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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1부 · 코드의 발견 · 0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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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2부 · ‘메디치 코드’ · 0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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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3부 · ‘천재들의 코드’ · 0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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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성 : SBS 다큐멘터리 2012년 3월 25일(일) / 4월1일(일) / 4월8일(일)
연출 : 서유정
SBS스페셜이 6개월에 걸쳐 촬영한 역작 명품 다큐멘터리이다.
‘인간’의 가치를 발현하고 발전시킨 르네상스의 천재들.
단테에서부터 브루넬레스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이어 미켈란젤로까지.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들은 르네상스의 천재들로,
이탈리아 피렌체에 근거를 두고 활동했다.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에서 전하는 르네상스 이야기가 훌륭한 영상과 음악,
숨막히듯 긴장감 넘치는 편집으로 영상화되어 시청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스페셜 제작팀은 천재들의 코드’를 찾기 위해 피렌체를 찾는다. 이 도시야말로
수많은 천재들이 나타났던 르네상스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천재들은 문학, 예술의 영역뿐 아니라 수학, 과학 등의 영역이 뭉쳐진
‘코드’ 덩어리인 ‘인간’ 에서 감정의 개방과 표출이라는 아주 작은 문을 열어
인류 지성사의 큰 획을 그었다. 그러면 천재들이란? 단순한 결론이기는 하지만
코드의 발견자들이며, 아울러 코드의 해독자들이 아닐까?
피렌체 르네상스 천재들을 중심으로, 천재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도전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천재들과 함께 만들어갈 미래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피렌체를 무려 스물아홉 번이나 다녀온 연세대 김상근 교수가 서른 번째로
피렌체를 찾아 구석구석의 천재들과 그들의 작품 속에 숨어 있는 비밀을 풀어준다.
천재란 무엇인가. 천재의 창조성을 어떻게 정의내릴 것인가.
어떻게 창조성을 발현할 것인가.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한 해명을 내놓고 있지만, 명쾌하게 풀린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여전히 궁금증은 남아 있다.
인류 역사상 한 시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천재들이 발현된 시기가
있었다. 아니, ‘천재성’ 이 발현된 시기가 있었다. ‘창조의 정신’ 이 한 획을 그은
시기가 있었다.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르네상스 시기였다. 여기에 인류지성사의
비밀이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이 비밀을 엿보게 된다면 천재들의 비밀 코드가 풀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출발점은 상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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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1265 ~ 1321)는 두란테의 약칭인 단테(Dante)로 알려진 이탈리아 시인 |
- 다큐내용 -
르네상스의 특징을 흔히 중세 천 년의 어둠을 끝낸 ‘인간의 재발견’ 이라
정의한다. 21세기에도 그 창조성을 발현하려면 인간에 대한 재발견이 필요
하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르네상스 천재들이 발견한 ‘인간’ 이란 무엇이며,
다시 재발견해야 할 ‘인간’ 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벽 앞에 섰다. 그러다 문득, ‘유레카’가 있었다.
(※ 새로운 발견에 흥분한 아르키메데스는 목욕도 하지 않고 발가벗은 알몸으로
거리로 뛰쳐나와 "유레카! 유레카!"[“알아냈다, 알아냈다(Heurka!, Heurka!)”]
라고 외쳤다. 유레카(eureka)는 그리스말로 "발견했다" 라는 뜻이다. 그는 부력
(浮力)을 이용한 부피로 비중(比重)측정, ‘아르키메데스의 원리’ 를 발견하였다.)
‘인간’이란 의미 자체가 문학, 예술의 영역뿐만 아니라 수학, 과학 등에서도
지속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수수께끼, 즉 ‘코드’ 덩어리란 사실의 발견이었다.
그 덩어리 가운데서 하나가 풀릴 때마다 인류는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르네상스
시기가 그랬다. 그 시기 천재들이 한 일은 인간 감정의 개방이며 표출이었다.
문으로 치면 아주 작은 문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르네상스’가 온 것이다.
그러면 천재들이란? 단순한 결론이기는 하지만, 코드의 발견자들이며,
아울러 코드의 해독자들이 아닐까.
SBS스페셜 3부작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는
영화배우 유오성이 피렌체 현지 취재에 직접 동행하여
코드를 풀어가는 하나하나의 여정을 그렸다. 화자의 주관적 시선으로
수많은 천재들의 수수께끼를 풀어갈 것이다. 또 한 사람의 중요한 인물,
피렌체를 무려 스물 아홉 번이나 다녀온 연세대 김상근 교수가 서른 번째로 피렌체를 찾아 피렌체 구석구석 천재들과 그들의 작품속에
숨어있는 비밀을 풀어줄 것이다. 피렌체 르네상스 천재들을 중심으로, 천재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도전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천재들과 함께 만들어갈 미래의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SBS스페셜 3부작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는 1부 ‘코드의 발견’ 3월 25일(일), 2부 ‘메디치 코드’ 4월1일(일), 3부 ‘천재들의 코드’ 4월8일(일) 밤11시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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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를 꽃피운 도시, 피렌체의 모습입니다. 피렌체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 주에 있는
도시입니다. 문화, 예술의 부흥기였던 르네상스 시대가 바로 여기서 시작됐죠.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단테,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 세기의 천재들이 활동했던 무대도 이곳, 15세기 피렌체입니다. 피렌체는 과학과
문화, 예술, 금융, 산업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던 최초의 과학도시로 꼽힙니다. 12세기부터 직물 산업이 발달해 상공업이
발달했고, 이를 통해 축적된 경제적 부는 산업과 문화의 발전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가문인 메디치가가 이 지역에
진출하면서 많은 학자를 지원하기도 했고요. 그러다보니 탄탄한 인프라, 비즈니스, 천재들의 창조정신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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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di Michelangelo, Firenze - palazzo_vecchi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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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chelangelo(1475-1564) - David, detail of the copy outside the Palazzo Vecchio in Flore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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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chelangelo(1475-1564) - Pietà, c. 1550, Marble, height: 226 cm, Museo dell'Opera del Duomo, Flore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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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atello(1386-1466) - The Penitent Magdalene, c. 1453-55, Wood with
polychromy and gold, Height 188 cm, Museo dell'Opera del Duomo, Florence
▲ Donatello(1386-1466) - Habbakuk, 1423-26, Marble, Height 195 cm,
Museo dell'Opera del Duomo, Flore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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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chelangelo(1475-1564) - The Creation of Man, 1508-12, from the ceiling of the Sistine Chap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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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onardo da Vinci - John the Baptist, 1513-16, Wood, 69 x 57 cm, Musee du Louvre, Pari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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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saccio(c.1401-1428), Expulsion from the Garden of Eden, c. 1424-28,
Fresco, Brancacci Chapel, Flore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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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saccio(c.1401-1428), Baptism of the Neophytesc. 1424-28,
Fresco, Brancacci Chapel, Flore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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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 The Meeting of Dante and Beatrice in Paradise Watercolor on paper, 185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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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렌체 아르노강 베키오 다리에서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첫 만남<1861>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단테가 9살, 베아트리체가 8살에 처음 베키오 다리에서 만나
단테가 짝사랑에 빠진다. 처음 한 말이 '그때부터 내 사랑이 내 영혼을 완전히 압도했네'...
두번재 만나서 단테는 베아트리체에게 단테의 불타는 심장을 바치는 꿈을 꿨다고 한다.
베아트리체가 24살 나이로 죽을때 단테는 무엇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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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 (부제) 피렌체를 알면 인문학이 보인다 르네상스의 발원지로서 피렌체의 황금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인물중심으로 살펴보는 책입니다.
항상, 인물 중심의 서술은 전체 스토리를 생략해 간다는 점,
영웅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점 등의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큰 그림을 잡는데는 매우 효과적입니다.
르네상스의 출현 - 르네상스적 깨달음은 단테가 산타 트리니타 다리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났을 잉태되었습니다. 미의 찬미, 아름다움에의 추구라는
인간적 주제를 예술의 중심으로 당겨온 공로지요. 이는 계관시인 페트라르카에 의해 확산됩니다. 회화라면 조토의 고뇌하는 천사에서 맹아를 보이게 되지요.
르네상스의 발현
선 원근법을 개발한 알베르티와 구현한 브루넬레스코의 공을 꼽아야 합니다. 초기 르네상스를 이끈 피렌체의 트로이카를 특기할 만합니다.
건축의 브루넬레스코, 조각의 도나텔로, 회화의 마사초이지요.
르네상스의 절정
메디치가에 의해 육성된 르네상스는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에 의해 만개합니다. 특히 미켈란젤로는 10세 때 위대한 로렌초의 양자가 되어 일찍부터 재능을 꽃피우지요.
이야기들
르네상스 인간들의 좌절과 반목, 고뇌의 스토리가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두번 물먹은 브루넬레스코부터 볼까요. 그는 성 요한 세례당의
문짝 컨테스트에서 기베르티에게 진 후 청동 조각을 접습니다.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가서 건축의 거장이 되어 다시 돌아옵니다. 반면,
승자인 기베르티는 그 후로 평생 두개의 문짝을 만들고 생을 마감합니다.
첫째 문은 20년, 둘째 문은 27년. 과연 누가 승자일까요.
브루넬레스코의 좌절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메디치 가문 저택 설계의 수주 경쟁에서는 미켈로초에게 지지요.
'눈에 띄지 말고 살자'는 메디치의 가풍에 따라 검소한 미켈로초가
화려한 브루넬레스코를 이깁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코의 흔적은
두오모 돔부터해서 피렌체 전역에 퍼져 있으니 큰 일은 아닙니다.
이 책에서 마이너로 분류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라파엘로는 어떤가요.
재능상, 둘 다 마이너는 절대 아니지만, 피렌체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던 천재들입니다. 특히 레오나르도는 재능에 비해 인정을 못
받습니다. 아직도 수수께끼이지만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인 레오나르도가 플라톤주의의 메디치 가문과 안 맞았을 것을 추정합니다.
메디치 가문에 발탁되기 위해 무던 애를 쓰던 레오나르도는 결국 메디치의 추천으로 밀라노 스포르차 가문에 취직합니다. 그것도 '한
재능있는 음악가가 있습니다'라는 추천장을 들고 말이지요.
그외에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간의 경쟁, 친구인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코간 조각 대결 등 재 미난 이야기가 많지만 일화 소개는 이쯤 그치겠습니다.
이책에서 가장 크게 배운 점은 두가지입니다. 첫째, 메디치가 주최한 피렌체
공의회의 의미를 알게되었다는 점입니다. 동방의 문물이 피렌체로 밀려들어와 융합하며 르네상스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둘째, 르네상스는 단순히 신학과
인문학의 대결이 아니란 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와 신 플라톤 주의의 충돌에서 생겨난 사조란 주장이 수긍가며 인상 깊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시대정신(zeitgeist)을 떠올렸습니다.
한 시대 첨단을 걷는 도시에 산다는 것이 갖는 축복같은 의미를 새삼 새겼구요. 무한히 천재를 빨아들여 다시 천재를 키워내는 지식의 용광로 피렌체.
그 찬란하고 치열했던 시대정신이 아릿하게 부럽습니다.
- Dante, Firenze
The Medici: Godfathers of the...: Birth of a Dynasty.
(SBS TV프로 지식나눔 콘서트 아이러브[人],
김상근 교수(연세대 교수)의 인문학 강의 내용을 정리….)
여러분 어떤 일을 하실 때가 제일 행복하십니까?
언제 가슴이 가장 뛰십니까?
저는 제가 알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서 여행을 떠날 때 가슴이 뜁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 생소한 환경으로 저를 노출시키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여러분들께 그런 놀라운 공간, 너무나 아름다운 공간,
제가 사랑하는 놀라운 도시를 지금부터 소개해 드리겠습다.
바로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입니다. (피렌체-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주의
주도(州都),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된 이탈리아 르네상스문화의 중심지)
이 작은 마을에서 천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하는 수많은 천재들이 태어나서
세상을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중세 천 년의 역사가
바로 이 작은 도시에서 단절되었고, 그리고 이곳에서 태어난 수많은 천재들이
세상을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저 위대한 작은 도시 피렌체에서
태어난 천재 중 누구를 기억하십니까? 단테,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갈릴레오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등 모두가 이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저 작은 마을에서 이런 수많은 천재들이 태어나서 르네상스라는
아름다운 시대를 열었던 것입니다. 저는 가끔 우피치 미술관
(Uffizi Gallery, 세계최고의 르네상스 미술관)에 가서 이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당신들은 도대체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기에 이렇게 놀라운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까?”
제가 최근에 피렌체에 다시 가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합니다.
이런 천재 예술가나 학자들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누굴까요? 바로 그들 뒤에 두 명의 남자가 서 있는데, 바로 “국부”로 불리는
코지모 데 메디치와 “위대한 자”로 불리는 로렌초 데 메디치입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입니다.
이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피렌체의 위대한 예술가들과 천재학자들을
잘 격려하고, 후원하고, 지도해서 지금의 르네상스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여러분들과 메디치 가문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 세상을 변화시킨 메디치 가문! (1397~1743)
메디치 가문은 16세기에 교황을 두 명이나 배출합니다.
(레오 10세와 클레멘트 7세) 당시 상황으로 페렌체의 상인가문에서 교황을 2명
이나 배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메디치 가문은
프랑스의 왕비를 2명이나 배출했습니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와 마리아 데 메디치)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1494년도에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범하게 되어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16~17세기 당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관계는 15세기 말 두 나라간의 전쟁으로
적대적 감정이 남아있던 상황) 그렇기 때문에 적국의 중산층 계층의
여인이 프랑스 왕실로 시집을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관계는 마치 우리나라와 일본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그 외에 메디치 가문이 어떤 공헌을 남겼을까요?
메디치 가문의 저택에서 오페라가 탄생했고, 카테리나 메디치가 말을 타는 것을
계기로 여성용 바지가 등장했으며, 메디치 가문 이전의 유럽 사람들은 식사할 때
음식을 손으로 집어 먹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포크와 나이프의 식사예절은
메디치 가문의 식탁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또한 키가 작은 카테리나 데 메디치가
키가 큰 프랑스 여자와 경쟁하기 위해서 신기 시작한 것에서 하이힐이 탄생했다.
메디치 가문은 천재 예술가를 후원했고, ‘정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키아벨리
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갈릴레이의 과학적인 발견, 그리고 아메리고 베스푸치
(이탈리아의 항해사, 신대륙 초기 탐험자, 아메리카라는 지명은 그의 이름 아메리고에서 유래함)의 지리적 발견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도대체 메디치 가문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요? 도대체
그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았기에, 어떻게 행동했기에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하고 한 시대를 아름다운 시대로 만들었을까요?
메디치가문은 어떻게 그런 많은 천재들의 마음을 얻어
아름다운 한 시대를 장식할 수 있었을까?
메디치가문은 한적한 시골의 작은 농장주였습니다.
이들은 인근 마을의 큰 도시인 피렌체에서 자본주의가 시작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을 기회로 삼아 자산을 정리하고 피렌체로 이사하여 조그만 환전상을
시작했습니다.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은행사업의 성공 비결은 예금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신용에 달려 있다!’ 라는 것을 깨닫고 메디치은행을 창립합니다.
이것이 피렌체에서의 메디치 가문의 출발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메디치 가문은 도대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되었을까요?
1. 한번 맺은 신의(인연)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요한23세가 눈을 감을 때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을 초청해서 이렇게 유언을 합니다.
“메디치가문의 사람들이여 내가 잘못되었을 때,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내가 폐위를 당해서 내가 갈 곳이 없을 때, 나를 환대해주고 그 엄청난 돈을
아무 조건없이 빌려주던 당신들에게 너무 감사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 한 개를 여러분께 남기고 갑니다”
메디치 가문이 엄청난 거금을 가져가서 요한23세를 구출해 내었을 때,
그 현장에 있 던 교황들과 왕과 군주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메디치 가문이 곧 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3,4년이 지난 후에 그 현장에
있었던 수많은 교황과 왕과 군주와 귀족들이 거래은행을 모두 메디치은행으로
바꿨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우리가 잘 되었을 때도 잘해줄 것이지만,
우리가 못 되었을 때도 그 신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죠.
메디치 가문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은 어떻게 대처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을까요?
2. 정면 돌파의 모범을 보여라!
위기가 닥쳤을 때, 메디치 가문은 목숨을 건 정면 돌파를 했습니다.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남긴 일기를 보면 “우리가 로렌쪼 데 메디치가 통치하는 이 시대의 페렌체의 시민인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렇다면 메디치 가문은 위기가 계속해서 반복될 때는 어떻게 하였을까?
카테리나 데 메디치의 삶과 철학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3. 인내하고 때를 기다려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고 행동으로 실천한 ‘마키아벨리의 진정한 제자’ 인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볼품없는 외모로 프랑스 앙리 2세에게 시집을 가 왕비가
되지만, 앙리2세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방인으로서 프랑스를 통치하기 위해서 자비로운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려
밤마다 군주론을 읽으며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합니다.
카테리나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빛과 평화를 가져 온다”
인내하고 인내하고 또 인내해서 진정한 기회가 올 때 까지 자신을 낮추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 아들 3명을 프랑스의 왕으로 만들고, 며느리들은 모두 유럽의 왕실에서 데려옵니다. 큰 딸
엘리자베스는 당시 유럽의 패권을 가지고 있던 스페인의 펠리페2세에게 시집을 보냅니다. 이렇게 해서 검은 왕비(늘 검은
상복을 입고 다녀서 얻게 된 카테리나의 별명)의 치마폭에서 유럽의 모든 왕실들이 좌지우지 되었던 것입니다.
4. 당나귀를 타고 가던 코시모를 기억하라! (겸손)
늘 겸손했던 코시모 데 메디치의 정신을 이어받지 못한 메디치가의 후손들로 인해 메디치가문은 몰락하게 됩니다. 선대의 코시모는 왕관을 내려놓고 늘 겸손하게
행동했는데, 후손들은 군림하는 자세를 취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대중들과 격리
되고 군림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잃게 됩니다.
이탈리아의 국부 코시모 데 메디치는 길을 갈 때 절대로 말을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말을 타면 시민들과 대화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늘 혼자서 걸어가며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코시모는 늘 빨간 모자를 쓰고 다니는 걸로
유명했는데, 아무리 신분이 낮은 사람이 다가와 인사를 건넬 때에도 빨간 모자를
벗어서 다시 인사를 하고, 취직이 안 돼서 고생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 농장의
문지기라도 시켜 줄 정도로 자비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사람들은
‘이탈리아의 국부’로 불렀습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당시 은행장으로서 출장을 갈 때 다른 사람들은 멋진 말을
타는데, 코시모는 당나귀를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낮아져 겸손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이탈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것입니다. 메디치가문의 무덤은
미켈란젤로도 조각을 했을 정도로 으리으리합니다. 그러나 코시모는
“내 무덤은 사람들이 밟고 설 수 있게 땅바닥에 깔아라!”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그가 임종했을 때(1464년)에 어떤 인문학자가 그의 죽음을 이렇게 애도했습니다.
- 코시모 데 메디치에 대한 추도사 -
"오, 모든 세상 사람들의 빛이여,
모든 상인들의 빛나는 귀감이여,
착한 근로자들의 진실했던 친구여,
탁월함을 추구하는 피렌체인들의 명예여,
가난한 자들의 친절한 봉사자여,
고아와 과부들의 자비로운 구원자여,
토스카나 지방의 철통같은 방패여!"
우피치 미술관 http://younghwan12.tistory.com/3585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http://blog.daum.net/waterelf69/12876413
메디치 http://blog.daum.net/khs3074/8423110
메디치 가문 이야기 http://boowoon.egloos.com/2874803
메디치 가문은 1397~1743년 346년간 유럽 최고의 귀족 가문이었다. 르네상스를 후원하고 우피치 미술관 소장품을 피렌체에
기증하여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게 하고 레오10세 및 클레멘트 등 교황2명을 배출하고 프랑스 왕비 2명을 배출한 가문이다. 단순하게
권력을 가진 귀족가문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여 오페라의탄생과 서양식 식사 예절,하이힐 패션 등이 나온 것은
모두 메디치가와 관계가 있다. 또한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요 갈릴레이 등을 후원하고, 아메리카대륙의 유래가 된 '아메리고
베스푸치'도 후원하여아메리카 대륙행을 도와주었다.
원래 Mugello 지방의 조그만 농장주 였던 메디치가문은 근처 마을 피렌체에서
은행업을 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교리상 은행업을 할 수없었기에
'장부'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신용'과 '재량'으로 이자를 주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여기에 바로 메디치 성장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더우기 은행업과 함께 모직사업을 진행하면서 유럽각국의 정보를 활용할 수 있었기에 더욱 큰 성장이 이뤄진 것이다. 마치
'광고'로서 전세계를 장악한 구글의 이사회에서 매월 한장의 통계리포트(광고주들의 물량)를 통해서 전세계의 산업성장을 예측하과
비즈니스전략을 세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메디치가문의 이야기중에서 가장 극적이면서, 가장많이 알려진 이야기는
교황 요한 23세의 이야기이다.
발다사레 코사는 나폴리 출신 해적인데 볼로냐 대학에서 가짜 법학박사 매입하고
추기경직을 매입했는데 신분상의 문제로 메디치 은행의 첫 고객이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1410년 교황 요한23세로
취임했다. 당시 유럽사회는 가톨릭교회의 대 분열시기(1378-1417)로 교황이 3명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이 개입하여 교회통합을
위해 독일 콘스탄트에서 교황모임을 개최하였다. 그런데 거기에서 요한 23세가 불법행위로 체포되고 35,000플로린의 막대한
벌금형을 선고하고 투옥하였다.
이 여행길에 코지모 데 메디치가 교황23세를 수행했다. 교황 요한23세는
하이델베르크 성채에 투옥되고 코지모에게 대출을 요청하였다.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116억원 정도다. 코지모의 소식을 들은
메디치가는 대출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석방된 요한 23세가 피렌체에서 망명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심지어 임종을 하자 성 세례
요한 세례당 안에 교황 영묘를 제작해 주기도 했다. 임종 순간 이 모든 것에 감격한 요한 23세는 성 세례요한의 손가락을 기증한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박물관에 보관). 신뢰를 지킨 메디치 가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회자되면서메디치 가문은 절대로 한번 맺은 신의를 버리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다소 어리석은 행동은
교황이나귀족이 주목하고 있다가 모두 몇 년 뒤 주 거래 은행을 메디치로 변경한다. 막대한 자금이 메디치로 쏟아
들어 오면서 유럽최고의 은행이 된 것이다.
한번 맺은 인연을 버리지 않는 메디치 가문의 신용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는 단순하게 성공한 비즈니스때문만이 아니다.
인문학을 사랑했던 코시모 데 메디치는 예술가들을 후원해 르네상스가 발흥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재물뿐만 아니라 심적 성찰을 통한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예술을
사랑하고 학문을 추구했던 것이다.
메디치 가문의 가장 극적인 이야기는 카테리나 데 메디치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삼촌인 교황 클레멘트 7세의 후원과 지참금 약속을 통해 프랑스 왕자 앙리 2세와 결혼했으나, 메디치 가문의 몰락과 교황 클레멘트 7세의 서거로 지참금을
줄 수 없었기에 말로 할 수 없는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궁전생활을 했다. 그러나
카테리나는 공식석상에서 한번도 슬퍼하지 않았고 웃으며 늘 당당한 모습을 이어
갔다. 그리고, 황통을 이어받을 아들을 얻는 방법을 알기 위해 카테리나는 점성술사 노스트라 다무스를 고용하여 마음을 의지하고 비법을 찾으려 했다. 비방은
“신선한 암소의 똥을 먹어라” 였는데 카테리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 똥을 먹었다.
그런데 몇 달 뒤 놀랍게도 아들을 낳게 된다. 이후 왕이 창에 찔려 죽게 되자 카테리나는 사자의 힘을 숨기고 여우의 지혜를 보이면서 그의 아들이 성장하여 황제가
될때까지 참고 견뎌왔던 것이다. 비록, 부와 패션과 권력이 총망라된 메디치 가문도 300년의 영화로 마무리가 되지만 드라마와 같은 메디치가문의 이야기는
르네상스라는 단어와 공존되고 있는 것이다.
1. 신의를 중의시 하고,
2. 내면을 풍족케하면서
3. 미래를 위하여 참고 인내하는 모습에서 몇 백년이지만 현재에도
위대한 삶을 살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만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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