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상이해-80. 비타자성(Non Alterity)
힌두교 사상의 다른 가닥들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신자와의 결합의 본질을 정의하려고 한 시도는 뱅갈로르 ‘기독교 종교와 사회 연구소’(CISRS)의 스탭으로 일하고 있는 인도 기독교 지도자 마크 순더 라오(Mark Sunder Rao)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결합에 대한 지나치게 자극적인 요기적 경험의 결과로 타자성(otherness, 다름)이 폐기되고 일심동체(oneness), 아나냐뜨바(ananyatva)가 자리를 대신한다고 생각했다.
라오는 이 ‘다르지 않음’(un-otherness)을 의미하는 이 용어를 ‘비타자성’으로 번역했다.
그것은 이전의 소외가 극복될 때 나타나는 연합과 교감이며, 이 역동적이고 변증법적인 성격 때문에 전통적인 아드바이타(advaita)의 정적 일원론과 신중하게 구별되어야만 한다.
라오는 변증법적 긴장 속에 있는 두 요소의 연합, 즉 신과 인간의 상호침투를 의미하는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삼위일체 각 위격간의 상호관계)와 상호내재와 같은 용어를 찾아낸다.
그는 다양한 힌두체계들이 신과의 연합에 대한 경험을 기술하는 다양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즈나냐 마르그와 일체성에 대해서 강조하는 아드바이타, 차별성을 갖지만 불가분리성을 주장하는 라마누자, 쁘러빠띠 또는 자기복종을 강조하는 사이바 싯단뜨(Saiva Siddhanta), 신에 대한 철저한 의존의 감각을 주장하는 마드바(Madhva)등이 그런 체계들이다.
이들 각 체계는 각각 그 나름의 공헌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타자성의 극복, 즉 아나냐뜨바의 가장 유용한 두 가지 사례들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교리에서 발견된다.
페리코레시스에 의한 하나의 신격 안에서의 세 위격의 연합, 성육신하신 아들의 연합, 즉 아나냐뜨바 안에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침투가 그것이다.
여기에 신과 박따의 결합을 보여주는 하나의 패턴이 있다.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교리로 기독교신자는 비이원론의 신학과 철학을 바르게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교리들이 바로 기독교 비이원론, 아나냐뜨바(일심동체)의 강령인 것이다.
이런 하나님과 인간의 역동적인 연합은 존재론적인 것도 아니고 ‘도덕적인’ 것도 아니다.
이는 성령의 사역, 즉 성령론적(pneumatological)이다.
이는 마틴 부버의 단순한 ‘나와 너’(I-Thou)보다 더 깊은 관계이다.
라오는 이를 ‘당신 안의 나’(I-in-Thee), ‘내 안의 당신’(Thou-in-me)으로 특징화한다.
상호내주 안에서 모든 자기중심성과 소외는 영적인 요가 안에 있는 사랑으로 극복된다.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 사유지아(sayujya)의 완성은 비이원성의 경험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그 원천을 신격의 본성 안에서 삼위일체의 페리코레시스와 성육신 안에서 찾는다.
대부분의 신학자는 이것이 스스로 하나의 힌두 철학 체계에 대한 ‘아이디어의 군집’ 속에 매우 광범위하게 제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라오는 이 장벽의 밖으로 더 나아가서 자신의 새로운 아나냐뜨바의 범주 아래 그 체계들을 포괄하면서 두 전통 모두로부터의 요소들을 결합하려는 의도적인 시도를 한다.
아마도 그는 이러한 전통들을 결합하는 일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힌두교의 용어로 하나님과의 결합이 단순한 ‘비이원론’보다 더 역동적인 것임을 보여주고, 성경과 교부들, 그리고 힌두교와 현대 인격주의 철학으로부터의 통찰력을 새로운 개념인 ‘비타자성’으로 결합하려는 그의 시도는 힌두교와 기독교 신비주의의 건설적인 상호작용으로 가는 길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다름’이 아닌 ‘비타자성’ 안에서 하나이지만 그것은 성령의 역동성으로 하나인 것이지, 마야의 혼돈으로 뭉쳐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일원론적인 하나인 것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