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5주(다) 사마리아인과 카르네아데스의 판자 13,07,14
김형수 비오 신부님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십시오.
사마리아 사람들의 뿌리를 봅니다. 아시리아가 이스라엘 북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바빌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 자리에 아시리아인이 이주해 왔습니다. 남아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아시리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과 다른 외국인들이 섞여서 살았습니다. 혼인으로 섞이고 종교도 좋은 것만 추려서 믿었습니다. 혼혈 백성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배생활이 끝난 다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아와서 성전을 짓는데 방해했습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천막에 살면서 성전을 짓는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때려 부수기도 하고 방해 공작도 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유행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하고 어울리는 것은 돼지고기를 먹는 것보다 나쁘다.」
신약성서에서는 그런 사마리아인들의 이야기를 좋게 전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영원한 생명의 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자기 동네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게 했습니다. 루카복음 10장에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유대인을 유대교의 제사장과 레위인은 모른 체하고 지나쳤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 구해주었습니다.
1. 착한 사마리아인과 카르네아데스의 판자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를 아십니까? 배가 난파되자 떠다니는 나무판자 한 조각을 붙잡고 간신히 살아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그리스의 철학자 카르네아데스가 문제를 냈습니다. 「나무판자를 붙잡고 간신히 견디는데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을 밀쳐내고 자신은 살았다. 그 살아남은 사람은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하겠는가?」 후대 사람들은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란 말로 얼버무렸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피해가 없음을 알면서도 구호행위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입니다. 강도를 당하여 길에 쓰러진 유대인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모두 그냥 지나쳤으나, 유대인과 적대관계인 사마리아인이 구해 주었다는 신약성서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법입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했을 경우, 법적으로 처벌 할 수 있다는, 도덕과 윤리에 대한 강제적인 법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응급의료와 관련된 법률에 착한 사마리아인 법과 비슷한 법이 있습니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5조 2항을 살펴보면 선의에 의한 응급 의료행위 도중에 상대가 더 큰 손상을 입는다 해도 면책하는 법입니다. 말하자면 돕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법이 아니라, 돕다가 잘못되어도 용서해주는 법입니다.
내가 위험할 때는 남을 해쳐도 된다는 법이 있습니까? 남을 돕지 않으면 나에게도 벌을 주겠다는 법이 있습니까? 이런 것 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남을 도울 때 설령 실수를 해도 용서해 주겠다는 법이 가장 따뜻한 법 같습니다.
2.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름과 주소를 아시는 분을 찾습니다.
프랑스의 한 젊은이가 눈 덮인 알프스 산을 오르다가 실족하여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그는 정신을 잃었고 한참동안 깨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의식을 회복해 보니 오두막집 따뜻한 방안에서 집주인이 정성스럽게 간호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자신이 살았다는 것에 너무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시군요. 이 은혜를 꼭 갚고 싶습니다. 이곳 주소와 은인의 이름을 가르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자 집주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하나 묻겠습니다. 저의 질문에 대답하실 수 있다면 저도 제 이름과 주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알고 계십니까?」 프랑스의 젊은이는 큰 깨달음을 얻고 나중에 훌륭한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남을 섬기는 사람이란 자신의 선행과 공로까지도 겸손하게 숨길 수 있는 미덕을 갖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높은 사람이 되려는 목적으로 남을 섬기는 사람은 오히려 진정한 섬김의 자세와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겸손하게 물러설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 남을 섬기는 사람이며,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을 특권을 받는 사람일 것입니다(매일미사 묵상에서).
3. 신문팔이 소년의 눈에 띈 착한 사마리아 사람
6,25전쟁 중 부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여섯 살짜리 꼬마가 신문을 팔고 다녔습니다. 번화가에서 넥타이를 맨 신사에게 신문 값을 못 받고, 발로 채이고 남은 신문을 흙탕물에 빠트려버렸습니다. 다음 날은 피난민들의 임시 집이 있는 동네를 골목골목 누비며 오르내렸습니다. 창문마다 등불이 켜지고, 골목은 점점 어두움이 짙어가고 있었습니다.
꼬마는 계속 “내일 아침 부산일보!" 하며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팔기는 몇 부 팔았지만, 아직 20부 정도나 남았습니다. 이대로 들어가면 본전도 못하는데 하면서, 열심히 외쳐 보아도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신문! 이리 와!"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달려갔더니 어수선한 하꼬방 속에 구둣방 아저씨가, 가빠 쪼가리를 무릎에 얹고, 구두를 잡은 채 저를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몇 살이니?」 「여섯 살입니다.」 「고향이 어디니?」 「저, 이북 강계입니다.」 먼저 왕 사탕 한 알을 주셨습니다. 입에 넣고 오물거렸습니다. 그때 아저씨가 물었습니다. 「몇 부 남았니?」「이만큼 남았습니다.」 「여기다 놔, 내가 다 살께.」 「아저씨 그러지 마세요. 아저씨 손해잖아요.」
구둣방 아저씨는 꼬마를 보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지금도 그리라면 그릴 수 있을 만큼 꼬마의 마음에 깊이 박혔습니다. 꼬마는 기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참, 고마운 아저씨다.
세상에 저런 아저씨들만 있으면 전쟁 같은 건 없었을 텐데!」
꼬마는 커서 신부가 되어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강론을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바꾸어도 구둣방 아저씨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이기정신부 이야기).
4. 예수님 비유 뒤에 숨어 있는 뜻을 찾아갑니다.
첫째로 강도 만난 사람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위험한 길을 왜 혼자서 어쩌자고 갔느냐?」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당한 사건을 놓고 왜 이 모양이 되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여기까지 왔느냐고 따져서는 이웃이 되어줄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강도가 생긴 사회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선민(選民)의 나라 이스라엘에 강도가 날뛰다니 말이나 되느냐? 사회가 왜 그렇게 되었느냐? 그 대책은 무엇이냐? 그런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일체의 말이 없습니다. 단지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을 뿐입니다. 다 죽어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피를 흘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한 생명이 있을 뿐입니다. 상황은 절박합니다. 돕느냐? 돕지 않느냐?
지난주에 전국적으로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많은 사람이 떠내려가고 가축도 떠내려가고 집들이 허물어졌을 것입니다. 예전에 초등학생이 그만 물에 빠져 떠내려갔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첫 번째 사람이 떠내려가는 어린이를 지나치면서 한 마디 했습니다.
「인생무상이로구나. 한 번 왔다가 한 번 가는 거지.」
두 번째 사람은 지나가면서 훈계를 늘어놓았습니다.
「부모 말씀을 잘 들을 것이지. 부모 애 많이 태웠겠군.
물에 빠져도 싸다. 네 잘못이다. 조심성이 있을 리 없지.
비가 오는데 뭐 하러 강둑에 갔을까?」
세 번째 사람이 말하면서 지나칩니다.
「사람의 죄 값은 사망이다. 네가 잘못했으니 네가 죽어야지!
그 부모의 죄가 얼마나 크면 저 어린놈이 저런 데 빠질꼬?」
네 번째 사람이 조용히 타이릅니다.
「최선을 다 해보아라. 살 길이 있을지 아느냐? 그러고도 안 되면
그저 조용히 기다려라. 바동거린다고 죽음이 피해가겠나?」
다섯 번째 사람은 이런 저런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우선 물로 뛰어 들어가 어린이를 끌어내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건은 구구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건져야하고 살려야하는 생명의 문제였습니다. 과거가 어떻고, 죄가 어떠하며, 율법이 뭐라고 하고, 도덕이 어떻고, 인생무상을 이야기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한 생명을 우선 살려놓고 볼일입니다.
5.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이유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 사람 가운데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대답했습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이르셨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과거가 어떻고 현재가 어떻고를 문제 삼을 것이 아닙니다.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사랑하면 참된 이웃이 생깁니다. 오늘도 이렇게 사는 사람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습니다(신명기30,10-14).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 율법서에 쓰인 그분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키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루카10,26-28).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물었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율법교사가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이르셨습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