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력
글 德田이응철
누군가의 글에서 빛의 속도로 변하는 시대를 따라가다 보니, 꼬리에 매달려 쫒아가는 것도 기운이 달려 일상에서 지칠 지경이라고 토로한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려가다가 말도 자신도 지치지 않았는데 잠깐씩 멈취 선다고 한다. 그 이유는 내 영혼이 미쳐 못 쫓아올까 봐 기다리고 있다고 대답하더란다. 아날로그 세대로 적극 공감이 간다.
빠르게 변하는 세월을 돌아보면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제주도 한수원 입구에 써 붙인 말이 떠오른다. 수급불류월 水急不流月 물은 급히 흐르지만 물 속에 달은 흐르지 않는다고 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물결 속에서 이웃과의 인간관계 역시 모래알처럼 삭막하기만 하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집에 다녀간 친인척들은 단 한 명도 없다. 물론 도 농간 차이는 있겠지만 시골도 크게 삭막하다. 물론 시대가 맞벌이가 주가 되면서 모든 만남이 제 3의 장소에서 성사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가끔은 물어물어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다. 지금은 가스 점검원이나 던지기 신문 배달과 마트 배달원이 전부이다.
60년대 초등학교 다닐 때 형님은 군대에 가셨다. 공회당에 모여 치약 칫솔 비누 수건이 든 가방을 배급받고 축하를 대대적으로 받으며 군대에 갔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근근이 살던 여섯 식구는 군대 간 날부터 어둠처럼 고생이 내려앉았다. 딸 둘, 형수와 도련님 둘이었다. 장정이 군대에 가니 농사일에 비상이었다. 어머님은 식구를 거느리고 종일 들판에 나가 땅을 파며 계절에 뒤질까 봄부터 가을까지 많은 식구 입에 풀칠하기에 고생을 빗물처럼 맞아야 했다.
초목지시 草木指示라고 특히 농사는 제철에 곡식을 꽂아야 한다. 농가월령가를 보라, 농사철이면 매일 이웃과 일을 주고받는 품앗이를 해야 모심을 때나 타작 때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 부자 몇 집은 돈으로 일꾼을 사기도 하지만, 가난한 대부분은 언감생심이다. 새벽같이 모를 심고 해가 질 무렵에야 끝나고 돌아오는 품앗이라 봄 농번기 땐 엄니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다.
모두가 힘들게 살아가던 60년대 어린 내 가슴에 따듯이 남아 흐르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울력(雲力)이다. 울력은 우리나라 조상님들이 동네 일손이 부족한 집을 무료로 도와주던 아름다운 미풍양속이다.
울력은 순수한 우리말이지만, 많은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 일한다는 운력雲力이 변해서 되었다고도 한다. 동네 주민들이 길흉사나 군대에 가서 일손이 부족한 집을 수시로 도와주는 협동방식이다.
동네에서 모두 힘을 합쳐 공동으로 모여 마을회관을 짓거나 공동판매하던 두레와 일을 주고받던 품앗이와 계모임이 있는데, 일손이 부족한 집에 무료로 봉사하는 울력이야말로 눈물이 나도록 고마워 잊히지 않는다. 울력의 수혜자인 당시 초등 2학년 꼬맹이의 눈에 비친 울력이 달빛처럼 한평생 잊히지 않는다.
추수 전, 가장 걱정거리는 무엇인가? 논에 볏단을 묶어 쌓아놓으면 집 마당으로 져 날라야 한다. 천수답으로 벼를 논에 널고 하늘을 보며 말려 볏단을 묶어 쌓아놓지만, 고개를 넘어 집까지 옮기는 일은 참으로 큰일이다. 지금처럼 경운기도 없이 오직 등짐으로 져 날라야 한다.
그런 어려움 속에 어머니 얼굴이 활짝 핀 것은 어느 날 새벽이었다. 동네 청년 대여섯 명이 고개 넘어 볏단을 마당에 옮겨준 것이다. 무임금으로 반상회 때 정한 모양이다. 새벽에 벼를 져다 주면 엄니는 조반을 정성껏 대접하셨다. 두부찌개나 포기김치를 대접하시고 일꾼들은 우리 집에서 아침을 먹고 일터로 나간다. 울력은 밝은 달밤에도 이루어졌다. 논에 쌓아놓은 볏단을 마당까지 져다 주던 게 어린 마음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뻐하시는 엄니를 따라 나 또한 덩달아 가슴이 뛰곤 했다.
어디 그뿐이랴! 입동이 지나면 집집이 겨울 땔감을 장만하는 일이 큰 문제였다. 그럴 때도 저녁으로 산에 가서 솔 검불 한 짐씩 지고 우리집 텃밭에 낟가리를 만들어 준다. 산에 가서 엄니가 나무해 오긴 너무 힘든 일이다. 어린 나는 그렇게 우리 마당에 나무를 한 짐 풀어놓는 것이 너무 행복해 춤을 추곤 했다. 시골에서 긴 겨울 삼동을 이겨내는 땔감은 연탄이 아니라 나무였다. 엄니는 불쏘시개처럼 쌓아준 솔 검불은 지극히 아껴, 여기저기 떨어진 삭정이를 줍고 연기가 나며 피득피득 타지도 않은 청수아리로 겨울 삼동을 나시곤 했다.
이제 어머니도 형님도, 새벽밥 끓여주셔 상급학교 다니게 해준 형수님도 곁에 없다. 고생을 밥 먹듯 하시다 모두 이승을 하직하고 칠순이 넘어 혼자 덩그러니 덕분에 밥술은 먹으며 새 물결 속 꽁무니에서 살아가지만, 머릿속에는 언제나 훈훈하게 남아 내 영혼을 풍성하게 해준 울력(雲力)은 영원하리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