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당신께서 558년 전 우리의 위대한 민족 유산인 한글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뜻깊은 날입니다. 말은 있었으나 글이 없어 어려운 중국의 한자를 써야 했던 그 시대에 자음 17자, 모음 11자를 만들어 백성에게 안겨주신 소중하고도 역사적인 날인 것입니다.
일신의 안위와 군림을 위해서는 국가권력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던 절대 왕권시절에, 무엇이 모자라 눈병까지 얻어가면서 그 고생을 자처하셨는지 우리 같은 범속한 미물들은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다만 밤늦도록 집현전의 학자들과 연구하며 토론하는 나랏님의 모습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담겨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뿌듯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적 우수성은 이미 입증되었습니다. 더구나 문맹의 백성에게 글눈을 뜨게 해주시고 고유한 문자를 통해 문화창달과 민족문화 계승의 토대를 마련해 주신 업적은 자손만대에 빛날 불멸의 치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많은 역대 임금 중에서 당신을 성군 중의 성군으로 꼽는 것도 이런 까닭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님!
당신이 애써 만드신 한글이 처음부터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천한 글이라며 오랫동안 따돌림을 놓았습니다. 모진 수난과 박해도 받았습니다. 민족혼 자체를 말살하려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서 우리의 말과 글자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지켜온 한글이건만 오늘 우리말이 처한 현주소는 안타까움을 넘어 비애감을 느끼게 합니다. 한글의 무차별 파괴현상이 이젠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21세기 문명의 총아인 휴대전화와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어문 규범의 훼손은 도를 넘어섰습니다.
조선시대 시조작품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는 인터넷에서 이런 버전으로떠다닙니다. `까마기 검다고 백로 쪼개냐???//겉이 검다고 배째도 검냐??? 우씨!@!!!//니나 그러치 凸 凸' 엄지손가락에서 만들어지는 통신언어나 문자 메시지는 더더욱 가관입니다. 문법파괴, 비속어, 은어, 이모티콘(그림말)남용은 한글의 오염 상태를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 .~할루~안냐세여. ~방가와염. 우씨, 오늘 노가다하러 교도소에 갔는뎅 담탱이 야리다 대땅 깨졌어염(T●T)”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윙크) 안녕, 오늘 공부하러 학교에 갔는데 담임에게 대들다 매우 혼났다(우는 모습의 이모티콘)”는 의미가 담긴 청소년들의 은어입니다.
언어가 갈수록 저속해집니다. 무분별한 유행어와 비속한 표현들이 판을 칩니다. 갈고 다듬는 사람보다 오염시키고 황폐화시키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거리에 나가보면 온통 외래어 간판과 국적불명의 상표들이 즐비합니다. 한글 맞춤법은 서툴러도 외국어가 유창하면 똑똑하고 유식하다는 대접을 받습니다. 외국어 조기교육론에 힘입어 유아와 초등학생들 사이엔 영어 학습의 열풍이 한창입니다. 공휴일이 너무 많다고 허구 많은 날 중에 한글날을 제일 먼저 솎아 버린 나라입니다. 대학입시에서도 모국어보다는 외국어 점수에 높은 가중치를 부여하는 국가 정체성이 불분명한 나라에 우리가 삽니다.
대왕님께서 만드시 소중한 한글이 그렇게 찢기고 거칠어지고 부서지고 무너져 내려도 속수무책이니 그저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더구나 당신 덕분에 국어교사를 자처하며 살아온 처지이고 보니 정말 면목이 없어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세종대왕님!
누가 뭐라고 해도 한글은 민족의 위대한 문화 유산입니다. 특히 558년 전 당신께서 창제하신 한글이 한 핏줄을 나눈 겨레에게 배달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까지 안겨주신 계기였음을 한글날에 즈음하여 다시 한번 기려봅니다. 아무쪼록 오늘 아침 집집마다 내걸은 태극기의 물결이, 대왕님이 베푸신 은총 안에서 숨쉬며 살아가는 미천한 것들이 그나마 당신을 향한 변함없는 감사와 경배의 뜻으로 받아주십시오. 부디 노여움과 서운함을 푸시고 어려운 상황을 딛고 저희가 한글을 강건하고 향기있게 가꾸어 가도록 늘 용기와 신념을 안겨 주시길 간곡히 기원하며 저의 글을 맺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