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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선민의 옷 - 백의민족(白衣民族)
(계시록 7:9-14)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양용은 골프선수가 지난 8월 17일 한국인으로서는 물론이고 동양인으로서도 처음으로 메이저 골프대회인 PGA 챔피언십에서 타어거 우즈를 꺾고 우승하였습니다. 그래서 “양이 호랑이를 이겼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양용은 선수는 대회 마지막 날 상하의는 물론이고 골프화까지 모두 흰색으로 차려 입고는 타어거 우즈에게 역전승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타이거 우즈가 10대 아마추어 시절에 한동안 부진하자 태국인 그의 어머니가 “붉은 셔츠를 입고 경기에 나가보라.”고 권했답니다. 불교의 나라 태국의 상징색인 빨강이 ‘힘을 불어넣어 준다.“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정말로 붉은 셔츠를 입고 출전하자마자 타이거 우즈는 연전연승했고, 붉은색은 승리를 부르는 색이 되었답니다.
붉은 옷을 입고 이렇게 무적을 자랑하던 타이거 우즈에게 흰옷을 입고 맞선 양용은이 역전 우승하였다는 사실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신문 방송들은 하나같이 백의민족의 승리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기는 흰옷을 입었기 때문에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겠지요. 흰옷만 입으면 저절로 우승하게 됩니까? 우승의 배후에는 무엇보다도 선수 본인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겠지요.
1. 우리는 백의민족입니다.
18세기 말에 한국에 들어온 어느 선교사는 “한국인을 보면 마치 요한계시록 7장에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 보좌 앞에 서있는 구원받은 백성들, 곧 흰옷 입은 사람들로 연상된다.”라고 자신의 책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흰옷을 입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택에 힘입어 의인이 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과연 한국은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뿐만 아니라 흰옷을 즐겨 입는 민족으로 그만큼 평화를 사랑하고 순결하고 착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연 오천년 역사 속에 단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았습니다.
1) 우리 민족이 왜 흰옷을 그렇게 좋아하게 되었을까를 설명하는 잘못된 주장들이 있습니다.
① 고려가 몽골에 망하면서 몽골의 풍습을 따라서 흰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며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즐겨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라고 했습니다. 부여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도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몽골의 영향이 아니라 그 전부터 흰옷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② 염료가 부족해 염색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가난해서, 염색을 할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흰옷을 입었다는 설입니다. 우리가 너무 가난했으니까 그럴듯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라나 고구려의 채색을 보면 식물염료로 중국과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얼마든지 염색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별로 돈을 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염색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는 게 사실입니다.
③ 흰옷은 한(恨)의 상징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우리가 듣기에는 하얀색을 사랑하는 순수한 민족이지만, 흰옷은 한을 상징하는 어쩔 수 없이 입은 옷이라는 설입니다. 가장 널리 퍼져 상식적으로 여겨지는 말이지만, 이것도 일본 학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설이기도 합니다. 근대화 이전에 우리 백성은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노동력 확보 차원에서 식구는 많고, 가진 땅은 적고, 당연히 생산량도 적고, 먹을 것도 없는데 입을 것이라고 풍족할 리 없습니다.
고작 입는 것이라고 해야 닳을 대로 닳고, 꿰매 입을 대로 꿰매 입은 질도 안 좋은 광목으로 만들어진 옷 한 벌뿐 이었습니다. 이러한 옷을 염색할 돈도 물론 없지요. 누런 광목옷을 빨아 입고, 또 빨아 입고, 수년을 빨아 입으니, 당연히 물이 다 빠져서 허연(하얗지도 않은) 빛을 띠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 서민의 모습을 타국 사람들이 보고, 어딜 가도 하~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으로 알고,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한 것입니다. 특히 우리 민족이 백의민족임을 강조하게 된 때는 일제시대로서 그것은 우리를 지배하고 억압하던 일본인의 옷이 무색옷이기 때문에 그와는 대조적인 백의를 항일정신(抗日精神)의 상징으로 더욱 강조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민족을 비하하는 염세주의적 역사관입니다.
2) 우리 민족이 흰옷(白衣)을 숭상하였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요?
① 흰빛은 모든 빛을 어우르는 빛으로, 태양과 하늘을 숭상한 우리 민족은 이를 상징하는 흰빛을 일상의 생활 속에 살려내고자 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이러한 흰옷 사랑은 갓 태어난 아기의 배내옷과 기저귀, 푸른 하늘과 논밭 사이에서 땀 흘려 일하는 농부들이 입던 일상복, 검박한 선비나 학자의 평상복, 특별한 제사나 의식에서 차려입던 제복,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자들이 입던 상복(喪服) 등으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② 이렇듯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몸을 감싸온 가장 대표적인 빛깔인 흰옷에는 하늘을 사랑하고 그 뜻을 받들고자 한 자연 사랑과 공경, 순수, 고결, 신성, 평화, 죽음과 불멸 등 우리 한민족의 꿈과 세계관, 아름다운 성정(性情)이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③ 한국 민족은 흰옷 입기를 좋아하였는데, 그런 습속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중국 문헌인 《魏志》에 의하면 부여시대의 사람들이 이미 백의를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백의를 애용하게 된 것은 태양숭배의 원시적 신앙에 의해 그 광명의 상징인 흰 빛을 숭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 민족이 백의민족임을 특별히 강조된 것은 일제시대(1910∼1945)로서 그것은 우리를 지배하고 억압하던 일본인의 옷이 무색옷이기 때문에 그와는 대조적인 백의를 항일정신(抗日精神)의 상징으로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④ 색채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 민족이 흰색을 선호했음은 “빛의 가장 순수한 본체”를 사랑했다는 말이 됩니다. 흰색은 완전한 균형을 이룬 색이라는 지적에서 우리의 흰옷이 지니는 색채학적 위상이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3) 자동차의 색을 보아도 그 나라의 민족성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① 붉은색을 좋아하는 이태리 국민들은 다혈질이고 쉽게 흥분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이태리의 대표적인 스포츠카 브랜드인 ‘페라리’를 상징하는 색도 붉은색입니다. 프랑스인들은 푸른색 차량을 선호하는데 이지적이면서도 평온한 이미지의 프랑스를 잘 표현해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지런하고 철저함으로 표현되는 독일인들은 평범함을 상징하는 은색을 좋아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하여 서민적이고 안정적인 흰색이나 검은색을 좋아하지요.
② 차 색깔은 차 주인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답니다. 흰색이나 회색 차량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보수적이고 서민적이며 안전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빨간색 파란색 등의 원색 계통의 차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젊은 층의 사람들이 많이 탄답니다.
③ 자동차의 색은 크게 전진 색과 후진 색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운전자들이 색깔을 인지하는 반응에 따라 나눠집니다. 빨강이나 주황과 같은 따뜻한 느낌의 색은 전진색으로 실제보다 크고 가깝게 느껴집니다. 반면에 파랑이나 보라와 같은 추운 느낌의 색은 후진색으로 작고 멀게 느껴집니다. 따라서 파란색 차가 앞에서 달리고 있는 경우 실제보다도 멀리서 달리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켜 사고의 위험률이 높다고 합니다. 교통사고 발생률이 가장 낮은 색은 은회색입니다. 밝은 색으로 눈에 잘 띄어 사고의 위험을 알려주기 때문이지요.
4) 우리는 왜 흰색을 좋아하게 되었을까요?
① 백의를 애용하게 된 것은 태양숭배의 원시적 신앙에 의해 그 광명의 상징인 흰 빛을 숭상했기 때문인 것 같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② 또한 흰옷은 숭고와 순결을 표현하는 시초 같은 것으로 굳이 염색을 하지 않아도 자연 그대로의 색을 나타냅니다.
③ 빛 중에서 가장 밝은 빛을 백광(白光)이라고 합니다. 별 중에서도 가장 밝은 별이 백색왜성(白色矮星)입니다. 근본 의미에서 백의(白衣)란 흰 색깔의 옷이 아니라, 흰 빛의 옷입니다. 더러워질까 두려워 흰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밝음을 숭상하고 태양처럼 밝고 힘차고 건강하게 살기를 염원했기에 흰 빛의 옷을 입은 것입니다.
④ 결론적으로 우리 민족이 흰옷을 즐겨 입는 백의민족이 된 것은 나라가 망해서도 아니고, 물감이 없어서도 아니고, 한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밝음을 숭상하고 밝음으로 돌아가고자 수도(修道)를 하였고, 자연과 조화를 꿈꾸는 가장 고상한 민족성을 가졌으며, 현대 과학적으로 가장 순수하고 가장 균형을 이룬 가장 자연스러운 흰 빛의 옷을 즐겨 입은 것입니다.
2. 성경에서 말하는 흰옷
1)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① 계시록 19:7-8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옳은 행실을 할 때에 우리의 옷은 더욱 희어지는 것입니다.
② 반대로 악을 행하거나 죄를 지으면 우리의 옷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비싸고 좋은 옷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척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들에 피어 있는 백합화 한 송이보다도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③ 우리의 옷은 곧 우리의 행실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눈에 보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셔서 보게 해 주신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2) 오늘의 본문에 보면 장차 구원 받게 될 모든 성도들의 옷이 흰옷이라고 했습니다.
① 8절까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 144,000명에 대해 설명하고 이어서 9절에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을 찬양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② 13-14절에 보니, 장로 중 한 분이 요한에게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는지 아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대답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들의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③ 이들은 환난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말세의 대환난만 환난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 의롭게 살려고 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환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환난을 두려워하여 굴복한다든지, 인간적 방법으로 피하려 하면 벌써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되고 맙니다. 환난이 오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그 환난을 잘 이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해 주심을 늘 체험하면서 주님의 은혜로 이겨나갈 때에 우리의 옷은 저절로 희게 되고,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3) 계시록 19:11-14에 백마를 타신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흰옷 입은 군대가 나옵니다.
① 11-13절에서는 먼저 백마를 타시고 전쟁에 나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의 눈이 불 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백마를 타셨고 피 뿌린 옷을 입으셨다고 했는데, 그러면 피 뿌린 옷은 색깔이 무엇일까요? 붉은색입니까? 아닙니다. 피를 뿌리면 죄가 다 지워지니까 옷이 더욱 희어집니다. 변화산 위에서 변형되신 예수님의 옷은 어떠했다고 했습니까? 마가복음 9:3에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옷입니다.
② 14절에는 그 예수님을 따르는 하늘에 있는 군대들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리스도를 따르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들도 온통 흰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영적으로 깨끗한 사람들이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이렇게 되어야 예수님의 군사가 됩니다. 옛날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하러 나갈 때에 처음엔 32,000명의 장정들이 모였지만, 다 추려내고 겨우 300명만 데리고 가서 큰 승리를 거두지 않았습니까? 기드온의 군대도 그러했다면 예수님의 군대는 어떠할까요?
③ 이 군사들이 입은 옷도 세마포였습니다. 행실이 옳아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입니다. 특히 말세에는 행실이 중요합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시면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부활장 한 가운데에서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전 15:33)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떤 행실을 가져야 합니까? 로마서 8:13에서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죽이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4) 계시록 6장 1-8절에는 네 말이 나오는데, 그 첫째가 흰말입니다.
① 첫째가 흰말이고, 둘째는 붉은말, 셋째는 검은말, 넷째는 청황색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해석입니다. 뒤의 셋은 그런 대로 쉽습니다. 붉은말은 전쟁입니다. 검은말은 기근입니다. 청황색말은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더 쉽습니다.
② 그런데 첫째인 흰말, 또는 흰말을 탄 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흰말을 탄 자는 적그리스도다”라고 해석합니다. 이 말들은 말세에 일어날 환난과 재앙들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예수님이 이 말세에 대해 경고하신 첫째는 “사람들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신 것이요, 그때에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그리스도들이 일어난다고 하셨으니, 이 흰말은 적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③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입니다. 2절은 “내가 이에 보니 흰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전쟁에 이겼습니다. 또 이기려고 합니다. 이것만 보아도 이는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찌 적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까? 또한 성경 어디에도 흰색을 거짓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한 예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우리의 성경해석은 어디까지나 성경 전체와 일치해야 합니다. 셋째로 다른 말들을 “전쟁, 기근, 사망”이라고 해석한다면 첫째도 그와 같은 이름을 붙여서 설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운동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대환난이 일어나는 중에도 하나님은 힘차게 복음운동을 전개하십니다. 환난 중에도 승리가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도 믿음이 생기고, 힘이 솟아나지 않습니까?
3. 흰옷을 사랑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1) 오늘의 우리들은 흰옷을 버린 지가 한참 되었습니다.
① 김택근이라는 시인은 “그렇게 사랑을 받던 하얀 옷이 왜 사라졌을까요? 하얀 옷을 벗어 던지고 차례차례 유색 옷으로 갈아입으며 우리는 무엇을 버렸을까요? 그 사이 이 강산에서는 도대체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라고 묻습니다.
② 흰옷은 더러움을 쉽게 탑니다. 더러워지면 금방 표가 납니다. 그래서 빨래도 자주 해야 하고, 입고 다니다가 더러운 것이 묻으면 당장 처리하기가 어려워져서 곤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흰옷을 입으면 항상 조심하게 됩니다.
라스베가스에서 목회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항상 클러지셔츠, 천주교 신부들이 입는 셔츠, 곧 목에 카라가 있는 옷을 입고 다니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박장이 있는 동네에 사니까 남들에게 오해 받기가 쉬운데, 복장을 이렇게 하고 다녀야 남들도 자기에게 조심하여 대하게 되고, 자기도 남들에게 조심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도 단정한 복장을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③ 그런데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서 흰옷을 입고 매사에 조심조심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라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들은 의식적으로 흰옷을 피하게 됩니다. 색깔이 진한 옷을 입으면 행동에 조심성이 좀 없어져도 옷이 더러워질 염려가 없게 되어 괜찮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게 되는 촉매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이것은 아주 큰일입니다.
2) 그러므로 우리가 흰옷을 사랑함으로 우리의 옛 전통을 살려야 하겠습니다.
① 바쁘게 일하는 우리들이 반드시 흰옷을 입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편한 복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흰옷을 입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죄를 지을수록 점점 더 까맣게 됩니다. 그런데 이 더러움을 씻는 재료는 그리스도의 보혈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다 드러나 보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더욱 조심하여 말이나 행동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②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가리켜 동방예의지국이라 하였습니다. 예의는 먼저 우리의 복장으로부터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이 흰옷을 입었기에 더욱 예의를 중시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우리가 예의를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복장부터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백의민족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③ 또한 흰옷은 그 색깔이 아니라, 그 빛이 더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빛나는 옷뿐 아니라, 빛나는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축도라고 하는 민수기 6:24-26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얼굴을 비추신다.”는 말을 두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시편 42편과 43편에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라는 말씀이 공통으로 나오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내 얼굴을 도우신다”는 말과 “하나님의 얼굴이 나를 도우신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의 광채가 나를 빛나게 해 주십니다.
3) 흰옷을 통해 성경적인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① 흰옷은 예수님의 옷입니다. 따라서 주님만 따르는 참된 성도들에도 입혀주시는 옷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서 거룩하게 살아감에 힘써야 합니다. 진심을 가지고 주님을 따를 때에 나도 모르게 성결하게 되고, 이때에 자연히 입혀지는 것이 흰옷입니다. 또한 흰옷을 입은 사람이라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② 흰옷은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 군병들의 옷입니다. 에베소서 6:14-17에 나오는 십자가 군병들의 무장을 아시지요?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바로 이런 것들은 교회에 다닌다고 하여 저절로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거룩한 사람에게만 입혀지는 옷이기 때문입니다.
③ 흰옷은 성도들의 세마포입니다. 옳은 행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입게 될 옷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에 우리 민족에게 흰옷이 점점 없어지듯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영적인 흰옷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깨어서 이 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고, 말과 행실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2009년 1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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