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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및 분단과 고당 조만식 선생님 / 주 목사님을 산정현교회로 모셔오고 끝까지 섬긴 분은 바로 조만식 선생님 - 신앙과 민족을 일치시킨 삶 -
권성아 (평화한국 평화연구소 소장)
1. 주기철 목사님께서 신사참배 반대로 순교하실 때까지 그 옆에는 누가 있었을까?
1) 주 목사님을 산정현교회로 모셔오고 끝까지 섬긴 분은 바로 조만식 선생님
1934년 일제가 만주국에 제정(帝政)을 실시하면서 중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내고 있을 때 ‘평양숭실전문학교’에서 신사참배 거부사건이 발생하였다. 신사참배는 1920년대 일제가 그들의 신도(神道)사상을 학생들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시작하여 1930년대에는 이를 일반인에게까지 확대시켜 나갔는데, 당시 학교 및 사회교육운동을 통하여 민중들의 민족교육을 주도해오던 기독교는 이에 강력하게 항거하여 끝까지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1938년까지 장로교 계통의 사립학교 18개교가 폐교처분을 당하였으며 1939년도에 구속․처형된 기독교인의 수는 324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때 고당이 장로로 있던 산정현교회에서는 교회의 위상을 고려하여 일제의 박해에 대항할 만한 지도력과 역량을 지녔다고 판단되는 주기철 목사를 천거하였는데, 주 목사는 오산학교에서 고당에게 배운 제자로, 당시 마산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제자인 주 목사를 스승인 고 장로는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어 모셔왔고, 담임 목사로 청빙한 이후에도 고당은 주 목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섬겼다.
이러는 사이 천주교에서는 1936년 교황청에서 신사참배를 애국행사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박해를 받지 않았으며, 개신교의 경우 이미 1935년에 안식교와 성결교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였으며, 1938년에는 감리교도 굴종하고 말았다. 그런데 가장 완강하게 거부하였던 장로교도 1938년 9월 9일 일경의 감시 하에 이루어진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결의를 하고 만다. 이는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불경일 뿐만 아니라, 조선민족으로서 민족에 대한 배반이었다.
이후 일제는 1939년 ‘종교단체법’을 제정하면서 신사참배 강요를 노골화하고, 1940년 기독교 ‘반전공작 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하여 참배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을 모두 비(非) 국민으로 단정하고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 등 평양 산정현교회 소속 교인들을 비롯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을 체포․고문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는 1942년 3월 ‘일본기독교 조선혁신교단’으로 개명하며, 일본어 성경만 사용하고 모세5경과 요한계시록은 민족사상이 있다 하여 삭제하였으며, 찬송가 가운데에서도 같은 이유로 많은 장들이 삭제되는 가운데 1945년 8월 1일에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발족된다. 이로 인해 기독교는 우상숭배를 용납하지 않는 유일신사상을 스스로 져버림으로 인하여, 더 이상 국민을 계도할 수 입장에 놓이지 않게 되고 만다.
그런데 산정현교회의 경우에는 1938년 2월 주기철 목사가 처음 투옥되었을 때 편하설 선교사가 목회를 대신했는데, 이때 장로들도 한 마음으로 설교를 나누어 감당했다. 특히, 고당은 설교와 기도회 인도를 통해 교인들이 많은 은혜를 받게 했으며, 일제의 형사들이 이중삼중으로 삼엄하게 감시하는 가운데에서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산상수훈 등의 말씀을 전했다.
그러나 1940년 3월 24일 교회당은 폐쇄되었고, 고당을 비롯한 3명의 장로는 강압에 의해 사표를 내게 되었다. 그러면서 일제는 그 비밀장소까지 찾아와 불법집회라는 명목으로 성도들을 옥에 가두곤 했지만, 교인들은 여전히 임시 예배 장소나 구역별로 흩어져 예배를 드리거나 각 가정에서 기도하면서 신앙의 지조를 지켜 나갔으며, 여기에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고당을 비롯한 5명의 장로와 4명의 집사가 큰 몫을 하였다. 특히, 고당은 다른 장로들과 함께 교인들을 조직적으로 이끌어 나갔으며, 각 가정을 방문하면서 교인들을 격려하고 위로해 주었다.
이런 가운데 주기철 목사는, 1938년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구속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 감옥에서 살다가 안질과 폐병에 심장병까지 악화되어 1944년 4월 21일 하늘나라로 가셔,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평양노회는 이미 그의 목사직을 박탈한 상태였으며, 가족마저 사택에서 추방시킨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의 장례식도 교회에서 하지 못하고 평양 서광중학교 앞 도로변에서 치렀으며, 유해는 평양 교외의 돌박산 공동묘지에 안치시켰다.
거의 모든 종교인들과 민족지도자들이 변절해간 일제의 마지막 때에 “신사참배 반대라는, 하나님의 뜻이, 산정현교회라는 장(場)에서 정치적인 면의 조만식 장로와 종교적인 면의 주기철 목사의 양립과 조화로서 영광의 승리가 성취”되었던 것이다.
2) 산정현교회는 1907년 부흥대성회가 열린 평양 장대현교회의 지교회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이 땅에 기독교가 전파된 초기 조선 기독교인들의 중심이 되었던 개화파는, 1896년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이 땅의 자유민권운동과 자주국가운동에 공헌한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1898년에 이르면 정부에서 독립협회에 압력을 가하는 등 충돌이 빚어지면서 보수 반동의 분위기가 감돌고 결국 협회의 운동은 좌절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초대총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나름대로의 기독교 정책을 구체화하고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정치는 통감이, 정신적 교화는 종교가 맡는다.”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강조하여 선교사들을 회유하는 것이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1901년 9월 장로회 공의회의 선교사 회의에서 ‘교회의 비정치화를 위한 결의안’을 채택하여 전국 교회에 전달하였다.
정교분리에 입각한 선교사들의 이러한 자세가 조선의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신앙에만 몰두하게 하였기 때문에 1907년의 대부흥회가 가능하였으며, 이에 따라 교회는 더 이상 정치적인 일에 직접 관여하는 일을 담당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지도층에 있는 일부 선교사들의 친일적 자세와는 달리, 조선인들과 직접 접하고 있던 일반 선교사들은 조선이 국권을 회복하고 타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국가가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당시의 우리나라 상황은 민족의 위기와 좌절 바로 그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은 조선의 민중과 왕실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조선침략을 보다 구체화시키는 길이 되었다. 게다가 러일전쟁으로 인하여 1904년 2월에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교환하고 8월에는 ‘한일협정서’(제1차 한일협약)를 체결함으로써 조선의 내외 정치는 자주권을 잃게 되어 조선의 독립 유지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 미국과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염려하여, 1905년 7월에는 미국이 일본과 ‘가츠라-테프트 비밀협약’을 맺고 9월에는 영국이 일본과 ‘포츠머드 강화조약’을 맺어, 일제의 조선 강점을 지지․용인하는 입장을 취함에 따라 조선에게는 국제 외교적 환경도 극히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 11월에 ‘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을 맺음으로써, 사실상 일제의 통치는 시작되었다. 이러한 민족적 불행은 우리의 민중과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찌르게 되었고, 이것이 1907년 대부흥운동의 한 배경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러일전쟁이 발생한 1904년 당시 22세였던 고당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뀌게 하는 일이 그의 피난지에서 발생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서당 다닐 때부터 친구이면서 지물상 동업자인 한정교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신하게 된 것이다. 물론 만식은 이보다 훨씬 이른 11-12세 경부터 한석진 목사 집을, 그의 아들과 친구였기 때문에, 자주 드나들며 모펫(馬布三悅, S. A. Moffet) 선교사 등을 만나고 복음서를 받곤 한 적이 있었지만 신앙으로 연결되지는 못했었다.
러일전쟁이 끝나 평양으로 되돌아 온 후 한정교가 만식을 데리고 간 곳이 바로 ‘장대현교회’였다. 이 교회는 당시 매 주일 신도가 2천 명 정도 모일 정도로 큰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미 1903년 겨울 원산에서부터 시작된 부흥회의 불길은 1907년 1월 연례사경회를 시작하면서 활활 타오르게 되었는데,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평양신학교와 숭실대학 및 숭실중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에도 이 불길이 번지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숭실중학교 3학년 졸업반이던 25세의 고당도 이 성령의 불길로 심령이 뜨거워져, 이후 그의 삶은 하나님과 조국을 위하여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나는 기독교적 신앙이 바탕을 이루게 되었다.
한편, 고당은 1906년 1월 이후에는 1905년 이 교회에서 지교회로 설립한 평양 닭골(鷄洞)의 산정현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는데, 1913년 3월 31세에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오산학교 교사를 맡으면서, 1921년에는 이 교회 집사로도 봉사하였다. 다음 해 이 교회에서 고당은 장로로 피택 되어 1922년 6월 14일 고시를 치르게 되었는데, 자신은 아직 장로가 되기에는 자격이 부족하다고 여겨 교리문답 시험에 제대로 답하지 않아 낙제하고 말았다. 그만큼 그에게는 ‘명예욕’이 없었다. 그러나 평양노회에서는 “그의 인품과 신앙 그리고 사회에 끼쳤던 지도력 등을 고려하여 준무시험(準無試驗)으로” 장로 임직을 주었다.
2. 평양이 일제 치하에서 기독교민족운동의 중심일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이유일까?
1) 조선 기독교인에 의해 신앙과 삶을 일치시킬 수 있었기 때문
일제라는 상황에서 맥켄지(F. A. Mckenzie) 선교사는 “성서에 젖어든 한 민족이 학정에 접하게 될 때에는 그 민족이 멸절되든가, 아니면 학정이 그쳐지든가 하는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일어나게 된다.”고 하였다. 즉, 일부 지도층 선교사가 아닌 일반 선교사들과 이에 의한 영향을 받은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국가가 처한 위난의 현실에 직면하면서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투쟁에 나서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의 기독교는 ‘항일 구국의 민족주의’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운동의 중심에는 항상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 기독교인들이 있었으며, 그 대표자로 우리는 고당을 뽑게 된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우리나라는 1882년 미국․영국․독일 등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급격히 근대화 물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부적으로는 임오군란 등으로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물결도 거세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시기 조만식은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안골 마을(內洞)에서 출생하였다. 이때가 1883년 2월 1일(음력으로는 1882년 12월 24일)이었는데, 이 해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태극기를 사용하던 시기라 한다. 즉, ‘민족국가’의 출발과 함께 만식은 그의 생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반석면은 지명 자체가 기독교와 떼어 내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앞으로의 그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암시하는 듯하다.
더욱이 고당이 태어난 강서군 내에 있는 대동강 하류의 초리면 포리는, 본격적인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지던 19세기 말보다 30여 년 앞선, 1866년 이 땅에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가 된 토마스(R. J. Thomas) 선교사가 성경 말씀을 전하던 곳이다. 순교의 피를 흘리며 나눠 준 성경 이야기가 입으로 전해지면서 강서 사람들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1897년 경 기독교인 수가 약 5천 명을 넘어서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평양 대동문 안에 있는 장로교인들만 5-6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안창호․한석진․방기창 등은 독립협회의 평양지회 지도자들이었으며, 그 중 한석진과 방기창은 1907년 조선 장로교에서 최초의 7인 목사가 된 사람들로, 특히 한석진은 고당의 유학 시절인 1909년 5월 동경에 조선인교회를 조직하여 영수를 맡았을 때 그곳 초대 목사로 초빙되었던 분이다. 그 지역에서 안창호․안태국․이승훈 등 유달리 민족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된 것도 이러한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러일전쟁 후 고당을 장대현교회로 데려간 친구 한정교는 만식에게 일제의 야욕을 알려주면서,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기 위해서 신학문을 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 술도 끊어야 할 것을 당부하였다. 워낙 대주가(大酒家)였던 만식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으나,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하려면 지혜와 실력을 갖추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술과 이로 인해 맺어진 세상친구들과 결별을 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05년 23세에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금주금연을 결심하고, 평양에 있는 1897년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평양에 처음 세워진 숭실중학교 초대교장 배위량(裴緯良, W. M. Baird) 박사를 찾아갔다.
당시 숭실중학교는 서양 선교사가 세운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영어는 절대 금물”이라는 철칙을 세워 이 학교에서는 영어를 내놓고 배울 수 없었다고 하며, 만식은 이곳에서 배위량 교장으로부터 전도의 목적이 “영혼을 천당으로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금세기에 민족적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2) 믿음을 상황에 관계없이 삶에 실천하려는 의지와 행동이 있었기 때문
일제하에서의 고당은 평양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으로 인해 반골 기질을 타고난 데에다가 숭실중학교를 다니면서 선교사들로부터 민족의식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유학시절에도 기독교인으로 활발히 활동하면서 신앙과 생활을 일치시키는 자세를 확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 전반기에는 오산학교 교사와 교장을 지내면서 교육과 종교를 일치시키며, 3․1운동 이후에는 대부분의 민족운동가들이 이 나라를 떠나가지만 고당은 정치적 망명을 하지 않고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교육과 경제를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펼친다. 이로써 고당의 사상을 ‘기독교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한민족이라면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대중적’․‘인도적’․‘자립적’ 민족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후반으로 넘어가면서부터는 기독교 청년운동의 일환으로 농촌진흥운동과 좌익과 우익이 함께 하는 신간회 활동 등을 통하여 이념이 아닌 민족애로 교육과 생활을 일치시키는 민족진흥운동을 펼쳐 나가는 것으로 보아, 고당의 사상은 ‘실천적’․‘화합적’ 민족주의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당은 반일운동을 직접 일으키는 것보다는, 민족을 위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그의 민족주의를 실천해 나갔다. 그리고 생활로 민족주의를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도발을 계기로 조선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으며, 1937년의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부터는 한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들은 일본어를 상용하도록 하면서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사 교육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반일적 언론기관과 학술단체를 폐쇄시켰을 뿐만 아니라 황국신민 서사(誓詞)와 신사참배 및 창씨개명 등을 강요하여 한민족을 말살하려 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식량․원료․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미곡을 강제로 공출하고, 금속기를 강제로 헌납하게 했으며, 많은 조선인들을 탄광과 군수기지로 끌고 갔다. 또한 많은 젊은이들을 지원병․학병․징병 등의 제도로 강제 동원하였고, 부녀자들까지도 정신대로 끌고 가 자신들의 침략전쟁에 희생 제물로 삼았다.
이러한 때 그나마 국내에 남아 있던 수많은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가혹한 탄압과 회유로 지조를 잃어갔다. 교회와 학교도 일제의 야만적 강압에 굴복해 갔다. 그러나 고당이 교수로 있던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와 고당의 출신학교인 숭실중학교 등의 기독교 장로교계 학교들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끝까지 거부하다 폐교로 신앙과 민족의 지조를 지켰다. 그리고 고당이 장로로 시무하던 산정현교회도 신사참배 거부로 결국 폐쇄당하고 만다. 그런데도 고당은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황국신민화운동의 추진기구인 국민총력연맹의 고문직 수락을 거부했으며, 차남의 학병입대 강요도 끝까지 거부하였다.
일제라는 암흑의 시대에 고당은, 인도의 간디처럼, 비폭력과 불복종으로 일제에 저항하고 항거한 국내에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민족지도자였던 것이다. 그런 그였기 때문에 해방 직전 아무 것도 못하고 고향에 은거하고 있을 때, 가족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 비슷한 말을 남겼다.
애국애족을 하다보면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만, 내가 죽은 뒤에 너희가 비석을 세우려거든 거기에 비문을 쓰지 마라. 그 대신 큰 눈을 두 개 새겨 다오. 그러면 저승에 가서라도 한 눈으로는 일본이 망하는 것을 보고, 또 한 눈으로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지켜보리라.
(한근조, 위대한 한국인 ⑩ 고당 조만식, 서울 : 태극출판사, 1972, 365).
3. 어떤 이유로 조만식 선생님을 기독교민족운동의 대표자로 지목하는가?
1)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로서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했기 때문
고당의 실천적 민족주의는 조선의 청년을 향해 1935년 삼천리 10월호에 기고한 “청년이여 앞길을 바라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청년이여 앞길을 바라보라
청년의 층(層)으로 말하면 여러 층이 되기 때문에 천편일률로 될 수가 없는 만큼 이 말씀은 특히 생각이 있는 청년에게 하는 바일 것입니다.
생(生)의 의식을 굳세게 파악하라
우리 청년들은 매우 영리한 한편 심히 유약하여 자기정신으로 생활하지 못하고 세상풍조에 휩쓸리어 그야말로 취생몽사(醉生夢死)의 처세(處世)의 형편이 많음을 흔히 본다. 대현(大賢)은 여우(如愚)라고 함과 같이 바라건대 약삭빠른 것 같으면서 크게 어리석지 말고 어리석은 것 같으면서 참 현철하게 세상풍조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의 태도로 생(生)의 의식, 말하자면 살겠다는 굳센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운명을 자기 스스로가 개척하도록 하지 아니해서는 아니 되겠다. 여기에 있어서 비로소 인생으로서의 청년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절제생활을 강조하라
절제라 함은 흔히 금주나 단연 뿐만을 의미하는 줄로 오해하는 이가 많다. 절제는 심사, 행동, 의복, 음식, 기타 범절에 긍(亘)하여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청년들의 허영적 외화적(外華的) 향락적 타락적 심리 안목, 기분, 행동 등 일체를 보기에 너무 통분하여 단연 절제생활의 길을 밟아, 각자의 모든 결함 과오를 대청산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환경이며 세태야 어떠하든지 우리 조선청년으로서 이래서는 아니 된다. 깊은 회오(悔悟)가 있어야만 된다. 환경의 유혹 세태의 영합은 붕정만리(鵬程萬里)의 전도(前途)가 요원한 청년에게는 대 금물인 것을 알아야 한다.
직업을 각기 가지라
직업은 작으나 낮으나 튼튼히 붙잡아서 자기의 생활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라. 이 생활문제가 그렇지 못하는 경우에는 포회(抱懷)하였던 이상(理想), 연구하였던 의도가 모두 공상으로, 수포로 돌아가기가 쉽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직업문제에만 열중하라함도 아니고 또는 이 직업문제로 인하여 정의나 인도 또는 좋은 사상에 배치되는 행동을 취해서는 더욱 아니 될 것은 다언(多言)을 불요(不要)할 바이다.
봉사에 충성하라
자기의 기능, 노력, 재산 기타 무엇이든지 사회 조그마한 공헌, 조그마한 비익(裨益)이 될 것이면, 이것을 제공하고 희생하여 사회에 봉사하자. 그리하여 성공 불성공은 다만 운명에 맡기고 남의 조소에 용기를 잃지 말라.
(조만식, 「청년이여 앞길을 바라보라」, 삼천리, 1935. 10 : 회상록, 404-405).
고당은 먼저 청년에게 의식이 있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의식이 없는 청년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나라 청년들이 매우 영리하지만 심히 유약하여 자아의식이 부족하고 세상풍조에 휩쓸리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살겠다는 굳센 의지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정신”을 가져야 청년의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자아의식을 파악한 청년이 생활에서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것은 절제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절제는 금주와 금연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모든 결함과 과오를 대 청산”하여 일체의 환경의 유혹이나 세태에의 영합을 금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청년은 누구나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직업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생활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고 낮음에 상관없이 자신의 일을 굳게 잡고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이상, 즉 정의와 인도 및 좋은 사상을 실현할 것을 고당은 권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러한 권고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청년들이 “자신을 희생하여 사회에 봉사”할 것을 소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의 봉사가 사회에는 조그마한 공헌일지 모르나 그와 같은 봉사는 사회에 ‘신비로운 이로움’(裨益)을 가져다 줄 것이므로, 성공의 여부는 운명에 맡기고 용기를 잃지 말고 “봉사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과 관련 없이 교육의 기본원리를 밝힌 것으로, 크고 원대한 꿈을 가지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과 봉사로 작은 일에 충성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청년의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함을 밝힌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당은 일반인이 아닌 기독교인들에게는 좀 더 높고 원대한 꿈을 가질 것을 요구하여, 1935년 8월 27일에서 30일까지 금강산 장안사에서 있었던 조선기독교연합회가 주최하는 하령회(夏令會)에서 강연을 맡았던 고당은, “먼저 내 몸과 재산과 재능과 지식을 하나님께 바치고 대중에게 유익을 주겠다는 결심이 없으면 안 될 것”이라고 하면서 “천당도 가야 하겠지 만은 이 세상에서 먼저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이다”고 강조하였다. 더욱이 고당은 일반 기독교인이 아닌 기독청년들에게는 최상의 꿈을 가질 것을 바라면서 1937년 삼천리 1월호에 “기독청년의 이상”이라는 글을 실은 바 있다. 여기서 그는 일제라는 당시의 시대와 환경이 “실로 상당한 이상을 가져야만 될 형편”에 놓여 있다고 보고, 이는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를 기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기독청년들아! 최고의 이상을 가져라!
하나님께 기도하여라. 염원하여라. 그리고 활동할 것이다. 오직 거기에서 의기(意氣)와 위력(偉力)을 얻을 것이다.
(조만식, 「기독청년의 이상」, 삼천리, 1937. 1 : 회상록, 422).
그러면서 그는 기독청년이 해야 할 급선무가 민력(民力)을 충실하게 하기 위한 ‘경제운동’이라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조합운동․물산운동․절제운동․농촌운동․상공운동 등을 펼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떤 이상을 가지고 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 : 33)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 모세나 자신을 영화롭게 해주겠다고 유혹하는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과 같은 “확고한 신앙으로” 고(高)․원(遠)․대(大)한 이상을 가지고 진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고(高)란 비루(卑陋)치 아니한 것을 뜻합니다.
원(遠)이란 기간으로는 단기간이 아니며
대(大)란 소리(小利)에 빈약함이 아닙니다.
(조만식, 「기독청년의 이상」, 삼천리, 1937. 1 : 회상록, 424).
고당에게 있어서 높은 뜻을 가지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타협 등으로 인하여 비굴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며, 멀리 그리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뜻이어야 하며, 작은 이익에 얽매이지 말고 대의(大義)를 따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이러한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고 보았다.
첫째 이상적 인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인격적 소유자라야 할 것입니다.
견고한 의지, 면밀한 두뇌, 성실한 활동 등으로 이상에 입각하게 되면 자연히 인격자가 될 것입니다.
둘째로 장해를 배척해야 할 것입니다.
호사다마 격으로 오인에게는 삼계(三誡)가 필요할 것입니다. 즉, 물욕, 명예, 권세욕 이 세 가지일 것입니다.
셋째로는 동지를 결합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인동심’(二人同心) 사업의 대소를 막론하고 이것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가 자기의 이상을 달성키 위하여 청년동지를 사방으로 구하여 훈련하였던 것입니다. 마치 가옥에는 기초, 지주와 기와가 필요하듯이 사람에게는 이지(理智) 의지심(意志心) 활동수족(手足) 등 각능(各能)을 결합함이 필요합니다.
넷째로 우리의 사업을 이상에 연결해야 합니다.
어떤 사업을 영위하든지 항상 고(高), 원(遠), 대(大)한 이상이 연결하고 이것이 비조(比照)하여 취사(取捨) 재단(裁斷)할 것입니다.
(조만식, 「기독청년의 이상」, 삼천리, 1937. 1 : 회상록, 424-425).
고당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격자가 되어야 하는데, 여기에도 견고한 의지가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에 면밀한 두뇌가 필요하며 여기에 성실한 활동이 뒤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격자는 이상적 인물이 되는 데 장해가 될 수밖에 없는 물욕과 명예 및 권세욕을 배척할 수 있어야 하며, 예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신 것처럼 기독청년 각자가 지니고 있는 지적인 능력과 의지 및 기능을 하나로 통합하여 한 몸과 같은 동지로 결합하여 행동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항상 높고 원대한 이상에 비추어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2) 공산주의자들과도 가능한 화해와 일치를 이루려 했기 때문
일제의 탄압이 극도에 달한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선언 이루어지고, 1945년 2월 4일 얄타회담과 7월 26일 포츠담선언이 이루어지면서 8월 15일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준비 없이 맞은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하여 평남도지사 니시까와(西川)가 고향에서 은거하고 있는 고당을 부르려고 16일 자신이 타던 차를 보냈다. 이때 심부름 온 김항복(金恒福) 전 숭인상업학교 교장은 고당에게 “아무래도 이북에서는 고당이 주인이니 업무를 인수해 달라”는 도지사의 지시를 전했다. 그러나 고당은 “일본 지사가 타던 차를 내가 탈 수 있겠는가. 조만식이를 그렇게밖에 보지 않았느냐”고 나무라면서 “나는 인수를 맡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심부름 온 사람을 곧바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다음 날 은거지에 숨어 있다 찾아 온 산정현교회 오윤선 장로가 보낸 차를 타고 17일 평양으로 귀환하여, 김병연․한근조 등과 함께 건국방안에 대한 의견과 당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하여 그날로 민족진영 중심의 ‘조선건국평남준비위원회’를 창립하고 고당이 그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니, 이때 고당은 63세였다.
그런데, 건준이 조직된 지 열흘도 못된 8월 25일 소련군(소련 제1극동방면군 제25군, 사령관 N. M. 치스챠코프 대장, 정치위원 레베데프 소장)은 평양에 진주하기 시작했는데, 이들과 함께 소련계 한인과 김일성 일파 300여 명도 정치․행정요원으로 따라 왔다. 소군정은 8월 27일 “행정권을 민족대표자들에게 이양하여 줄 터이니 15명의 대표가 철도호텔에 오라”고 하여 주저 없이 달려갔더니, 이미 별실에는 15명의 공산당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이들 30명으로 ‘정치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권고하였는데, 민족진영은 공산당과 함께 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러면 그들의 흉계대로 일이 진행되어 갈 것 같아 이를 수락하기로 했다. 더욱이 “저들이 제아무리 소련군을 배경으로 획책하더라도 민족진영 대표인 조만식 선생에 대한 국민들의 신망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그들 뜻대로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위원회는 위원장인 고당의 숙소를 고려호텔로 정하고, 여기에서 집무를 맡아 보게 했다. 그런데 공산당 측에서는 앞으로 수립될 국호는 ‘인민공화국’이어야 할 것이며, 우선 지주의 토지는 무조건 몰수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하였다. 게다가 당시 평남 개천 출신으로 연희전문과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여 공산당 가운데 가장 지식파로 알려졌던, 그래서 8월 17일 김용범․박정애․장시우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를 조직한 바 있는, 현준혁 부위원장이 9월 2-3일 경에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주로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민족진영의 입장에서는 공산주의자들과는 함께 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으니, 결국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여 공식적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민족진영 중심의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해체하는 일이 되어버린 셈이다.
소련군은 10월 8일에는 ‘5도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10월 28일에는 이를 ‘북조선5도행정국’으로 개편하여 공산진영과 민족진영의 연립정권을 만들어 고당을 위원장에 앉히려고 했으나, 고당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1945년 9월 중순부터 기독교인들과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당 조직에 착수하여,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11월 3일 평양에서 ‘조선민주당’을 창립하고 고당은 당수를 맡았다. 그러나 11월 23일 신의주에서 대규모 반공․반소 학생시위(‘신의주학생사건’)가 발생하고 12월 27일에는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되고 그 다음 날 이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공산진영과 민족진영은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심각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946년 새해를 맞아 치스챠코프 장군 등 소군정 대표들이 새해 축하인사를 하러 고당을 찾아 와서는 또다시 신탁통치 결의안을 지지해줄 것을 강요하였으나 고당은 끝까지 반대하였다. 이에 따라 소련군정 및 김일성의 ‘조선공산당’과의 신탁통치 문제는 결렬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북측에서는 고당과 그의 지지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중상모략이 시작되었으며, 고당을 친일분자로 몰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군정에서는 고당을 감시하여 로비에조차 나오지 못하게 하더니, 1월 5일 소련군과 보안서원(保安署員) 10여 명을 파견하여 고당을 평양 고려호텔 1실에 가둬 버렸다. 이때부터 고당의 연금생활은 시작되었다.
이러한 고당의 태도를 본 그의 제자 박남수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세상을 앓던 사람”이라고 묘사하며, 고당 탄생 83주년을 맞은 기념식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낭송하였다.
……
살눈썹에 서리는 자부러움 뒤에서
당신의 작은 눈은 늘 타고 있었고
옳은 일이면 동강 부러질지언정
구불어져 휘는 일이 없었다.
……
가져다 준 해방의 어려운 터전에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지금 어디서 당신은
은전(銀錢)에 팔려 간 형제들을 굽어보시는가
……
(박남수, 「세상을 앓던 사람」, 1965, 회상록, 348-349).
4. 그런데 우리는 왜 조만식 선생님을 제대로 모르고 있을까?
1) 혼자 북녘에 남겨두고 남녘에 내려와 반공주의를 형성한, ‘화해’할 줄 모르는 기독교인
고당은 죽기 전에 일제가 망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해방을 맞게 되나, 조국이 자주독립하는 것은 보지 못하며, 기독교인으로서 공산주의와 맞부딪치게 된다. 그러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을 때도 조선민주당 당수로 있을 때도 고당은 항상 좌익과 우익이 함께 하는 정권을 창출하려 했다. 그러나 신탁통치 문제가 발생을 하면서 소련군 사령부와 공산당의 교란 공작으로 인하여, 일반 기독교인과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독립된 하나의 민족국가를 설립하고자 하는 진정한 민족주의는 포기하고 만다. 대신 일반 기독교인들은 반공에 입각한 ‘우파 민족주의’를 형성하면서 대부분 월남해 버리고, 공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입각한 반일․반제의 ‘좌파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북쪽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이때 공산당이 판치는 것을 목격하고 월남한 우파진영들은 남쪽에 내려와서 보니, “남한이 너무도 어지럽고 또 남한에 있는 정치가에게만 맡겨 놓아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우리 민족은 우리 사상과 우리의 손으로 독립을 해야지 절름발이 독립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일한 대안은 고당 선생님밖에 없다”고 생각한 남한 정계 지도층과 월남한 사회자들은 몇 사람을 다시 월북하도록 하여 고당을 서울로 모셔오려 했다. 1945년 11월 중순 경에는 이승만 박사가 당시 바로 전에 월남한 한근조를 만나 고당을 상경시켜 줄 것을 직접 부탁하기도 했다. 한근조는 조선물산장려회 부회장과 신간회 평양지부 부회장을 맡으면서 고당을 도와왔고 해방 후에는 첫 평양시장을 맡았던 인물로, 월남하여 1946년에는 미 군정청 하에서 대법관을 지내면서 고당을 모셔오려고 두 번이나 평양으로 밀사를 보냈다.
그러나 고당은 자신만 살겠다고 자신을 믿고 있는 이북 사람들을 버리고 갈 수가 없다고 하면서, “죽으나 사나 평양을 떠날 수 없다”는 각오를 단호히 말했다. 고당은 “자기의 사명․생명을 바칠 순간이 왔을 때는 팔방미인적 타협정신은 싹 가시고 의연한 용기와 결단으로 역사의 한 선을 그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공산당들이 그때까지는 자신의 말을 잘 안 듣는다든가 무시하는 일은 없지만 국민들이 활동할 때 사상 면에서 좌익과 우익이 충돌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그곳에 있으면 이런 일이 크게 번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다음과 같이 모든 사람이 자신의 거주지에서 애국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들을 돌려보냈다.
중앙(서울)에 너무도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 같다. 지방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내버려 두고서 서울에서만 활동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앞으로 독립 국가를 건설해서 운영해 나가려면 모든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고 생활할 곳에 가서 생활해야지 중앙에만 다 몰려 올라가면 자기 고장은 비어버리게 된다. ……
(나병덕, 「고당 선생을 구출하러 갔던 일」, 1995. 9 : 회상록, 236).
이러면서 북측에 남아 있던 고당은 1946년 가을 부인이 면회 왔을 때, 그 전(3월 10일)에 이미 자신의 최후를 준비하여 자른 머리카락을 넣은 누런 봉투를 건네주며, 반동분자로 간주된 사람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봉쇄하려 하므로 “아이들을 눈 뜬 장님으로 만들지 말라”며 서울로 데려가 공부시킬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장남에게는 이승만 박사와 김구 주석 앞으로 된 친서를 써 주시면서, 함께 목욕을 가서 “아버지 때문에 평양에 올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과 “특별한 용건 없이 서울에 있는 정계 인사들을 방문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 월남할 것을 강권하였다. 이때, 장남만 서울로 가고 나머지 식구들은 북쪽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 이듬해인 1947년 2월 중순부터는 가족의 면회까지 사절되었는데, 산정현교회에서 함께 장로직을 맡았던 오윤선의 아들 오영진의 회고에 의하면, 고당이 그해 7월 2(7?)일 미소공동위원회의 미 측 대표로 평양에 체류 중인 브라운 소장을 면담하고 고려호텔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8일 고당은 연금 상태에서 구속 상태로 바뀌었는데, 당시 호텔 2층 발코니에 서 있는 모습을 길 건너편에서 부인이 마지막으로 접했다고 한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9월 9일 이북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11월 27일 부인 등 가족도 월남하였다.
이후의 고당의 소식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1950년 6월 10일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하여 남쪽에서 공산주의 지하공작 책임자로 암약하다 붙잡힌 남로당 중앙위원인 김삼룡․이주하와 조만식을 6월 26일에 교환하여 석방하자고 남한에 제안을 하였으나, 이승만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왜 거절했는지는 모르나, 그리고 승낙을 했다 하더라도 북쪽 동포들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던 고당이 이 제안을 받아들일지도 의문이었지만, 바로 그 전날 6․25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에 교환 문제는 어쨌든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김일성의 통역을 맡아서 하다 1950년대 후반 외무성 제1부장(차관급)을 지낸 박길룡의 증언에 의하면, 고당은 유엔군의 반격으로 북한이 중국으로 일시 후퇴할 때 김일성의 명령으로 처단 당하였다. 그들은 후퇴하면서 감옥소에 있는 정치범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을 했고, 당시 평양 형무소 소장이던 주광무가 이 문제를 문의하자 김일성은 고당을 포함한 정치범들을 처단하라고 명령을 했다는 것이다. 이때 조선노동당 상임중앙위원회 위원이었던 허가이와 기석복이 배석했는데, 기석복이 후에 박길룡에게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유엔군의 평양 입성 하루 전인 10월 15일 대동강변에 있는 내무성 정보처에서 한규만 소좌가 지휘하는 내무서원들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동아일보 1962년 4월 6일자에 전해졌는데, 이때에 고당은 68세였다. 이에 의하면 당시 고당은 극심한 심적 고통과 심장쇠약에 복막염이 겹쳐 남평양의학대학 부속병원 특별실에 입원해 있었는데,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 정권은 내무성 구락부에 그때까지 감금해 두었던 재북 저명인사와 종교인들을 모두 집결시키고 병상에 누워 있던 고당마저 그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고당을 포함한 이들을 처치한 후 대동강변에 구덩이를 파고 일부 시체는 가매장하고 일부는 그대로 두고 도망쳐 버렸다. 그러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12월 초순 평양을 다시 탈환하자 이들의 처형 장소를 찾아내고는 고당과 그 밖의 정치범을 사살한 것은 이승만과 미군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즉, “전쟁을 도발한 이승만 괴뢰군이 평양에 쳐들어오면서 조만식 선생 등 수많은 민족 지도자급 인사들을 죽인 후 구덩이에 파묻고 퇴각했다”고 선전했다는 것이다.
박길룡은 1959년 소련으로 망명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1991년 여름 중앙일보 기자 김국후에게 모스크바 자택에서 말해주었고, 이에 따라 고당의 죽음에 대한 기사는 1991년 7월 19일자 중앙일보에도 실리게 되었다(단, 중앙일보에는 사망날짜가 10월 18일로 나와 있음). 그리고 마지막까지 고당과 함께 고려호텔에 머물면서 그를 돌보았던 차남 연창과 사위 강의홍은 1947년 3월 이후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차남은 아오지 탄광에 끌려갔다가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강제노동소로 끌려가 처형을 당했다 한다.
고당의 부인 전선애 여사는 남편에 대한 회상을 “고당 선생님이 이 나라를 위해 하늘나라에서 기도하시는 힘은, 그분이 살아계셔서 땅에서 수고하시는 것보다 더 큰 힘일 수도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2)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하여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는 ‘일치’는 신앙에 위배?
일본 유학시절에도 “우리가 앞으로 고국에 돌아가게 되면 피차 고향을 묻지 말고 일해 나가자. 인화단결이야말로 앞날의 국권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독립하였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하면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민족을 사랑해야 한다고 한, 고당을 보면서 그의 제자 박재창은 오스카 아메린저(Oscar Ameringer)가 말한 “정치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서로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부자로부터는 돈을, 가난한 사람들로부터는 표를 걷어 들이는 예술이다.”라는 표현을 인용하면서, 고당은 이러한 술수를 쓰는 ‘정치꾼’(politician)이 아니라 오로지 애국애족만을 생각한 진정한 ‘정치가’(statesman)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때문에 고당은 신탁통치 문제로 당시 북쪽에서 김일성 다음 가는 세력가였던 최용건이 19번이나 설득하러 왔을 때도, “그저 공산당들이 붙어 공격하고 달래고 설명하고 공갈하고 하면 가만 앉아 듣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할대로 다 한 다음에는 자기는 가만히 “아니!”해버린다는 것이다.”
아니라고 하는 것이 옳은 줄 분명히 알았다 하더라도, 당시는 전부가 그 반대인 줄 고당도 알았는데, 그리고 아니라고 하면 칼이 목에 들어올지도 모르는 문제인데, 그런데도 고당은 혼자서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그래서 “이보다 더 무서운 영웅이 어디 있나?”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소련군 사령부와 공산당원들은 그를 죽이자 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죽이지 말라 하긴 더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러니 김성식은 고당이 남한과 같은 난세에 처해 있었다면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하였을 것이라 본 바, 고당은 “21세기 이 민족의 앞날을 새롭게 할 하나님의 사람이며 2000년의 한국정치는 물론 인류정치를 이끌어가는 진정한 인간적 민주주의(Humancracy : 益民主義)의 정치적 이상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① 그에게는 물욕(物慾)이 없었으니 협잡배와 같이 어울리지는 않았을 것이요
② 그는 명예에 노예가 아니었으니 권력을 잡으려고 온갖 부정 수단을 다 사용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하지는 않았을 것이요
③ 그의 인도주의와 민족애는 비민주주의적 독재정치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성식, 「민족주의자로 일관한 삶」, 월간중앙, 1975. 3 : 회상록, 274).
고당은 이러한 일을 우리나라에 제한하지 않고 국제적 평등과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도 확장하고자 했으며, 모든 산업을 민중화하면서도 이 모든 일을 법에 근거하여 정당정치를 통하여 실천하고자 했다. 이런 고당이기 때문에 그를 “신앙심과 애국심”의 화신으로 평가한 한경직 목사도, 고당이 통일에 있어서도 한 알의 밀알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고당 선생의 이야기를 이렇게 마치고 말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고당은 북한에 떨어진 한 일의 밀알입니다. 북한 땅에 떨어진 고당을 비롯하여 많은 애국 동지들의 밀알들은 반드시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 많은 열매를 맺을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남북통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앞으로 고당의 날 기념식을 서울에서 할 것이 아니고, 평양 만수대 위에서 성대히 거행할 그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습니다.
(한경직, 「고당 선생의 신앙과 민족교육」, 1994. 7 : 회상록, 74).
“워낙 뚜렷하고 빛있는 일은 세소인원(世疏人遠)하여 일시 잠적되는 일은 있을지언정 결코 영멸(永滅)하는 법은 없는지라,” 거의 혼자 남아 있는 고당을 구출하러 갔던 나병덕도 “이후 통일이 되면 선생님이 하시던 일이 온 나라에 알려져 북한 동포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실 것이고 또 통일의 후유증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되시라 믿는다고 보았다. 이에 고당의 민족주의는 그의 죽음과 더불어 끝난 것이 아니라 그를 북쪽에 혼자 남겨 두고 남쪽에 내려와 우파 민족주의를 형성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데에 주는 시사가 크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고당의 ‘기독교 사회주의’는 공산주의 사상 자체도 뛰어넘는 것이어서, 앞으로 우리 민족이 통일을 이루는 데에도 많은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출처: https://unibelief.tistory.com/7 [조화와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