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찰사 권수(觀察使 權𢢝)
[생졸년] 1656년(효종 7)~1718년(숙종 44) / 향년 62세
[문과] 숙종(肅宗) 18년(1692) 임신(壬申)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丙科) 1위(04/06)
[생 원] 숙종(肅宗) 5년(1679) 기미(己未) 식년시(式年試) (生員) 3등(三等) 51위(81/100)
[묘 소] 원래는 금산군 진산면에 마련하였다가 1719년 4월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 사정리로 옮겨 부인 이씨(李氏)와 합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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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논산 출신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성(子誠), 호는 반곡(盤谷). 권겹(權韐)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권전(權佺)이며, 아버지는 집의를 지낸 권양(權讓)이다. 어머니는 홍사도(洪思道)의 딸이다. 권수는 권속(權謖)에게 입양되었다. 아들은 권적이며, 딸은 현감 김지경에게 출가하였다.
권수(權𢢝)는 1679년(숙종 5) 진사가 되고, 1692년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그 뒤 성균관전적, 형조좌랑을 거쳐 헌납에 오르고, 1701년 지평이었을 때 군비의 강화와 국가의 재정을 충실히 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왕자들의 원찰(願刹)을 지어야 한다는 말이 있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1703년 장령이 되고 1706년 사간을 거쳐 동래부사에 이르렀다.
이때 외국과 서신을 교환하는 가운데 어휘(御諱, 임금의 이름)를 잘못 쓴 일로 탄핵을 받았다. 1708년 홍문록(弘文錄)에 등록되었으며 1712년 향리에 물러나 있으면서 선대 세종의 선정과 학문적 열의를 본받아 선정을 베풀 것을 상소하였다. 이듬해 집의가 되었으며 1714년 사간이 되었다. 아들 권적이 강화부유수가 되었을 때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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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찰사 권공 묘갈명(觀察使權公墓碣銘)
관찰사 권수(權𢢝) 공이 숙종 무술년(戊戌年,1718, 숙종 44) 6월 9일 연산(連山,충청남도 논산시에 있는 면)의 반곡(盤谷)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3세였다. 고을의 선비들은 고하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어진 대부가 돌아가셨다.” 하였다.
공은 자가 자성(子誠)이니 사헌부 집의 휘 양[讓,1628년(인조 6)~1697(숙종 23)]의 아들이다.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찬성 휘 근(近)으로부터 습재(習齋) 휘 벽(擘), 석주(石洲) 휘 필(韠)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문장으로 이름났다. 석주는 현감 휘 항(伉)을 낳고, 현감은 휘 직(謖)을 낳았으나 후사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석주공이 시화(詩禍)로 죽었다는 이유로 특별히 공을 후사로 명하였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예닐곱 살에 이미 학문을 좋아할 줄 알았다. 장성하자 글솜씨가 날로 진보하였고, 교유(交遊)한 이들은 대부분 한 시대의 명사(名士)였다. 기미년(己未年,1679) 사마시에 합격하고 임신년(壬申年,1692) 춘당대 정시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고 규례대로 옮겨 박사(博士)에 이르렀다.
승진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의 감찰, 지평, 장령, 집의, 사간원 사간, 시강원 보덕, 병조의 좌랑과 정랑, 지제교가 되었다. 외직으로는 경상도와 충청도의 도사, 무안 현감(務安縣監),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었다. 갑오년(甲午年,1714), 승정원 승지에 발탁되고 차례로 승진하여 좌부승지가 되었다.
얼마 후 외직으로 나가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가 조정으로 돌아와 예조 참의(禮曹參議)가 되었다. 또 무주 부사(茂朱府使)가 되었다가 1년 뒤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옮겨 임명되었다. 공은 당시 이미 관직을 버렸는데, 전라 감영에서 파직하는 장계가 마침 왔기에 부임하지 못하였다.
공은 대각[臺閣: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통틀어 이르는 말]에 있으면서 강직하게 직분을 다하였다. 한번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사치하는 폐단을 극론하며,
“후궁의 의복을 멀리 연경 시장에서 사오고, 왕자의 원찰(願刹)을 다시 지은 것은 모두 성상(聖上: 임금) 의 덕(德)에 누가 됩니다.”
하였다.
기묘년(己卯年,1699) 과옥(科獄)이 3년 동안 판결이 나지 않자,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낙양(洛陽)의 감옥에 행차한 일을 인용하여 속히 처결하기를 희망하였다. 성상께서 처음에는 경솔하다고 배척하였으나 곧 그의 말을 따랐다.
임진년(壬辰年,1712) 정시(庭試) 때 고관으로 낙점을 받은 자가 도로 집으로 갔고, 궐문을 닫지 않아 응시자가 난입하였으며, 또 어두운 틈을 타서 시권(試券)을 던진 자가 있었다. 공이 가장 먼저 논죄하니, 이건명(李健命,1663~1722) 공과 이의현(李宜顯,1669~1745) 공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이어서 논열하였다. 고관 이돈(李墪)은 결국 벌을 받고, 오수원(吳遂元) 등 4인도 삭과(削科)당하였다.
또 통신사 조태억(趙泰億,1675~1728) 등이 나라를 욕되게 한 죄를 논하였다. 조태억 등이 일본에 갔다가 관백(關白,막부 쇼군)이 준 보배를 사양하지 않고 배에 싣고 건너 왔는데, 그가 돌아올 때 짐이 몇 리에 걸쳐 이어졌다고 한다. 국사를 맡은 대신이 북한산성을 쌓고 또 중성(中城)을 쌓으려 하자, 공은 나라를 위한 계책에 무익하다며 속히 중지하도록 청하였다.
진언한 내용은 모두 공론에 맞았으나 저촉되는 것이 많았다. 성품도 강직하여 남과 몰려다니며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두 번 홍문관에 선발되었으나 번번이 도당(都堂, 마을의 수호신을 모셔 놓고 제사지내는 단)에서 저지당하여 대부분 작은 고을을 맴도느라 조정에 벼슬한 지 30년 동안 관직이 크게 현달하지 못했다.
서울 관사의 아전은 대부분 관장(官長)에게 오만하게 구는데, 공이 가는 곳에서는 엄격하여 감히 올려다보지 못했다. 고을에 있을 때는 더욱 엄격히 단속하였으나 백성에게는 자애롭고 관대하여 속마음을 털어놓게 하였기에 무안에 있을 때는 어사가 표창하도록 아뢰었다.
상주는 영남의 큰 고을인데 공은 복잡한 일을 처리하는 재주가 뛰어나 여유롭게 대처하였다. 그가 시행한 일은 물을 담아도 새지 않을 정도였는데, 대부분 학교를 진흥하는 것을 우선하였다. 동래 사람들이 공의 청렴결백을 칭찬하여 근세에 없던 일이라고 하였다. 공의 어린 딸이 작은 거울 하나를 청했는데 이 또한 허락하지 않았으니 다른 일은 알 만하다.
공은 형 둘과 아우 하나가 있었다. 변(忭,1651~1726)은 대사헌(大司憲)을 지냈고 높은 절개가 있었으며, 성(𢜫,1653~1730)은 판서(判書)를 지냈고 업(𢢜,1669~1738) 역시 판서를 지냈는데 모두 재주로 드러났다. 공의 집안은 집의공(執義公) 이후로 모두 어렵게 나아가고 쉽게 물러나는 지조가 있었다. 논자들은 공의 청고(淸苦)함이 대사헌공과 앞을 다툴 만하다고 하였다.
공(公)은 세 번 혼인하였다.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장헌대왕(莊憲大王)의 별자 밀성군(密城君) 침(琛)의 후손으로 부친은 생원 상응(尙膺)이다.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통덕랑 석보(碩寶)의 딸이다.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사인 이현(以鉉)의 딸이다. 이부인은 정숙하고 온화하여 친족들이 어질다고 칭찬하였다.
구부인은 순종하고 신중하여 공의 청렴한 덕을 도와 이룩하였다. 아들 적(䙗)은 문과에 급제하고 딸은 현감 김지경(金趾慶)에게 시집갔으니 모두 이씨 소생이다. 적은 족자(族子) 진(振)을 후사로 삼았고, 딸의 아들은 한태(漢泰)이다. 적은 현재 강화부 유수가 되어 공을 이조 참판으로 추증하였다. 공은 처음에 진산(珍山)에 장사 지냈다가 기해년(己亥年,1719) 4월 본현의 사정리(沙亭里)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 지내고 이 부인을 부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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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사람됨이 준결하고 방정하며 온화함으로 균형을 이루었으며, 평소 게으른 모습을 하지 않았다. 성품이 책을 좋아하여 거의 손에서 놓지 못할 지경이었는데,《심경(心經)》과《근사록(近思錄)》에 더욱 깊이 힘을 쏟았다. 또 기질이 편벽(偏僻)된 점을 엄격히 바로잡아 만년에는 덕성이 더욱 완벽해졌다.
어버이를 섬길 적에는 깊은 사랑이 있어 용모를 부드럽게 하였으며 한번도 그 뜻을 어기지 않았다. 병이 들면 근심을 다하고 상을 당해서는 슬픔을 다하고 제사 지낼 때는 공경을 다하였다. 가법이 몹시 엄격하여 자제들이 앞에서 웃지 못하였으며, 친척에게 돈독하고 이웃에게 어질었다. 벗에게는 절대 의례적인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 스스로를 대우할 적에는 담박하여 비용을 절약하고 근본에 힘써 일을 벌일 때는 터럭만큼도 남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다.
옳고 그름과 바르고 사악한 것을 구분할 때는 마치 일도양단하는 것 같았다. 재야에 있더라도 조정의 잘못을 들으면 근심하고 비탄하며 종종 먹는 것도 그만두었다. 남의 선하지 않은 행동을 보면 반드시 분명한 말로 통렬히 지적하였으나 그가 고치면 그만두었다. 고을 사람들은 공의 한마디 말을 들으면 칭찬의 경우 영예로 여기고 꾸짖음인 경우는 부끄러워하였다.
얼굴을 알지 못하는 자도 오직 공에게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고, 그의 집 앞을 지나면서 모두 숙연히 공경하였다. 공의 공정한 마음과 강직한 도리가 비록 조정에서 시행되지는 못하였으나 고을에서 시행된 것이 이와 같았다. 시문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나는 공의 친구의 아들로 외람되게 돌봄과 사랑을 받았는데, 40년 동안 시종일관 생사와 성쇠 때문에 마음을 달리하지 않았다. 아,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온화한 군자여 칭송이 그치지 않는다.” 하였는데, 공을 두고 한 말이리라. 명은 다음과 같다.
화살은 곧고 / 矢則直兮
얼음은 맑네 / 冰則淸
이것으로 공을 형상하니 / 以此狀公兮
오랜 세월 지나도 살아 있는 것 같네 / 雖百世其如生
반곡의 집과 / 盤谷之閭兮
사정리의 무덤이여 / 沙亭之阡
지나는 자는 반드시 공경하리니 / 過者必式兮
누가 어진 대부라 하지 않으리 / 疇不曰大夫之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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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관찰사 권공 묘갈 :
이 글은 권수(權𢢝)의 묘갈명이다. 권수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성(子誠)이다. 1656년(효종7) 태어나 1718년(숙종44) 6월
9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석주공이 …… 이유 :
권필은 광해조의 권신 유희분(柳希奮)을 풍자하는 시를 지었다는 이유로 장(杖)을 맞고 유배가는 도중에 죽었다.
[주03] 한(漢)나라 …… 일 :
한 명제는 시어사(侍御史) 한랑(寒朗)의 간언에 따라 낙양(洛陽)의 감옥에 친림하여 죄수들을 심리하고 억울한 죄수를 석방하였다.
《資治通鑑 卷45 漢紀37 顯宗孝明皇帝下》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