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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중국학자들이 동이족에 대해 설명하는 요지는 분명하다. 고대 중원지방에 살던 동이족이 치우천황 는 주나라와 보다 후대인 진시황에 밀려 남ㆍ북으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북쪽으로 간 부류는 부여인 등 고대 한국인의 선조가 되었고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운남성이나 귀주로 가서 오늘날 묘족(苗族) 또는 요족(瑤族)이 되었다는 것이다.
위의 설명으로 절강성의 월족들이 이루어 놓은 양저문화와 하모도문화가 동이문화와 유사한 문신 등의 풍습들을 갖고 있는 이유가 충분하게 설명된다. 이동식은 월족 즉 절강성의 고대인들이 산동성의 동이족과 본질적으로 같은 계통의 문화를 갖고 있는데 송편과 월병도 한 예로 들었다.
한국의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이 송편으로 일반적으로 달의 모양을 흉내 낸 것이라고 설명된다. 반면에 중국의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은 월병으로 달 모양을 흉내 내어 만든 일종의 떡이자 과자이다. 한국의 송편은 상현달을 본뜬 것이며 중국의 월병은 보름달을 본뜬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월병은 고대 월국의 중심지인 항주이다. 강남에 살고 있던 월족은 과거부터 떡을 만들어 일가친척이 한데 모여 나눠먹는 습속이 있었는데 그 기원이 은나라까지 올라간다.
월(越)은 월(月)과 발음이 같다. 한국의 한자 독음과도 같다. 이것은 월병(月餠, 달떡)은 원래 월병(越餠, 월나라 떡)이었는데 달을 숭상하는 풍속과 결합이 되어 월병이 중국 전체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물론 월병에는 또 다른 유래가 있다. 원나라 말에 관가의 부패가 극에 달하자 태주(천태산이 있는 곳)의 장사성(張士誠)이 ‘몽고족을 죽여 원나라를 멸망시키려니 8월 15일에 거사하자’라고 쓴 종이쪽지를 둥근 떡 속에 넣어 전했다. 8월 보름 예상대로 의거가 시작되어 결국 원나라는 멸망했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8월 15일 월병을 먹으며 장사성의 공훈을 기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무대도 월나라의 근거지인 항주 일대이다.
추석날 한국도 달떡을 만들어 먹는다. 물론 달떡의 모양은 다르다. 중국 것은 보름달처럼 둥글고 한국에서는 상현달 같은 반달이다. 이 차이는 지역과 시대를 내려오면서 달라질 수 있다고 이동식은 설명했다.
월 지방에는 우리의 무당과 같은 무속인들이 후대까지 전해진다는 것도 제시됐다. 명나라의 방효유는 월무(越巫)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월의 무당은 스스로 귀신을 부릴 수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사람이 병이 나면 단을 세우고 호각을 불고 방울을 흔들며 뛰고 소리를 지른다. 둥글둥글 호무를 추며 귀신을 쫓는다. 요행스럽게 병이 나으면 술과 음식을 먹은 뒤 상 위에 놓인 돌을 가지고 가고 혹 환자가 죽게 되면 귀신이 요망을 부렸다며 자신의 기술이야말로 요망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이동식 기자는 월무라는 무당이 우리나라의 무당과 큰 차이가 없다고 지적했다. 무당은 북방민족의 대표적인 민속 중에 하나인데 월지방에도 있었고 그 무당의 형태가 오늘날 한국의 무당과 차이가 없다는 설명이다.
최근 중국 역사학계의 가장 큰 변화는 중국의 역사가 삼황오제로부터 ‘하-은-주’로 일직선으로 내려왔다는 전통적인 중화우월주의를 버리고 다원성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고조선,고구려를 먹기위한 어쩔수 없는 선택이나 사실은 옳은 방향입니다만 주체가 화하족이 아닙니다)
중국학자 서북문(徐北文)은 신석기시대 말기 이후 중국대륙에는 서부지역의 화하문화와 동부지역의 동이문화가 함께 병존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화하문화는 하나라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우임금으로부터 시작해 주나라로 이어지고 동이문화는 치우천황을 거쳐 요순시대 이후 은나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두 개의 큰 문화의 흐름 즉 이질적인 민족의 문화를 인정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중국 측의 변화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등 일련의 사건을 볼 때 진의를 의심하는 학자들도 있다. 현재의 중국 영토가 자신과는 다른 이민족이 살고 있던 지역도 포함하게 되자 그들 역사도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설명이다.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중국과 뚜렷이 구별되는 동이문화의 뿌리가 산동성뿐만 아니라 양자강 일대까지 확산돼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설명도 된다.이러한 사실은 그동안 한국 학자들에게 큰 고민을 안겨 주었던 신라 말 최치원의 글에 대한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에는 강병 백만으로, 남으로는 오월(吳越)을 침해하고 북으로 연(燕)ㆍ제(齊)ㆍ노(魯)를 위협하여 중국의 거적(巨賊)이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남쪽으로 침범했다는 오·월은 절강성 일대인데 최치원의 짧은 이 말 한마디가 그동안 잊혀졌던 한국의 과거사를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치우천황과 헌원이 탁록에서 전투하여 치우천황이 패배했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전투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치우천황이 패배했기 때문에 동이족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헌원의 포로가 되었고 다른 부류는 도망쳤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포로가 된 많은 동이족들이 중국의 화하족에 동화되었을 것은 이해가 되며 중국이 강조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이 점을 기수연 박사는 분명히 했다. 한대(漢代) 이후 동북지역에서 나타나는 동이를 그 이전 시기 산동 일대에서 존재했던 동이와 같은 계보로 묶을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동이족이 중국의 화하족과 대립하는 상대적인 개념의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치우천황이 헌원에게 패배한 이후 상당수의 동이족들이 화하족에게 흡수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포로가 되지 않고 탈출한 사람들은 중국에 동화되지 않고 동이족의 전통과 풍습을 계속 유지해 내려왔다고 추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바로 이 대목이 한국민이 강조하는 것으로 한민족은 헌원에게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화하족에 동화되지 않고 계속 동이족으로 내려와 현재의 한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윤명철 박사는 보다 구체적으로 동이가 한민족의 근간이 된 예맥족을 포함하고 있으며 중국의 한족과 대립하면서 문화전통을 유지 발전시켰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설명은 치우천황을 바라보는 각도가중국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치우천황이 중국의 헌원에게 패배한 후 일부 부류는 중국에 동화되었지만 한민족은 동화되지 않은 채 그들의 문화를 계속 유지했으므로 치우천황의 맥을 현재까지 계승하고 있는 것은 한민족이다.'
동이족이 헌원에게 패배하면서 도망갈 때 반드시 중국의 동북방으로만 진로를 잡았다고 볼 수는 없다. 동이족인 은나라가 주나라에 패배할 때도 같은 정황을 그려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앞에서 설명했지만 동북방의 동이족 후예인 한민족과 중국 남부의 월족이 같은 부류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중국 실크로드의 관문인 난주(蘭州)에서 돈황까지 가는 유일한 통로가 ‘하서주랑(河西走廊)’이다. 남쪽으로는 기련산맥(祁連山脈)이 우뚝하고, 북쪽으로는 몽골고원과 사막이 펼쳐진 가운데, 좁은 곳은 10km, 넓은 곳은 100km에 이르는 회랑(回廊)이 1000km 정도 길게 뻗어 있다.하서주랑은 옛 주인이었던 삼묘족(三苗族)과 흉노족(匈奴族) 때문에 우리 역사와 관련이 있는데 소여림(邵如林)은 『하서주랑(河西走廊)』에서 삼묘족을 구려족(九黎族)의 후예라고 설명하고 있다. 금속문명을 지녔던 치우(蚩尤)의 구려족이 황제족(黃帝族)과 탁록전투에서 패한 후 이 고원지역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구려족은 동이족의 한 갈래이므로 하서주랑의 삼묘족 또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설명이다.
여하튼 중국 길림성의 송호상 교수는 1990년을 기준으로 중국에 있는 동이족의 후예를 조선족 200만 명, 만족1000만 명(실제 1억명추정), 묘족 750만 명, 리족(黎族) 100여 만 명이며 묘족의 해외교포만 100만 명이 넘는다고 적었다. 물론 묘족을 포함하여 만족, 리족이 동이족의 후예라고 하더라도 한민족과 동일 선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하다는 설명도 있음을 첨언한다.
여하튼 10여 년 전 만해도 역사학자들이 치우천황과 한민족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했지만 현재와 같이한국인들이 치우천황의 이름을 잘 알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한국 고대사에 큰 화두를 던져주고 있는 치우천황이 스포츠를 통해 가까워진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과거를 찾아주는 고대사가 앞으로 스포츠를 비롯한 과학적 연구에 의해 계속 우리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끝.
/이종호 과학저술가
2006.07.17 ⓒScience 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