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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날 기념 김선우 작가 초청강연회>
11월 15일(토) 오후 4시 시작.
참석한 100여명의 학생들에게는 김선우 작가의 첫 소설인 ‘나는 책이다’를 선물로 주었고, 2시간의 강연이 끝난 후 작가사인회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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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반갑다. 강릉에 일찍 와서 대관령옛길, 허난설헌 생가터에 들렀다가 왔다. 감기에 걸려서 기침을 하더라도 이해를 해달라.
0. 강연회에 온 분들이 ‘나는 춤이다’라는 책을 많이 가지고 계신데 내가 쓴 시집을 잘 모를 것 같아서 보여드리면 이렇다. 책이 좀 많은가? 전업작가로 살면서 본업에 충실하다보니 책이 좀 많다. 좋은 책이 많으니(웃음) 많이 봐주시기를 바란다.
0. 이런 자리가 감사하다. 사람이 밥을 먹어야 살 듯이 정신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팍팍하게 살다보면 그런 기회를 잃고 사는데 마음의 밥, 영혼의 밥, 정신의 밥을 먹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리에 불러 주어서 좋다.
0. 사회 : 선생님의 시를 낭독해주면 좋겠다.
0. 내가 시낭송을 싫어할까? 좋아할까? 나는 시낭송을 참 좋아한다. 시낭송은 각별한 것이 있다. 문자를 눈으로 읽을 때와 소리로 들을 때는 다른 파장을 준다. 읽고 싶은 시가 너무 많아서.... 등단작 중에 읽어드리면.
대관령 옛길 / 김선우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火酒―
싸아하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컹 올라온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 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때로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화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나의 길을 걷는다
겨울 자작나무 뜨거운 줄기에
맨 처음인 것처럼 가만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너도 갈 거니?
양변기 위에서 / 김선우
어릴 적 어머니 따라 파밭에 갔다가 모락모락 똥 한무더기
밭둑에 누곤 하였는데 어머니 부드러운 애기호박잎으로
밑끔을 닦아주곤 하셨는데 똥무더기 옆에 엉겅퀴꽃 곱다랗게
흔들릴 때면 나는 좀 부끄러웠을라나 따끈하고 몰랑한 그것
한나절 햇살 아래 시남히 식어갈 때쯤 어머니 머릿수건에서
도 노릿노릿한 냄새가 풍겼을라나 야아-- 망 좀 보그라 호박
넌출 아래 슬며시 보이던 어머니 엉덩이는 차암 기분을 은근
하게도 하였는데 돌아오는 길 알맞게 마른 내 똥 한무더기
밭고랑에 던지며 늬들 것은 다아 거름이어야 하실 땐 어땠을
라나 나는 좀 으쓱하기도 했을라나
양변기 위에 걸터앉아 모락모락 김나던 그 똥 한무더기 생
각하는 저녁, 오늘 내가 먹은 건 도대체 거름이 되질 않고
0. 질문 : 소설가로 변신했는데, 시와 소설의 다른 점은? 어느 것에 더 즐거움을 느끼는지?
0. 시인과 소설가? 시인인 김선우를 좋아한다. 장편소설을 써보니 탈고한 순간의 쾌감이 엄청나다. 시인은 일상적인 상상의 기쁨을 주지만, 장편소설을 끝냈을 때 양적으로 물밀 듯이 밀려오는 쾌감이 있다. 시는 짧지만 소설은 퇴고를 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시라면 50편 정도를 퇴고할 시간에 소설은 1권을 읽기에도 벅차다. 그만큼 큰 쾌감이 있다. 소설은 양적인 쾌감이라면 시는 질적인 섬세함의 기쁨을 준다. 이번에 소설 ‘나는 춤이다’를 끝내는 순간 ‘운동을 해야겠구나’라고 생각이 들만큼 무척 힘든 노동이었다. 몇 명의 소설가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순수한 육체적 노동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하루에 들어가는 물리적인 시간이 소설에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하루에 7-8시간. 그래서 소설은 엉덩이 힘으로 쓴다는 말이 있다. 시는 모든 순간과 시간을 달고 살면서 한순간 충만해 지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소설은 책상 앞에 일상적 출퇴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시는 정신적인 노동이라면 소설은 육체적인 노동이다.
0. 질문 : ‘나는 춤이다’를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0. 독자 마음대로 읽어라. 특히 시는 더욱 그렇다. 시인이 시를 완고를 해서 세상에 내보내서 독자들에게 가면 그때부터는 독자에 의한 새로운 창작이다. 같은 시라도 독자마다 다르고, 같은 독자라도 시간에 따라 다르다. 똑같은 시인데 어느 순간에 딱 다가오기도 한다. 시는 열린 텍스트이다. 소설은 시에 비하면 좀 닫혀 있다. 스토리와 서사성이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수동적인 독서이다. 독서법은 조금 다르지만 공통점은 멋대로 읽어라는 것이다. 김선우를 이해하라고 김선우의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읽으면서 자신을 읽는 것이다. 문학은 작가를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독자자신의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좋은 작품이란 끊임없이 무언가를 던져주는 것이다. 시는 수능시험 공부하는 것처럼 밑줄 쫙이 아니라 멋대로 읽어야 한다.
0. 질문 : 만나고 싶었다. 김선우의 시를 좋아하고 현재 4년 정도 습작을 하고 있다. 시를 쓸 때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단지 짝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시를 쓰기위한 조언을 해달라.
0. 시공부 오래하셨나? 시를 쓰는데 짝사랑으로 끝날 것인가라고 했는데, 시는 짝사랑으로 끝나도 좋은 것이다. 쓸모없는 짓이 아니다. 시를 읽고 시를 쓰려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의미있는 일이다. 어떨 때는 피 몇방울과 시와 바꿨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시를 쓰는 것이 행복할 때도 있지만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질문하신분이 시를 4년 동안 공부했다고 했는데 고급한 시독자는 읽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시를 쓰게된다. 그것이 행복하지 않을 때도 있는데도 그 짓을 한다. 하지만 제일 행복한 사람은 고급한 시독자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쓰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얼마나 가혹하고 치열하게 썼느냐’이다. 좋은 시를 10,000편 넘게 읽어야 하고, 이것이 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1,000편 넘게 써야 한다. 좋은 시를 계속 읽다 보면 좋은 시의 감각을 체화하게 되고, 그리고 자신에게서 끄집어 낼 수 있다. 나는 대학 때는 시인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20대 중반에 너무나 힘들어서 시를 쓰게 되었다. 한순간도 시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꿈속에서의 이미지까지도 놓치려 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2년 반 동안 집중적으로 매달렸다.
0. 질문 : 고등학교 학창시절이 어떠했는지?
0. 강일여중을 졸업하고, 가정형편도 그리 좋지 않았고 나름 공부를 잘한다고 하여 약간의 장학금을 받고 강일여고로 진학했다. 고등학교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다. 강일여고에는 특수반에 있었는데, 모든 선생님이 특수반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런 식의 환경자체 때문에 아주 고통스러웠다. 학생들을 보이게 보이지 않든 선을 긋는 것이 싫었다. 내가 다시 비평준화지역의 특수반에 다니게 된다면 학교를 그만둘거다. 지금은 대안학교도 있기에 학교를 벗어날 수도 있지만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를 벗어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특수반이라는 모범생집단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실망을 시키지 않기위해 공부는 열심히 했다. 하지만 조숙한 독서광이었다. 그 시절의 독서가 아직도 큰 자양분이었다. 그리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의 책을 많이 보았다. 강일여고에는 상과반도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우리반 문을 차고 간다거나 하는 것에 그들을 이해하면서도 이렇게 아이들을 갈라놓고 끊임없이 경쟁을 시키는 것이 특수반 아이나 상과반 아이 모두에게 상처가 되었다. 그래서 도망가듯이 카프카를 읽거나 헤세를 읽었다. 자율학습시간에 옥상으로 살짝 나가 별을 보거나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대학을 가보니 고등학교때 미팅을 해보지 않은 아이가 나밖에 없을 정도로 모범적이고 내성적으로 고등학교를 보냈다.
0. 질문 : 한겨레 신문에서 칼럼을 많이 보았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는지?
0. 고등학교 때까지는 내성적이고 평범했다. 고작 일탈이라면 독서정도. 88년 대학에 진학했는데 강원대학교 광장에 광주항쟁 사진이 붙어 있었다. 세상에는 우리가 추구하려는 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광주항쟁 사진을 보면서 벼락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80년 내가 10살일 때 저 아래 고장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내가 세계라고 믿은 것이 무엇인가? 어떤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가? 등의 질문이 막 쏟아졌다. 그러면서 운동권학생으로 변해갔다. 과격한 운동권학생으로 대학생활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에 대해 회의를 하면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싸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독서의 스펙트럼도 고등학교때까지는 문학이었다면 대학교에는 사회과학, 역사서, 철학 등이 많았다. 강의실보다는 교문에서 벌어지는 가투에서 화염병을 나르는 일을 주로 했다. 고등학교때의 친구들이 이때의 나를 보고 놀라워 하던 기억도 난다. 거칠고 뜨겁고 아프기도 하고 그러나 물르고 싶지는 않은 대학생활을 했다. 대학 졸업후 22,3,4살 때가 무척 힘들었다. 사범대학을 진학했으니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교사가되려기 보다는 좋은 사람, 좋은 혁명가가 되고 싶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한국의 운동권도 위축되면서 들어가려고 했던 사회현장의 선이 끊어지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 제기 받는 시기이었다. 인생을 통틀어 제일 힘들었던 시기이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정말 거창하게 말하면 인류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좋은 혁명가로 살고 싶다는 역할모델들도 너무 처절했다. 진짜 선한 윤리, 선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가에 의문이 들었다. 대학 때에는 우리와 적이 분명했는데, 졸업 후에는 우리에게서 적이 발견되고 나에게서도 적이 발견되었다. 우리에게서도 가부장적인 질서가 용납되는 현실도 보였고......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공공선에 다다를 수 있는가하는 회의가 들었고 사는 것이 재미없었다. 기진기진 살아가면서 삶보다는 죽음을 탐닉하는 시기였다. 그러면서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0. 질문 : 결혼하지 않으셨는데?
0. 혼과 결합하는 것이 결혼하는 것이라면 나는 무척 많은 것들과 결혼했다.
0. 질문 : 조선일보에 글을 쓰고 있는데.....
0. 9월말부터 조선일보에 한국인이 사랑하는 애송시 연재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에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터부시하였다. 안티조선의 초기 선언자이기도 하다. 조선일보는 정치적으로 완전한 수구이기 때문에 보수의 핵심이다. 조중동 모두 마찬가지이다. 중앙 동아에 글을 쓰는 것은 문제가 안되지만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것은 문제가 된다. 조선일보가 갖는 상징성이기도 하다. 한국사회는 진보언론과 보수언론이 극명하다. 이것은 너무 이분법적이다. 이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안티조선에 대해 회의를 하였다. 또한 진보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다양성, 소통을 말하면서 다양성과 소통의 체화가 없는 사람이 많다. 조선일보에 글을 쓰면서 조금이나마 다양성과 소통을 만들고픈 마음이다.
0. 질문 : 중학교때 시를 써서 상도 받았는데, 엄마가 너만큼 쓰는 사람도 많다라고 해서 공부만 했는데, 공부는 아닌 것 같고. 재수를 했는데 아직 미래를 정하지 못했다. 무슨과를 가야할지 고민이다. 시인이 되고 싶은데 아빠는 너는 공기먹고 구름똥을 싸고 있다고 한다.
0. 시인이 되고 싶으면 심리학과도 괜찮다. 시인이 되고자 한다면 문예창작과에 진학하는 것이 그리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창과에서 시창작을 배우고 시인이 되는 것이 시심이 불붙어서 시인이 되는 것보다 오히려 확률이 떨어지는 것 같다. 시는 사람이다. 세상에 대해 냉소적인 마음을 갖는것부터 파랑이 시작된다고 보는 사람이다. 바로 여기에서 희망을 꿈꾼다고 생각한다. 좋은 시인이 많아지고 좋은 시 독자가 많아지는 것이 우리 사회의 숨결같다고 본다. 문화의 질감이 좋아지지 않는 사회는 절대 좋은 사회가 될 수 없다. 우리 사회를 벗어나서 우리 사회를 바라보면 우리 사회의 문화적 질이 높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사회는 참 안타까운 지점이 많다. 예를 들어 단일민족의 허상이라든가..... 문화의 질과 양과 폭을 넓히고 높이기 위해서는 내편 네편이 없다. 문화적 인프라를 높여야 한다. 문화적 베이스 없이는 바뀌는 것이 없다. 작가들을 뒷받침하는 베이스가 없다. 시인이 되고 싶다면 언젠가는 시인이 될 수 있다. 나는 거리에서 보낸 대학4년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그 시기에 세계를 균형있게 보는 시각을 주었다. 시를 잘 쓰기 위한 법을 배우기보다는 더 중요한 것은 다양한 경험이다.
0. 질문 : 글을 쓰면서 슬럼프가 있을텐데.... 어떻게 극복하는지?
0. 글을 쓰면서는 슬럼프가 없는데,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야 하는 것에서 슬럼프를 느낀다. 산다는 것에 능동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못할 때..... 지금까지는 젊었던 그 시기이었다. 재충전이 필요할 때는 있다.
0. 질문 : 시인이 된다고 했을때 가족들의 반응은?
0. 시인에 대해 불쌍한 존재로 보는 것 같다(웃음). 그런데 시인으로 사는데도 별로 불쌍하지 않다. 어느날 지하철에서 여대생 둘이 얘기를 나누는데 한 여대생이 시집을 꺼내니 다른 학생이 ‘넌 아직도 시집을 보니?’라고 하더라. 88년 내가 대학에 들어간 시기에는 ‘누구 시집을 봤어?’라고 했는데, 지금은 ‘아직도 시집을 보니?’라고 하는 시기가 되었다. 80년대 폭력이 있을 때 폭력에 굴하지 않으려는 인간의지가 발동한다. 그렇기에 인문학적으로 가장 풍성한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미래를 꿈꾸는 토양적인 상태가 퇴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집은 한 사회의 척도인 것 같다.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는데 ‘가방안에 시집 한 권이 있는 에티켓’.
0. 질문 : 고등학교때는 모범적, 대학 때는 거칠었다고 하는데 고등학생이라면 꼭 해보고 싶은 것은? 고등학생들에게 권할만한 것은?
0. 내가 지금 고등학생이라면 분명한 것은 학교를 다니지 않을 거다. 하지만 권할 만한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때 책을 많이 읽어라. 대학교 문창과에 다니는 학생조차도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 독자들이 자기의 수준을 높여야 자기에게 약이 되는 것을 취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생님은 책이다. 문화예술적이라고 하는 것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생산하려고 할 때도 돈이 많이 든다. 하지만 문학은 그렇지 않다. 문학에 대한 열정, 깨어 있는 사유, 종이와 연필이 있으면 된다. 영화표 한 장에 7천원이다. 이 시집이 6천원이다. 하지만 독자들이 시를 먹으려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훌륭한 선생님은 책이다. 문화예술적이라고 하는 것들은 향유하려고 할때도 배우거나 생산하려고 할때도 돈이 많이 들어가기에 자본의 논리에 많이 휩쓸린다. 하지만 책은 값이 싸기에 혁명적이다. 초등학교 때 읽은 독서량이 중고등학교 때에 읽은 독서량의 절반이라고 한다. 스스로를 사랑한다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야 한다.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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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우
1970년 강릉출생. 1996년 「창작과 비평」겨울호에 「대관령옛길」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2004년 제49회 현대문학상과 2007년 제9회 천상병시상을 수상.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도화 아래 잠들다」「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산문집「물 밑에 달이 열릴 때」「김선우의 사물들」「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 칼럼집「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동화「바리공주」가 있다.
최근 소설 「나는 춤이다」발표.
출처 http://chamkw.eduhope.net/bbs/view.php?board=chamkw_7_1&id=431&page=1
첫댓글 아유 이걸 타자화한 분도 지극 정성이네요. 이 글을 어느 블로그에서 발견한지는 좀 되었는데, 마침 전교조강원지부 홈피에 있는걸 발견해 올려요.
지금 고등학생이라면 학교에 다니지 않을거라고 했는데 여기가 한국이라서 한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교육문제만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요.
동감입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음, 선생님의 결혼에 관한 언급, 조금 찡해요. ^^ 와닿기도 하고요. 또, 조선일보에 시 해설 연재하신 것에 대한 입장도 많이 이해가 돼요. (조금 건방지자면, 제가 원했던 답이에요!!) 음, 선생님이 옆에서 조곤조곤 말씀해주시는 것 같아 귀 기울여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