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경승(杜景升)은 전주(全州) 만경현(萬頃縣) 사람이다. 자질은 후덕하나 글이 모자라고 용력(勇力)이 있었다. 처음에 공학군(控鶴軍)에 보임(補任)되자 수박(手搏)하는 사람들이 두경승을 불러다가 한 오(伍)에 편입시켰다. 그 장인인 상장군(上將軍) 문유보(文儒寶)가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수박은 천한 기술이니 장사(壯士)가 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니 두경승이 결국 가지 않았다. 뒤에 대정(隊正)으로서 후덕전(厚德殿)의 견룡군(牽龍軍)에 충원되었다.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무인(武人)들이 남의 재산을 약탈한 것이 많았으나, 두경승은 홀로 대궐 문을 떠나지 않고 추호(秋毫)도 범하지 않았다. 명종(明宗) 초에 다시 산원(散員)으로 옮겼는데 이의방(李義方)이 그의 명성을 듣고, 데려다가 내순검군 지유(內巡檢軍 指諭)로 삼았다. 하루는 퇴근길에 태안문(泰安門)을 걸어 나와서는 옷을 바꿔 입고 도망쳐 숨어버렸다. 집안사람들이 사흘 동안 찾아다니다가 북산(北山) 바위틈에서 발견하고 그 까닭을 물으니, “일찍이 숙직을 하다가 어슴푸레 꿈꾸는 것 같았는데 몇 사람이 나를 죽이려 해서 무서운 나머지 미복(微服)으로 갈아입고 도망갔는데, 잠시 후 수만 명이 나를 쫓아오기에 여기까지 도망해 왔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경인년(1170)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재앙[祟]을 내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의방은 두경승이 다시 출근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런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라며 다시 지유를 제수(除授)했다가 낭장(郎將)으로 승진시켰다.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이 반란을 일으키자[起兵] 남쪽 지방도 모두 호응하니, 이의방(李義方)이 그의 종형인 낭장(郎將) 이춘부(李椿夫)와 두경승을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로 임명하였는데, 이춘부는 성품이 포학(暴虐)하여 고을의 수령[邑宰]들을 많이 죽였다. 두경승(杜景升)이 조용히 일러 말하기를, “명령을 받던 때에는 변방의 진(鎭)들이 반역을 도모하고 주·군(州郡)들도 호응하여 화란(禍亂)이 끊이지 않아 평정하기 어려울까 걱정했는데, 지금은 공(公)의 위엄과 덕에 힘입어 괴수(魁首)가 이미 섬멸되었고, 〈우리 군사가〉 도착한다는 소문만 듣고도 손을 묶고 명령만을 요청하고 있소. 〈적도(賊徒)들을〉 이미 많이 처단했으니 지금부터는 모두 관대하게 처분하고, 만약 반역의 형상이 있다면 정황과 증거가 명백히 드러난 이후에 벨 것을 요청하오.”고 하니 이춘부가 그 말을 따랐고, 남쪽 지방이 기뻐하며 복속해왔다. 선유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 이춘부가 두경승에게 말하기를, “처음에는 공을 어리석고 비겁한 사람으로 여겼었는데, 지금은 공이 너그럽고 신중하여 큰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겠소. 지난번 공의 계책이 아니었더라면 아직도 반역을 끝내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나로 하여금 불의(不義)에 빠지게 했을 것이오.”라고 하며, 생사를 같이하는 소중한 벗[刎頸交]을 맺게 되었다. 〈이후〉 두경승은 전공(戰功)으로 장군(將軍)이 되었고,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로 임명되어 창주(昌州)를 수비하였다.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켜[起兵] 분도장군(分道將軍) 박존위(朴存偉)·이언공(李彦功) 등을 사로잡았다. 이때 두경승(杜景升)이 〈창주(昌州)를〉 수비하다가 향산동(香山洞) 통로역(通路驛)에서 서경(西京)의 군사를 만나 패퇴시켰다. 두경승이 무주(撫州)의 객관(客館)에 도착해 점심을 먹는데 서경 군사 1,000여 명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두경승이 객관의 문을 열자 서경 군사들이 다투어 들어왔고, 두경승이 한 명을 쏘아 그 자리에서 거꾸러뜨리니 서경 군사들이 패하여 달아났다. 두경승이 사졸(士卒)들에게 말하기를, “적들이 앞에 있으니 옛길로 가면 안 된다.”라고 하고는, 지름길을 따라 밤길을 가다가 어느 절에 도착하여 안장을 풀었다. 승려에게 길을 물어 그가 가르쳐 준 길을 따라 밤낮으로 행군하여 8일 만에 개경(開京)에 도착하였다. 그때 원수(元帥) 윤인첨(尹鱗瞻)이 이끄는 군사들이 이미 출전하였기에 왕은 두경승을 동로가발병마부사(東路加發兵馬副使)로 임명하였다. 두경승은 군사 5,000여 명을 이끌고 고산(孤山)에 이르러 군사를 셋으로 나누고, 좌익과 우익에게 서경 군사들을 급습하게 하여 크게 깨뜨리고 1,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의주(宜州)에 도착하니 조위총의 장수 김박승(金朴升)이 성 밖에 수레를 늘어놓고 방어하고 있었다. 두경승이 정예(精銳)들을 뽑아 그 성을 공격하여 김박승을 사로잡아 목을 베어 머리를 개경으로 보냈다. 여러 주(州)와 진(鎭)이 차츰 귀부(歸附)해 왔으나 정주(定州)·장주(長州) 2주와 선덕진(宣德鎭)이 여진(女眞)에 투항하려 하자 두경승이 사람을 보내어 어루만지고 안정시켰다.
여진(女眞) 사람 1,000여 명이 정주(定州) 성문 밖에 와서 위급함을 틈타 노략질하려하자 두경승(杜景升)이 해산할 것을 설득하니 여진이 곧 물러갔다. 두경승이 맹주(孟州)에 당도하니 서경(西京) 군사들이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항거하였는데, 이의민(李義旼)·석린(石麟) 등과 함께 격파하고 400명의 목을 베니 맹주와 덕주(德州)의 군사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두경승이 주민들을 위로하고 편안히 살게 하였다. 〈그런데〉 무주(撫州)가 굳게 항거하며 항복하지 않은데다가 운중도(雲中道) 군사들까지 또 이르러 서로 성원(聲援)하니 두경승이 군사를 나누어 공격하자 운중도 군사들은 퇴각하였고 무주는 마침내 항복하였다. 그때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와 네 총관(摠管)들은 전세가 불리해져서 개경(開京)으로 돌아가는데 서경 군사들이 길을 막았다. 두경승이 대동강(大同江)에서 적의 공격을 맞받아치니, 무릇 20번의 전투에서 모두 이겼고 서경 군사들은 크게 패하였다. 두경승이 돌아오는 길에 평주(平州)에 이르자 왕이 지주사(知奏事) 이광정(李光挺)을 보내 교외(郊外)에서 맞아 위문하게 하였다. 〈개경에〉 도착하자 왕이 말하기를, “경(卿)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하여 힘을 다해 흉악한 무리들의 기세를 꺾었으니 공(功)이 적지 않다. 그러나 큰 악인[大憝]이 아직도 살아 있으므로 사직(社稷)의 수치이다. 경이 힘써주기 바란다.”라고 하고, 후군총관사(後軍惣管使)로 임명하여 다시 〈전쟁터로〉 보내었다.
두경승이 철관(鐵關)을 넘어 요덕로(耀德路)와 운중로(雲中路)를 따라 행군하니 이르는 곳마다 〈적들이〉 초목(草木)이 바람에 쓰러지듯 하였다. 서경 군사들이 연주(漣州)로 들어가 지키자 성 밖에 흙을 쌓은 후 큰 포(砲)를 벌여 놓고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또한 의주도령(義州都領) 최경약(崔敬若)과 영유(令猷)·영영(令英) 등의 목을 베었다. 사졸(士卒)들이 성(城)으로 들어가 다투어 재화와 보물을 취하자 두경승이 명령을 내려 금지시켰지만 가마솥을 가져가는 것만은 허락하였다. 이에 서북 지방의 여러 성이 〈관군을〉 맞아들여 항복하니, 드디어 병력을 옮겨 서경을 공격하여 연승(連勝)하였으나, 서경 사람들은 〈성의〉 견고함을 믿고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았다. 군중(軍中)에서 연주에서 가져온 가마솥을 취사도구[爨器]로 사용하니, 사람들이 그것을 편리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공(公)의 계책이 참으로 원대합니다.”라고 하였다. 서경 군사들이 밤중에 나와 진영을 공격하고 영문(營門)을 불태우자, 두경승이 명령하여 말하기를, “이미 불이 났으니 불을 끈들 무엇이 이로우랴?” 하고는 오히려 물건들을 가져다 불 속으로 던지니, 불길이 더욱 세져 낮과 같이 밝아지자 서경 군사들이 감히 침입하지 못하였다. 두경승은 온정과 신의로 평소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서경 사람으로 성에서 나와 투항하는 자가 많았다. 마침내 윤인첨(尹鱗瞻)과 함께 서경을 격파하고 조위총을 잡아서 죽이니 서경이 평정되었다. 나머지 적병들이 아직 있으므로 다시 두경승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임명하여 영청현(永淸縣)을 진압하게 하였다. 북로처치사(北路處置使) 이경백(李景伯)이 군사(軍事)를 의논하고자 하여 기병 500명을 보내 두경승을 맞이하게 했는데, 서경 사람들이 복병을 숨겨두었다가 길에서 저격하니 기병은 모두 몰살당했고 오직 낭장(郞將) 고용지(高勇之) 등 10여 명만 달아나 〈죽음을〉 면하였다. 두경승이 이미 출발하였는데 도중에서 변고를 듣고 말을 달려 성으로 돌아가자, 서경 사람들이 추격하였으나 잡지 못하고 전리(電吏)만 잡아 죽였다. 이경백과 두경승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이경백을 소환하고 석린을 대신 지서북로병마사(知西北路兵馬使)로 임명하였으며, 두경승에게 처치사(處置使)를 겸임하게 하였다.
금(金)의 사신이 귀국하려는데 서경(西京) 군사들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두경승이 사졸(士卒)을 모아 불시에 습격해 적들을 죽이니 왕이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상장군 지어사대사(上將軍 知御史臺事)로 승진시키고 급작스럽게 수태위 참지정사 판리부사 수국사(守太尉 叅知政事 判吏部事 修國史)로 옮겨 전주(銓注)를 장악하게 하니, 비록 왕의 총애를 받는 자라도 감히 그를 어쩌지 못하였다. 평장사(平章事)에 오른 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봉하고 칙서(勅書)를 내려 화공(畵工) 이광필(李光弼)에게 그 형상을 그리게 하였다. 이광필이 아뢰기를, “화법(畵法)에 살아있을 때는 반신상(半身像)만 그릴 뿐입니다.”라고 하자 두경승이 노하여 그로 하여금 몸을 갖추어 〈그리게〉 하였다. 양부(兩府)와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이 그의 집으로 가서 하례하였고, 중방(重房)의 여러 장군(將軍)들도 축하연을 베풀었다. 술이 취하자 각자 악기를 잡았으며, 두경승은 노래하고 수사공(守司空) 정존실(鄭存實)은 소관(小管)을 불었다. 이의민(李義旼)이 성내어 욕하고 꾸짖기를, “재상(宰相)이 어찌 영인(伶人)처럼 노래 부르고 피리를 부는가?”라고 하자 잔치를 그만하고 돌아갔다.
두경승은 눈으로 봐도 글을 알지 못하였는데 그때 어떤 의원(醫員)이 벽에다 자칭 옥당인(玉堂人)이라고 썼다. 어떤 사람이 이를 두고 비웃으며 말하기를, “전쟁터의 장수가 지금 수국사(修國史)가 되었으니, 의원이 옥당인이라고 써도 괜찮지 않은가?”라고 하니, 듣는 이들이 이가 시리도록 〈비웃었다.〉 두경승이 동료들과 함께 아뢰기를, “식목도감(式目都監)에 소장하고 있는 판안(判案)은 나라의 귀감(龜鑑)인데 그 순서가 뒤섞여 점점 참고하기 어려워지니 마땅히 다시 검토하고 베껴 써서 보관해야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선대(先代)의 여러 공신들은 대업(大業)을 도와 나라를 안정시킨 공이 탁월하니 관작(官爵)을 추가함으로써 〈그들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가상히 여겨 모두에게 관작을 추증(追贈)하고 또 녹권(錄券)을 만들어 그 후손들에게 하사하였다. 〈두경승은〉 이의민과 함께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는데, 그 서열이 이의민의 위에 있자, 이의민이 중서성(中書省)에서 마구 욕을 퍼부었으나, 두경승은 웃기만 할 뿐 상대하지 않았다. 얼마 후 중서령(中書令)을 덧붙여 주었는데, 옛 제도에 3품 이상은 매번 승진할 때마다 관례상 사양하는 표문(表文)을 올리고, 왕은 조서(詔書)를 내려 그것을 허락하지 않은 후에야 감사하는 표문을 올리고 관직에 올라갔다. 두경승이 혼잣말로 말하기를, “속으로는 사양하고 싶지 않으면서 남의 붓을 빌어 겉으로 사양하는 척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못할 짓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연경궁(延慶宮)으로 거처를 옮길[移御] 때 ‘임금이 탄 수레[輦] 아래서 변란이 일어난다.’라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왕을 호종하던 백관(百官)들이 당황하여 사방으로 흩어져버렸으나, 유독 두경승만은 혼자 말고삐를 잡고 태연하였다.
최충헌(崔忠獻)이 왕을 폐위시킬 음모를 꾸미고서 시가(市街)에 군사를 배치한 뒤 의논할 일이 있다는 구실로 두경승을 불렀다. 두경승의 사위인 장군 유삼백(柳森栢)은 그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결국 두경승은 자연도(紫燕島)에 유배되었고 또 유삼백의 아버지 유득의(柳得義)는 남쪽 끝으로 유배되었다. 두경승은 섬에 있으면서 울분으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두경승이 금을 갖고 있었는데 그 노(奴)가 훔치려고 몰래 독살했다.”라고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