다. 학교의 학습지진아를 위한 각교 초유의 개인교사를 학교에서 하도록하였고 결국 교장선생님은 폴의 교유ㅜㄱ을 다른 학교로 전학가도록 알선한다. 그래서 카돌릭 계통의 형 누나가 다니던 학교에서 수도사 선생님과 수녀님들의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부터 폴은 하나님을 알기 시작하고 우리가 보통 기복신앙으로 시작하는데 폴은 진리의 말씀을 깨치려고 많은 생각과 수녀님과 수도사들에게 질문을 함으로써 그의 신앙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령 "하나님은 어린아이를 모두 사랑한다는데 어떤어린아이는 몸이 허약하게 태어나고 어떤어린이는 불구자로 태어납니까? " 이런 질문때문에 그의 학창 생활은 수녀님과 마찰을 겪게 된다. 그러한 속에서도 진리를 깨우치겠다는 그의 일념은 그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하고 그의 이성은 그 또래하고는 달리 수도사들과 침식을 같이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정도로 발전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그 시절에 있어서도 신앙과 진리에 대한 갈등은 일어나고 그 갈등은 심화 되기도하고 수도사님들과의 대화 속에서도 그는 결국 대학을 갔다. 예ㅣㄹ 대학에 가서 그의 신앙적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결국 철학을 위해서 아니 자신과의 내부와의 갈등을 해소할려고 그는 독일의 일년동안 연수(어학)를 통해 예이츠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섭렵하고 다시 하버드에 돌아와서 그는 드디어 불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은 정말 이럴 수도 있는가? 하는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을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늘나라로 들어갈 자가 없다고했는데 부처는 누구나 불성을 갖고있며 자신도 수행을 통하여 부처가 될 수 있다며 하고 말하는 종교를 비교하며 그의 지도교수의 조언으로 인연의 매듭은 시작되어 그의 불자의 길은 시닥된다. 얼마나 많은 갈등을 느끼는가 하면 읽는 제가 다 초조해졌던 기억입니다. 빅토를 위고의 저 유명한 레미제라블에서도 빵을 한 조각 훔쳤다는 스 사실만으로 18 년 도안이아(그 안에서 탈옥도 시도했던 죄도 포함하여ㅕ) 쟝뱔쟌은 출소할 때 무슨 생각을 하였겠는가. 하지만 하룻밤 자고 난 대주교 집을 나올때 은촛대를 두개 갇고 나오는데 결국 경관에게 붙잡혀 다시 성당의 주교와 대면하게 됐을때 "내가 그에게 주었다" 라는 그의 사랑의 대 실천에 쟝발잔은 그의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나는 어릴때 그 대목을 그냥 지나쳤는데 20 대가 되어 그책을완간본으로 다시 읽었을때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왜냐면 그 당시의 그 천주교성당은 무척이나 가난했고 쟝발잔이 오전 밤 대주교의 식사장면이 나오는데 정말 그 두개의 은촛대는 그 가난한 살림에 대단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당시 전기도 없던 시절에 그 촛대야말로 의미가있느것입니다. 그 사랑의 은촛대는 물론 그가 쓸쓸히 죽어갈때도 그의 유일한 재산으로 우리 그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너무나도 감명을 준다. 나는 격국 그 쟝발쟌을 끝까지 쫓아오며 그를 잡아넣으려 한 라자드경감은 법의 집행자와 인간의 갈등에서 결국 자살하고만다. 나는 그 책이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프랑스 혁명의 무대가 나와서도, 쟝발쟌의 행위가 드라마틱해서도 아니다. 나는 주장할수있다. 사람에게 어떤계기가 될 수 있는 그 순간은 결국 사랑의실천 그리고 종교의 힘 이 두가지는 충분히 만대에 이르기까지 읽힐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히 현각스님이 된 폴은 결국 불교를 통한 부처님의 말을 수행하는 한국의 불자로 말하고있다. 그의 이러한 종교적 갈등을 어떡하든지 극복한 그는 위대한 인강이다.그러나 나는 그가 예일대학 그리고 하버드 신학원을 다닐때 우리 한국인은 군대를 가야하고 사랑하는애인을 군대로 보내야하는 애처로움이 있다. 물론 그옛날 엘비스프레슬리가 군대를자원해서 간것하고는 다르지만서도 대부분의 우리 한국인은 군대를간다. 그 추운 겨울 날 아무것도 보이지않고 오직춥다는 생각으로 "춥다. 춥다." 그러다 머리도 얼어붙어 정말 남자가 냉이 걸릴정도로 그러한 어려움을 겪고 우리는 인생을 걸어왔다. 약간의 부르조아적 냄새를 지워버린듯한 흔적은 나에겐 좋다. 그의 갈등을 좋아한다. 이제 그의 나이 38 세 나의 나이 40 세, 이것저것 비교해보고 나느 말 한다. 자기가 깨친것도 이렇게 문자를 통해서 표현해도 좋지만 그가 더 많은 어려움과 또 선행을 한 후 그의 사랑의 실천을 상업성이 배제되 형태로 읽응 독자에게 전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럼 이것으로 현각스님의 만행기를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짧은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맞춤법이 틀린것을 용서하시기바랍니다. 더욱 발전하는 독서 토론회가 되길 바라며. 제목 : 새 천년 풍운아라면 !! 21 세기를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익살과해학 그리고 멋이다. 라고 이 풍운아는 하루에 시작을 구호로써 시작한다. 조선시대의 서화담 선생을 따라 잡을 수만 있다면 이 시대의 풍류 여걸 "황진이 마담"을 만나 새 천년의 사랑극을 만들어 여예계 기자들을 게으름 피우지 못하게 하며 사춘기 청소년 들이 공부 열심히하여 나도 저런 Love story 의 주인공 들이 되어봤으면 하는 소망을 각게 하고싶다. 세이스피어의 햄릿의 여자친구는 오필리어이다 로미오의 걸 프렌드는 쥴리엣이고 닥터 지바고의 연인은 라나이다. 그리고 저 유명한 비터르 위고위 레미제라블의 코젣트의 휘앙새는 마리우스이다. 그리고 우리의 고전 성춘향이의 오매불망 잊지못하는 도련님은 물론 이 몽룡이지요. 아하 한사람 빼면 안되지요. 저 유명한 카이사르의 전장터의 파트너 클레오파트라 . 아 ! 성경에 나오는 삼손의 이웃마을 애인 데릴라... 하하하 ! 그러나 이 풍운아느요사이에처럼 누이 많이오고 쌓일 때 " 강남간 제비님들 가며는 아니오네 일도집에 도아가도 꿈동산 찾지말고 백설이 만건곤할제 단란주점 찾아주오" 라는 시조를 읊조리느 황진이 주막집을 사랑하고 그리고 만나고 싶다. "오시면 풍운아님 안오시면 나그네 오며는 빨리가고 일년에 한번오네 풍장사 황진이 주막 문전성시 언제인가 " 이런 집을 일번지로 정하고 자유롭게 살고싶다. 내가 만일 풍운아라면 이 곳 부평에 있는 단란주점, 룸 카페, 룸 싸롱, 나이트클럽, 색시집 을 외롭게 하지 않으리. 알콜이 있어야 흥이 더나고 멋도 드리워진다라는 나의 말에 반대표를 던질 수많은 종교 지도자 그리고 학교 선생님 또 ywca ... 하지만 나는 풍운아.그러나 분명 그대들에게 피해를 주고싶지 않다. 그래서 도시의 외곽으로 가든에가서 먹고 좋은 경치를 자랑하는 러브 모탤, 호텔을 이용하고..이것이 사회의 지탄을받지마는 현실이다. 이것에 순응하며 사는데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이런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이런것이 선진국형 잘 사는 사람들에게서 배워 온 것들이리라. 하지만 이 풍운아는 서화담과 청산리에 사는 벽계수는 아니지만 풍운아 서화담이 되고싶다.( 이것은 단지 서화담과 황진이의 사랑이야기만 해당하지요) 제가 서화담의 성리학 즉 유교의 깊이를 어찌 배울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그것까지 닮고싶다. 추신 : 미성년자는 부모님 입회하에 읽어보시고 일단 이것으로 " ~라면" 에 대한 나의 짧은 글을 마칩니다. 이것은 mac62 의 전부가 아니라는것을 밝혀 두면서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3 9/4 Mr. Choi is my friend who was born in 1961. He is older thenme After elementory school,each others we met the YoungDo middle school in 1974 march. 난 그 때... 신나는 국민학교 육학년 겨울방학.. 국민학교 육년동안 달다이 부어온 우체국 적금도 타게되고 이 얼마나 설레는 돈인가! 그 때 난 국민학교 사학년 때 부터 계속 같은 학생들이 5학년 7반 그리고 6학년 7반으로 같이 올라온 급우들의 적금액을 볼수 있었다. 내가 달달이 내는 육성회비가 아마 삼백원이었고 부잣집 애들은 600원이었다고 생각된다. 어쨋든 그 수령액은 나에겐 엄청나게 생각됐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눈길을 준 애들의 수령액은 나의 서너배는 되었다. 빈부의 차를 느끼곤 있었지만 난 공부 잘하고 잘사는 애들이 나랑 같은 중학교로 다니지 않게 되기를 은근히 바랬었다. 국민학교 때에는 선생님들이 방과 후에 과외를 직접 하셨다. 눈치가 없는 나는 월례고사 중간고사 등등의 시험이 있어도 육학년이 되어서야 아이들이 시험 전 날 공부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시험 당일 아침에 담임선생님에게 과외를 받는 애들이 이거 저거 물어보며 외우라는 것들이 그대로 시험 문제로 출제 되는 것을 알고 그 어린 나이에 나도 과외만 하면 성적이 오를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결코 어머니 한테 과외를 시켜 달라고 조르질 않았다. 그 당시 학교는 시골에서 전학 온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난 그들과 노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특히 방의철이란 애가 생각난다. 별명을 방구철이라고 하며 잘도 놀았다. 당시 도림이동에 연탄공장 옆에서 가게를 했는데 아마 대포집이 아니었나 어렴풋이 기억된다. 이런 친구들하고 같은 중학교로 배정되기를 바랐었다. 동네 친구인 안정환, 손은수, 홍용표 그리고 최순덕 이들도 나와는 모두 다른 학교로 배정되었다. 도림 태권도 무덕 체육관을 같이 다니던 최순덕과 가겟집 아들인 안정환은 같은 학교로 된 것 같은데 중학교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성남 or 당산 중학교) 다만 그들이 입은 교복에는 한문 이름표가 된 것으로 기억 되며 홍용표는 장훈 중학으로 배정 받았다. 난 그 눈 많이 내리던 긴 방학을 영등포 역 앞에 있는 한림학원으로 영어와 수학을 배우러 다녔다. 가족들은 언덕백이 위에 위치한 도림교회 뒤의 이문식 아저씨의 집에서 살았는데 아들 석환이랑은 나이가 같아 곧 잘 놀았다. 옆집에 화준이 형, 화숙이 강준이 들도 생각난다. 하준이 형네는 신진 양장을 했는데 나의 어머닌 그 곳에서 거의 완성된 옷의 실밥을 빼거나 단추 또는 훅크를 다는 부업을 하셨다. 집앞 평화 이발소를 지나 뗑뗑 거리는 기차 건널목을 지나 학교와 중화학교 뒷길을 지나 판번 시장 쪽의 역으로 향한 큰 길을 따라 그 당시에 낫이나 삽 그리고 호미 같은걸 만드는 쭉 늘어선 철공소들 을 신기하게 구경하며 당시에 영등포 우체국 앞엔 지상 건널목이 있었는데 여길 두번 건너면 학원이었다. 그래도 석유 난로가 있었던 것 같다. 영어 선생은 학생 한명을 데려오면 파카만연필을 하나 준다며 강의하던 학원 강의실.. 난 영어 펜맨십을 길거리표 만년필인 것도 같은 걸 쓴것도 같기도 하고.. 돌아 올 땐 영등포 역 골목 창녀촌이 있는 곳으로 오며 가끔 그녀들이 있음직한 집을 힐끔 거려 보면서 (왜 그랬을까?) 밤색 비닐 잠바안에 책을 놓고 두손을 윗 주머니에 찔러놓고 볼 것 많은 길거리를 다녔다. 그러다 다방이란 간판을 보며 여기에는 미성년자 출입금지라고 했는데 무엇하는 곳일까 상상도 해보면서 영어 단어도 외어 가면서... 그렇게 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국민학교 졸업하던 날, 그 왠수같은 김상길 담임선생을 안보게 되어 속이 시원했다. 당시 기성회비를 안 가져 오면 애들을 집에 가서 가져오라고 집에 보내기도 하고 마포걸레 손잡이를 빼서 막 휘두르는 것이다. 내가 맞아봐서 당시 유행하는 꼰데라고 뒤에서 나도 그랬던 시절이 이때다. 붓글씨를 잘 지도 해서 당시 수영장이 있는 풀장 앞에서 무슨 잡지신문인가 하는 기자가댱 우리 반 전체를 사진도 찍어간 것을 보면 그리 무능력한 선생은 아닌 것 같이 지금은 생각 되는데 그 땐 무척 싫었었다. 육학년 때 우린 전학온 애들이 많아 한 반에 팔십명도 넘었는데 그래도 선생님은 날 알아보는 눈치셨다. 왜냐하면 여름 방학 대 학교 풀장에 내가 가는 때가 안닌데 나의 담임이 그 곳에서 매 시간 별로 들어오는 학생들을 수영하기 전에 준비 체조 시킬 때 문 쪽에서 서있는 날 알아보고 야 운배 너 먼저 풀에 들어가서 물위에 떠 있는 잎파리 걷어내. 물론 잽싸게 가서 횅재 한 날이다 하며 수영을 한 기억도 있다. 어째든 졸업하는 날, 해는 있는데 몹시 추웠다. 집에 가서 졸업장 딸랑 하나 던져 놓고 (육년 동안 상장 하나 못 받았다)도림 2 동 , 같은 학교에 어머니가 주신 돈 갖고 은숙이와 은주를 데리고 아버지가 다니시던 중앙신철 앞에 있는 중국집에서 나는 짜장면 한그릇 은숙이와 은주는 한그릇 시켜 반씩 나눠 먹었다. 난 중학교를 배정 받고 아마 책(교과서)을 받으러 국민학교 동창들이랑 같이 간 것 같다. 우리 반에선 이광호, 정용환, 이해균이 같은 학교였다. 이해균은 국민학교 때 반장도 했고 아버지가 고물상인가 했던 걸로 기억되고 나도 한번 놀러간 적이 있다. 정용환은 두명이 있는데 우리 동네쪽에 사는 축구 잘하는 친구가 아니라 문래동에 사는 정용환이다. 난 안낙영과 이 친구 집을 이상스레 헷 갈리곤 했다. 신입생들이 입학식 하던 날 난 그래도 스마트 기성복을 사입고 도림 시장에서 한복집과 아버지가 트럭 운전수인 에리트 복지로 맞춰 입은 광호랑 학교로 갔다. 우리 엄마는 참석치 않으셨지만 광호 엄마는 오셨다. 이날인가 다음날인가 난 수학을 담당한 김홍길 선생이 담임이었고 운동장에서 키 순으로 짝을 맞춰주셨는데 이 때 Mr. Choi를 만나게 되었다. 그 인연이 오늘 날 까지 계속 된 것이다. 친구는 현재 미국 한 통신회사의 한국지사 대표이사를 맡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