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복피동어 또는 중복수동어: 번역가들의 업보
* 길들여지다(△) → 길들다(O)
* 꺾어지다(△) → 꺾이다(O)
* 끊어지다(△) → 끊기다/끊이다(O)
* 놓여지다(△) → 놓이다(O)
* 덮여지다(△) → 덮이다(O)
* 되어지다(△) → 되다(O)
* 둘러싸이다(△) → 둘려싸이다(O)
* 뒤집어지다(△) → 뒤집히다(O)
* 뒤틀어지다(△) → 뒤틀리다(O)
* 뜯어먹히다(△) → 뜯겨먹히다(O)
* 모아지다(△) → 모이다(O)
* 물어뜯기다(△) → 물려뜯기다(O)
* 믿어지다(△) → 믿기다(O)
* 보여지다(△) → 보이다(O)
* 비뚤어지다(△) → 비뚤리다(O)
* 비틀어지다(△) → 비틀리다(O)
* 삶아지다(△) → 삶기다(O)
* 심어지다(△) → 심기다(O)
* (글이) 쓰여지다/써지다/씌이다/씌어지다(△) → (글이) 쓰이다(O)
* (귀신) 씌이다/쓰여지다(△) → (귀신) 씌다/쓰이다(O)
* 읽어지다(△) → 읽히다(O)
* 잊혀지다(△) → 잊히다(O)
* 잡아먹히다(△) → 잡혀먹히다(O)
* 틀어지다(△) → 틀리다(O)
※ 물론 위에서 구분되기 쉽도록 (△)표를 꼬리붙인 중복(이중) 피동형(수동형) 표현들은 국어통사법에 어긋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들은 번역자들이 워낙 자주 상대하는 영어의 피동사(수동사)나 일본어의 재귀동사 따위를 한국어로 번역하다가 조금이라도 여의찮으면 ‘~지다’라는 접미어를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바람에 다소 무분별하게 관행화된, 이른바, 번역투(번역체; 번역문)의 소치들이므로, 가급적 드물게 사용될수록 한국어문장도 더 개선될 수 있으리라.
2. 일본어투에 물들어 몽롱한 한국어 표현
* ~에/데/에게 있어서
1)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 관행화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몽롱한 표현이 정확히 사용되려면, 예컨대, “구름을 안고픈 꿈이 나의 가슴 속에 있어서 나의 발바닥이 간지럽구나.” 같은 문장에나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2) 그러나 “~에/데/에게 있어서”는 실제로 (혹은 통상적으로), 예컨대, “~와/과 관련하여”, “~의/하는 경우에”, “~하려고”, “~일 때에/~할 때에” 같은 연결어가 사용되어야 할 자리에 거의 마구잡이로 사용되고 ‘있어서’ 문맥을 흐리멍덩하게 만드는 묘용(?)을 발휘한다.
그러니까 한국어문장에서, 특히 한국어로 쓰인 논저들에서는 더 빈번하게, 발견되는 “~에/데/에게 있어서”라는 연결어가, 예컨대, “나에게 있어서 돈은...”,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살로메는...”, “민주주의에 있어서 우리는 ...”, “사랑에 있어서 눈물은 ...”, “우는 데 있어서 호흡의 문제는 ...” 같은 식으로 모호하고 무분별하게 사용되면 몽롱한 효과를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2-1) 아마도 이런 묘용은, 언필칭, “일제시대에 있어서” 일본어를 번역하는 “데 있어서” “국어에 있어서” 번역가들이 안이하게나 다소 졸렬하게 답습한 엉성한 번역관행의 소산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
2-2)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한국에서 이 몽롱한 연결어는 오히려 더 강대한 위력을 발휘했다.
왜냐면 특히 영어의 “in/of/for” 같은 전치사와 “~에/데/에게 있어서”가 찰떡궁합을 이루면서 영한번역서들을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연결어가 “번역에 있어서” 가히 ‘만능연결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으로 쓰여서 발표되는 거의 모든 “학술적 글들에 있어서” 이 연결어가 남발되고 남용되다가, 차라리, 아예 자연스러운 공용국어로서 만연할 지경에 이르렀을 뿐더러 심지어 “문학에 있어서도, 그러니까 시와 소설에 있어서도” 빈용(頻用)되는 경향이 확산될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한국의 이른바 “문학평론에 있어서나 문학비평에 있어서도” 비평가의 안이하고 엉성한 사고력 및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이 몽롱한 연결어가 무비판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2-3) 그러나 이토록 몽롱한 묘용(?)을 요해할 지능을 타고나지도 함양하지도 못한 나는, 위 1)번의 경우를 제외하면, “한국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이 만능연결어를 서슴없이 사용하고 거침없이 술술 쉽게 이해하는 철학자들, 인문학자들, 평론가들, 서평가들을 위시한 갖가지 유식자들의 언어감각을 그저 관망하면서 놀랄 따름이다.
* ~로서의
이 복합조사는 특히 영어의 ‘as’라는 단어와 짝짜꿍하며 잘도 논다.
이것은 “~와/과 다름없는/같은”, “~에 버금가는”, “~(으)로/라고 말될 수 있는,” “~일 수 있는” 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니까 예컨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유명한 철학서의 제목은 “의지와 같고 표상과 같은 세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흔히 명사형으로 표현된 제목이 더 명료하게 이해된다고 여기거나 믿는 통념 내지 고정관념이 “~로서의”라는 모호한 복합조사를 한국어문장에서 남용시키는 원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제목이 더더욱 명료하게 이해되려면 차라리 “세계는 의지이고 표상이다”로 표현되어야 하리라.
* ~로서와 ~로써
“~로서”는 ‘자격’을, “~로써”는 ‘용도(쓰임새; 쓸모)’를 나타내는 복합조사라는 사실은 한국에서 대체로 이미 알려졌지만, 두 복합조사를 분간하지 않고 사용하는 한국인이 실제로 많다.
* ~에 다름없다/다름 아니다
일본어가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태어난 이 서술형 표현도 희한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와(과) 다름없다/다르지 않다(다르잖다)”로 쓰여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에/데 불과하다”는, 역시 정밀하게 검토되면 문제시될 만하지만, 어영부영 쓰이면 무방할 수 있는 표현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이한 접속문구도 일본어가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중복현상의 소산이다.
물론 반대의미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이런 접속문구를 그럴싸하게 만들어주는 듯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접속문구를 깔끔하게 대체할 수 있는 다른 한국어접속사가 많다.
“그럼에도”만 쓰여도 충분할 뿐 아니라 “그런데도”, “그렇다고 해서”, “그럴지라도”, “그럴지언정”, “그럴망정,” “그렇더라도”, “그래도” 같은 간명한 접속사들도 있다.
그런데, 예컨대, “나는 당신을 증오하는데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를 사랑하시오?”라는 문장에 사용된 “불구하고”는 문맥을 좀더 강조해주는 듯이 보이기도 하니까, 사용되어도 무방하겠지만, 그냥 “증오하는데도 당신은”으로 표현되어도 문맥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아울러 “불구하고”의 어간 “不拘”라는 한자말은 "거리끼지/망설이지/주저하지/저어하지/서슴지 않음"을 뜻한다는 사실도 기억되면 좋을 것이다.
* 보다 ~
예컨대,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고” 같은 문장에서 사용되는 이 “보다”는 원래 ‘접미사’인데, 요즘에 한국어문장에서는 너무나 흔하게 ‘부사’로도 사용된다.
그러나 이 “보다”라는 접미사가 부사로(써) 사용되면, 예컨대, “이것은 사용되기 보다 쉬운가보다. 이것을 보다 쉽게 이해하려는 사람은 이 책을 보다 열심히 읽어야 하는가보다” 같은 몽롱한 문장도 출현할 수도 있듯이, 혼동을 유발할 수도 있다.
그래서 “보다”보다는 “조금 더”, “더”, “더욱”, “한층”, “한결” 같은 부사가 직접 사용되는 편이 더 나으리라.
* ~의
이것은 원래 소유관계나 귀속관계를 나타내는 한국어조사이다.
그런데 영어전치사 “of(오브)”나 일본어조사 “の(노)”가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마구잡이로 무분별하게 “~의”로 대용代用되어 본래역할이 무색해진 바람에 현대 한국어를 상당히 혼탁하게 만들어왔다.
예컨대, 심지어 “문학에로의 초대” 같은 기이한 문구뿐 아니라 “자살의 연구”, “소비의 사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권력에의 의지”, “앎에의 의지”, “진격의 거인” 같은 문구들도 이런 난망한 실태를 선연히 반영하는 증례들이리라.
그렇다면 이 문구들이 어찌 개선되면 더 나아질까?
“자살의 연구”는 “자살을 고찰한 연구”나 “자살연구”로, “소비의 사회”는 “소비사회”나 “소비하는 사회”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감옥에서 한 사색”이나 “감옥에서 비롯한 사색”으로, “권력에의 의지”는 “권력의지”나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나 “권력지향의지”로, “앎에의 의지”는 “앎의지”나 “지식의지”로, “문학의 이해”는 “문학에 대한 이해”나 “문학 이해하기”나 “문학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진격의 거인”은 “진격하는 거인” 등으로 표현되는 편이 더 낫게 보인다.
아래왼쪽그림은 잉글랜드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스위스 화가·작가 헨리 퓌즐리(Henry Fuseli; 요한 하인리히 퓌슬리Johann Heinrich Füssli, 1741~1825)의 1779년작 〈고대 조각품의 웅장한 파편들에 압도되어 절망감을 느끼는 예술가(The Artist Moved by the Grandeur of Antique Fragments)〉이고, 아래오른쪽그림은 프랑스 화가 쥘 르페브르(Jules Lefebvre, 1836~1911)의 1882년작 〈판도라(Pandor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