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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산문
27. 남파 홍우원(洪宇遠), 흑과 백 -<백흑난(白黑難)>
백(白)이 흑(黑)에게 묻기를,
"너는 어째서 외모가 검고 칙칙한가? 그러면서도 어째서 자신을 씻지 않는가? 나는 희고 깨끗하니, 너는 나를 가까이 하지 말라. 네가 나를 더럽힐까 두렵다."
하니, 흑이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너는 내가 너를 더럽힐까 두려워하는가? 네가 비록 스스로를 희고 깨끗하다고 여기지만, 내가 보기에는 희고 깨끗한 것이 썩은 흙보다 훨씬 더 더럽다."
백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너는 어째서 나를 썩은 흙처럼 더럽게 여기는가? 나는 맑고 흰 것이 마치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로써 씻은 것 같고, 가을 햇볕에 쬐인 것과 같다. 검게 물을 들이는 염료도 나에게 누를 끼칠 수 없고, 티끌과 흙의 혼탁함도 나를 더럽힐 수 없다. 무릇 천하에서 나보다 깨끗하고 맑은 것이 없는데도, 너는 어째서 나를 썩은 흙으로 여기는가?"
하니, 흑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내 말을 들어 보라. 지금 너는 자신을 깨끗하게 여기면서 나를 더럽다고 여기고 있다. 나는 나를 더럽다고 여기지 않으며, 너를 깨끗하다고 여기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네가 과연 깨끗한 것인가? 내가 과연 더러운 것인가? 아니면 내가 과연 깨끗한 것인가? 네가 과연 더러운 것인가? 이점은 알 수 없다. 내가 논쟁하면 너 또한 논쟁할 것이며, 네가 따지면 나 또한 따질 것이니, 이것은 너와 내가 따진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너와 함께 세상 사람들에게 징험하여 말하는 것이 좋겠다.
지금 천하 사람들 중에 너를 좋아하는 자가 있는가? 없다.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자가 있는가? 없다.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젊고 건장할 때에 머리털을 검게 한 것은 내가 한 것이고, 귀 밑머리털을 검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한 것이다. 사람들이 청춘을 머무르게 하여 아름답고 예쁜 얼굴을 간직하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오로지 내가 한 것이다. 세월이 점차 흐른 뒤에는 너도 모르는 사이에 예전의 검은 머리가 꽃처럼 하얗게 되고, 흰머리가 반이나 되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거울을 잡고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라 족집게로 흰머리를 뽑는다.
아, 슬프다. 한스러운 것은 나를 머물도록 할 수 없는 것이고, 괴로운 것은 너를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이점이 바로 희고 깨끗한 것이 일찍이 사람들에게 기쁨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미움의 대상이 되었으며, 애당초 너의 아름다움이 되지 못하고 너에게 누를 끼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너의 깨끗함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한 광채를 깊숙이 감추고서 세상과 뒤섞여 속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용납되는 방법이다. 너무 고결하고 너무 밝게 처신하면서 출세한 자를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백이(伯夷)는 성품이 맑아서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고, 굴원(屈原)은 성품이 고결하여 멱라수에 빠져 죽었다. 그런데 조맹(趙孟)은 신분이 귀하고 계씨(季氏)는 부유해서 한껏 사치를 부리고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마음먹은 대로 행동하고 인생을 마음껏 즐겼다. 이들 가운데 누구의 삶이 빛나고 누구의 삶이 초췌한가? 누구의 삶이 성공하고 누구의 삶이 실패한 것인가?
아, 굴원과 백이의 화(禍)는 주로 네가 재앙을 만든 데에서 나왔다. 그러나 계씨와 조맹의 공명과 부귀가 당시에 위세를 떨치고 성대했던 것은 어찌 내가 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너는 광명정대한 것으로 자신을 고상하게 여기고, 기운이 맑고 깨끗한 것으로 자신을 훌륭하게 여기고 있다. 그래서 더러운 흙탕물 가운데서 벗어나 더러운 것은 받지 않고 먼지와 티끌을 뒤집어 쓰지 않는 것이다. 돈과 패물은 세상사람들이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것인데도 너는 지푸라기 같은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고, 수 많은 말과 곡식은 사람들이 누구나 바라는 것인데도 너는 뜬 그름처럼 하찮게 여기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을 고생시키고 곤궁하게 하며, 사람들로 뜻을 얻지 못하여 실의에 빠지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로 군색하게 하여 이를 견디지 못하게 하고 있다.
아, 덧없는 인생은 얼마 되지 않고 세월은 순식간에 흘러가 버린다. 만일 미쳐서 정신을 잃고 본심을 잃어서 세상과 등지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가 너를 따라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자 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어둡고 어두워서 티끌을 같이하고 모호하고 불분명하여 먼지를 머금는다. 밝게 빛나지 않고 씻고 갈아서 깨끗하게 된 것을 좋게 여기지 않는다. 재화와 진귀한 보배를 본래 가지고 있다면 높은 벼슬과 막대한 부도 못할 것 없다. 만일 얻을 수 있다면 구하여 사양하지 않고, 만일 취할 수 있으면 받고 사양하지 않는다. 문채나는 비단 옷에 대해서 사람들은 너나 없이 빛난다고 여기며, 성대하게 차려진 음식상에 대해서 사람들은 너나 없이 가득하다고 여긴다.
무릇 자기 몸과 자기 집을 이롭게 하는 자는 누구나 다 자기 마음에 들고 자기 뜻을 흔쾌하게 하니, 이 때문에 온 세상이 휩쓸리듯 오직 나에게 모여든다. 간담을 쪼개 보아도 나와 사이가 없고, 속을 열어 보아도 나와 한결 같다. 제왕과 귀족들이 신는 붉은 신발을 신고서 검은 패옥을 차고 옥소리를 내면서, 재상들이 업무를 보던 황각에 올라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는 모두 나와 견고하게 결합된 사람들이다. 금으로 만든 인장을 걸고 인끈을 매고서 재상의 자리를 밟고 왕명의 출납과 언론을 맡은 자는 모두 나와 마음이 투합한 친구들이다. 철관(鐵冠)을 높이 쓰고 홀(笏) 끝에 백필(白筆)을 장식하여 어사대를 지나 어사부에 오르는 자는 모두가 나와 정신적으로 사귀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장 깃발을 세워 놓고 용맹스러운 군사들이 빙 둘러서 있으며, 칼과 창이 삼엄하게 벌려있는 가운데 관찰사에 임명되어 나라의 간성이 된 자들은 모두 나의 당파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훌륭한 수레에 붉은 휘장과 검은 일산을 하고서 한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있는 자는 모두 나의 무리들이다.
이들은 모두 너나 없이 유유자적하고 득의만면하다. 기개는 드높아서 우주를 업신여기고, 숨을 쉴 때 무지개를 토해낸다. 일을 만들면 사람들이 감히 좋고 나쁜 것을 지적하지 못한다. 종신토록 즐기고 놀아도 풍부하여 여러 대 동안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너와 종유하는 자들을 돌아보건대, 현재 쑥대로 엮은 초라한 집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살고 있고 산과 들 사이에서 쓸쓸하게 있다. 집안에는 아무 것도 없이 사방의 벽만 황량하고 한 바가지의 음료도 자주 거르고 있다. 옷은 짧아서 춥고, 손과 발은 얼어서 부르텄으며, 얼굴은 누렇게 뜨고 목은 바짝 말라서 거의 죽게 된 자들은 모두 이와 같다.
그런데 너는 벼슬은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누각을 세울 땅도 없으며, 지위는 높고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아직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살아 생전에는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하지 못하였고, 죽어서는 자손들에게 생계 대책을 마련해 주지 못했으니 너무 부끄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너나 없이 너를 경계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면서 혹시라도 따라올까 염려하고 있다. 또한 사람들이 너나 없이 나를 사랑하여 급급하게 나에게 나와서 혹시라도 잃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이로써 보건대, 너는 세상사람들이 버리는 대상이고, 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대상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버리는 것은 천한 것이며,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귀한 것이다. 나는 귀한 것이 깨끗한 것인지, 천한 것이 깨끗한 것인지, 귀한 것이 더러운 것인지, 천한 것이 더러운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무릇 천한 사람들이 누구나 다 더럽다고 여기는 것은 썩은 흙만한 것이 없다. 썩은 흙의 더러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두 더럽다고 침을 뱉고 지나간다. 지금 세상에서는 너를 매우 천하게 여기고 있다. 지나가면서 더럽다고 침을 뱉고 가는 대상이 어찌 썩은 흙뿐이겠는가. 너는 앞으로 자신을 더럽다고 여기는 데도 겨를이 없을 터인데, 어느 겨를에 나를 더럽다고 여기겠는가. 너는 떠나가라. 그리고 나를 더럽다고 여기지 말라."
백은 망연자실하여 한참동안 묵묵히 있다가 말하기를,
"아, 옛날 장의(張儀)가 소진(蘇秦)에게 말하기를 [소진이 득세한 세상에 장의가 어찌 감히 말하겠는가.]하였다. 오늘날은 진정 너의 시대인데 내가 어찌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논란하지 않았다.
홍우원(洪宇遠) : 1605년(선조38)∼1687(숙종13). 자는 군징(君徵), 호는 남파(南坡), 본관은 남양(南陽), 시호는 문간(文簡).현종 및 숙종 때 남인 4선생의 한사람. 1645년 별시문과에 급제. 1654년에 강빈(姜嬪 : 昭顯世子嬪) 옥사(獄事) 때 삭직 당했다가 뒤에 기용되어 수찬에복직했다. 1660년 제1차 예송 때 서인 송시열(宋時烈)이 주장하는 기년제(朞年制)의 잘못을 논박했다가다시 파직당했고, 1674년 제2차 예송 때 남인이 집권하자 대사성, 공조참판, 예문관제학,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참찬이 되었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파직당하고 명천(明川)에 유배, 이어 문천(文川)으로 이배(移配)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신원되었다. 이글은 저자의 문집 [남파집(南坡集) - 한국문집총간 제106집] 권10, 잡저에 실려있다. 원 제목은 <백흑난(白黑難)>이다.
白問乎黑曰。子何闇然而黝然乎。子奚不自疏濯也。余則皎皎焉矣。子無庸近我爲也。余恐子之浼乎我也。黑啞然笑曰。若恐我浼若乎。若雖自以爲皎皎乎。吾視皎皎者。不啻若糞壤之穢矣。白忿然曰。汝奚糞壤我哉。吾皜皜乎濯江漢而曝秋陽也。緇涅之染。不能爲吾之累。埃壒之濁。不能爲吾之溷。凡天下之潔且淸者莫我尙也。汝奚糞壤我哉。黑曰。若毋嘵嘵。吾且語若。今夫若自以爲潔而謂我汚也。我自謂不汚
28. 이건명(李健命)의 그물손질과 정치 '-보망설(補網說)
정원홍(鄭元鴻)군은 내가 귀양살이할 때 같이 지낸 사람이다. 그는 그물 손질을 잘하였다. 해어진 그물을 잘 손질해서 날마다 고기를 잡았지만 언제나 성하여 새 그물 같았다. 그 덕에 나는 조석으로 생선을 먹을 수가 있었고, 따라서 반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정군은 매일같이 그물을 손질하고 고기를 잡곤 하였지만 힘들어하지 않았다. 나는 그 일을 다른 노비들에게 대신 시켜 보았다. 하지만 제대로 해내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정군에게 "그물 손질은 아무나 해낼 수 없는 특별한 방도가 있는 것이냐?"
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정군은,"미련한 노비는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물이란 본디 벼리(網)와 코(目)가 있는데, 벼리는 코가 없으면 쓸모가 없고, 코는 벼리가 있어야만 펼쳐지는 것입니다. 벼리와 코가 잘 엮어지고 가닥가닥이 엉키지 않아야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물을 처음 만들 때에 맨먼저 벼리를 준비하고 거기에다 코를 엮는데, 가닥가닥이 정연하여 헝클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그러나 모든 물건은 오래되면 망가지게 마련인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게나 고기들이 물어뜯고, 좀이나 쥐가 갉아서, 처음에는 그물코가 터지고 나중에는 벼리까지 끓어지게 됩니다. 그러한 그물로 고기를 잡을라치면 마치 깨진 동이에 물붓기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너덜너덜 해져서 손질을 하기가 어렵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통상 버릴 때가 되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왜 손질할 수가 없겠습니까? 저는 그 해진 그물을 가지고 돌아와서 바닥에다 펄쳐 놓고 해어진 부분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조바심 내거나 신경질 부리지 않고 끈기를 가지고 부지런히 수선을 합니다. 제일 먼저 벼리를 손질하고, 그 다음 코를 손질합니다. 끊긴 벼리는 잇고, 터진 코는 깁는데, 며칠 안 돼서 새 그물 같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버리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모두, 헌 것을 고쳐서 새롭게 만든 것인 줄은 알지만, 골똘한 생각과 매우 부지런한 노력이 필요하였다는 것까지는 모릅니다.
만일 버리라는 말을 듣고 손질하지 않았다면 이 그물은 이미 쓸모없이 버려졌을 것입니다. 아니면 설사 손질하고자 하더라도 미련한 종놈에게 맡긴다면, 벼리와 코의 순서가 뒤죽박죽 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손질하려다가 도리어 헝클어놓게 되는 것이니, 이익을 보려다가 도리어 손해를 보는 경우가 될 것이 뻔합니다. 이후로는 잘 사용하고 잘 간수해서, 해어진 곳이 생기면 바로바로 손질하고, 어리석은 종놈이 헝클어 놓는 일이 없게 한다면, 오래도록 성하게 사용할 수 있을 터이니 무슨 걱정할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그의 말을 자세히 다 들은 뒤에 한숨을 쉬고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자네의 그 말은 참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이가 알아야 할 내용이다."
하였다.
아! 벼리는 끊기고 코는 엉키어서 온갖 것이 해이되어 해어진 그물과도 같은 이 말세임에랴!
끊기고 엉킨 벼리와 코를 보고 모른체 버려두고 어찌해 볼 수가 없다고 하지 않는 이가 몇이나 되며, 어리석은 종놈에게 맡겨 그르치게 하여 이익을 보려다가 도리어 손해를 당하지 않는 이가 몇이나 되던가?
아! 어떻게 하면, 정군과 같이 골똘한 연구와 여유 있고 침착한 손질로, 조바심 내거나 신경질 부리지 않고, 선후를 잘 알아 처리하여 간단하게 정돈해 내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날마다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힘들어하지 않고 언제나 완전함을 유지하여 망가지지 않도록 하는 그런 인물을 얻을 수가 있을까? 아!.....
이건명(李健命 : 1663~1722) 子는 중강(仲剛), 號는 한포재(寒圃齋)·제월재(霽月齋). 본관은 나주(羅州). 현종(顯宗) 4년(1663)에 태어나 경종(景宗) 2년(1722)에 졸(卒)한 조선후기 문신(文臣)이다. 현종 12년(1686)에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 을과(乙科)에 급제. 이조정랑(吏曹正郞), 응교(應敎), 보덕(輔德),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고, 숙종 24년(1698)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우승지(右承旨), 대사간(大司諫), 이조참의(吏曹參議),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고, 이후 부제학(副提學), 형조(刑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등의 판서(判書)를 거쳐 숙종 44년(1718)에 우의정(右議政), 경종(景宗) 즉위년(1720)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당시 세제(世弟-英祖) 책봉(冊封)을 건의하고 이어 책봉진청사(冊封秦請使)로 청나라에 갔으나 그간 국내에서 일어난 신임사화(辛壬士禍)로 귀국하자마자 경종 2년(1722) 나로도(羅老島)에 유배되어 이내 사사(賜死)되었다. 영조 즉위년(1724)에 신원(伸冤)되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였다. 이 글의 원제는 '보망설(補網說)'이며, <한국문집총간 제177집 한포재집(寒圃齋集) 卷九 잡저(雜著)>에 있다.
鄭君元鴻與余處。能手綴網之弊者。日用於淵而常完不缺。不知其爲弊也。使余無彈鋏之愁。而朝夕資焉者。網有賴焉。鄭君日事而不告倦。余欲使僕隷替之。鮮能學者。余曰爲此有道。而抑有能有不能者歟。曰然。此非庸奴所可爲也。夫網有綱焉有目焉。綱不可無目而自立。目不可無綱而自張。形勢相維持。條理不紊亂。然後可用。玆網之創也。有綱而立。有目而張。井井鑿鑿。無訛無舛。生久而弊。物之理也。其魚蠏
29. 남파 홍우원(洪宇遠), 늙은 말 -노마설(老馬說)
숭정 9년(1636년, 공 32세 시) 4월 어느날 주인이 종놈인 운(雲)을 시켜 나뭇간 아래에서 늙은 말을 끌어내게 하여 말에게 고하기를,
"아, 갈기말아! 이제 네가 나이는 먹을 대로 먹었고, 근력도 이제는 쇠할 때로 쇠하였다. 장차 너를 데리고 치달리게 하고 쏜살같이 몰아 보려한들 네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며, 너에게 도약을 시키고 뛰어넘게 하려해도 네가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내가 안다. 내가 너를 수레에 메워서 태행산(太行山)의 험한 길을 넘으려 한다면 너는 넘어지고 자빠져서 일어나지도 못할 것이고, 내가 너에게 무거운 짐을 실어서 망창(莽蒼)의 아득히 먼 길을 건너고자 한다면 너는 고꾸라져 짐에 깔려 죽고 말 것이다. 갈기말아, 너를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 푸줏간 백정에게 넘겨주어 너의 고기와 뼈를 가르게 하자니 내가 차마 너에게 그렇게는 못하겠고, 장차 시장에 내어다가 팔려 해도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너를 사겠는가.
아, 갈기말아. 내가 이제 너에게 물린 재갈을 벗겨주고 너를 얽어맨 굴레를 풀어서 네가 하고자 하는 대로 내버려 둘 테니 너는 가고픈 대로 가겠느냐? 그래, 떠나도록 해라.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취하여 쓸 것이 없다."
하였다.
이때에 말은 마치 무슨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이 귀를 늘이고, 마치 무슨 하소연이라도 하려는 듯이 머리를 쳐들고는 한참을 주저주저 몸을 펴지 못하더니, 입으로는 말을 하지 못하는지라 가슴 속에 쌓여있는 심정을 억대(臆對)하여 이르기를,
"아, 진실로 주인의 말이 맞소이다. 그러나 주인께서도 역시 어질지 못한 분이십니다 그려. 예전에 내 나이가 한창 젊었던 시절에는 하루에 백여리는 치달렸으니 나의 걸음걸이가 굳세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며, 한번 짊어지면 곡식 몇섬은 실을 수 있었으니 나의 힘이 강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소.
주인께서 가난했던 형편에 대해서는 오직 내가 잘 알고 있으니, 온 집안은 쑥대가 무성하여 처량하기 그지없고 텅 빈 살림살이는 쓸쓸하기까지 하였소. 쌀단지는 바닥이 나서 됫박쌀의 저축도 없고 고리짝에는 한자짜리 비단조각 조차 없질 않았소. 파리하게 수척한 마누라는 굶주림에 허덕이다 바가지나 긁고, 딸린 여러 자식들은 너나 없이 밥달라 징징거리며, 아침 저녁에도 죽으로 요기나 때우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이집 저집 다니면서 동냥쌀 빌어다가 끼니를 잇지 않았소.
그 당시에 내가 실로 있는 힘을 다해 동분 서주하기를 오직 주인의 명령대로 하였고, 남으로 가라면 남으로 가고 북으로 가자면 북으로 가기를 오직 주인께서 시키는 대로 하였소. 멀리는 기천 리 가깝게는 수십, 백 리를 지고 나르며 달리고 치닫느라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으니 나의 노고가 실로 컸다고 할 것이오. 주인집의 여러 식구들이 목숨을 온전히 부지해 온 것은 모두 나의 덕이며, 길가에 쓰러져 굶어죽거나 곤궁하게 떠돌다가 도랑이나 골짜기에 처박혀 죽지 않은 것도 모두 나의 덕이 아니겠소.
옛날 한나라의 고조(高祖)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하는데, 지금 주인께서야말로 말을 가지고 집안을 꾸려오셨으니 나의 공이 가히 높다고 해야 할 것이오. 대개 나라의 임금이 신하를 부릴 때 노고가 많은 자에게 반드시 많은 녹봉을 주는 법이니, 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권장시키는 방법이기도 하거니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스스로 모든 것을 바치게 되는 까닭인 것이오.
그러나 지금 주인께서는 그렇지 않소. 나의 노고가 이와 같이 큰데도 나에게 먹여주는 것은 전혀 변변치 못하였고 나의 공이 이와 같이 높은데도 나를 길러주는 것은 푸대접뿐이었오. 짚 썰은 한 방구리의 여물과 한 사발의 물로 나의 배를 채우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것은 결코 헛말이 아니잖소. 게다가 재갈과 굴레를 씌워서 속박하고 채찍으로 치고 때리는가 하면, 굶주리고 기갈들게 하고 치달리고 달음박질시키느라 나를 쉬지 못하게 한 것이 이제까지 여러 해가 되었소. 비록 내가 나이가 들지 않고 아직 어리다고 한들 나의 기력이 어찌하여 고달프지 않을 수 있겠으며, 나의 힘이 어떻게 쇠하지 않을 수 있겠소.
대저 기기(騏驥)나 화류와 같은 천리마들은 좋은 말이 많은 기주 북방에서 알아주는 양마이며, 천하에서도 으뜸가는 준마라 할 것이오. 그러나 그들도 올바르지 않은 도리로써 채찍질해대고 그 재량을 다 할 수 있도록 먹여주지 않는다면 오히려 보통의 말만도 못하게 될 것인데, 하물며 전혀 기기나 화류에 미치지 못하는 나와 같이 노둔한 재주를 가진 말이야 말해 무엇하겠소. 그러므로 나의 기력이 지치고 나의 힘이 쇠하여 쓸모가 없게 된 것이 주인의 잘못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소.
대저 젊었을 때 그의 기력을 다 부려먹고 나서 늙었다고 하여 내버리는 짓은 실로 어진 사람이나 군자라면 하지 않는 법인데, 주인께서는 차마 그렇게 하시려드니, 아, 역시 너무도 어질지 못하십니다.
아, 내 아무리 늙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식성은 왕성하며, 주인께서 특별히 성의를 가지고 나를 기르고 마음을 써서 길러준다면 옥산(玉山)의 좋은 풀은 고사하고 동쪽 뜰에 풍성한 풀이면 족히 나의 허기를 면할 수 있고, 예천(醴泉)의 좋은 물은 말할 것도 없고 남쪽 계곡의 맑은 냇물로도 족히 나의 갈증을 면할 수 있을 것이오. 쌓인 피로를 쉬게 하여 지쳐 느른한 기력을 회복하고 쇠하여 비척대는 몸을 쉬게 하여 고달픈 힘을 소생시켜서, 힘을 헤아려 짐을 싣고 재주를 헤아려 부려준다면. 비록 늙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그래도 떨쳐 일어나서 크게 울어젖힐 수 있으니, 주인을 위하여 채찍질로 부림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소이다. 이로써 남은 생애를 마치게 된다면 이것은 나의 커다란 바램이오.
그러나 끝내 버려지고 말 팔자라고 하더라도, 아직 나의 발굽은 족히 서리와 눈보라를 헤쳐 나갈 수 있고 갈기 털은 추운 바람도 막아 줄만 하니, 풀 뜯고 물 마시며 애오라지 스스로 자신을 기르고 다스리면서, 나에게 주어진 천성을 온전히 하고 나의 본래의 성질로 되돌아 갈 것이니 나를 풀어준다 해도 걱정할 것은 아무 것도 없소. 감히 아뢰오."
하는 것이었다. 주인이 이때에 멍하니 맥을 놓고 있다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다. 말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옛날 제나라 환공(桓公)이 길을 가다가 길을 잃게 되었을 때 관자(管子)라는 이가 늙은 말을 풀어 놓아 그 말을 따라 가도록 청하였다. 오직 관자야말로 늙은 말도 버리지 않고 거두어 쓸 줄 아는 이였기에, 이로 해서 능히 그의 임금을 보필하여 천하에서 패왕노릇을 하도록 하였다. 이로 본다면 어찌 늙은 말이라고 하여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말을 잘 먹여주도록 하라. 그리고 네놈의 손에서 말이 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하였다.
홍우원(洪宇遠 : 1605년(선조38)∼1687년(숙종13))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군징(君徵), 호는 남파(南坡)이다. 홍가신(洪可臣)의 손자로서, 학문이 고명(高明)하고 품성이 직절(直節)하였다는 평이 있다. 1654년 소현세자빈 옥사때에 직언으로 장살된 김홍욱(金弘郁)의 신원과 1663년 조대비 복상문제로 유배된 윤선도의 석방을 주장하는 등 직언으로 인해 수차 파직되었고, 문천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이글은 저자의 유집인 남파집(南坡集 - 한국문집총간 제106집) 권10에 실려 있으며 원제는 '노마설(老馬說)이다.
崇禎九年四月日。主人使奴雲牽出伏櫪之下老馬而告之曰。嗟乎鬣乎。汝之齒今長矣。汝之力其衰矣。將以汝馳乎騁乎。則吾知汝不能也。將以汝躍乎踔乎。則吾知汝不能也。吾欲駕汝以車。越乎太行之險。而汝則僨焉。吾欲載汝以重。涉乎莽蒼之遠。而汝則斃焉。鬣乎將以汝奚用也。將畀之庖丁而解之乎。則
30. 이규경(李圭景)의 잊혀진 우리의 나래(飛車辨證說)
수레가 뭍으로 다니고 배가 물에서 떠다니는 것이 배와 수레의 상도(常道)인데, 이제 바퀴를 깎아 날게 하고 나무를 파서 굴러 다니게 하는 것은 배와 수레의 이도(異道)로서, 이런 이치는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곧 이치의 당연한 것이요, 필시 이러한 이치가 있다고 한다면 곧 이치가 상도를 거스르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믿지 않는다고 치면, 수레가 나는 것과 배가 굴러 다닌다는 사실은 버젓이 존재하기에 이러한 사실들이 서책에 기록되어 있어 증거할 수 있다 할 것이고, 믿는다고 치면 세상에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간책(簡冊)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서 공허한 말로만 남아 있을 따름이라고 하리라.
내가 이에 대하여 의혹을 품고 있었는데, 그 의혹이 점차 심해짐으로 인하여 그것에 대한 과거 사실들을 논하면서 나의 의혹을 풀고자 한다.
[제왕세기(帝王世記)]를 살펴 보건대,
"기굉(奇肱)의 백성은 옥문(玉門 : 중국 감숙성 서부의 지명으로 돈황敦煌의 유적이 있음)에서 4만 리나 떨어져 사는데, 비거(飛車)를 만들 수 있어서 바람을 이용하여 멀리까지 다닐 수 있었다. 탕왕(湯王) 때에 서풍이 불어 오자 그 비거를 움직여서 예주(豫州)에 이르렀는데 탕임금이 그 비거를 부수어 버리고 그 곳 백성들이 보지 못하게 하였다. 그 후 10년 만에 동풍이 이르자 다시 비거를 만들 수 있게 허락하여 되돌려 보냈다."
고 하는데, 이는 혼란했던 시절의 허황된 설이기 때문에 고거할 도리가 없다.
악라사(顎羅斯 : 러시아의 옛 명칭으로 아라사(俄羅斯)의 다른 표기)는 중하(中夏 : 중국)에서 수만 리나 떨어져 있고 구라파(歐羅巴)와 중국 사이에 위치해 있는 나라인데, 지금 이곳 사람들은 네 바퀴 달린 비거를 제작하여 하루에 천리를 간다고 하고, 또한 서오인(西嗚人)도 비거를 보유하고 있어 풀무질하여 바람을 일으키는<프로펠라로 사료됨> 기술을 전용하여 바람을 일으켜 기운을 발생시켜 공중으로 떠서 다니기 때문에 뭍과 물에 장애되는 곳이 없고 난리를 당하여도 적을 방어하기 이롭다고들 하나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여 그 사실 여부를 제대로 알 수는 없으나 굳이 그 이치를 구하자면 역시 기법(氣法)에서 연유했을 것이다.
근세에 신승선(申丞宣 : 승선은 승지의 별칭 - 이름은 경준景濬으로 호남 순창군 사람이니, 곧 신말주申末舟의 후손이라고들 한다.)이 일찍이 책문(策問)에 답하는 대책 중 거제(車制)를 논하면서 말하기를,"*임진년 왜추(倭酋)가 창궐했을 당시 영남의 고립된 성이 바야흐로 겹겹이 포위를 당하여 망하는 것이 조석지간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때 어떤이가 성주(城主)와 절친하였는데 평소 매우 색다른 기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비거를 제작하여 성중으로 날아 들어가 그의 벗을 태워 30리쯤을 난 뒤에야 지상에 착륙하여 왜적의 칼날에서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만일 그러하다면 옛날부터 그 제도가 있었고 우리 나라 사람들도 만들 수 있었으되 다만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을 따름일 것이다.
기굉의 비거와 영남인의 제도는 곧 악라사와 서오의 방법과 같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연도(燕都 : 북경)에 들어가서 어쩌다 악라사인과 접촉하게 될 때 그 비거제도는 고거해 보지도 않고 단지 망원경과 같은 하찮은 것만을 구하는 것은 왜 그러할까? 그 까닭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경제(經濟)에 소양이 없기 때문이리라.
구양형(歐陽衡)이 말하기를,
"만력(萬曆) 연간에 부제국(浮提國) 사람들이 강우(江右)에 와서 수일을 머물다가 날아가 버렸다."
고 하였는데, [종신록(從信錄)]에 기록되어 있으며, 서거원(徐巨源)도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황명(皇明) 말기의 기이(記異)에 전하기를,
"만력 말기 어사(御史) 섭영성(葉永盛)이 강우지방을 순무할 때, 그 곳의 유사(有司)가 보고하기를 '한 떼의 광객들이 스스로 황백사(黃白事 : 연금술)에 능하다고 하는데, 술을 많이 마시고 오락을 즐겼습니다. 또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물건도 매우 사치스럽습니다. 주옥을 많이 사면서 기증(綺繒 : 비단의 일종)으로 값을 치뤘는데, 값어치보다 많았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자 갑자기 보이지 않기에 여관을 물어서 찾아가 보았으나 옷가지마저 간 데 없다가 아침 일찍 돌아왔습니다. 매우 기이한 일이니 대수색을 하소서.'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다만 자기 앞으로 오도록 하였다. 그들의 손에 돌맹이 하나를 쥐고 있었는데 칠척(七尺 : 엄지손가락 일곱마디)쯤 되는 수정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책상에 놓으니 상하 전후에 있는 물건이 그 가운데 투영되어 작은 먼지까지도 자세하게 보였다. 또 한 개의 금루소함(金縷小函)이 있었다. 검은 종이에 녹색 글씨로 쓰여져 있었는데 반야어(般若語) 같았다. 그것을 다 보자마자 글자가 날아가 버렸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두가지 물건을 섭 어사에게 헌납하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섭 어사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다른 나라 사람이 분명하니 바친 것들을 내가 받을 수 없다. 그러니 속히 경계를 넘어가 우리 백성들을 현혹시키지 말라.'고 하자 머리를 조아리며 돌아가 버렸다."
고 하였다.
대개 해외에 부제국이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모두 비선(飛仙)으로서 천하를 유람하기를 좋아하였는데 도착한 지방의 사투리를 잘 쓰고 그 지방 옷을 입고 그 지방 음식을 먹는다. 음주를 좋아하여 절제함이 없고 간혹 양태별관(陽태別館 : 창녀촌)에 들르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자기 나라에 돌아가고자 하면 한순간에 홀연히 바람을 일으켜 만리나 갈 수 있었다.
바야흐로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여간인(중국에서 로마인을 지칭하는 말)의 환법(幻法 : 마술)과 비교해 보건대, 위에서 말한 것들은 그른 것이라 생각된다. 환법이란 한순간에 다른 사람을 속이는 기술인데, 어찌 마술로써 큰 바다를 건널 수 있단 말인가!
원서등(遠西鄧)의 [옥함(玉函)]에는 기기도(奇器圖)에 사람을 태우고 날아가는 그림이 있었는데 원본은 없어져 버렸으니, 그 이유는 혹시 그 기술을 비장하려고 발설하지 않고자 하는 의도에서인가?
악라사와 서오는 이미 서양에 있으니 어찌 기굉의 유종이 아님을 알 수 있겠으며, 옥함의 그림도 어찌 기굉의 유제가 아님을 알 수 있겠는가.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이르기를,
"노반(魯班)이란 자는 돈황 사람으로 연대는 상세치 않다. 그의 기술의 교묘함이 귀신 같았는데 양주(凉州)에 있으면서 부도(浮圖)를 만들고 나무연을 제작하여 가로나무를 계속 두드리고 세 번 내리면서 그것을 타고 내려왔다."
고 하였고, [홍서(鴻書)]에는,
"당나라 목종 때에 한지화(韓知和)는 본시 왜인으로 나무 다루기를 잘 하여 온갖 새들의 형상을 제작하였는데, 마시고 쪼는 동작이 진짜 새와 다름없었다. 관려(關려)를 복중(腹中)에 설치하여 띄우자 구름을 넘어 힘차게 날아 백척이나 높이 날고 이백보 밖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지상에 착륙한다."
하였는데, 만일 이 제도를 수레에 적용한다면 수레가 날 수 있을 것이다. - [두양편(杜陽編)]에 "당나라 목종조에 비룡사(飛龍士) 한지화는 본래 왜국 사람으로서 능히 호랑이를 다루어 춤추게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오대무(五隊舞)와 양주곡(梁州曲)을 지은 자이다."라고 하였다.-
어떤이가 북원(北原 : 원주)과 노산(魯山 : 노성)에 비장된 비거에 관한 서적을 전한다고들 하는데 허황된 설일지도 모른다. - 어떤이가 말하기를 "일찍이 원주 사람이 소장하고 있던 책을 보았는데, 곧 이거제로서 풀 종류로 만든 것에 네 사람을 태웠는데, 고니와 따오기 형태를 만들어 복중을 쳐서 바람을 일으키면 공중으로 떠올라 백장(百丈)이나 날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양각풍(羊角風 : 회오리바람)이 불면 날아 가지 못하여 추락하고 광풍을 만나도 날아 갈 수 없다. 그 제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으며 전주부 사람인 김시양(金時讓 : 조선 仁祖 때의 문신)이 말하기를 "호서 지방 노성(魯城)에 윤달주(尹達主)라는 사람이 있는데 명재(明齋)의 후예로서 교묘한 기기를 잘 만든다. 이 사람 또한 비거제를 가지고 있어 기재하여 간직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신비스러운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만일 이러한 제도가 있다면 바람을 타고 올라 가고 먼지를 일으키며 천지사방을 돌아 다니는 것을 집안 뜨락에서 다니는 듯이 하며 마음먹은 대로 가도 도처에 방해가 되는 것이 없으니 어찌 상쾌하지 않겠는가.
진정으로 그 제도를 모방하려고 한다면 우선 수레를 나는 연과 같이 만들고 날개와 깃털을 부착하고 그 안에 기계를 설치하여 사람이 그 가운데 타서 기계를 작동하기를 잠수부가 수영하듯이 굼벵이가 몸을 굽혔다 폈다하듯이 움직여서 풍기를 발생하게 한다면 양날개로 스스로 훨훨 날아 올라 눈깜짝할 사이에 천리를 날 수 있으리니, 열구(列寇)가 순오(旬五 : 15일)만에 돌아 오고 대붕(大鵬)이 삼천리를 나는 기세가 어찌 이보다 나으리오.
그 기계는 오로지 연결쇠가 좌우로 움직이며 연결되어 신축하고 서로 운행하며 공기 중에서 바람을 일으키면서 양 날개가 펄럭거려 확연히 떠서 경풍(勁風)·대기(大氣)의 위에서도 그 기세를 막지 못할지니, 이는 곧 기(氣)로써 기계를 움직이고 새로써 방법을 삼았기 때문에 생각으로는 가능하다고 하겠다. 이치가 그 가운데 있기는 하나, 스스로 억측으로 돌리고 방치하고 논하지 않는 것이 옳겠다. - [해국도지(海國圖志)]에 비거도(飛車圖)가 있으니 후에 고거하기 바란다. -
이규경(李圭景 : 1788(정조12)∼ ?)조선후기 실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규(伯揆),호는 오주(五洲)·소운거사(嘯雲居士).덕무(德懋)의 손자이며, 광규(光葵)의 아들로서 그의 학문은 선대에 연원을 두고 있는데, 특히 청조(淸朝) 실학(實學)의 학풍에 영향을 받고 있다. 일찍이 정조에 의해 규장각의 검서관(檢書官)으로 등용되어, 당시 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와 함께 사검서(四檢書)로 불리었다. 이 글은 저자의 육필 저서인 [오주연문장전산고] 권2에 수록되어 있는 [비거변증설]이다.
車行於地。舟行於水。卽舟車之常也。今也斲輪而使之飛。刳木而使之轉。卽舟車之異也。必無是理。卽理之當然者也。必有其理。卽理之反常者也。欲不信。則車之飛者、舟之轉者固편001在。而記之於書者可徵也。欲信之。則世不常有。而但見於簡策者。載垂空言而已。吾於是乎惑矣。因其惑而論其遺蹟。以破滋惑焉。按《帝王世紀》편002。奇肱氏去玉門四萬里。能爲飛車。從風遠行。湯時西風吹至豫州。破其車不以示民。十年東風至。復作車賜之。此鴻荒之世悠謬之說。不可考。今鄂羅斯距中夏數萬里。介處歐邏巴中國之間。而製飛車。輪凡四。而日行千里云。且西隖人有飛車。全用橐籥、轆轤之術。鼓風生氣。浮行空中。水陸無礙。利於臨亂禦敵云。不能目擊。則其有無。不可知者。苟求其理。則亦出氣法。近世申丞宣【景濬。湖南淳昌郡人。卽申末舟後裔云。】嘗對策車制曰。壬辰倭酋猖獗也。嶺南孤城。方被重圍。亡在昕夕。有人與城主甚善。而素抱異術。迺作飛車。飛入城中。使其友乘而飛。出行三十里。而卸於地上。以避其鋒。若然。則自昔有其制。而東人亦能之。特未之傳於世也。奇肱之車、嶺人之制。乃是鄂羅、西隖之法也。我人每入燕都。或接鄂羅人。而未嘗叩其制度。但求其玻瓈鏡窯。何哉。短於經濟故也。歐陽衡曰편003。萬曆中浮提國人來江右。數日飛去。《從信錄》記之。徐巨源詳焉。《皇明末記異》。萬曆末葉御史永盛按江右。有司呈。一群狂客。自言能爲黃白事。極歡편004娛樂。市物甚侈。多取珠玉綺繒。償之過于直。及暮忽不見。詰至逆旅。衣裳則無有比。早復來。甚怪之。請大搜索。不許。第召至前。能爲江右土語。自言爲海外浮提國人。且不諱黃白事難爲也。手持一石似水晶可七尺許。置于案上下前後。物物映其中極寧毛芥。又持一金縷小函。中有經卷。烏楮綠字如般若語。覽畢則字飛。其人願持二者爲獻。葉曰。汝等必異人。所獻吾不受。然可速出境。毋惑吾民。於是叩頭而去。蓋海外有浮提國。其人皆飛仙。好游行天下。至其地。能言土人之言。服其服食其食。喜飮酒無數。亦或寄情於陽坮別館。欲還其國。一呼吸可萬里。忽然飄擧。方愚者以智。比諸犛靬人【西國名】之幻法。愚以爲非也。幻者。頃刻瞞人之術爾。豈有自瞞而幻越大洋也哉。遠西鄧玉函《奇器圖》載人飛圖。而原本佚焉。其或祕其術。引而不發之意歟。鄂羅、西隖。旣在西土。則安知非奇肱之遺種。玉函之圖。又安知匪奇肱之遺制者乎。《太平廣記》。魯班편005。燉煌人。莫詳代年。巧侔造化於凉州。造浮圖作木鳶。每擊楔三下。乘之以歸。鴻書。唐穆宗時韓志和편006。本倭人。善雕木。作鸞鶴鴉鵲之狀。飮啄動靜。與眞無異。以關捩置腹中。發之。則凌雲奮飛。可高百尺。至二百步外。方始却下云。若移其制於車。則車可翔矣。【《杜陽雜編편007》。唐穆宗朝飛龍士韓志和。本倭國人。於御前편008能舞蠅虎子。作五隊舞梁州曲者也。】有人傳北原與魯山藏飛車之書者云。無乃齊東之說也歟。【有人以爲。嘗見原州人所藏一書。則飛車制。以草乘四人而作鵠形。鼓腹生風。則浮上空中。能行百丈。然過半角風。則不得前進而墜。遇狂風則不可行。制詳尺度云。全州府人金時讓言。湖西魯城有尹達圭者。明齋之支裔。善造巧器。又有飛車制度記載以置。然祕不示人云。未知其詳也。】如有此制。則摶扶搖而上。鼓埃壒而游。周流六合若庭衢焉。惟意所適。到處無礙。則豈不快且爽哉。苟欲倣象其制。先作一車如飛鳶而摶편009羽翼焉。設機其內。人乘其中。轉機若泅人之游泳。似尺蠖之屈伸。俾生風氣。則雙翮自能翶翔。奄作一瞬千里之勢。列寇旬五之返。大鵬三千之擊。何以過此。其機專在於絙索。縱橫聯絡。伸縮互纏。絙行機中。鼓橐生風。則兩翅扇動。劃然浮泛於勁風大氣之上。其勢有不可遏。此是以氣爲機。以烏爲師。則思過半矣。理在其中。然自歸臆說。存而勿論可矣夫。《海國圖志》有飛車圖。以俟後考。
31. 청성 성대중(成大中)의 왜적을 물리친 바늘춤
임진왜란 당시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가 충청도 소사평(素沙坪)에 진을 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왜놈 하나가 칼춤을 추며 기세 등등하게 도전해 오자 긴 창을 든 중국 병사가 용기를 내어 나가 맞섰다.
그러나 그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칼에 찔려 쓰러지고 말았다. 이를 지켜본 그의 네 아들들이 격분하여 달려나갔으나 그들 역시 놈의 적수가 못 되었다. 칼을 든 왜놈은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 더 바싹 다가들었다. 마귀는 황급히 군중에 상금을 내걸고 놈과 대적할 자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온 군대가 겁에 질린 나머지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이때 베옷을 입은 조선 병사가 소매를 걷어 부치고 나와 맨손으로 놈을 잡겠다고 하였다. 그 말에 군사들은 모두 그가 미쳤다고 비웃었지만 마귀는 달리 대처할 방도가 없어 우선 그에게 놈과 맞서 싸우도록 하였다.
조선 병사는 아니나 다를까 단숨에 달려나가 놈의 칼날에 맞서 맨손으로 춤을 추었다. 이를 본 왜놈은 하도 어이가 없어 휘두르던 칼을 멈추고 깔깔 웃어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칼을 든 왜놈이 갑자기 거꾸러지는 것이 아닌가. 조선 병사는 유유히 그 칼을 주워들어 놈의 목을 잘라 바쳤다. 이리하여 왜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나머지 아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마귀는 조선 병사에게 최고의 공을 돌리고"그대는 검술을 아는가?"
하고 물었다. 그가
"아닙니다."
하고 대답하자, 마귀가 또
"그렇다면 어떻게 놈의 머리를 벨 수 있었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저는 어렸을 때 앉은뱅이가 되어 방안에서 홀로 지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 붙일 곳이 없어 재미 삼아 바늘 한 쌍을 창문에 던지는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동이 트면 연습을 시작하고 어두워지면 그만두곤 하며 오로지 이 일에만 골몰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바늘이 바람에 나부끼듯 어지럽게 떨어지더니 한참 지난 뒤에는 곧게 날아가서 반경 한두 길 안에 물체라면 반드시 명중하였습니다. 3년이 지나자 멀리 있는 물체가 가깝게 보이고 작은 물체가 크게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바늘을 던졌다 하면 손가락이 마음과 통하여 백발백중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처럼 완벽한 재주를 쓸 곳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난 지금 천행으로 다리가 펴져서 비로소 그 재주를 적에게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미친 듯이 맨손으로 나가 춤을 추자 놈은 비웃으며 저를 베지 않았으니. 바늘이 자신의 눈알을 노리고 있을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마귀가 이 말을 듣고 왜놈의 머리를 살펴보니 아닌게 아니라 두 눈알에 각기 바늘이 한치 가량 박혀 있었다.
성대중(成大中 : 1732-1812) 자는 사집(士執), 호는 청성(靑城), 본관은 창녕(昌寧), 찰방 료기(孝基)의 아들이며 김준(金焌)의 문인이다. 1756년(영조 32)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서기관(書記官)으로 통신사(通信使) 조엄(趙曮)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1784년(정조 8) 흥해군수(興海郡守)로 재직 중 구휼을 잘하여 조정으로부터 표창을 받고 뒤에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그는 서얼가문 출신의 문인으로 박지원, 박재가 등과 교유하기도 했지만 이들 실학파의 학문을 배격하고 성리학을 토대로 한 순정문학(醇正文學)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이 글은 성대중의 잡록집《청파잡기(靑坡雜記)》에 실려 있는 글이다. 《청파잡기》는 췌언, 질언(質言), 성언(醒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췌언은 10편의 중국고사를 작자 나름의 독특한 시각으로 재해석한 것인데, 작자의 폭넓은 역사 지식과 치밀한 분석력이 돋보이는 명쾌하고 신선한 글이다. 질언은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120여 항의 격언인데, 담백하면서도 빈틈이 없는 글이다. 그리고 성언은 100여 편의 교훈적인 국내의 야담을 기록한 것이다. 위의 글은 바로 성언중의 하나인데 제목은 옮긴이가 나름대로 붙인 것이다.
壬辰倭亂當時來的救兵,明朝(麻貴)之所以長壽和魔鬼在(素沙坪)소사평時發生的事情。一個日本鬼子揮舞,氣勢宏偉,來挑戰的中國士兵奮勇去。
但是,他多少錢,用刀刺傷,倒了。 看着這些他的兒子們憤怒了,你出去,但他們也是對手的傢伙。 持刀的鬼子仗腰眼子,似乎更靠近了。 魔鬼在向羣衆慌忙懸賞的要和者。 但是來的軍隊被嚇傻了,其他人沒有一個。
此時,
穿着麻衣朝鮮士兵在帣了袖子,徒手抓住"東西.那句話,都是他的軍事對應不同,但魔鬼笑沒有辦法,先給他傢伙,讓
朝鮮士兵在不出所料,一口氣跑出去的,他徒手跳了舞。 看到這些的鬼子實在不可思議,揮舞的刀,並停止。吃吃地笑 可這是怎麼回事? 持刀的日本鬼子突然的地。 朝鮮士兵是那把刀,搶他的脖子주워들,。 這樣的士氣,倭寇的其餘我軍勝利了。
是朝鮮
士兵向魔鬼的球,"你知道嗎?刀"
問
, 他
"不是。"
後
, ,又魔鬼
"那麼,如何把頭小子的了嗎?貝爾數"
問
,
。
對此,他這樣回答,
"我是
小時,屋裏炕上,獨自一人。因此,心貼時沒地方玩針一對在窗子上的練習。如果每天天亮就開始練習,經常會,黑就不幹了這件事只只關注。
剛開始迎風飄蕩針一樣亂後,下降了半天,直飛,半徑內物體,一路打了一定 3年後,遠處的物體,小近大的物體。 於是提出了針,通過手指和心靈未有百發百中。 遺憾的是如此完美的技用不着。 但戰爭發生的現在幸好我的腿才恍然大悟,那才使用的敵人可以的。 瘋狂地舞蹈,徒手在嘲笑着我,篘,並沒有呢。"砍 針是自己的眼睛的,怎麼知道? "我
不會
說這個魔鬼 ,日寇的頭一看,果然,在各兩滴針左右,一刻。
32. 고생은 적고 이익은 많고 <타농설(惰農說)>, <흑우설(黑牛說)>
1. 한 삼태기의 흙
지난 경인년(1470)에 큰 가뭄이 들었다. 정월에서부터 비가 오지 않더니, 가을 7월까지 가뭄이 계속되었다. 이 때문에 땅이 메말라서 봄에는 쟁기질도 못했고 여름이 되어서도 김맬 것이 없었다. 온 들판의 풀들은 누렇게 말랐고 논밭의 곡식들도 하나같이 모두 시들었다.
이때 부지런한 농부는,
"곡식들이 김을 매주어도 죽을 것이고 김을 매주지 않아도 역시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냥 팔짱끼고 앉아서 죽어 가는 것을 쳐다만 보고 있기보다는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살리려고 애를 써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다가 만에 하나라도 비가 오면 전혀 보람 없는 일이 되지는 않으리라,"
하고,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서 김매기를 멈추지 않고 다 마르고 시들어 빠진 곡식 싹들을 쉬지 않고 돌보았다. 일년 내내 잠시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여, 곡식이 완전히 말라죽기 전까지는 농사일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한편 게으른 농부는,
"곡식들이 김을 매주어도 죽을 것이고 김을 매주지 않아도 역시 죽을 것이다. 그러니 부질없이 분주히 뛰어다니며 고생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내버려두고 편히 지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만약 비가 전혀 오지 않으면 모두가 헛고생이 될 테니까."
하였다.
그래서 일하는 농부나 들밥을 내가는 아낙들을 끊임없이 비웃어대며, 그 해가 다 가도록 농사일을 팽개치고 들어앉아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가을걷이를 할 무렵에 내가 파주(坡州) 들녁에 나가 논밭을 보니, 한쪽은 잡초만 무성하고 드문드문 있는 곡식들도 모두가 쭉정이뿐이었고, 다른 한쪽은 농사가 제대로 되어 잘 익은 이삭들이 논밭 가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게 된 이유를 마을 노인에게 물었더니, 농사를 망친 곳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며 농사일을 하지 않은 농부의 것이었고, 곡식이 잘 영근 곳은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농사일에 애쓴 농부의 것이었다.
한 때의 편안함을 찾다가 일년 내내 굶주리게 되었고, 한 때의 고통을 참아내어 한해를 배불리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아! 열심히 일을 하면 뜻한 바를 이루고, 편안하게 놀기만 하면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농사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시서(詩書)를 공부하여 벼슬길에 나아가려 하는 사람들도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 선비들이 젊었을 적에는 학문에 뜻을 두고 밤이나 낮이나 열심히 책을 읽고 쉬지 않고 글을 짓는다. 그렇게 닦은 재주를 가지고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솜씨를 겨루는데, 시험에 한 번 떨어지면 실망을 하고 두 번 떨어지면 번민하고 세 번 떨어지면 망연자실해 하면서 이렇게 말을 한다.
"공명(功名)을 이루는 것은 분수가 있는 것이어서 학문을 한다고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며, 부귀를 누리는 것도 천명이 있는 것이어서 학문을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하던 학문을 팽개쳐 버리고 지금까지 해놓았던 공부도 모두 포기한다. 어떤 사람은 절반쯤 학문이 이루어졌는데도 내던져버리고 어떤 사람은 성공의 문턱까지 갔다가 주저앉아 버린다. 마치 아홉 길 높은 산을 쌓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산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게으름을 피우며 농사일을 제쳐놓은 농부와 같은 무리가 아니겠는가.
학문을 하는 고생은 일년 내내 농사를 짓는 고생에 비하면 고생도 아니다. 그러나 학문을 해서 얻는 이익을 어찌 농사를 지어 얻은 이익에 비교 할 수 있으랴. 농사를 짓는 일은 겨우 배나 채울 수 있을 뿐이니 그 이익이 아주 하찮은 것이지만, 학문을 하면 명성을 얻게 되니 그 이익이 엄청난 것이다. 이익이 적고 고생스럽기만 한 농사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제대로 안 되는데, 더구나 조금만 고생하면 큰 이익을 얻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말해 무엇하겠는가.
편안히 공부만 하는 사람들은 땀흘려 일을 하는 농부들의 고생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지어 그들을 깨우치고자 한다.
2. 뇌물 먹은 소
종묘 사직의 제사에 검은 소를 희생으로 바치는 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제도이다. 그런데 희생에 알맞은 소가 드물고, 완전하게 털이 검은 소를 구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조정에서는 전생서(典牲書)를 설치하여 그 일을 주관하게 하고, 만일 희생에 알맞은 소를 한 마리 바치는 자가 있으면 말 세 마리로 소값을 쳐주었다. 이 때문에 그 이득을 노리고 비싼 값으로 검은 소를 사서는 권세 있는 집에 가 청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희생에 쓸 소를 계약하는 날이 되면 자신의 소를 바치려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관청의 문 앞은 시장처럼 북적거렸다. 그렇지만 필요한 소는 한 마리뿐이므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한 사람만이 소를 바칠 수 있었다.
용산(龍山) 땅의 어느 달관(達官)이 말이 없어 늘 근심하다가 베 20필로 소를 한 마리 샀다. 온몸이 칠흑처럼 검고 키가 한 길이나 되는 놈이었다. 소를 잘 기르는 사람에게 맡겨서 기르게 하면서, 사육하는 데에 드는 비용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해 겨울을 부지런히 먹이고 나니, 살이 올라 상등품 희생 소가 되었다.
그 소를 전생서 관원에게 보였더니, 아주 휼륭하다고 하였다. 달관은 기뻐하며, 이제 뜻한 바를 이루게 되었다고 여겼다.
어느 날 전생서 제조(提調)가 관사에 앉아서 소를 고르는데, 한 소년이 편지를 올리며 제조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알리고는 또 술을 갖고 와서 소를 맡은 담당자와 소 우리 안에서 함께 술을 마셨다.
이윽고 전생서 관원이 들어와서 먼저 달관의 소를 들여오게 하였다. 제조가 소를 맡은 담당자를 돌아보며 어떠냐고 물으니, 담당자가,
"소의 몸집이 우람하기는 해도 병이 들었으니 희생에 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제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소를 몰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소는 작고 비쩍 말랐는데, 담당자는,
"소가 비록 몸집이 작기는 해도 달포쯤 잘 먹이면 희생으로 쓸 만합니다."
하였다. 제조가 웃으며 그 소를 받기로 하고, 장부에다 적었다. 관원이 항의를 하였으나 소용없었다.
몹시 실망한 달관이 소를 도로 팔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소가 병이 들어서 퇴짜를 맞았으니 희생에도 쓰지 못하며, 농사에도 적합하지 않으니, 사서 무엇에 쓰겠는가."
라고 하였다. 여러날 지나도록 팔지를 못하다가 결국 반값에 남에게 넘기고 말았다.
종묘와 사직의 제사에 쓰이는 희생은 신하된 자라면 반드시 유의를 해야 한다. 그리고 제조는 조정에서 함께 벼슬하는 처지로서 간사한 사람의 청탁은 따르고 달관의 말은 듣지 않아,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소를 받아들이고 물리쳐서는 안 되는 소를 물리쳤다. 그러한 짓은 나쁜 풍습을 조장할 뿐만 아니라 하늘을 업신여기며 경건한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대체로 군자와 소인이 송사를 하면 사리에 맞는 군자는 대부분 지고 사리에 맞지 않는 소인이 오히려 이긴다. 이것은 모두가 뇌물 탓이다. 옛말에도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가까이 있는 실무자에게 아첨하는 편이 낫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빈말이 아니다.
성현 (成俔 : 1439∼1504) 본관은 창녕(昌寧),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용齋)ㆍ허백당(虛白堂), 시호는 문대(文戴)이다. 세조 8년(1462)에 식년문과, 4년 후에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였다. 시문에 능하여 가형인 임(任)을 수행하여 연경을 다녀와서 관광록(觀光錄)을 지었고, 음악에 조예가 깊어 예조판서로서 「악학궤범」을 편찬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저서에 「용재총화」,「허백당집」,「부휴자담론」등이 있다. 윗글은 그의 문집 「허백당집」권(卷)12 설조(說條)에 실린 글로서 앞글의 원제는<타농설(惰農說)>, 뒷글의 원제는 <흑우설(黑牛說)>이다.
歲庚寅。大旱。自正月不雨。至于秋七月。春不得犂。夏不得鋤。草之在野者無不黃。禾之在畝者無不萎。其有勤者則曰。耘之亦死也。不耘亦死也。與其安坐而待焉。孰若殫力而求焉。萬一得雨。豈盡無益。故田已柝而耨不止。苖已槁而芟不休。終歲勤動。要死而後
廟社用黑牲。古也。其中牲者鮮矣。而純毛黑色者尤爲鮮。朝廷設典牲署主之。苟有納一牛者。價給三馬。由是人愛其理。高價而買之。爭趨權勢而請之。契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