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변화로 인한 물 부족 현상, 식수 부족은 오늘날 지구 곳곳에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미래의 전쟁은 석유 때문이 아니라, 물 때문에 발발할 것이라 예상하기도 한다. 이것이 현대적 현상만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 인류가 존재한 이후부터 물 부족 현상은 부족 간 갈등의 주요 원인이었다. 경쟁자를 뜻하는 영어 ‘라이벌’(rival)도 강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서로 대치하던 상황의 긴장 관계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논농사를 중심으로 하던 우리 문화에서도 물은 항상 주요 과제였다. 최근에는 4대강 사업을 둘러싼 전반적 상황과 그 이면에 감추어진 불의한 정경유착 과정 등이 우리에게 물에 관한 진지한 성찰을 촉구한다.
‘녹색성장’을 기치로 벌인 4대강 사업은 결과적으로 ‘녹조성장’만을 초래하였다. 인간의 절제되지 못한 탐욕과 무분별한 개발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창조한 피조세계를 관리할 청지기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자연의 자체적 복원력에 의존해야 할 존재임을 깨닫게 하였다. 이 글은 4대강 사업에 들어간 천문학적 숫자만 보고, 그 사업을 적법한 절차 없이 빠른 시일 안에 밀어붙이고 뒷감당을 할 수 없이 만들어버린 사람들만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신교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관여해서 결정을 내리고 추진했던 사업인 만큼, 한국 개신교의 모습을 자성하는 의미에서 여성신학, 물, 강, 생명이라는 화두를 던져 성찰하고자 한다.
중세 여성 신비주의자들의 하나님 인식
중세 여성 신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힐데가르트 폰 빙엔을 꼽을 수 있다. 힐데가르트는 한국 고유의 천지인(天地人) 사상인 하나님, 인간, 자연과의 삼중적 관계성에 그 누구보다도 주목했던 여성신학자였다.2
본래 푸르도록 의도되었던 사람들에게는 이제 여하한 종류의 더 나은 삶이란 없습니다. 단지 무력한 불모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람이 극도로 무시무시한 악취 곧 이기적인 행실들로 시달림을 받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보시는 앞에서 온 세계가 순수해지기를 원하십니다. 지구는 상처를 입어서는 안 됩니다. 지구는 파괴되어서는 안 됩니다. …3
그녀는 ‘하늘로 향한 창’ ‘마당으로 열린 창’ ‘정원으로 열린 창’이라는 상징성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성과 인간과 인간, 인간과 피조물의 수평적 관계성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한다는 것은 이웃하는 피조물과의 수평적 연대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삼중적 관계성 안에서 가능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구약성서의 예언 전통, 특히 아모스가 강조한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공동선을 향한 사회정의가 결합된 것이다.
기독교 역사의 전통 안에서 이러한 포용적 시각을 드러낸, 친 생태적인 생각들은 기독교 주류에게서가 아니라 오히려 비주류 전통에서 강조됐다.4 바꾸어 말하면 기독교 주류는 인간 중심의 ‘적색 구원’에만 집중하였던 반면에 피조물 중심의 ‘녹색 구원’의 문제에는 둔감하였다는 것이다. 화해자 예수의 구원 범위가 인간에게만 집중된 것이 아니라, 우주적 구원으로 확대되어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기쁘게 자기와 화해시키셨습니다.”(골 1:20, 표준새번역)
물은 정화와 거룩함의 표상
한국 문화와 전통종교에 근간을 이루는 도교와 노장사상에서 도(道)는 자주 물에 비유된다.(필자의 책 《또 하나의 여성신학 이야기》461~473쪽 참고) 노자의 도덕경 8장은 상선약수에 관한 것이다.5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덕목 중 최고 위치에 선이 자리하고 있다. 물은 모든 것을 이롭게 하고 다투지 않는다. 뭇사람이 싫어하고, 낮은 자리, 자기라는 것이 따로 없는 자리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도에 가깝다고 했다. 노자는 또한 도덕경 8장에서 물과 움직이는 때, 자연의 때에 순응해야 함을 강조한다. 인간이 조작한 때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따르라는 뜻이다. 그 자연의 이치를 거슬려 조화가 깨질 때 자연은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한다.
물은 만물에 이로움을 주며, 물이 존재하는 방법은 뛰어난 적응력이고 융통성이고 조화이고, 자신의 모양이나 위치를 굳이 폐쇄적으로 고집하지 않으며, 시끄럽게 다투지도 않고 만물에 조용히 이로움을 준다는 것이 도덕경이 전하는 물에 대한 가치이다. 이에 반하여 우리는 너무 상업적 가치로만 물을 계산해 4대강의 파괴 등 위기를 초래했다. 생명체를 살아 있게 하는 원소, 생명과 떼어놓을 수 없는 물의 가치는 바로 다름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그것이 최고의 선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물은 아시아의 종교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고등종교에서 공통적으로 정화와 거룩함의 표상으로 사용된다.6 물은 유연하여 모든 것에 창조적으로 순응하는 놀라운 특성을 지니지만, 강력한 힘과 파괴력을 지니기도 하며,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대표적 표상이기도 하다. 특히 도교에서 물로 비유되는 도의 특성은 여성성의 원리와 근본적으로 통한다. 도교적 특성과 농경문화에 근거한 우리 문화의 구석구석에서 물과 관련한 상징성을 찾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도교에서 천계신이라고 하는 북두성군이나 자연신 가운데 대표적인 용왕이 모두 물과 관련이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견우와 직녀 이야기는 물과 관련된 유명한 신화이다. 이처럼 수경작물인 벼농사 위주의 농경문화를 근간으로 하는 우리에게서 물에 대한 염원은 아주 간절한 것이었다.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하던 우리 어머니들의 이야기 또한 이와 관련 있다. 우리의 전통문화가 한국교회에 토착화된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새벽기도일 것이다. 한국에서 새벽기도를 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은 1904년 9월 이화학당 부흥회와 관련되어 언급된다. 길선주 목사의 경우 개종 이전 수행의 방법을 따라 기도하던 습관이 새벽기도로 이어졌고, 1906년 가을부터 교회에서 이를 시행했다. 이것이 우리가 익히 아는 1907년 대부흥운동의 촉발 요인이 되었다. 즉 한국 여성들이 천지신명께 가족의 건강과 자녀를 위하여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하던 것이 새벽기도회로 토착화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7, 새벽기도는 한국교회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그 정한수는 북쪽 하늘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이 맑은 물을 하늘에서 부어주듯 세워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새벽녘에 떠 올린 물로, 그때 뜬 물이 가장 정결한 것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약을 달일 때, 아픈 아이들에게 먹일 때 이 물을 쓰는 등 치유의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여기에서 칠성은 도교와 불교의 영향으로 비를 관장하고 인간의 재물, 수명과 운명을 관장하는 신으로 모셔져서 이를 위하여 칠성단을 쌓고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하던 습관이 유래한 것이다. 이처럼 물이라는 아이콘은 우리 문화와 민간 신앙에서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리고 이것은 긍정적인 측면에서건, 부정적인 측면에서건 한국교회 안에 토착화되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융화되었다.
물은 숨어있는 힘 쉬지 않는 창조 죽지 않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다.8
생태 여성주의의 눈으로
우리나라는 유엔(UN)이 분류한 물 부족 국가에 들어가 있다. 그런데도 무분별한 토지개발과 산림벌채, 골프장이나 스키장과 같은 시설을 확장·유지하기 위하여 우리의 자연, 특히 하천을 병들게 한다. 그뿐이 아니다. 2000년을 전후하여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을 비롯한 주한미군에 의한 하천 오염, 농지 오염 또한 심각한 상태이다. 불평등한 한미 SOFA 협정9이 개정되거나, 이행되지 못하고 한국 정부의 미온적 대처로 인하여 오염이 악화되고 있다.10 이러한 형태의 환경오염은 한국의 분단 상황에서 파생된 피해이기 때문에 통일을 지향하는 한국 여성신학이 주목하여야 할 중요한 측면이다. 군사주의적 체제의 고착화로 우리의 땅과 물이 유린당했기 때문이다.
인도의 생태 여성주의 운동가 반다나 시바가 말하듯이 생태 여성주의는 다름이 아니라 옛적 지혜를 되살려내는 것 바로 그 자체다.11 우리에게는 농경문화의 자연친화적 지혜와 두레 정신의 회복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민중의 생존권이 우선시되었던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마찬가지로, 민주화와 인권 문제가 더 중요하였던 한국의 신학적 담론에서 생태 여성주의에 대한 논의는 아직까지도 신학적 담론과 교회의 실천 장에서 제대로 육화되지 못하였다. 1990년대 이후 우리의 신학과 교회에서는 살림을 화두로 하는 생명운동이 확산되고, 실제적으로 교회 여성이나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살림 운동도 다각적으로 전개되지만, 보편화되기까지 가야 할 길이 멀다.)
인간의 생명은 어머니의 양수에서 시작되며, 물은 인간의 몸과 지구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12 물은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단순한 H2O가 아니라, “여성주의적 생태적 생명의 성체”13이며, 우주적 에너지의 여성적 형태이다. 물은 하나님에 의하여 인간에게 부여된 선물이며(창 1:2), 이것은 우리의 독점물이나 상품이 아니다. 물은 이웃과 우리의 후손들과 나누어야 할 공동의 자산이다.14 즉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어진 물에 대한 책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서가 드러내는 물의 의미
물은 동양사상과 종교, 우리 전통문화에서의 중요한 상징어가 될 뿐 아니라, 성서에서도 핵심적 개념이다. 심지어 도덕경에서 상선약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물은 성서에서 세례를 통한 갱신, 정화, 축복, 생명과 희망의 상징이다.15 그 반면, 죄에 대한 심판은 갈증, 가뭄이나 홍수16로 상징되어 나타난다. 물은 또한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실현되는 궁극적 종말론적 비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표상이다.(사 43:19-20; 겔 47:12; 계 21:1; 22:1-2) 창세기(창 37-50장)와 출애굽기에서는 물 부족과 가뭄이 분쟁의 원인이 되고, 사람들을 난민으로 만들고, 삶이 위기에 처하게 되는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하는 과정에서 물은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17 하나님은 바닷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 병사의 손에서 구하셨으며(출 15:1-10),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출 15:25), 갈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심으로 물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여러 부분에서 경험한다.
여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역시 출 17:1-7에서 미리암의 바위 혹은 미리암의 샘 이야기일 것이다. 이와 연관된 민수기 20:1-13의 내용도 빠트릴 수 없다. 미리암은 랍비 전승에서 모세와 아론에 이어 세 번째 민족의 지도자로 묘사되며, 목마름에 지친 이들에게 물을 제공해주며, 그의 죽음 후 물이 말랐다고 성서는 전한다.18 무생물인 바위가 생명을 주는 샘으로 바뀌는 것(시 114:8; 사 48:21)이 미리암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바울은 출애굽을 언급하며 그 바위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상징화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고, 모두 똑같은 신령한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과 동행하는 신령한 바위에서 물을 마신 것입니다.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습니다.”(고전 10:3-4, 새번역) 물을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신약성서에서 성육화된 생명 샘의 그리스도로 드러난 것을 증언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물은 특별히 생명의 원천이며 세례를 통한 정화의 상징적 기능을 갖는 점에서 여러 형태로 강조되고 있다. 특히 요한복음은 물의 이미지를 기독론과 관련하여 강력하게 부각시킨다. 영생에 이르는 샘물(요 4:1-15), 생명수(요 7:38) 이야기가 그러하다.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긴 대화체로 구성된 수가성과 예수의 대화19를 다룬 요한복음서 말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하나님의 선물(δωρεα)”(요 4:10)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또한 요한복음은 생명을 주는 샘이면서도 그 자신 갈증에 시달리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예수의 면모를 어김없이 드러낸다.(요 19:28)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의미를 상징화한 것이기도 하다. 예수가 갈증에 시달리며, 저주받을 것을 짊어지셨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갈증이 해소되었고, 저주가 아닌 축복이 우리의 몫이 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을 억압에서 자유로 인도하시는 출애굽 사건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물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신학적 생태 여성주의의 논의에서 포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다. 지금은 “모두를 위한 밥”을 위한 기도는 물론, “모두를 위한 물”에 대한 기도가 새삼 요청되는 때이다. “목마른 자에게 생명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신”(계 21:6)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한국적 생태 여성주의 신학이 “타는 목마름으로 생명의 물에 대한 갈망”20을 드러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신학의 과제 중 하나는 자신의 상황을 주체적으로 말할 수 없거나 그 기회를 갖지 못하는 ‘서발턴’21을 대신하여 변호하고(Advocacy) 그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필자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서 서발턴의 범주 안에 자신의 주체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자연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이웃을 보살펴 주는 것을 율법의 가장 큰 완성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인정하셨던 예수의 말씀(눅 10: 25-37)에 착안하여 볼 때 그 강도 만난 이웃에는 자연도 포함되어야 한다.
바로 그러한 배려와 구체적 행동이 공의(미쉬파트)와 정의(체다카)를 향한 예배로 이어지고, 하나님과 만난 결과물로 드러나야 한다. 이미 구약 예언자 전통에서 드러난 하나님과 인간과 피조물과의 삼중적 관계성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모습에 비추어 끊임없이 점검되어야 한다.
자신을 ‘집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암 7:14)이라고 칭했던 구약의 예언자 아모스는 예수 탄생 이전 750여 년 경 살았던 인물이지만, 21세기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예언을 전한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암 5:24, 표준새번역) 널리 읽히는 아모스의 이 메시지는 정의와 공의를 강조하기 때문에 중요할 뿐 아니라, 물과 강을 형상화된 언어를 사용하여 그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양을 치고 나무를 가꾸는 노동을 통하여 생태적 감수성을 지녔던 예언자 아모스가 강조하는 “물”과 “강”이란 계절에 영향을 받아 쉽게 마르는 시내가 아니라, 일 년 내내 흐르는 강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소수 개인의 이윤이 극대화되고 다수가 빈곤화되는 절망감에 쌓인 이 가뭄의 시대에 긴급하게 다시 회복하여야 할 정신일 것이다.
이제 4대강 사업의 상처는 우리에게 값비싼 교훈을 곳곳에 남겼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자연의 재생 회복력으로 다시 강물이 흐르게 되어,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우리 사회 곳곳의 부조리한 찌꺼기들도 같이 씻겨 내려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여성신학의 존재 이유
"여성신학은 이원론적 대립을 거부하며 성서의 본래적 뜻에 따라 총체적 조화를 추구하는 신학이다. 그것은 남과 여, 인간과 자연, 영과 몸, 믿음과 행위, 이 땅 위에서의 정의와 우리 영혼의 구원, 이승과 저승, 세계와 하나님 등으로 이원론적인 대립과 분리를 수용하지 않는 것이다."22
▲ 필자가 번역한 도로테 될레의 책.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
이제는 우리가 시급히 “떨쳐 일어나 방향전환”23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철저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주류 기독교 신학과 담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금까지 교회와 신학이 인간중심주의적인 시각에만 너무 몰입한 나머지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의 차원은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포함하는 감추어진 진실과 아울러 지금까지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는 여성신학의 존재 이유(raison d'être)가 여기에 있다.
여성신학은 다양성을 회복하고, 포용성을 연습하고 실천하며,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역동성을 지향하도록 돕는다.24 만약 여성신학이 획일성을 추구하고, 배타적이 되고, 정체된다면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현대사회와 전 지구적 위기상황을 고찰할 수 있는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면서 우리만의 독특한 문제 상황을 아울러 고려하고 해법을 찾아가는 신학적 노력은 참으로 소중하다. 이와 같은 상황성의 고찰은 성서적 근거 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그 성서해석이란 단순히 문자주의를 확산하는 것이나, 이념적으로 주관적 성향을 성서에 주입하는 것(Eisegese)이 아니라, 성서의 본래적 뜻을 찾아내서(Exegese)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아모스의 메시지를 우리의 상황에 적용해보자. 그는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고, 부당한 부를 축적하는 가운데 형식적인 예배만을 반복하던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사람들이 배고파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암 8:11, 표준새번역)
각주) 1. 제목은 필자가 옮긴 도로테 쥘레의 책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한들)의 제목이다.
2. 여성신학의 시작을 어느 시점으로 잡을 것인가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흔히 엘리사벳 캐디 스탠튼의 “여성의 성서”를 그 출발점으로 잡기도 하지만, 필자는 중세 여성 신비주의자들이 여성신학의 단초를 놓았다고 생각한다. 신 인식과 신 존재 증명에 대하여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이 주도권을 갖고 교회와 신학의 주류로 자리 매김되어 있었던 중세기에 대학과 학문의 영역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던 여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방법론을 새롭게 전개하고 남성중심의 제도적 권위에 도전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 인식에 대한 이성적 접근만을 시도했던 남성들에 맞서서 오감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법을 전개했고, 그러한 신 체험의 내용을 글로 표현하여 글쓰기의 원형이 되었다. 이들은 각각 고유한 특징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보편화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여성신학이 지향하는 가치들을 이미 담보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상호 연관성, 포용성, 유연성 등은 이들 중세 여성 신비주의자들에게서 공통분모로 찾아볼 수 있는 경향성이다.
3. Hildegard of Bingen, Meditations with Hildegard of Bingen, tr. by Gabriele Uhlein, (Santa Fe, N.M. : Bear & Co, 1982), 77. 정미현, ‘생태 여성신학의 선구자: 힐데가르트 폰 빙엔’, 《또 하나의 여성신학 이야기》 (한들출판사, 2007), 65-66쪽.
6.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2005년 5월 4‐8일, 유럽교회 환경연합회 주관으로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회의에서 7개 주제 중 물 분과에 참여하여 선언문을 작성하였고, 물을 화두로 종교간의 협력이 실천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였다. www.ecen.org(2016년 11월 25일 방문) 참고.
8. 반병섭의 시 <물 모든 것의 어머니> 일부. 《물은 스스로 소리가 없지만》(순수문학사, 2003), 97쪽.
9. SOFA 합의의사록 제3조 제2항. “대한민국 정부와 합중국 정부는 1953년 상호방위조약에 의한 대한민국에서의 방위활동과 관련하여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인정한다. 합중국 정부는 자연환경 및 인간건강의 보호에 부합되는 방식으로 이 협정을 이행할 것을 공약하고, 대한민국 정부의 관련 환경법령 및 기준을 존중하는 정책을 확인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합중국 인원의 건강 및 안전을 적절히 고려하여 환경법령과 기준을 이행하는 정책을 확인한다.”(2001. 1. 18)
10. 녹색연합 홈페이지(greenkorea.org) 참고(2017년 4월 25일 방문). 물론 한국에서 수질 오염의 문제는 비단 미군기지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미군기지 환경오염 사건은 주변 논농사에 돌이킬 수 없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에 덧붙여 최근 용산 미군기지 이전을 둘러싼 환경오염과 정화문제가 대두되는 실정이다.
11. Cf. Maria Mies and Vandana Shiva, Ecofeminism, (New Jersey: Fernwood Publications, 1993), 13.
12. 물을 생태신학적 차원에서 다룬 책으로 다음을 참조. Ama Tofaeono, Ecotheology: aiga‐the household of life, (Erlangen:Erlanger Verlag, 2000).
13. Aloysius Pieris, Feuer und Wasser. Frau, Gesellschaft, Spiritualität in Buddhismus und Christentum, (Basel:Herder Verlag, 1994), S. 142. 피에리스는 이 책에서 물을 여성성에, 불을 남성성으로 비유하는 우주적 상징성의 다양한 의미를 불교와 기독교의 측면에서 다루며, 물과 불이 상극이 아니라, 상생이어야 하고, 대치가 아니라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말한다.
14. 크리스토프 스튀켈베르거 지음, 정미현 옮김, 《환경과 개발: 사회윤리학적 접근》 (한국신학연구소, 2006) 참고.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이 지구에 머물고 가는 손님이라고 표현하고, 손님으로서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15. 물뿐 아니라 강과 호수는 성서에서 중요한 장소성의 의미를 지닌다. 대표적으로 예를 들어 요단강은 구약성서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고(창 13:10; 수 1:2, 3:1-17; 삼하 17:22; 왕하 5:1-14), 신약성서에서도 요단강은 물 세례와 관련하여 요한의 중요한 사역지이며(마 3:6; 막 1:5; 요 1:28; 3:26; 10:40), 예수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마 3:13; 막 1:9; 눅 4:1). 또한 갈릴리 호수는 예수 사역의 구체적 장소였다.(마 4:18-21; 마 4:23, 27:55, 26:32)
16. 물론 홍수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은 활을 내려놓음을 뜻하는 무지개의 표상으로 화해를 뜻하는 새로운 언약의 상징이 되었다.(창 9:13)
18. H. A. Rapp, “Jüdische Traditionen zum Wasser in den Exoduserzählungen, Wasserläufe,” OeKU, Bern 2003, S. 7ff; R. Grünenfelder, “Durch die Wüste zur Quelle, Wasserläufe,” OeKU, Bern 2003, S. 16.
19. 수가성의 우물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아스칼 인근 지역에 위치한 세겜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란을 떠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통과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약속의 땅을 처음으로 밝혀 주신 곳이다.(창 12: 6) 또한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돌아와 장막을 치고 단을 쌓아 정결하게 하였고(창 33:18-20),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 제단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창 33:20)이라고 명하였던 곳이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총리대신을 지닌 요셉의 시신이 안치된 곳이다.(수 24:32) 이렇게 아브라함과 야곱의 후손들이 그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던 이 터전에서 우물은 일상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소중한 원천이었고 여기서 예수와 수가성 여인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24. 여성신학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정의에 비추어 인간의 정의를 실현하도록 노력하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하여 진정성 있게 변호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유엔이 2016년부터 향후 30년간 전 지구적으로 함께 노력해야 할 ‘지속가능개발 목표’(The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17개 조항을 발표했다. 이 17개 조항과 169개의 세부 조항 가운데 여성신학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내용들이 많이 있다. 특별히 물 관련 조항과 젠더 관련 조항 등은 여성신학적으로 더 주목하며 협력을 모색하여야 할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지구 남반구 사람들에게만 주로 해당되었던 이전의 UN ‘새천년 개발목표’(The Millennium Development Goals)와 달리 이 ‘지속가능개발 목표’는 지구 남반구뿐 아니라, 북반구에서도 함께 협력하고 실천해야 할 일이다. 지구 북반구와 남반구의 교량 역할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한반도에서,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할 당위적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