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지역의 월남사찰 월남사와 혜광사 소개
월남사
4월 14일 맑은 날씨에 가벼운 마음으로 Berendo St., LA에 있는 베트남 사원을 찾았다. 번지수가 863-865로 된 것을 보아 3채의 2층집을 연결하여 사원을 만든 것 같다. 입구중앙에 월남사라고 한문으로 쓴 현판을 지나 2층까지 이어진 층계를 오르니 대웅보전이라고 한문으로 쓴 현판이 나타나고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신 법당으로 이어진다. 법당 안 오른 쪽에 범종이 걸려있고 대 법사이신 Dr. Thich Man Giac [석만각] 스님의 사무실로 이어져 있다. 큰스님은 월남불교통일교회 대법사, 미국월남사 원주, 전미월남불교총회 회주 등의 직책을 맡고 계신다. 마침 큰스님은 미리 전화로 면담을 약속했던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중풍으로 말도 못하시고 지팡이와 시자의 도움 없이는 거동도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큰스님의 까만 눈동자가 내뿜는 안광만은 그분의 수행력을 짐작케 한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옆에 계신 보좌스님이신 Thic Tue Hanh 노비구니 스님과 면담을 시작하였다. 비구니 스님은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으려고 하여 여러 번 부탁하였으며, Thich Man Giac 대 법사님의 간략한 이력서에 대해 묻자, 즉각 대답하시기를, 출가승은 자신의 생애에 관한 글을 남기지 않는다고 하신다. 우선 월남사의 간략한 역사와, 미국의 베트남 불교와 관계가 깊을 Thic Man Giac 대 법사님에 대한 것을 물었다.
월남사 법당 내부
미국에서의 베트남 불교의 위치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기반이 잡혔다고 볼 수 있다. 베트남 전쟁으로 백여만 명이 넘는 베트남 교민들이 미국에 살고 있으며, 이들 교민들을 위해서 그리고 철저한 수행을 바탕으로 하는 베트남 대승불교를 좀 더 알기위해서, 미국 측에서 초청했다고도 볼 수 있다.
월남사는 현재 미국에 산재해 있는 100여개의 베트남 사원과 20여개가 넘는 명상센터의 총 본산이며, LA에만 60여개의 베트남 사원이 있다. 베트남의 통일을 막으려는 미국과 베트남(남 베트남)과, 통일과 독립을 원하는 민족주의 정당의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북 베트남)과의 20년 (1955-75)에 걸친 베트남 전쟁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미국의 패배로 끝난 이 전쟁은 끔직한 환경문제들을 일으켰으며, 수 많은 상상을 초월하는 비극을 미국인들에게도 베트남인들에게도 안겨주었다. 전쟁이 한창인 1966년, UCLA는 베트남의 Van Hanh University의 인문대 학장을 지낸 고 Rev. Dr. Thich Thien An [석천사] 대법사를 동양철학 교수로 초청하였다. 일년 계약이 연장되어 UCLA에서 계속 강의하면서 동양철학 학자와 학생들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IBMC (International Buddhist Meditation Center)와 월남사를 세웠다. 사이곤에서 같은 대학에서 있었던 Ven. Dr. Thich Man Giac 대법사를 1969년에 초청하였다. Rev. Dr. Thich Man Giac 대법사는 11세에 출가하여 베트남에서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셨다. 시를 좋아하시어 선 시집을 출판하셨으며, 1975년 베트남이 공산국가로 통일되자 77년 말레지아 난민캠프로 피난하였다. 78년 LA에 있는 월남사로 오게 되었으며 고 Rev. Dr. Thich Thien An 대법사가 입적하신 1981년부터 주지로 계시며 베트남 교민들과 미국인들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해 지자, 2001년부터 베트남에서 오신 Ven. Thich Nhu Minh [석여명] 법사가 주지 직을 맡고 계시며 영어를 못하신다고 한다. 큰스님의 비서격인 노비구니 스님을 통해서 그분의 포교철학과 월남사의 활동을 알아본다.
월남사에는 10명의 비구스님이 2층에, 6명의 비구니 스님이 아래층에 상주하고 계시며 재적신도는 천여 명 정도이다. 베트남 절에서 출가한 미국인 비구니 스님도 한 분이 계시고, 미국인 비구스님으로 출가한 분들도 4,5명이 된다고 한다. 신도들은 베트남 교민들, 동남아 사람들이 많고 미국인들과 카토릭 신부, 수녀님들이 명상을 통해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 많이 온다고 한다.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하였다. 노비구니 스님의 거침없는 법문이 잊을 수가 없다.
“불교의 핵심은 내면의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명상입니다. 명상은 스트레스 많은 사회에서 모든 것을 조금 느리게 합니다. 그러면 삶이 다르게 보이지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행복하지 못하면 내게 와서 앉아 명상하라, 자신을 보아라, 그것이 나를 따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명상법은 들숨과 날숨을 지켜보는 수식관이 기본입니다. 수식관이 어느 수준에 이르면 공안을 줍니다. 외국인으로 공안을 받은 사람은 독일여자분 한사람이 있었습니다만 몇 년 전에 유명을 달리 하였습니다. 명상시간에는 외국인들에게 불교의 전통을 먼저 설명하여 주고 가능한 많은 질문을 하도록 합니다. 자신들의 문제를 우리 스님들에게 가져오게 하지요. 실생활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명상을 접목시키도록 도와줍니다. 외국인들에게 개종을 요구하지 않지요.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먼저 갖게 합니다.”
중풍에 걸리신 Thich Man Giac 큰스님과 상좌
“신도들을 위해서 어떤 프로그람을 운영하고 계십니까?”
“스님들은 새벽과 저녁 5시에 예불과 참선을 하고 저녁 9시에 참선을 합니다. 모든 스님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 까지 낮에는 고등학교나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거나 직장에서 일을 합니다. 주말에는 신도들을 위한 법회를 하며 주중에도 저녁에 명상시간이 있습니다. 일요일 오전 8시부터 명상법회, 청소년 법회, 베트남 교민법회, 모든 불자를 위한 영어법회가 이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문제를 스님과 의논할 수가 있습니다. 미국인들도 많이 옵니다. 한달에 두 번 음력 초하루 보름에 계를 지켰는지를 돌아보는 법회도 있습니다. 주지사와 미국 하원의원이 불교관련 자료 등에 관해 자문을 구하기도 합니다. 스님과 사원은 열려있는 곳입니다. 신도들의 병문안도 가지요.”
“이 시대에 미국사회에서 베트남 사원의 사명을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불교의 전통을 유지하며 기본교리를 전해야 합니다. 베트남 사원은 베트남 이민 2,3세에게 베트남의 좋은 문화전통을 가르쳐주고 지키도록 해야 하며 베트남의 재건을 도와야 합니다. 불교의 4대 명절은 베트남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지킵니다. 5월 보름 부처님 탄신일, 음력 7월 보름 백중, 납월 8일 부처님 성도일, 그리고 음력 정월 초하루입니다. 불교전통은 상황에 맞게 변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새벽 3시에 예불을 들이나 여기서는 5시에 합니다. 또 스님도 자동차를 운전합니다.”
노비구니 스님은 필자와의 대화에 무척 흥미를 느끼셨으며 기회가 되면 미주현대불교에 위와 같은 주제로 기고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큰스님은 먼저 거처로 돌아 가셨고 필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베트남 가구들이 배치된 접견실에서 일어섰다. 비구니 스님이 월남사를 소개하는 작은 책자를 한권 주셨다. 그 책자를 근거로 하여 베트남 불교를 간략히 소개한다.
베트남은 베트남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중국의 남쪽 국경을 넘어와서 [월남] BC 2세기 경에 세운 나라이다. AD 1세기 경부터 불교가 소개되었으며 그 후 중국의 지배를 천년간 받으면서 중국의 남종선이 들어왔고 그와 함께 도교와 유교도 들어와 우리나라와 거의 같은 형태의 대승불교를 발전시켰다. 인도에서도 남방불교가 들어왔으며, 베트남 민속신앙은 조상숭배와 모든 것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정령신앙으로 한국과 흡사하다. 베트남 사람들은 어떤 신앙과도 융합하며, 하나의 사원에 신과 인간이 함께 숭배되며, 인간도 정령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민족성과 토속문화를 지키려는 정신은 강하다. 베트남 스님들은 수행과 교학공부에 철저하면서도 난민 돕기, 독재 항거 등 행동으로도 현실참여를 한다. 19세기 후반부터 불란서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20년에 걸친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독립하면서 하나의 베트남으로 통일되었는데 여기에도 스님들의 역할은 적지 않다. 카토릭 신자인 고딘디엠 대통령 당시, 독재에 항거하고 주권독립을 주장하면서 대통령 궁 앞에서 좌선의 자세로 미동도 하지 않고 분신한 Thic Quang Duc 스님의 사건은 세계가 놀란 사건이었다.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위해 일하시는 베트남 스님 한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분의 짙은 갈색의 얼룩이 묻어있는 승복과 승려로서의 투철한 사명감을 느끼게 하는 투박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보이는 듯 하다.
혜광사
혜광사 전경
4월 16일 맑은 날씨, 혜명 보살님과 함께 한 시간 넘어 차로 달려 아침 9시 반경, LA 남쪽 Santa Ana에 있는 Chua Hue Quang 혜광사 Vietnamese Buddhist Cultural Center에 도착하였다. 주소는 4918 W. Westminster이며 길모퉁이에 눈이 번쩍 뜨이게 아름답고 커다란 베트남 식 사원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널찍한 마당은 벽돌과 시멘트로 깨끗이 정리되어있고, 신발을 벗고 등이 달린 법당 입구로 들어갔다. 법당은 100평은 됨직한 커다란 홀로 동쪽 중앙에 백색의 불상이 모셔져 있고 불상 뒤에는 작은 방이 있으며, 커다란 범종도 있고 목탁도 있다. 풍경소리고 들린다. 법당 안에는 초등생부터 대학생 정도의 100여명 되는 청소년들이 서서 법회를 보고 있었다. 미국 내 한국사원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베트남 사원이 이처럼 이민 2,3세의 불교와 전통교육에 힘을 쏟고 있으며, 또한 베트남 불자가정에서도 2,3세대에게 모국의 불교와 전통을 가르치는데 적극적인 것이 놀라웠다. 일요일 아침 8시-10시에 있는 청소년 법회가 끝나고 모두들 사원 옆 야외식당으로 가고, 법당에서는 한편에 있는 긴 테이블에서 제사가 진행된다. 사원 옆과 뒤에 두어 채 이상의 가옥이 모두 사원 소유라고 한다. 우리는 법당 옆의 가옥을 개조한 소박한 사무실로 들어가 주지스님을 기다렸다. 얼굴이 검게 타고 짙은 갈색의 간략한 승복을 입으신 중년의 주지스님이 들어오셨다. 일하다 오셨는지 승복에 얼룩이 져 있다. 영어가 서툴러 통역이 함께 오셨다. 합장 반배하고 아름다운 사원의 내력부터 물었다. 주지스님께서는 무엇이 그리 좋으신지 연신 웃으신다.
혜광사 제사를 모시는 테이블
“이 Orange County를 Little Saigon이라고 부르지요. 베트남 사람들이 그만큼 많이 산다는 뜻입니다. 베트남에 있는 본사에서 불자들이 성금을 모아 보내주어 82년에 처음으로 작은 집에서 시작했습니다. 처음 5년간은 행자와 둘이서 오는 난민들을 도우며 사원을 운영했습니다. 그때 이곳에는 베트남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10년이 지나며 난민들이 이 상업지구에 정착하게 되었고 조금씩 조금씩 모아 집을 사고 땅을 샀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이웃들과 파티도 열면서 친해졌습니다. 사원건축허가를 얻을려면 1 에이커의 부지가 필요하답니다. 설계도도 준비하고, 시의회 사람들의 청문회도 통과했지요. 사원의 아름다운 모습에 허가가 난 것입니다. 건축비는 1.5백만 달러가 들었고 3년간 걸렸으며 장식에만 2년이 걸렸습니다. 얼마 전에 완공되었답니다. 이제는 Little Saigon의 중심이 되어 누구나 이 사원에 옵니다. 앞으로 도서관과 식당을 짓고 학교도 세울려고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경전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말에 힘을 주시면서 황무지와 같았던 곳에 완공된 아름다운 사원과 앞으로의 법을 펴실 계획에 주지스님은 마냥 행복해 하신다.
“먼저 여쭈어 보고 싶었는데, 주지스님 불명과 어떻게 이곳에서 법을 펴시게 되었는지요?”
“내 불명은 Thich Minh Man이며 12세에 출가하였고 62년에 사미계를 받았고 3년간 상좌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사이곤에 있는 불교대학에서 10년간 공부를 하였고 사이곤에 있는 An Quang 사원에 있었습니다. 75년, 베트남이 공산국으로 통일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조국을 떠났습니다. 나도 78년에 말레지아의 섬인 Pulau Bidong 캠프에서 일년 넘어 있었습니다. 1 평방마일의 넓이인 섬에 5만 명의 난민이 북적거렸으니 식수, 화장실 등 상상을 해 보십시오. 매일 보트난민들이 그 작은 섬으로 들어왔습니다. 호주나 미국의 난민구호란 말 뿐이었지요. 그래도 그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법문을 해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80년에 Washington DC에 도착했고 82년에 이곳으로 왔습니다. 사이곤 본사의 은사님도 한번 초청했었습니다.”
“이 사원에서는 어떤 프로그람들을 운영하고 있으며, 스님께서 미국에서 하시고 싶으신 일은 무엇인지요?”
“청소년 법회, 일상의 불교의식들, 일반 법회, 그리고 명상 반을 운영하고 있는데, 주말명상 반에는 미국인 베트남 교민 합해서 200명에서 500명까지 참석합니다. 일반인들에게 매일 아침 7시에 공원에서 걷기명상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일이고, 미국인들에게 수식관을 다른 스님이 지도하고 계십니다. 이 사원에는 15분의 스님들이 상주하고 계십니다. (노비구니 스님들이 법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스님들은 일반인과 다른 수행프로그램을 따르고 있습니다. 일년에 한 달간을 노숙자들에게 무료식사를 제공합니다. 결혼, 상례 등 사원의 전통적인 의무들을 하며, 양로원 방문 등 자원봉사도 합니다. 어디서나 불법을 이어가려면 어린이들에게 불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스님들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에 맞게 어린이용 불교교재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미국인들에게 불교를 가르쳐 출가시켜 그들로 하여금 불교를 전하게 해야 합니다. 경전을 새 시대에 맞게 해석한 책들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 베트남 교민들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원에 모여서 불법을 공부하고 스님들과 생활이 연결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Thich Tue Hanh 노비구니스님
단정하게 차수하신 손은 비록 노동으로 거칠어져 있지만 짧게 깍은 손톱이 정결함을 넘어 아름답게 보였다. 이 사원에서 사용하는 어린이용 영어불교교재 한권을 주시면서, 점심을 먹고 가라고 권하시어 천막으로 된 식당으로 갔다. 주지스님이 손수 자리를 잡아주시고 많이 먹고 가라고 하시며 바삐 나가신다.
주지스님의 삶은 오직 탐진치의 번뇌로 이루어진 우리네 삶의 등불이 되시려는 대자비뿐인 듯 하다. 한사람의 부처님 제자의 대자비는 그분과 인연이 닿는 수많은 사람들을 번뇌에서 구하고 행복을 주며, 부처님의 정법에 생명을 불어넣어 세세생생을 이어가게 한다. 물질이 풍요할수록, 정보와 지식이 홍수를 이룰수록, 우리는 사람됨을 잊고 거칠고 그악스러워 지며, 메말라 간다. 우리가 행각하는 행복을 추구할수록 우리는 불행하다고 느낀다. 이런 기이한 시절인연 속에서 우리가 모두 갈망하는 것은 자비와 지혜의 비가 아닐까. 다른 어떤 종교도 보여줄 수 없는 부처님의 대자비와 지혜만이 이 시대의 모순에 대한 답일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답을 심신이 메말라 병든 우리에게 주는 것이 이시대의 불교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2006년 11월 197호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