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 성철 큰스님께서 법정스님과 말씀을 나누시다가 이렇게 하셨다.
"내가 늘 생각하는 쇠말뚝이 있습니다. 쇠말뚝을 박아놓고 있는데, 그것이 아직도 꽂혀 있습니다.
거기에 패가 하나 붙어 있어요.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다.>
영원한 진리라고 하면 막연하지요.
내가 불교인이니 그것은 불교 밖에 없는가, 하고 혹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견문이 그리 넓지는 않지만 더러 책도 읽어 모았는데,
불교가 가장 수승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불교를 그대로 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만약에 앞으로라도 불교 이상의 진리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면 이 옷을 벗겠습니다.
나는 진리를 위해서 불교를 택한 것이지,
불교를 위해서 진리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내 기본 자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든지 진리를 위해서 산다는 이 근본 자세는 조금도 변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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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려서부터 남달리 책읽기에 열중하여, 동서고금의 주요 저서를 섭렵하다
성철 큰스님은 1912년 임자년 4월 10일에 지리산 골짜기의 깊은 산골 마을인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합천 이씨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꼿꼿한 선비로 알려진 아버지 이상언씨와 어머니 강상봉씨 슬하에서 일곱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스님의 속가 이름은 영주英柱였습니다.
"우리 마을에 개구쟁이가 하나 있었지. 돈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집 대문 밖에서 동네 가 떠나가도록 제 아버지 이름을 부르곤 했어. 그러면 그 부모는 동네가 부끄러워서라도 아이에게 돈을 주었고, 그 아이는 그 돈으로 저 하고 싶은 것을 하고는 했제..." 성철 스님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 개구쟁이는 뒤에 알고 보니 바로 스님 당신이었다 고 합니다.
아마도 그 개구쟁이는 어린 아이 처지로는 사기에도 벅차려니와 읽기에도 버거운 책들 을 사 보려고 떼를 써서 돈을 얻어냈을 터입니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세살 때에 벌써 글을 익혀서 어른들이 보는 책을 읽었고, 다섯 살에는 집안 어른을 따라 백일장에 갔다가 장원을 하였으며, 소학교 때에는 「서유기」,「삼국지연의」같은 중국의 4대 기서를 사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산모퉁이 양지바른 곳에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읽어내려 간 적도 있었습니다.
"내가 남에게서 배운 것이라고는 소학교 6년과 서당에서 배운 자치통감自治通鑑이 전 부여. 그것 말고는 다 혼자 공부해서 알았지."
성철 큰스님은 모든 것을 오로지 독학으로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그만큼 스님의 독서량 은 엄청났는데, 그것은 스님 열반 뒤에 발견된 '서적기'만 보아도 쉬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님이 스무살이던 때에 적은 그 서적기에는 스님이 그 때까지 읽은, 팔십여 권에 이르는 책 목록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행복론,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역사 철학, 남화경, 소학, 대학, 하이네 시집, 기독교의 신구약성서, 자본론, 유물론 따위로 동서고금의 철학에 관한 책이 주로 많습니다. 이 가운데 순수이성비판은 동경 유학생에게 서 쌀 한 가마니를 주고 얻은 것이라고 하니 스님의 책에 대한 열정을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스님은 책읽기에 열중하던 가운데 더러 대나무 숲이나 넓은 밤나무 밭에 나가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생각에 깊이 잠기곤 하였습니다. 아마도 읽은 책 내용을 곱씹어도 보고 삶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찾으려고 깊은 명상에도 잠기고는 한 듯합니다. 그러나 스님 은 훌륭하다는 동서고금의 책을 아무리 읽어도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른 길을 찾으려는 스님의 정신적인 방황은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시절에 스님이 보던 책에는 근원적인 문제에 관한 낙서가 눈에 많이 뜨입니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 영원 의 문제는 스님이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성철스님은 우연히 어떤 스님에게서 영가대사의 「증도가」를 얻어서 읽게 됩니다. 그 책을 읽는 순간 마치 캄캄한 밤중에 밝은 횃불을 만난 듯 했습니다. "아, 이런 공부가 있구나." 그것은 참으로 큰 충격이었습니다.
스님의 서적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때까지 스님은 불교 경전은 한 번도 대한 적 이 없었습니다.
2. 삶의 근원에 대해서 길을 구하던 청년시절, 머리 긴 속인으로 화두참선을 시작하다
스님은 그 길로 바로 대원사로 갑니다. 영원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를 구하려고 집을 떠나 깊은 산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성철스님은 대원사 주지 스님의 배려로 그 곳에서 작은방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영원의 문제를 풀기 위한 참선 길에 들어갔습니다. 스님은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사람들이 가고 오는 것도 모른 채, 밤낮으로 정진하였습니다.
"그 때는 지리산에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을 해친다고 하여 밤만 되면 모두들 방문 밖으로 나가 지 못했지. 나도 호랑이 밥이 될까 무서워 밤에는 방을 나서지 못했어. 그런데 하루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호랑이를 겁내서 떨고 있는 내 꼴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때는 먹히더라도 겁내지 말아야겠다 싶어서 그 뒤부터는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잤어.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지나도 아무 일이 없었거든. 그 다음부터는 호랑이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어 낮이나 밤이나 마음대로 다녔어."
스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한 번 결심하면 번복하거나 도중에 멈추는 일 없이 그대로 실행하거니와, 그런 태산 같은 의지로 정진하여 삼매에 드니 대원사의 다른 스님들이 오히려 혀를 내두르며 속인인 스님을 어려워 할 정도였습니다. 성철스님은 "개에게는 불성佛性이 없다"는, 이른바 무無자 화두를 가지고 참선에 정진하였습니다.
스님 말씀으로는 그 때에 정진에 든지 "사십이일만에 마음이 다른 데로 도망가지 않고 동정일여動靜一如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3. 스물여섯의 나이에 가야산 해인사 동산스님에게로 출가하다
한 속인이 이렇듯 훌륭하게 정진하고 있다는 소문은 곧 대원사의 본사인 해인사로 전해졌습니다. 그리하여 1936년 초겨울에 성철스님은 김법린, 최범술 같은 해인사 큰스님들의 권유로 해인사로 갑니다. 그 무렵 해인사에는 당대의 선지식인 동산 스님이 백련암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성철스님을 본 동산스님은 곧 큰그릇임을 알아차리고, 퇴설당에 자리를 마련해 주며 출가를 권하였습니다. 성철스님은 처음에는 참선만 잘 하면 그뿐이지 승려가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도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지 형식이 무슨 소용이겠느냐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결젯날 동산스님의 법문은 성철스님의 마음 자리에 운명의 싹을 틔어 놓았습니다.
"여기 길이 있다. 아무도 그 비결을 말해 주지 않는다. 그대 스스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 는. 그러나 그 길에는 문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길 자체도 없다."
성철스님은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여 1937년 정축년 3월에 동산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습니다. '이영주'라는 속인의 옷을 벗고 '성철'이라는 법명으로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고 수행의 길에 든 것입니다. 이 때에 스님은 이런 출가시를 남깁니다.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 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 것 다 버리고
초연히 내 홀로 걸어가노라.
彌天大業紅爐雪
跨海雄基赫日露
誰人甘死片時夢
超然獨步萬古眞
그리하여 성철 큰스님은 용성, 동산, 성철로 이어지는 한국 불교계의 큰 산맥을 잇게 됩니다. 그 무렵 한국 불교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승풍이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이 에 스님은 피폐해진 이 땅의 불교 속에 참선으로써 진리의 문을 열리라는 서원을 세우고서, 여러 이름난 선원을 다니며 화두 삼매의 선정에 들어갔습니다. 동산스님을 따라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 한철을 난 성철스님은 같은 범어사 산내 암자인 내원암으로 가서 용성스님을 시봉 하였습니다.
그 무렵 용성 큰스님께서는 어떤 스님을 보아도 스님이라 하지 않고 "선생, 선생"하고 불렀는데 성철스님에게만은 웬일인지 "성철스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성철스님이 그 까닭을 여쭈니 "다른 중들은 스님이라고 부를 사람이 없어. 그런데 너를 대하니 스님이라고 부를 만하다는 생각이 들 어..." 하였습니다. 용성 큰스님은 그렇듯이 성철스님을 미더워하여 서울로 옮겨갈 때에도 성철스님을 시봉으로 데려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대답은 "예" 해 놓고 큰스님을 부산역 까지만 모셔 드리고는 그 길로 줄행랑을 칩니다.
오로지 한마음으로 공부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4. 출가 삼 년만에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마침내 견성을 이루어 깨달음을 얻다
그 뒤 동화사 금당선원에 이르러 걸망을 풀고 하안거에 들어가 있던 중이었습니다. 대원사 시절부터 계속해서 지녀 온 무無자 화두를 들고 선정을 닦던 스님은 삼매중에 문득 견성見性을 이루어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 동안, 참선 정진하는 틈틈이 여러 조사어록을 섭렵하면서도, 오매일여 寤寐一如로 잠시도 화두를 놓지 않던 스님은 마침내 칠통 같은 어둠을 깨뜨리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본 것입니다. 1940년 여름, 스님 나이 스물아홉일 때입니다. 스물 여섯 살에 출가하여 불과 삼년만에 깨달음을 얻어 눈부신 법열의 세계로 들어간 스님은 이렇게 오 도송을 읊습니다.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
문득 한 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로대 흰구름 속에 섰네.
黃河西流崑崙頂
日月無光大地沈
遽然一笑回首立
靑山依舊白雲中
5. 부처님 법이 그릇 되이 전해진 모습들을 마주치다
성철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뒤에 당신의 경지를 점검하기 위하여 운수납자의 여정에 오릅니다. 처음 발길이 가 닿은 곳은 송광사였습니다. 그 곳에서 하안거를 보내며 보조스님의 저서를 독파 한 스님은, 그러나, "먼저 깨달은 뒤에 닦는다"고 한 보조스님의 '돈오점수' 사상에 대하여 아쉬움 을 느낍니다. 깨달음이 이루어지면 닦음도 단박에 이루어지는 '돈오돈수'가 참으로 견성의 경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뒤로 성철스님은 금강산 마하연사, 수덕사 정혜사, 은해사 운부암, 도리사, 복천암 등지로 계속 발길을 옮기면서 당대의 선지식들을 만나는 한편 한결같은 자세로 정진을 이어갔습니다.
평생의 도반이 된 자운스님, 청담스님들을 처음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나라 안 곳곳의 선원과 암자를 다니는 동안 성철스님은 깨달음에 대한 인가 印可가 참으로 가볍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 무렵 수행자들은 철저한 깨달음의 경지도 없이 만행이나 기행을 흉내내기가 일쑤였습니다. 선지식들에 대해서도 거듭 실망한 끝에, 결국 성철스님은 당신의 깨달음에 대하여 누구에게서도 인가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6. 눕지 않고 자지 않는 장좌불와 수행을 팔 년 동안 행하다
그러는 사이에 성철스님은 그 수행의 예봉과 다문박식으로 제방선원에서 명성이 자자해졌습니다. 특히나 지금도 널리 이야기되고 있는 그 유명한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은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눕지도, 자지도 않는 장좌불와 정진은 동화사 금당에서 견성한 뒤로 여덟 해 동안 줄곧 이어졌습니다. 스님은 그 여덟 해 동안에 밤중에도 잠은커녕 졸음으로 고개 한 번 떨구어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느 때인가 도봉산 망월사에서 하룻밤을 지낼 때입니다. 그 날 밤도 여느 때처럼 장좌불와로 밤을 지새는데, 마침 망월사에 머물고 있던 춘성 노스님이
"저 철 수좌가 정말 소문대로 눕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면서 좌복 위에 꼿꼿이 앉아 지새는가?" 하여 문에 구멍을 뚫고 날이 새도록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과연 소문대로 좌복 위에서 꼼짝도 않고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는 크게 감탄하여, 그 때부터 춘성 노스님도 환갑이 다 된 나이에 장좌불와 수행을 열심히 하였다고 합니다.
또 금강산 마하연사에서 정진하던 때 이야기입니다. 마치 큰 바위같이 아무런 움직임도 흔들림 도 없이 참선에 몰두하던 스님에게 하루는 어머니가 그 춥고 먼 곳을 찾아왔습니다. 스님이 "볼 필요 없다"하며 어머니를 만나 주지도 않고 그냥 돌려보내려 하자, 선방의 대중들이 들고일어나 "아무리 우리가 세상과 인연을 끊은 수행승이지만 철 수좌는 인정이 너무 없다"면서 어머니를 맞이하지 않으려면 그 곳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도반들에게 떠밀린 스님은 하는 수 없어 어머님 을 등에 업고 이레 동안 금강산을 구경시켜 드렸습니다.
7. 해방과 더불어, 봉암사 결사를 이끌며 불교 중흥의 길을 마련하다
그러던 중 일제로부터 나라가 해방되었습니다. 해방은 스님들에게 한국 불교의 본래 면목을 되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결국 한국 불교를 살리려면 총림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 때 마침 효봉 큰스님이 해인사에 '가야 총림'을 열었으나 청담스님만 참여하고 성철스님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뒤에 두 스님은 다시 논의하여 문경의 희양산 봉암사로 함께 거처를 옮겼습니다. 성철 스님은 "이 좋은 도량에서 함께 열심히 정진하자"며 울산에 머물고 있던 향곡스님도 봉암사로 불러들였습니다. 불법을 바로 세우려는 스님들의 청정한 의지가 바로 이 희양산 산자락에서 처음 태동됩니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봉암사 결사'가 그것입니다. 성철스님 이 이끈 봉암사 결사는 선종 본디의 종풍을 살리고 옛 총림의 법도를 이 땅에 되살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뜻을 같이하는 젊은 수좌들이 전국에서 모여드니, 청담스님과 향곡스님을 비롯하여 자운, 월산, 우봉, 보문, 성수, 도우, 혜암, 법전스님 등 모두가 뒷날 한국 불교를 이끌어나간 굳건한 동량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뒤에 종정 두 명과 총무원장 세 명이 나왔을 뿐 아니라 여러 선방의 조실로 종단의 지도자가 되지 않은 스님이 없었습니다.
"당시 봉암사의 분위기는 조사의 도량으로서 그 청정한 긴장감이 사뭇 대단했습니다. 법法의 구름이 도량을 덮고 있는 듯했지요. 다시 한번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지금 봉녕사 학장 스님으로 있는 묘엄스님의 말씀입니다.
그런 전통이 있기에 봉암사는 지금도 일반 사람의 발길을 막아 산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서 결제 와 해제가 따로 없을 만큼 꼿꼿한 선풍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철스님은 이 때에 '공주규약共住規約'이라 하여 대중이 함께 생활하는 데에 필요한 규칙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이는 부처님 법대로 살려는 참으로 엄격한 실천궁행 이었습니다.
첫째, 삼엄한 부처님 계율과 숭고한 조사의 유훈을 부지런히 닦고 힘써 실행하여 구경의 큰 결과를 원만히 빨리 이룰 것을 기약한다.
둘째, 어떠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의 각자의 사견은 절대 배척한다.
셋째,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공급은 자주자치自主自治의 표지 아래에서 물 기르고, 땔나무 하고, 밭에 씨 뿌리며 또 탁발하는 등 어떠한 어려운 일도 사양하지 않는다.
넷째, 소작인의 세조와 신도들의 특별한 보시에 의한 생활은 이를 단연히 청산한다.
다섯째, 부처님께 공양을 올림은 열두시를 지나지 않으며 아침은 죽으로 한다.
여섯째, 앉는 차례는 비구계 받은 순서로 한다.
일곱째, 방안에서는 늘 면벽좌선하고 서로 잡담을 엄금한다.
'한국 불교의 르네상스'라고 할 이 봉암사 결사는, 성철스님 생애에서도 퍽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거니와, 오늘날 우리 불교가 지니고 있는 질서와 형식이 거의 모두 봉암사 결사에 뿌리를 두고 있느니 만큼 불교사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처럼 이루어진 이 중흥 불사는, 안타깝게도 육이오전쟁 직전에 희양산 일대가 좌익, 우익의 전략 거점으로 짓밟히면서 몇 해 되지 않아 무산되고 맙니다.
좌, 우의 대립이 퍽 심하던 그 때에, 스님이 어쩌다 행각중에 토방에서 장좌불와를 하고 있으면, 밤중에 사람들이 슬며시 찾아와 "앞으로 좌익이 이길까요. 우익이 이길까요? 제게만 살짝 알려 주십시오"하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스님은 한결같이 "나는 사문이라 그런 것은 모른 다"고 대답했고, 그러면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거나 심지어는 욕을 퍼붓기도 했다고 합니다.
8. 안정사 천제굴 시절, 그 유명한 삼천배 기도를 처음으로 시키다
육이오전쟁 뒤에 성철스님은 월내의 묘관음사에 이어 통영 은봉암에 얼마 동안 머뭅니다. 그러다가 안정사 앞 골짜기에 초가 세 채로 된 토굴을 짓고 천제굴闡提窟이라고 이름하여 그 곳에 주석합니다.
그 때에 근처의 많은 선남선녀들이 스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고, 스님의 법문을 듣고는 발심 하여 출가하는 일이 잇달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철스님 믿다가는 집안 망한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스님의 법문은 유한한 인생에서 일시적인 행복을 버리고 영원한 행복을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는 높고 깊은 설득력을 지녔던 것입니다.
스님은 이 곳에서 처음으로 신도들에게 그 유명한 삼천배를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을 만나려면 젊은이든 노인이든 재벌이든 장관이든 누구 할 것 없이 먼저 부처님 앞에서 삼천배를 해야 했습니다. 절은 그 행위 자체가 참회요 공덕인 것입니다. 삼천배는 그것을 삼천 번씩 되풀이하며 스스로를 낮추고 마음의 때를 닦아 없애 나가는 과정입니다. 스님이 신도들에게 예외 없이 삼천배를 시킨 까닭은, 아마도 쉬임 없이 무릎과 허리를 폈다 구부렸다 하며 삼천 번 절하는 동안에 느끼는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스스로 마음의 먼지를 닦아 없애서 자기를 바로 보게 하려는 방편에서였을 터입니다.
스님은 또 삼천배 기도 말고도 신도들을 위한 수행 방법의 하나로서 아비라 기도라는 독특한 예불의식을 만들어 전해 주었습니다. 이 아비라 기도는 삼천배의 예배 절차와 함께 그 뒤로도 줄 곧 이어져 큰스님 살아 생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도 해인사 백련암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철스님은 이렇듯 신도들에게 기도를 통한 참회와 수행을 철저히 가르치는 한편, 당신 스스로도 평생을 두고 하루도 빠짐없이 일체 중생을 위한 백팔배 참회 기도를 함으로써 수행의 모 범을 보여주었습니다.
9. 성전암에 철망을 두르고 십 년 동안 한번도 바깥으로 나오지 않다
정화淨化 운동이라 하여 비구승과 대처승 사이의 투쟁이 불거지던 무렵입니다. 한평생 수행자 의 길에서 한치도 벗어남이 없던 스님은, 정화 운동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절 재산을 모두 사회에 내주고 승려는 걸식하며 수행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절 뺏기 식의 정화가 되어 자칫 잘못하여 묵은 도둑 쫓아내고 새 도둑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을 우려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성철스님의 그 간곡한 뜻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스님은 1955년 겨울에 대구 팔공산에 있는 파계사 성전암으로 거처를 옮기고는 그 뒤로 십년동안 한번도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십 년에 걸친 동구불출洞口不出', 팔 년 장좌불와에 이은 또 하나의 신화를 이룬 것입니다.
스님은 퇴락한 성전암을 수리하고는 그 둘레에 철조망을 둘렀습니다. 그렇게 둘러친 철조망안에서 일체의 바깥출입을 삼가면서 스님 은 차곡차곡 한국 불교의 앞날을 준비하였습니다. 수많은 불경과 조사어록을 공부함은 물론, 과학과 수학 같은 학문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바깥에서는 불교 정화라는 이름으로 대처승과 비구승의 투쟁이 한창일 때, 스님은 시류를 멀리한 채, 한국 불교의 진정한 내적 정화를 위 해 든든한 징검다리를 놓고 있었으니, 곧 뒷날 '성철불교'라 일컫게 된 독보적인 불교 이론과 실 천 논리를 확립합니다.
10. 성전암 시절에 남긴, 수도자에게 주는 글 '성팔이 노트'
그 성전암 시절에 불필스님과 그 도반들에게 공부 잘하라고 손수 지어 준 글이 있습니다. 이른 바 '성팔이 노트'라고 합니다. 그 노트 첫머리에 성팔이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성팔이 노트라 한 것입니다.
성팔이 노트는 윤회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성철스님은 평생 윤회에 대해서 많은 법문을 하였을 뿐더러 서구의 과학적 이론이나 실험 사례를 빌어서 윤회가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려고 힘썼습니다. 한편, 스님의 법어집인 「자기를 바로 봅시다」에 나오는 '수도자에게 주는 글'도 바로 그 노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좋고 영광스러운 것은 늘 남에게 미루고 나쁘고 욕되는 일은 남 모르게 내가 둘러쓰는 것이 수도하는 사람의 행동이다."
"육조 스님이 늘 말씀하시기를, 자기의 허물만 보고 남의 시비 선악은 보지 못한다 하셨다. 이 말씀이야말로 공부하는 사람의 눈이다. 내 옳다는 생각이 추호라도 있을 적에는 내 허물이 태산 보다 더 크다. 나의 옳음을 찾아볼래야 볼 수 없는 사람이라야 조금 철이 난 사람이다. 그렇게 되 면 무슨 일에서든지 내 허물만 보이고 남의 허물은 볼래야 볼 수 없는 것이다. 세상 모두가 내 옳고 네 그른 싸움이니 내 그르고 네 옳은 줄만 알면 싸움이 영원히 그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깊이 깨달아 내 옳고 네 그름을 버리고 늘 나의 허물, 나의 잘못만 보아야 한다."
"법연 선사가 말씀하셨다. '이십 년 동안 죽을힘을 다해서 공부하니 이제 겨우 내 부끄러운 줄 알겠다.' 내 잘났다고 천지를 모르고 깨춤을 추는 어리석음에서 조금 정신을 차린 말씀이다."
이렇듯 그 내용은 수행인으로서 지녀야 할 하심下心과 도를 이루기 위한 노력과 그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1. 남 모르게 남을 도우라 가르침과 실천에서 철저했던 '그 스님에 그 신도'
스님은 성전암에 있는 동안에 결제와 해제 앞뒤로 일 년에 네 번은 문을 열어 신도들을 위하여 기도 법회를 열고는 하였습니다.
어느 때에 파계사 큰절 법당이 비가 새어서 주지 스님이 걱정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스님은 기도 법회에 온 아는 보살님에게 일렀습니다.
"큰절 법당이 비가 샌다고 하니 보살이 불사를 하지.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절대 큰절 주지 스님에게는 누가 불사를 하는지 모르게 해야 돼.
시자가 심부름을 해 줄 터이니 보살이 돈 들고 직접 나서지는 말어."
그렇게 해서 그 보살은 남 모르게 큰법당 불사를 하였습니다. 그 뒤에 성전암에 기도하러 오는 길에 불사가 잘 되었나 하는 마음에서 큰절에 들렀습니다. 보살은 새로 고친 법당에 올라 108참 회의 절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 절을 하고 있는데 웬 스님이 들어오더니만, "웬 보살이 스님 허락도 없이 큰법당에 들어와 멋대로 절을 하느냐"고 큰소리로 호령하며 꾸짖더니 그만 보살 을 내쫓고 말았습니다. 그 보살은 그 길로 성전암에 올라와서 성철스님에게 말했습니다.
"큰스님, 정말 오늘 제 마음이 한량없이 기쁘고 깨끗합니다. 큰절 법당에서 허락 없이 절한다고 쫓겨났습니다. 그 스님이 제가 불사 시주를 한 사람인 줄 알았으면 잘 대접한다고 얼마나 법석을 떨었겠습니까? 오늘 대접받고 올라오는 것보다 박대 받고 올라오는 이 걸음이 얼마나 가볍고 좋은 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참 불사지."
성철스님의 한마디였습니다. 참으로 '그 스님에 그 신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12. 1967년 해인 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백일법문'을 설하다
1965년, 성철스님은 마침내 굳게 닫은 성전암 문을 열고 나옵니다. 그 길로 김용사에서 대중들 을 모아 놓고 스님의 사상을 거침없이 토해 내니 그것이 대중 앞에서 한 최초의 법문이었습니다.
십 년 동안 걸어 잠근 문을 열자 자운스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운스님은 성철스님을 설득하여 해인사의 백련암으로 모셔갔습니다.
봉암사에서의 결사 의지를 되살리며 자운 스님은 청담스님과 함께 해인사를 총림으로 키우는 데에 뜻을 모았고, 성철스님은 그 뜻을 받아들여 1967년에 해인총림의 초대방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 해 겨울, 성철스님은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법석을 열어, 사부대중을 위하여 하루 두 시간씩 일백일 동안 법문을 하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백일법문'입니다.
'백일법문'을 통하여 스님은 흐트러진 불교 교리를 정리하여 집대성하고 조계종의 법맥을 바로 잡고 나아가 선종의 핵심 사상 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었습니다.
곧, 불교의 근본 진리가 선과 교를 통해서 중도中道에 있음을 밝히고 선종의 정통한 종지는 돈오돈수頓悟頓修에 있음을 천명하는 한편,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리는 원자물리학이나 양자 역학에서 또한 입증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3. 불교의 근본 진리가 중도에 있음을 밝힌 스님의 중도법문
"부처님이 뭐라고 했나 하면, 나는 모든 양변을 버린 중도를 깨달았다. 이렇게 선언을 했어요. 양변을 버리니, 곧 생멸生滅도 버리고, 나고 죽는 것(生死)도 버리고, 있고 없는 것(有無)도 버리고, 착하고 악한 것(善惡)도 버리고, 옳고 그른 것(是非)도 다 버렸으니,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 무엇이냐, '절대'다 이 말이여. 그래서 나는 상대 세계를 모두 버리고 절대의 세계를 성취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해탈성불이야. 생각해 보아라. 너희는 고행주의 아니냐. 또 세상은 모두 환락주의 아니냐. 너희들은 환락을 버리고 고행하니 가장 착한 것 같지만, 변은 둘 다 똑같다. 결국은 참으로 해탈을 하려면 고행도 버리고 환락도 버려야 한다. 두 가지를 다 버려야..."
일체가 불생不生이요, 불멸不滅이라는 것입니다. 일체가 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니, 사람도, 짐승 도, 초목도, 돌도, 허공도, 해와 달도 전체가 모두 불생불멸이지 생멸은 없습니다. 성철스님은 불생불멸 중도법문을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를 들어서도 재미있게 설명하였습니다.
"과학만능 시대인 만큼, 중도를 과학적으로 좀 근사하게 풀이해 보자, 이 말이여. 그럼 불생불멸하고 과학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원자물리학에서도 실질적으로 불생불멸을 실험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했어. 그게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나오는 등가원리지. 등가원리는 이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은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에너지와 같다는 거지. 그래서 유형인 질량과 무형인 에너지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거 야."
유형의 질량과 무형의 에너지가 같다는 등가원리는 유형, 무형의 형이 바뀐다 해서 그 본질이 없어지거나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생불멸, 모든 것 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설법과 결과적으로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스님은 이를 좀더 알기 쉽게 또 달리 설명하였습니다.
"만물은 모양이 바뀐다고 해서 없어지거나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얼음과 물의 관계와 같은 식이여. 물은 에너지에 비유하고 질량은 얼음에 비유하거든. 물 한 그릇이 얼음이 되었거든. 물 한 그릇이 얼음 한 그릇이고 얼음 한 그릇이 물 한 그릇이지."
"유형인 질량이 무형인 에너지로 전환하고 무형인 에너지가 유형인 질량으로 전환하는데, 색色 이라는 것은 유형을 말하고 공空이라는 것은 무형을 말한다 이 말이여, 그저 입으로만 말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니라, 실제 자연계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이지. 이런 이론을 우리 불교에서는 중도법문이라고 해. 중도법문!"
부처님의 일대 사상을 중도中道로써 전한 백일법문으로 한국의 불교는 선종, 교종 할 것 없이 모 두가 불교의 사상에 대해서 새롭게 눈뜨게 되었습니다.
14. 이기주의에 젖은 중생들에게 연기 법칙을 설명하다
마음의 눈은 가리는 세 가지 독은 욕심 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인데, 그 가운데에 탐욕이 근 본이며 탐욕은 이기주의에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무한경쟁의 이 시대에 나만 잘 살아보자는 이기주의가 성행합니다. 이기주의에 젖은 중생들에게 스님은 일체 만물은 서로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음을 설명하였습니다. 두 막대기가 서로 버티고 섰다가 이쪽이 넘어지면 저쪽도 넘어지는 것과 같이 혼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이쪽을 해치면 저쪽도 손해를 보고 저쪽을 도우면 이쪽도 이익을 받으니, "참으로 내가 살고 싶거든 남을 도우라"고 하였습니다.
만물은 본디부터 한 뿌리로 서로 관련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며,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는 연기의 법칙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가 짖고 자기가 받으며, 몸을 바로 세우면 제 그림자도 발라지고 몸을 구 부리면 그림자도 구부러지듯이, 바른 汰?지으면 모든 생활이 발라지고 굽은 업을 지으면 모든 것이 굽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모든 행, 불행은 스스로 만들 결과라고 하였습니다. 이기주의와 물질문명에 병든 이 사회에 스님의 그 말씀은 청량한 법음이었습니다.
15. 영원히 변치 않는 영혼의 존재와 윤회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다
스님은 피고 지기를 되풀이하는 이 자연계가 무상하기 짝이 없어 보여도,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불멸의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이승에서의 삶을 끝내고 어디로 가게 되는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그 영혼이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이며 영혼이란 과연 있는 것일까? 스님은 영혼의 물질화와 영혼 사진, 정신 사진을 찍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영혼불멸 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며 정신 에너지는 살아서나 죽은 뒤에나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보존된다고 하였습니다.
또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다시 윤회(또는 재생)하며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란 사막에서 풀잎 얻는 것만큼이나 어려우며 사람이 아니더라도 영혼이 다시 몸을 받아 태어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몸을 받지 못한 수많은 영혼이 허공을 떠다니고 있으며, 윤회는 지구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깨우쳐 주었습니다.
윤회하는 근본 원칙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업에 끄달려 서만 된다고 하였습니다. 곧, 착한 일을 많이 했으면 행복한 내생이 되고 악한 일을 많이 하면 불행한 내생이 된다는,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인과법칙에 따라 윤회하는데, 그런 사실이 과학적으로 판명되었음을 또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윤회의 고리에 갇혀서 억겁을 두고서 나고 죽는 고통스런 순환을 되풀이하면서, 인간으로, 동물로, 미물로, 때로는 초목으로 몸을 바꾸어 태어난다고 하였습니다.
16. "마음의 눈을 뜨고 지혜의 광명을 보면 내가 부처요,
이 사바세계가 극락이다"
마음을 가리고 있는 번뇌의 구름을 걷고 지혜의 광명을 볼 때 중생들은 비로소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 영원한 생명 속에 무한한 능력을 가지는 대해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스님은 또한 일러주었습니다. 바로 그 곳에 윤회를 벗어난 영원한 자유와 절대적 행복이 있으며 이 광명은 영 겁이 다하도록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요.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 고 중생들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는 어떤 방법으로 될 수 있는가요? 스님은 거기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은 바로 화두참선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마음을 한곳에 모아 일상과 몽중과 깊은 수면의 경계에서도 오로지 화두를 참구하여 근본 무명까지 없어진 구경에 이르게 되면, 마음에 쌓인 먼지가 다 없어져서 본디부터 자기 마음속에 있는 불성 곧 자신의 부처를 자기의 힘으로 발견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화두를 참구하여 자기의 본래 면목을 보려면 첫째로 잠 많이 자지 말라, 둘째로 말 많이 하지 말라. 셋째로 책(경전)을 보지 말라. 넷째로 간식하지 말라. 다섯째로 돌아다니지 말라는 수좌5계 를 남기셨습니다. 해탈에 이르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욕심을 버리고 남을 돕는 생활을 해야 한다 고 강조하였습니다. 욕심 때문에 마음 거울에 때가 묻었으니 욕심이 다 없어지면 결국 마음의 거 울의 때가 하나도 없어져서 자기의 본래 면목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스님은 이 번뇌망상, 그 먼지만 닦아내면 내가 바로 부처며, 이 자리가 극락이라고 하면서 중생과 사바세계 에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17. 선가의 오랜 가풍인 '돈오돈수'를 설파하다
스님은 또한 조계종의 종조 문제를 대담하게 제기합니다. 오십년대 정화운동 뒤로 새롭게 자리 매김 하려던 '보조스님 종조설'을 전면 부인한 것입니다. 한국 불교의 종조는 본디 태고스님이었습니다. 이에 성철스님은 한국 불교가 조계 혜능스님을 원조로한, 임제종의 법통을 이은 선종이며, 종조는 태고 보우국사임을 확실하게 밝혔습니다.
종조문제와 돈수, 점수 논쟁으로 성철스님은 한국 불교 조계종이 모두 우러르는 고승 보조스님 과 대립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보조스님은 선과 교를 융합시키려고 힘썼으나 그 결과 교가적인 돈오점수 이론을 선가의 종지 로 내세우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그 영향으로 한국 불교는 언제부터인가 점수 사상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성철스님이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설파하기 시작하자, 한국 불교계는 한동안 돈오돈수, 돈오점수의 논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화두를 부지런히 해서 나중에 오매일여가 되고 안팎이 명철해져 거기서 한 눈 뜨면 깨친 것이 지, 견성이지. 그러기 전에는 병난 거여."
화두를 참구해서 마침내 아주 작은 망상까지도 없어진 구경의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본원 자리에 단박 깨달아 들어가는 돈오돈수가 선종의 본디 사상인 것입니다. 이에 성철스님은, 선사들 의 어록을 쉬운 우리말로 번역한 '선림고경총서' 서른일곱 권을 내어, 돈오돈수 사상이 비단 스님만의 주장이 아니라 역대 선사들의 오종 가풍임을 밝혔습니다.
큰스님께서 해인총림 방장으로서 백련암에 머무는 동안 해인사는 눈에 띄게 그 면모가 새로워졌습니다. 큰절과 산내 암자가 크게 발전하였는가 하면 선원, 율원, 강원을 두루 갖춤으로써 명실 상부한 총림의 면모를 지니게 두었고, 무엇보다도 서릿발같은 선풍禪風의 기강을 드높임으로써 청정한 수행 도량을 이루니 오백여 명에 이르는 산중 대중이 부처님의 혜명을 이으려고 밤낮없이 정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70년대 말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한국 불교는 또 한 차례의 거 센 부침을 겪어야 했습니다. 해방 뒤로 시작된 비구승과 대처승 사이의 분규와 조계종 내부의 종 권 다툼으로 승려들의 기강이 크게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여기에 신군부는 또 다시 정화라는 이름으로 세속의 칼을 들이대었습니다. 그것이 현대 한국 불교의 최대의 치욕이라 하는 1980년 10.27 법난입니다.
한걸음 한걸음 위기의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던 한국 불교계가 그 때에 선택한 분이 바로 성철 큰스님이었습니다. 큰스님이야말로 허물어져 가는 불교를 받쳐줄 기둥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철 큰스님은 "내 이름을 빌려주어서 불교가 중흥한다면 기꺼이 응하겠다"며 제7대 종정직을 수락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던 성철 큰스님은, 이 때에 취임법어 하나로 대뜸 세간을 술렁이게 하면서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18. 삼십년 남짓 가야산 해인사를 떠나지 않은 '가야산 호랑이'
"종정 안 한다는 말만하지 말라고 해서 종정이 되었으나 산중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스님은 종정 취임식장에 가지 않았을 뿐더러, 1991년에 다시 제8대 조계종 종정에 재 추대되어 입적하기까지 끝끝내 산승이기를 고집하여 평생 그 말씀을 지켰습니다.
일찍이 그 박학다문함과 장좌불와 팔 년, 동구불출 십 년 같은 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거니와, 또 그 독보적인 사상과 선풍으로써 이 땅의 불교계에 새로운 지평을 연 성철스님은, 1967년 이후로 줄곧 가야산 해인사를 지켜 오는 동안에 '가야산 호랑이'라는 별칭을 얻습니다. 공부하는 대중스님들을 늘 잔뜩 긴장시키던, 그 불길 서리 같고 서릿발같은 가르침의 엄격함 덕분에 얻은 이름입니다.
정진 중에 어느 스님이 잠깐이라도 졸음에 빠질라치면 이내 " 이 도둑놈아, 밥값 내놔라!" 하는 쩌렁쩌렁한 고함소리와 함께 등줄기에 장군죽비가 날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상하고 유머도 풍부하며 짐짓 장난스러운 면모도 드러내고는 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을 퍽 좋아하여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꼭 천진무구한 아이 같았고, 도반들과 함께 있을 때면 씨름을 하기도 하면서 짓굳은 장난을 예사로 하였습니다. 법문사이에 끼여드는 우스갯소리도 여간 구수하지 않았습니다.
19. 청빈한 수행 납자로서 말 그대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다
또 큰스님은 "도를 이루려면 가난부터 배워라"고 가르치면서 스스로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음식은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을 정도면 된다며 소식으로 일관해 왔는가 하면, 여름에는 삼베, 겨울에는 광목으로 옷 한 벌에 바리때 하나만으로 지내는 청빈한 삶을 이어 왔으니, 그나마 그 한벌 옷도 여든 나이가 되도록 손수 기워 입었습니다.
"스님, 입고 계신 옷이 저희가 보기에는 상당히 남루하고 누더기입니다만 몇 년 동안 입으셨습니까 ?"
"삼십년 넘었어. 이 옷이 두 갠데, 번갈아 가며 입어. 삼십년 넘었어. 거의 사십년 됐어."
평상시에 안 입고 예식 있을 때에만 입으십니까?"
"장 입고 다니는 옷이라."
"늘 입고 다니시는 옷이군요."
"오늘 특별히 입고 나온 줄 아는 모양이네.
나 장 입고 다니는 옷이야."
" . . . . . . . "
"나 제일 못났기 때문에 좋은 옷 입을 자격이 없어. 아무 자격이 없는데 좋은 옷 입을 수가 있나." 스님을 찾아온 어느 기자와의 대화 한 자락입니다.
20. "내 말에 속지 마라" 1993년 11월 4일 처음 출가한 그방 퇴설당에서 열반에 들다
그러나 큰 스님은 삼십 년 남짓 한결같이 다니던 가야산 포행길을 언제부터인지 힘겨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야산 호랑이도 한 자락 가사 밑에 어느덧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스님, 한 말씀만 여쭈겠습니다."
"뭐를?"
"일천삼백만 불자가 있는데 그 불자들에게 한 말씀만."
"한 말씀만?"
"내말에 속지 마라."
"자신의 말에 속지 마라."
"내 말 . . . . ? "
"내 말 말이여. 내 말한테 속지 말어.
나는 늘 거짓말만 하니까."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내 말에 속지 마라, 그 말이여."
1993년 9월에 당신의 저서인 '성철스님
법어집'11권과 선종의 종지를 담은 '선림고경총서' 37권이 완간 되는 것을 보고 나서 두 달 만인 그 해 11월 4일 아침에 성철 큰스님은 열반하였습니다.
"내 말에 속지 마라" 는 말을 던져주고는 영영 우리 곁을 떠난 것입니다.
그날 새벽, 해인사 퇴설당에서 제자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큰스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참선 잘하라 !" 그 한 말씀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제자 어깨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처음 출가한 그 방에서 마지막 열반에 드니, 행운유수行雲遊水의 사문의 길에서 보기드문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법랍 59년, 세수 82세로 큰스님은 열반 게송을 남기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 지라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 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마침내 생사를 벗어나 적멸에 든 큰스님은 입적한 지 이레째 날 평생을 주석한 해인사 퇴설당을 떠나서 일주문 밖에 마련된 연화대로 향하였습니다.
그날, 퇴설당 위로는 일시에 새떼가 날고, 다비장에서는 때늦은 낙엽들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스님 떠나던 그 날도 그러더니, 백련암 뒷산 하늘에서는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환한 빛이 피어올랐습니다. 이는 드물게 보는 방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른 시간이 넘게 걸린 다비는 일백여 과에 이르는 영롱한 사리를 남겼습니다. 다비식에서 사십구재에 이르는 동안 큰스님의 떠남을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뭇 대중의 발길은 해인사 앞뜰을 가득 메우며 끊일 줄 몰랐습니다.
21. 아직도 가야산의 메아리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전의 가르침
성철 큰스님은 속인으로 왔다가 끝내 부처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부처'로 불리는 까닭은, 오직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용기, 그리고 그 결의를 평생토록 지킨 남다른 실천궁행 때문입니다.
큰스님 가고 없는 가야산, 그러나 한 평생 오롯한 선승의 길을 걸어 온 큰스님의 자취는 지금도 매서운 죽비소리가 되어서 날마다 새롭게 우리 곁에 다가 옵니다.
자기를 바로 보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참회하고 일체 중생이 행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누누이 이르시던, 그 참되고 소박한 가르침은 오늘도 가야산의 메아리가 되어 영원으로 울리고 있습니다.
“흐르는 개울물도 아껴 써라”
“쓰레기통의 콩나물, 다시 삶아오너라”
옛날 큰스님들 가운데 근검절약을 실천하지 않은 분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 가운데서도 청담 스님은 유독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한 분이었다.
<사진설명>청담스님(사진 왼쪽)과 성철 스님의 웃음이 너무도 천진하다.
“쓰레기통 콩나물 다시 삶아오라”
스님께서 서울 강북구 삼각산 도선사(道詵寺)에 머물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이 무렵 모든 백성들의 삶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되던 형편이었으니, 절집 살림도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청담 스님은 도선사의 모든 수행자들은 아침에는 반드시 죽을 쑤어 먹도록 했다. 그리고 그 죽에도 조건이 따라 붙었다.
“자고로 옛 스님들은 아침에 죽을 쑤되 그 죽에는 하늘이 보여야 하고, 방안에서 들여다보면 그 죽에 천정이 그대로 다 들여다보일 정도가 돼야 한다.”
죽을 쑤되 그야말로 멀겋게 쑤라는 당부이셨다. 식량이 넉넉지 못한 세상이라 절약해서 살자는 뜻이 담겨있는 당부이셨지만, 그 보다는 ‘시주의 은혜’가 막중하니 쌀 한 톨이라도 소중히 여기라는 청담 스님의 가르침이 담겨있었다.
이토록 절약과 검소한 생활을 몸소 실천하고 있던 청담 스님이 하루는 도선사 뒤뜰 쓰레기통에서 버려진 콩나물 대가리를 발견했다. 청담 스님은 그 콩나물 대가리를 주워 들고 공양간으로 가서 행자생활을 하고 있던 혜자(지금의 도선사 주지)를 불러 세웠다.
“이것 보아라. 누가 버렸는지 모르겠다마는 이 콩나물 대가리가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다. 이 콩나물 대가리를 내 너에게 맡길 것이니 반드시 내일 아침 내 밥상에 반찬을 만들어 올리도록 해라.”
그때의 행자는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청담 스님의 그 근검절약정신을 잊지 못한 채 큰 교훈으로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다.
1960년대는 너나없이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다. 자동차도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고 서울 인구도 500만명 안팎일 때라 그때만 해도 공해문제는 거론조차 된 일이 없었고 자연보호니 환경보호라는 말은 나온 일조차 없었다.
이 무렵만 해도 도선사 바로 아래 계곡에는 방금 손으로 퍼마셔도 될 섬섬옥수 같은 맑은 개울물이 사시사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도선사 스님들은 누구나 이 개울로 내려가서 몸도 씻고, 채소도 씻고, 빨래도 했다.
어느날 젊은 스님이 도선사 아래 개울로 내려가 시원한 개울물로 머리를 씻고 있었다. 비누질까지 신나게 하고 있는데 이 모습을 도선사에서 내려다보고 계시던 청담 스님이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셨다.
<사진설명>청담 스님은 도선사에 주석하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잊지 않았다.
“얘 인석아, 너는 왜 그렇게 물을 함부로 쓰는게야? 엉?!”
머리를 씻던 젊은 스님이 몸을 들어 올려다보니 청담 스님께서 야단을 치고 계시는게 아닌가!
“이건…흘러가는 개울물 아닙니까요 스님?”
“흘러가는 개울물이라도 아껴 쓸 줄을 알아야지. 흘러가는 개울물이라고 해서 그렇게 함부로 쓰고 비누칠을 마구해도 괜찮다더냐?”
“아이 참 스님께서두…이 개울물은 저기 저 산에서 한없이 흘러 내려오지 않습니까요?”
“에이끼 이런 녀석아! 아무리 산에서 흘러내리더라도 그렇지. 저 아래 계곡에서 이 물로 마을 사람들이 채소도 씻고, 과일도 씻고, 들놀이 나온 서울 사람들은 이 물로 밥도 짓고, 국도 끓이는 걸 못봤단 말이냐?”
“그 그야, 그 그렇습니다만…”
“에잉 쯧쯧쯧! 어찌해서 너희들은 네 눈에 보이는 것만 안단 말이냐 그래. 정신 차리거라 인석아. 심청정 국토청정(心靑淨 國土靑淨)이야!”
‘자연보호’라는 말이 단 한번도 나온 일이 없었던 1960년대에 청담 스님은 이미 자연보호의 중요성을 꿰뚫어 보시고 흘러가는 개울물마저 아껴써야 한다고 가르치셨으니,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면에서도 청담 스님은 한 세대 앞서간 선각자였고 몸소 자연보호를 실천한 보살이었다.
<사진설명>청담 스님이 쓴 '대자대비'
“중 밥상, 3찬이면 족하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1960년대의 스님들은 대부분 ‘헐벗고 굶주리며’ 수행했다고 해도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가난해야 도(道)가 깊어지고 배부르면 마(魔)만 성한다”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여름에는 감자 몇알로 끼니를 때우고 겨울이면 도토리묵으로 하루 해를 넘기는 일이 산중에서는 다반사였다. 그만큼 스님들의 살림살이는 청빈하기 그지 없었다.
청담 스님이 정화 종단의 총무원장자리에 계시던 그때의 일이었다. 청담 스님의 속가 따님이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는데 그 비구니 묘엄 스님이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날 점심 무렵, 청담 스님을 안국동 선학원에서 뵙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묘엄 스님이 선학원으로 찾아뵈니, 아버지 청담 스님이 마침 정심 공양상을 받고 있었다.
“니 점심은 묵었나?”
“예 스님. 저는 먹고 왔습니다.”
“그래, 그럼 거기 좀 앉거라.”
청담 스님, 총무원장을 맡고 있는 청담 스님의 점심 밥상에는 밥 한 그릇, 시래기 국 한 그릇, 김치 한 접시 그리고 간장 종지 하나가 달랑 놓여 있었다. 밥 한 그릇을 빼고 나면 반찬은 간장까지 합해도 모두 세 가지 뿐이었다. 속가 따님인 묘엄 비구니의 가슴은 허전하기 그지 없었다.
“아이구 스님…공양상이 이래 허술해서…어쩝니까….”
“공양상? 이기 이래도 나한테는 한 가지가 더 있는기다.”
“무엇이 한 가지 더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도 오늘은 간장이 한 가지 더 올라 왔구먼. 중 밥상 3찬이면 족한기다.”
청담 스님은 반찬이 모자라자 밥에도 간장을 쳐서 맛있게 비우시며 흡족하게 웃으셨다.
“중 밥상 3찬이면 족한기다.” 시래기 국, 김치, 간장 세가지 반찬이면 족하다는 청담 스님의 그 날, 그 말씀은 그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노비구니 묘엄 스님의 가슴속에 한으로 남아 청담 스님의 매서운 가르침으로 살아있다.
10년간 맨발 고행 감내한 ‘인욕보살’
청담(靑潭) 스님은 한국불교정화운동의 화신(化身)이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불타올랐던 한국불교정화운동의 한복판에 서서 “성불(成佛)을 한생 미루더라도 불교정화만은 반드시 이루겠다”고 서원했던 분이 바로 청담 스님.
청담 스님은 190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농업학교를 마친 후 2차에 걸쳐 출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친구였던 박생광(朴生光) 화백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송운사(松雲寺)의 아끼모도 준까 스님 문하에서 6개월을 수행했다. 그러나 일본불교의 승풍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곧바로 귀국, 25세에 경남 고성 연화산에 있는 옥천사에서 남경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했고, 순호(淳浩)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 후 스님은 서울 개운사의 대원강원 박한영 스님 문하에서 수학했고 이어 만공선사 문하에서 수행, 금강산을 거쳐 묘향산에서 깨달음을 얻고 만공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해방 후, 스님은 한국불교정화운동에 뛰어들었고 기어이 청정비구종단의 기틀을 확고히 세웠다. 스님은 한국불교 대표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의 총무원장, 종회의장, 장로원장, 동국학원 이사장, 선학원 이사장, 종정까지 지내시고 1971년 11월 15일, 세수 70세, 법랍 45세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오직 불교정화의 완성을 향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어찌보면 청담 스님의 화두는 ‘불교정화’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불교 정화의 화신
스님은 속가에 늙으신 홀어머님과 아내, 딸 하나를 두고 삭발 출가했었다. 훗날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도인스님’으로 알려지자 고향인 진주의 불교신도들이 스님을 찾아뵙고 간청, 진주의 연화사 초청법회에서 설법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초청법회가 끝나고 스님은 아들의 설법을 들으러 온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옛 속가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늙은 어미의 유언을 들어 달라.”
어머니의 이 말씀을 차마 거역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이 어미의 마지막 유언으로 알고 이 한가지 부탁만은 꼭 들어다오. …오늘 밤, 이씨 가문의 대(代)를 이을 씨 하나만 심어놓고 가거라….”
그러나 그것은 늙은신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이라고 해서 들어줄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었다. 스님은 단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노모의 마지막 유언은 차라리 절규에 가까웠고, 결국은 절망적인 통곡으로 이어졌다.
스님은 검푸른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옛날 목련존자는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지옥에 내려가 그 무서운 지옥고를 견디면서 어머니를 구해냈다고 하거늘 나는 살아있는 늙은 어머니의 소원 한가지를 들어주지 못한단 말인가!
어머니 모셔다 삭발 출가시켜
결국 스님은, 지옥에 갈 각오를 하고 옛부인이 자고 있는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 하룻밤의 파계를 참회하기 위해 장장 10년 세월동안 엄동설한에도 맨발의 고행을 감내했다. 그러면서 늘 이렇게 다짐했다.
“지옥에 갈 각오로 파계했던 몸, 이만한 고통이야 달게 받아야지….”
지옥에 떨어질 각오를 하고 마지막 효도행(孝道行)을 하느라 감행한 파계였건만, 참으로 기구한 인연이었던가. 하룻밤 파계로 태어난 아이는 이씨 가문의 대(代)를 이을 아들이 아니라 또 딸이었으니, 청담 스님은 늙으신 어머니의 소원도 이루어드리지 못한 채 막중한 파계의 죄만 짓게 된 셈이었다. 그래서 청담 스님의 참회 고행은 더더욱 처절하고 냉혹했다.
스님이 된 아들은 파계까지 시켜가면서 대(代)를 이을 아들을 낳을 기회를 만들어주었건만 또 딸을 낳은 며느리를 시어머니는 몹시 원망하고 미워했다. 그리하여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말씀이 아니었다. 속가의 이 비극적인 소식은 바람결에 실려 스님의 귀에까지 들려오게 마련이었다.
스님은 진주 속가로 가서 늙으신 어머니를 직지사로 모시고 와 삭발 출가시켜 드렸다.
“그동안 쌓으신 업장, 노후 염불공덕으로나마 씻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속가의 어머니는 성인(成仁) 노비구니스님이 되어 염불공덕을 쌓은 후 며느리와 뜨거운 화해 끝에 열반에 들었다.
그리고 그 후 하룻밤 파계로 얻은 둘째 딸은 성철 스님의 권유로 삭발 출가하여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거목으로 커서 수많은 중량급 후학들을 길러내고 있는 저 유명한 수원 봉녕사의 노비구니 묘엄 스님이 되었다.
그리고 청담 스님의 옛 속가 부인도 청담 스님 열반 후 따님 묘엄이 모셔다 삭발 출가시켜 드렸으니, 결국 청담 스님 집에서만 네 식구가 삭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인욕제일 청담 스님”
1950년대 한국불교계에 정화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을 때,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했던 스님들은 동산 스님, 청담 스님, 효봉 스님, 금오 스님 등 기라성 같은 청정비구스님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청담 스님은 초강경파.
이 무렵 한국불교계에서는 “설법제일 하동산, 정진제일 이효봉, 인욕제일 이청담, 지계제일 정전강”이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청담 스님은 어떤 어려움, 어떤 수모, 어떤 고통도 기꺼이 잘 견디어 내고, 어떤 경우에도 신경질을 부리거나 화를 내는 일이 없었다.
만일 불교정화운동 때 청담 스님의 그 철저한 인욕바라밀이 없어다면, 아마도 불교정화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청담 스님은 불교정화운동을 위해, 하나에서 열까지 참고 견디고, 견디고 참아내면서 인욕바라밀로 시종일관, 끝까지 정화운동을 밀어붙여 결국 정화운동 성공의 기틀을 마련한 셈이었다.
“만일 그때 청담 스님이 그 처절한 인욕을 실천하지 않았더라면 자체 내에서 분관과 반목이 일어나 정화운동은 실패했을 것이다.”
후학의 이 한마디 증언은 청담 스님이 얼마만큼 철저한 인욕보살이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남을 살리고 이롭게 해야 보살”
<왼쪽>'유심사상'의 핵심을 강의하고 있는 청담 스님 | <오른쪽> 열반하기 하루 전 이대에서의 마지막 설법
스님 걸망 속엔 꽃삽이 있었으니…
지금은 우이동 종점에서 도선사까지 도로가 잘 닦여져 자동차로 편하게 도선사에 올라갈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3Km에 이르는 비탈진 산길 뿐이라 청담 스님도 별 수 없이 걸어서 오르내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것도 봄부터 가을까지는 그런대로 힘들게 산길을 오르내릴 수 있었지만, 겨울철에는 위험한 빙판길이 한두곳이 아니었다. 요즘에야 톱니같은 신발 밑창이 있어서 안전하게 빙판길도 오르내리고 미끄럼을 방지해주는 갖가지 방한화도 개발되어서 편해졌지만, 청담스님께서 도선사에 주석하고 계시던 1960년대에 스님이 신을 수 있던 신발은 고작해서 검정고무신 뿐이었다.
겨울철 온 산야에 폭설이 내려 쌓이고 나중에는 눈 녹은 물이 흘러내리다 얼어붙어 빙판으로 변해버리면 스님들은 그 검정고무신을 새끼줄로 동여메고 험한 산비탈길을 오르내려야 했다. 청담스님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청담 스님은 그 미끄럽고 험한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오르내리시다 말고 잠시 걸음을 멈추고 걸망을 벗으셨다. 그리고는 걸망 속에서 꽃삽을 꺼내들고 비탈길에 달라붙어 있는 얼음조각을 떼어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겨울철, 청담 스님의 걸망 속에는 언제나 꽃삽이 들어 있었는데 산길을 내려오다가 혹은 산길을 올라가시다가 비탈길에 눈이 얼어붙어 있거나, 얼음이 얼어 붙어 있으면 반드시 그 꽃삽으로 미끄러운 눈과 얼음을 떼어내시는 것이었다.
당신은 이미 지나왔지만, 뒤에 올 사람을 위해 비탈길의 얼음을 꼭꼭 떼어내던 스님, 바로 그 분이 청담스님이셨다. 청담스님이 강조하시던 보살행은 멀리 있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와 사소한 생활속에서 직접 실천할 수 있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속에 있었다.
“극락과 지옥은 마음속에 있다”
평생토록 ‘마음’ 법문을 펼치시며 불교정화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청담스님은 6·25직전 봉암사에서 수행하시다 빨치산의 습격을 받아 원주가 총살 위협을 받게 되었을 때 ‘마음’ 법문을 펼쳐 원주의 목숨을 구했다.
“천당입네, 극락입네, 지옥입네, 그런게 있다고 헛소리를 하느냐?”
빨치산 대장은 그렇게 스님들을 윽박지르며 위협했다. 그 때 청담스님이 한말씀 하셨다.
“이 사람을 살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면 바로 그 마음이 천당이요 극락인 것이오. 그리고 이 사람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마음이 바로 지옥인게요.”
청담스님의 이 한마디 명설법이 빨치산 대장의 마음을 움직여 총살직전에 놓여 있던 원주의 생명을 구해낼 수 있었다.
-천당과 지옥은 멀리 있는게 아니다. 바로 우리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
인생의 헛된 삶과 참된 길
청담큰스님 / 조계종 2대 종정
우리 인간이란 본래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또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이며 그저 막연히 생겨났으나
살 때 까지는 죽지 못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고달픈 삶에 쫓기다 보면 이런 문제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각박한 현실생활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기 이전에
벌써 살고 있는 것이며 그러하기 때문에 여기서
나는 잘사는 문제를 가지고 말하려 한다.
농사짓는 사람이나 장사하는 사람이나 고기 잡는 사람이나
공장 직공 정치인 학자 종교인 심지어는 석가 공자 예수에
물어볼지라도 잘 살려는 마음, 즉 이 한 생각만을
똑같이 가지고 있으리라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렇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을 잘 산다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이 누구나 잘 살려는 이 한마음을 가졌을 진 댄 잘
살 수 있는 어떤 법칙이 필요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잘 사는 법을 말하기 전에 먼저
어떤 것을 잘 사는 것이라고 하는가를 우리 인간들 모두에게 묻고 싶다.
세계의 경제를 한 손에 넣고 주무르는 재벌이나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제왕이 되거나 또 사자후의
웅변을 토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서늘하게 만들고
천하의 독자를 붓 하나로 놀라게 하는 큰 문호가 된다면
이것을 일러 잘사는 것이라고 할 것인가?
부귀와 명예를 헌신짝같이 던져버리고 뜬 구름 흐르는
물로 살림을 삼아 천상천하 유아독존인양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을 일러 잘사는 사람이라 할 것인가? 아니다,
이 모두가 겉치레의 잘사는 방법이 될는지는 몰라도
참된 의미에서 말하는 잘사는 방법은 되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떤 것이 잘사는 것인가?
부족이 없는 것이 잘사는 것이요,
구할 것이 없는 것이 잘사는 것이요,
원망이 없는 것이 잘사는 것이요,
성냄이 없는 것이 잘사는 것이요,
공포와 불안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강제와 속박이 없는 것이 잘사는 것이요,
해탈과 자유가 있는 것이 잘사는 것이요,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요,
보다 위 없는 것이 잘사는 것이요,
마음에 흡족한 것이 잘사는 것이다.
인간의 일평생을 백 년이라 한다면 이
일평생을 흔히들 살아간다고 한다.
이 귀중한 한평생을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또 누구를
위해서 살고 있단 말인가? 우리는 흔히 이런 문제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이에 머리엔 흰머리카락이 얹어있고
얼굴엔 주름살이 잡히는 수가 있다.
만일 인간들이 이런 이유를 모르고 그저 먹고 자고
성생활만을 지탱해나간다면 이는 저
금수들의 생활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흔히들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살아간다는 말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말이다.
가령 인간이 백 년의 삶의 권리를 가지고 와서 하루 살았다는
말은 하루 죽었다는 말 이외에 또 무슨 다른 뜻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일년을 살았다는 말은 곧 일년을 죽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살아간다는 말은 죽어간다는 말이 옳은 것이다.
우리가 농사짓고, 장사하고, 정치하고 경제하고,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죽지 않으려는 것인데 그래도
죽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닌가.
이는 참으로 비참한 사실이다. 또 권력, 재력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일생을 따지고 보면 죽음이라고 하는
큰 구렁이한테 뒷다리를 물려 들어가는
개구리의 운명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 인간들이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을 볼 때는
정말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구렁이한테 물린 개구리는 구렁이 뱃속에 완전히
들어가기까지엔 오직 구렁이 자신이 결정할 것이지
개구리에겐 아무런 자유도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죽음도 인간의 자유의사에 의해서 결정된다.
천하의 영웅과 만고의 호걸도 이 죽음 앞에선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그저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마치 남의 일처럼
새까맣게 잊고 살아가고 아니 죽음이라는 구렁이
앞에 다가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세계에서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과학자, 종교가,
철학자등 일체 중생이 누구나 다 업보중생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보는 견해도 역시 업안으로 밖에는 보지를 못함이 또 사실이다.
우리 일체중생이 이 업안(業眼)을 해탈하여
진리의 눈(心眼)으로 세상을 보고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런 진리의 눈(法眼)을 만들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
심성수양(心性修養) 곧 어두운 마음을 밝게 함으로 견성(見性)이다.
견성이란 자기성품(바탕) 자리 일체만유(一切萬有)의
본성(本性)자리 곧 진리이니 이 진리인 본심(本心) 자리를 맑고
청정히 가져 만사만리(萬事萬里)를 통찰할 줄 아는
지혜(慧眼)의 눈을 얻는 것이다.
중생의 육안(肉眼)으로는 아니 보이나 이상하고 묘하게도
성품(性品)은 각자가 모두 지니고 있으면서도 못보고
못 찾는 것이 묘한 이치라 할 수 있겠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각자가 지니고 있는 성품을 보고
이 고해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 범부중생은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과 재물에 대한 욕심,
색에 대한 욕심, 음식에 대한 욕심, 오래 살고자 하는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등 다섯 가지 즐거움을
누려보고자 하는 병에 걸린 환자들이다.
그러니 이 탐, 진, 치 삼독과 오욕병을 고치지
아니하고는 자기 성품을 볼 수 없거나 먼저 삼독과
오욕락을 버리고 육바라밀을 행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해서 죽음에 직면에 있는 우리 일체중생이
불안과 공포에서 헤어나서 영원한
절대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흔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세계를 사바세계라 한다.
모든 생명들이 살아감에 서로 빼앗고 서로 죽이고 잡아먹고
약육강식(弱肉强食)하는 하나의 수라장(修羅場)이라
함이 무리가 아닌 것이니 이 현실세상은 관거
무량겁을 내려오며 서로 가지고 놓은 죄악의 업력(業力)으로
만들어진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보복(報復)의
결산장(決算場)이라 서로가 지은바 업력과 업보로
괴로운 재난이 눈앞에 전개됨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인과응보의 법칙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
자기 성품을 바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품을 보라함은 나의 실체(實體),
존재성을 알라함이요, 나의 실체를 알라함은
나의 영원의 삶을 터득함이다.
우리 인간이 이것 이외에 또 무슨 일이 있단 말인가?
청담(靑潭)큰스님 약력(1902∼1971)
1902년 10월 20일 : 경남 진주에서 출생
1927년 : 고성 옥천사에서 남규영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30년 : 개운사에서 박한영 스님 사사. 대원불전 대교과 졸
1955년 :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
1956년 : 조계종 종회의장
1966년 : 조계종 통합종단 2대 종정
1970년 : 조계종 총무원장
1971년 : 11월15일 : 세수 70세, 법랍 45세로 도선사에서 입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