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월계곡에는 개울 건너로 외딴 집이 한 채 보이는데, 그 집에 비슷하게 허리가 굽은 노인 부부가 살고 있다. 오늘 새벽에는, 할아버지는 밭에서 일을 하는지 보이지 않고 할머니 혼자 마당을 쓸고 있었다.
“저렇게 두 노인네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정겹잖아?”
포플러처럼 피어오르는 굴뚝의 흰 연기를 바라보며 내가 말하자 아내가 대꾸하기를,
“그래. 그런데 저렇게 서로 기대고 살다가 하나가 먼저 가면 어쩌지?”
“아마 남은 쪽도 오래 버티진 못할 거야.”
서로 기대는 정도가 깊을수록 한 쪽을 잃은 다른 쪽은 그만큼 기운이 없을 것이다. 아마도 남자와 여자의 성(性)이란 게 그렇지 않을까?
사실 성(性)은 남성(男性)도 여성(女性)도 아닌 무엇이다. 남자도 그것을 지녔고 여자도 그것을 지녔는데, 처음부터 남자 여자가 그것을 따로 지니고 있는 건 아니다. 『중용(中庸)』에 보면 하늘의 명(天命)을 일컬어 성(性)이라 한다고 했거니와, 하늘의 명(命)에 남자와 여자의 것이 다를 리 없다.
성(性)은 사람이 그것을 지니고 있지만 그보다 먼저 사람을 있게 한 것이다. 마치 나무 속에 열매가 있고 열매 속에 나무가 들어있듯이.
그런데, 이렇게 하늘의 명인 성(性)은 아직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기 전 상태를 가리킨다. 일단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면(그것이 스스로 저를 드러내면) 남성 또는 여성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질계의 법칙에 따라, 음과 양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때, 성(性)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 그릇(器)이다. 남성은 자지라는 이름의 그릇으로, 여성은 보지라는 이름의 그릇으로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내어, 서로 만나서 조화(造化)를 부린다. 그러니까, 남성도 여성도 본질에서는 동일한 것이요 그것이 ‘조화’를 부리기 위해 짐짓 둘로 나뉘어 ‘만남’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하겠다(이는 한 사람이 여러 생을 통해 남자로 여자로 왔다 갔다 환생하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사람만 그런 게 아니다. 모든 생물이 이와 같은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통해 생육하고 번성하는 과정이 지속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혼자서는 존재 못한다. 본디 하나인 것이 둘로 나뉘었기에 이쪽 없이 저쪽이 있을 수 없고 저쪽 없이 이쪽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성과 여성을 서로의 짝이라고 부른다. 하나가 못쓰게 되면 나머지 하나도 못쓰게 되는 것이 짝이요 하나가 병들면 나머지 하나도 병드는 게 짝이다.
짝은 본질상 평등이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먹으면 먹은 쪽도 먹힌 쪽도 더 이상 짝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만남이 있을 수 없고 만남이 없으면 조화(造化)도 없다. 조화가 없으면 생육도 번성도 없다.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남성과 여성은 성(性)이 저를 존속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임시방편이다. 그 사람이 남자냐 여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성(性)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우선 염두에 둘 것은, 성(性)과 그것을 담은 그릇인 성기(性器)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긴 하지만 그러나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성과 성기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성(性)에는 남자·여자의 차이가 없지만 성기(性器)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동일한 성이 남성으로 자기를 드러낼 때에는 단단하고 외향적이고 겉으로 내놓은 모습을 띤다. 흔히들 ‘남자답다’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반면에 여성으로 자기를 드러낼 때에는 부드럽고 내향적이고 안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띤다. 그런 모습을 사람들은 ‘여자답다’고 말한다. 아마도 남성을 하늘에, 여성을 땅에 견주어 말하는 까닭도 여기 있지 싶다. 하늘에는 태양이 있다. 태양은 불이다. 자지는 보지를 만날 때 불처럼 성을 낸다. 땅에는 물이 있다. 보지는 자지를 만날 때 물처럼 적셔준다. 이쪽 극(極)과 저쪽 극(極)이 만나 조화를 이루고, 바로 그 조화 속에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성(性) 자체가 끝없이 존속하는 것이다.
여성과 남성이 서로 만나는 것은 내가 남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만나는 것이다. 성(性)은 남(男)이든 여(女)든, 같은 성(性)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남성과 여성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아무리 난폭한 강도라도 제가 저를 사랑하는 점에서는 성자(聖者)와 다를 게 없다.
이렇게 이론이 명백한데 어째서 우리는 성 때문에, 성에 연관되어, 벌어지고 있는 온갖 범죄와 고통을 경험하는 것일까?
그것은 성(性) 때문도 아니고 성기(性器) 탓도 아니고 성욕(性慾) 때문도 아니다. 성욕을 원수인 양 여기고 그것을 억압함으로써 성(性)에서 해방되려는 시도는 무모한 짓이다. 성욕이 없으면 남성과 여성의 만남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인간 자체의 존속이 불가능해진다. 그것은, 기독교의 언어를 빌리면, 사람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
성은 말할 것 없고 성기도 성욕도 모두 성(聖)스런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남성이 여성을 또는 여성이 남성을 지배, 장악하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부도(不道)요 비도(非道)이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를 어기는 짓이기에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어째서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인간들이 개도 돼지도 저지르지 않는 성폭력을 행사하며 스스로 자기를 파멸시키는 것일까? 나의 어리석은 생각은 그 원인을, 불교식으로 말하여, 무명(無明)에서 찾고자 한다. 무명은 어리석음이다. 뭐가 뭔지를 모른다는 말이다. 눈에 무엇이 씌워져 있어서 앞이 안 보이는 것이다.
성(性)에 연관된 인간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앞에서 말했지만, 성(性)과 성기(性器)를 혼동하는 것이다. 그릇과 그릇에 담긴 내용은 불가분의 관계이긴 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물은 바가지에 담아도 유리병에 담아도 같은 물이다. 남성도 여성도 같은 성(性)이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질이 다른 성(異性)이 아니라 다른 그릇에 담겨 있는 같은 성(同性)이다. 그릇이 다른 것을 보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물까지 다른 줄로 아니까, 남성은 여성에게 여성은 남성에게 서로 다른 ‘남(他)’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성교(性交)를 하는 것은 내가 남을 만나 무엇을 주거나 받는(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만나 스스로 채우는(성숙해지는) 것이다. 이점을 착각하니까, 성을 가지고 인격을 능멸할 수도 있고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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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에 연관된 인간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앞에서 말했지만,
성(性)과 성기(性器)를 혼동하는 것이다. 그릇과 그릇에 담긴 내용은
불가분의 관계이긴 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질이 다른 성(異性)이 아니라 다른 그릇에 담겨 있는 같은 성(同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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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쯤 전 일이다. 저 유명한 서울 미아리 고개 너머 이른바 ‘방석집’이라는 술집에 동료들과 어울려 간 적이 있다. 동행 가운데 하나가 유별나게 술집 여자 하나를 괴롭혔다. 가슴에 손을 넣고 더듬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는지 아랫부분까지 마구잡이로….
그때, 여자가 참다못해 이런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어찌나 머리 속 깊이 박혀버렸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손님. 나를 손님 누이라고 생각해보셔요. 그래도 이러실 수 있나요?”
사실 그 한 마디는 지금까지 수 차례 성적 방종의 길목에서 나를 돌아서게 만들었다.
인간 사회의 모든 범죄와 비극은 사람들이 서로를 ‘남’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나온다. 그런데 바로 이 생각이 무명(無明)에서 생겨난 착각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은, 그분이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짝을 걷고 하셨다는 말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한 마디에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늘 위를 보아도 하늘 아래를 보아도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는 뜻일 터인데, 이 말씀은 천상천하에 ‘나’ 아닌 ‘남’이 없다는 선언 아니겠는가?
아무리 술집에서 웃음을 파는 여인이라 해도 그가 내 누이라면 함부로 성기를 주무르며 희롱할 수 있겠는가?
누이는 오히려 멀다. 사실은 지금 내가 마주 대하고 있는 사람이 그게 바로 나 자신인데 그 사실을 알고도 함부로 농락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길게 말할 것 없다. 내가 너를 개로 여기면 벌써 나는 개인 것이다. 이 사실을 알면서 스스로 개가 되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미친 놈 앞에서 나는 더 할말이 없다.
수(雄)를 알고 암(雌)을 지키면 세상의 골짜기가 되고 세상의 골짜기가 되면 한결같은 덕(德)이 떠나지 않아 젖먹이로 돌아간다’고 했다(노자, 28장).
무슨 말인가? 남성과 여성이 한 몸에서 조화(造化)를 이루면 세상의 골짜기가 된다는 얘기 아닐까? 노자가 자주 말하는 ‘골짜기’는 텅 비어 있어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도(道)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골짜기는 여자의 성기를 연상케 하면서, 남자의 성기를 연상케 하는 산마루를 제 속에 담고 있다.
이렇게 한 사람의 인격에서 여성과 남성이 조화를 이룰 때 덕(德)이 그를 떠나지 않게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젖먹이로 돌아간다. 젖먹이는, 성경의 언어를 빌리면, 타락 이전의 인간,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운 줄 모르던 원인간(原人間)이다. 예수는 젖먹이같이 된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했다. 젖먹이는 아직 ‘나’와 ‘남’을 구별하지 못한다. 수(雄)를 알고 암(雌)을 지키는 사람은 ‘나’와 ‘남’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분별을 넘어선 사람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그릇에 성(性)을 담고 있지만 그것들이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서, 이것으로 저것을 억압하거나 짓밟는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상대를 존대하는 것이 바로 나를 존대하는 것이요, 상대를 학대하는 것이 바로 나를 학대하는 것임을 깨달은 사람이다.
우리가 바라고 나아갈 이상적인 인간상은 충분히 늙어서 젖먹이로 돌아간 사람, 성숙한 성기(性器)를 통하여 성(性)으로 돌아간 사람, 그리하여 마침내 ‘나’와 다른 ‘남’이 없어진 그런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