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불교에서 말하는 육근六根으로 눈, 귀, 코, 혀, 몸, 뜻을 가리킴)으로 사물을 접하면서 순간순간 기쁘다, 슬프다, 두렵다, 외롭다 하는 갖가지 감정을 경험합니다. 좋아하고 사랑할 때는 너무 기뻐서 천국을 경험하고, 미워하고 원망할 때는 너무 괴로워 지옥 속에서 허우적대지요.
그렇다면 우리를 기쁘게도 하고 괴롭게도 하는 감정은 어떻게 일어나는 걸까요?
감정은 부싯돌이 부딪치면 불꽃이 피어나듯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낯선 사람이라도 순간 마음이 동요합니다. 그리고 이내 슬퍼집니다. 그게 만약 불의(不義)의 결과라면 분노를 느끼겠지요. 이렇듯 감정은 외부 자극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본래 타고난 것이고, 고유의 실체가 있어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사로잡혀 자기감정을 절대화하지요. 과연 좋고 싫음은 객관적 실체가 있을까요?
꽃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는 때를 생각해봅시다. 지금 내가 장미 한 송이를 보며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면 이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리고 그 좋은 마음에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꽃이 나를 좋아해주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꽃이 참 예쁘구나!’하는 마음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좋아할 때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은 상대가 나를 좋아할까 아닐까를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듯이 저 사람도 날 좋아할까?’
‘어떻게 하면 저 사람도 나를 좋아하게 만들까?’
이렇게 생각하고 요구하기 때문에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심장이 뛰는 겁니다. 즉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은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런 생각에 아무리 몰두해도 상대가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면 상대도 나를 좋아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과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예요. 그러니 앞으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가슴이 뛸 때는 ‘내가 지금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기보다 ‘지금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길 바라고 있구나.’라고 자신의 감정을 바로 봐야 합니다.
직장에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싫은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서 고민이란 분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분명한 편이고 그것을 개성이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감정표현에 너무 솔직하니까 자꾸 손해 보는 일이 생기더라고요. 이제라도 이런 저를 고쳐야 할까요?”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지금처럼 좋아하고 싫은 감정을 표현하고 살아도 아무 문제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좋고 싫은 감정에 너무 끌려 다니면 내가 거기에 속박당하게 되고, 그러면 나에게 손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요? 바로 나의 카르마, 즉 나의 업식(業識)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된장찌개 냄새를 맡으면 군침이 돌고, 카레 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이 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어릴 때부터 길들여져 익숙하거나 아예 경험해보지 않은 탓에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을 보이는 거예요. 그 맛, 그 냄새가 누구에게나 좋은 느낌 또는 나쁜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된장찌개는 구수하고, 카레 냄새는 역겹다는 느낌은 나의 업식의 반응일 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뒤집어서 바깥에 있는 대상에 좋고 나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된장찌개 냄새는 좋고, 카레 냄새는 싫다고 규정하는 것이지요.
결국 똑같은 빛깔인데 내가 어떤 색안경을 끼고 보느냐에 따라서 내 눈에 다른 색깔로 보이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좋고 싫음이 나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 느낌이 나로부터 온 것임을 정확히 안다면 좋다 싫다 시비할 게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감정에 빠지지는 않게 됩니다.
나와 사고방식과 관점이 다른 사람이 있을 때 굳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사귀려고 할 필요도 없고 그 사람을 회피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상대방을 내 마음에 맞게 고치려고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카르마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그 사람 편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됩니다.
따라서 어차피 만날 수밖에 없는 인연이라면 상대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나를 편안하게 하는 길입니다. ‘내 성격도 못 고치는데 내가 어떻게 남의 성격을 고치겠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으면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도 같이 일할 수 있고 같이 살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좋아하면 같이 살아야 한다고 집착하고, 싫어하면 무조건 헤어지는 길밖에 없는 줄 아니까 늘 괴롭고 불평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좋고 싫음의 감정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 인생이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우리는 좋아하면 반드시 가져야 되고 싫어하면 반드시 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주어진 객관적 상황은 좋아하는데 가질 수 없고 싫어하는데 버릴 수 없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그럴 때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집니다. 따라서 상대가 좋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고 싫지만 함께 있을 수밖에 없을 때는 그 좋아하고 싫어함에 내가 속박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