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되니츠 제독은 구독일에서 U-보트 잠수함 중심의 해군을 발전시키고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무렵 독일 해군을 총지휘했다. 그는 또 아돌프 히틀러 사망 후에는 독일 총통 자리를 승계했다.
그는 연합군 측과 독일의 최종적인 항복교섭을 한 후 침략전을 매듭짓기도 했다. 되니츠는 잠수함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을 일으키고 중요성을 입증한 해군제독으로 전세계가 채택한 잠수함작전 전술과 절차를 확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되니츠는 1891년 9월16일 베를린 근방 그뤼나우에서 출생, 청소년 시절부터 군대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마침내 1910년 독일제국 해군학교에 입학했다. 되니츠는 1913년 해군소위로 임관한 후 독일 해군함대에서 복무했다. 이때는 그가 1916년 10월 신설된 U-보트 함대에 참여하기 전이었다.
U-보트는 독일의 신형 중형 잠수함으로 제1, 2차 세계대전 때 대서양·태평양에서 맹활약했다. 이 잠수함은 양산이 가능했고 소리가 없는 데다 급속 잠수 능력이 뛰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의 장갑순양함 3척을 연이어 격침해 1400명의 희생을 내는 등 일약 전세계적 이름을 얻었다. U-보트는 당시 군함과 상선을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 공격해 한때 영국을 기아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은 잠수함 건조가 금지됐으나 나치의 등장과 재군비정책에 따라 다시 U-보트를 건조하기 시작했다. 독일은 제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U-보트를 1158척 건조했으며 연합군 군함과 상선 5150척을 격침해 큰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200~300t이던 것이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1000t 이상의 것도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주력 잠수함인 U-7형은 수상배수량 790t, 속력 17노트, 항속거리 1만2000㎞에 어뢰발사관 5기를 장비했다. U-보트 공격으로 인해 연합군 측은 약 20만 명에 이르는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됐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 미국 여객선 루스타리아가 U-20에 격침당한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참전하게 된다. 전쟁 초기에는 수중 잠수함을 수색할 수 없었으나 영국은 곧 폭뢰와 아즈딕이라는 대잠무기를 만들어 대항했다. 결국 대잠부대와 잠수함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상태에서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잠수함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돼 완전히 새로운 전투형태인 잠수함 작전이 탄생했다.
되니츠는 처음 U-68에서 관측장교로 근무하다가 나중에 이 보트를 지휘하게 된다. 1918년 10월4일 영국 호송선을 야간공격할 때 U-68이 격침, 되니츠 함장과 선원이 모두 생포됐다. 그는 1919년 독일로 송환된 후 전후 해군에 남게 된 몇 안되는 해군장교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 잠수함 전력보유를 금지시켰기 때문에 되니츠는 한동안 수상지휘만을 담당했다.
히틀러의 등장과 해군전력 증강을 위한 ‘Z전력계획’에 따라 잠수함 건조를 다시 시작함으로써 되니츠는 U-보트 전단에 다시 합류할 수 있었다. 1935년 9월27일 에리히 래더 해군사령관은 되니츠에게 신형 U-보트 함대를 재건해서 지휘하라고 명령했다. 되니츠가 U-보트 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할 당시만 해도 독일 해군에는 잠수함과 수병 및 작전 매뉴얼 또는 전술이론서조차 없었다.
되니츠는 순전히 자신의 전투 경험과 다른 나라의 새로운 잠수함 전략을 연구해 독창적으로 독일 잠수함 전투이론 교본을 집필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무기체계와 잠수함의 속도 및 항속거리를 증가하는 추진기관 개량 등을 포함, U-보트 잠수함 설계를 감독하는 데 온힘을 쏟았다. 그는 이런 경험을 토대로 수병들의 훈련교본도 직접 저술했다.
되니츠는 또 U-보트 이론의 두 가지 기본 개념을 창안했다. 그는 U-보트의 기본 공격목표는 적의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전함이 아니라 상선이 돼야 한다는 점을 상관들에게 설득, 납득시켰다. 그의 두 번째 전술 개념은 잠수함 전투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U-보트가 집단적으로 전투전개를 해서 여우떼처럼 몰려다니며 적을 무찌르는 것이었다.
독일의 제한된 철강 사정 때문에 300척의 U-보트 잠수함 함대를 조직하려는 그의 목표는 당초 매우 지연됐다. 그러면서도 그는 수상해군 및 육군과 경쟁하지 않으면 안됐다.
1939년 9월1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되니츠는 56척의 U-보트만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이 가운데 22척만을 대서양 실전에 투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소수의 제한된 함대로 적과 싸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포격전 수병들을 선실로 대피시키기 위해 재래식 경고음을 내는 방법에만 의존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