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문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화엄경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이 화엄경 한 구절 한 구절마다에 출현하
셨습니다.
여래께서 이 화엄경 한 글자 한 글자마다에 출현하
셨습니다.
부처님의 법[佛敎]은 베푸는 일이고, 나누는 일이고,
보시하는 일이고, 회향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나누어 보시하면 가장 수승한 보시가 되
겠습니까? 무엇을 나누어 보시하면 가장 훌륭한 공덕의
과보를 얻겠습니까?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음을 알리는 일입니다.
여래께서 화엄경에 출현하셨음을 널리 알리는 일입니
다. 여래께서 이 화엄경 한 구절 한 구절, 한 글자 한 글
자마다에 출현하셨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일입니다.
부디 온 세상에 화엄경이 있음을 널리 알리는 크나큰
보시공덕으로 회향합시다.
화엄경이 세상에 있음을 알리는 훌륭한 보시로써 복을
짓고 공덕을 닦읍시다.
이 세상에서 최상의 보물로써 무한보시를 실천하는 공
덕을 닦는 보살이 됩시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오다.
인생은 오직 공덕을 닦는 일입니다.
수승한 공덕을 닦는 일입니다.
화엄경부처님이 세상에 오셨음을 널리 알리는 크나큰
보시공덕으로 회향하는 일입니다.
2015년 5월 15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
10회향 품이 워낙 긴 품이 돼서 여섯 번째 권이 되겠습니다. 이 서문 안에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오다.
이것은 신라 때 양지스님이 장육사를 창건하시면서, 신도들이 많이 모여서 울력을 하는데, 그때 전부 노동으로 흙을 나르고ㆍ돌을 나르고ㆍ기왓장을 나르고ㆍ석가래를 나르고 하는 일이 전부 사람 손으로 하나하나 어깨에 매고 그렇게 울력에 의해서 절이 지어졌습니다.
그때 양지스님께서 鄕歌(향가)를 지어서 그 노래를 부르면서 울력하는데 힘 덜 들게 하고, 신심도 나게 하고,
‘즐겁게 불사를 하자.’하는 뜻에서 그때 지어서 부르던 노래가 바로 이 향가입니다. 이것은 신라의 그 아름다운 음악, 불과 몇 편 안되는 향가가운데 들어있는 아주 짧은 내용입니다. 그리고 낱말이 불과
1 오다. 2 서럽더라. 3 우리. 4 공덕. 5 닦다. 이것뿐입니다. 다섯 낱말뿐입니다.
다섯 낱말가지고 ‘인생은, 인생현실은 어떤 것인가?’ 또 ‘우리는 그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어떻게 살아야 바람직한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인생사에 대한 그런 아주 요긴한 문제를 다섯 낱말에 다 담아서 해결하고 있습니다.
여기 처음에 오다ㆍ오다ㆍ오다는
삼세 : 과거ㆍ현재ㆍ미래. 우리는 끝없이 오고, 와서 또 오고, 앞으로도 계속 올 것이다. 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오다ㆍ오다ㆍ오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와보니 어때요?
인생은 苦海(고해)다, 火宅(고해)이다. 하는 겁니다.
여기는 서럽더라 라고 이렇게 했습니다.
오다ㆍ서럽더라 와보니 인생은 苦海요 火宅이더라.
누구 없이 다 그렇지요. 그래서 서럽더라. 우리네여
어떤 팔자 사나운 옛사람만 인생이 괴로운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공히 苦海요 火宅이다. 그래서
우리네여 라고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그런 苦海요 火宅에 와서 이렇게 사는데요.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길인가?
공덕 닦으러오다. ‘공덕 닦는 일밖에 달리 다른 것 없다.’ 그 절, 불사 할 때 흙을 나르고ㆍ돌을 나르고ㆍ기왓장을 나르고ㆍ나무토막을 나르면서 아주 부르기 좋은 노래입니다. 그리고 아주 단순하잖아요.
노동요는 이렇게 단순해야 됩니다.
복잡하면 외우기 힘들잖아요. 단순한 것을 반복해서 하다보면 그 깊은 뜻이 마음속에 젖어 들어서 인생의 현실을 깨닫게 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마음에 다지게 되는 그런 내용입니다. 저는 이것 평소에 참 좋아해서 마침 여기 실을 기회가 돼서 이렇게 서문에 인용을 했습니다.
아무튼 28권까지 벌써 이렇게 돌아왔는데요.
앞으로 보현행원품까지 하면 53권이 남았습니다.
세월 참 잘 갑니다. 53권해봐야 5년도 채 안 남았습니다. 오늘공부는 152쪽 중간단락 功德修行과 衆生이라고 하는 단락부터입니다.
(5) 功德修行과 衆生
如是修集無量功德이 皆爲成熟一切衆生하야
無有退轉하며 無有休息하며 無有疲厭하며
無有執着하야 離諸心想하며 無有依止하야
永絶所依하며 遠離於我와 及以我所하고
如實法印으로 印諸業門하며 得法無生하야
住佛所住하며 觀無生性하야 印諸境界일새
功德修行과 衆生(공덕수행중생).
이것이 역시 10회향 품 내용입니다.
10회향 품 내용인데 第二不壞廻向(제이불괴회향).
무너지지 않는 회향에 대한 내용을 이렇게 경문에서,
화엄경경문에서 우리가 만나볼 수 있는 그 내용.
그야말로 ‘회향의 원형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앞에 온갖 공양으로 공양하는데요.
모두 앞에 아승지ㆍ아승지ㆍ아승지가 붙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합독을 했지요.
함께 우리가 같이 읽어서 넘긴 그런 부분입니다.
그와 같은 많은 공양거리로 공양했다. 하는 그런 내용이 있었고요. 그런 공경공양과 중생에 대한 그런 앞의 내용에 이어서 功德修行과 衆生.
如是修集無量功德(여시수집무량공덕)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을 修集한 것이,
皆爲成熟一切衆生(개위성숙일체중생)하야,
그러니까 우리는 앞에 오다ㆍ오다ㆍ오다 하는 향가에서도 보았듯이 모두가 일체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한 일. 그것이 바로 ‘공덕을 닦는 일이다.’ 그런 뜻입니다.
皆爲成熟一切衆生하야
無有退轉(무유퇴전)하며,
한 번하고 마는 것이 아니고, 끝없이ㆍ끝없이, 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공덕을 닦는 일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退轉함이 없다. 이 말입니다.
無有休息(무유휴식)하며, 쉬지도 아니하고,
無有疲厭(무유피염)하며,
피곤해하거나 싫증내는 일 없으며,
無有執着(무유집착)하야,
그렇게 우리가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고 해서,
‘아 내가 했네.’하는 그런 상을 내거나 집착을 하게 되면,
바로 부작용이 일어나고 공덕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無有執着. 집착이 없어서,
離諸心想(이제심상)하며,
모든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떠나며,
無有依止(무유의지)하야, 거기에,
닦은 공덕에 의지하는 바도 없어서
永絶所依(영절소의)하며,
의지하는 바를 영원히 끊으며,
遠離於我(원리어아)와 及以我所(급이아소)하고,
중요한 말이지요. 나와 나의 것. 중생들의 병은 바로 이 두 마디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 아집이지요. 我執(아집).
그리고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我執에서 나온 것입니다. 我所. 我와 我所. ←이것은 소승 교리나 대승 교리나 끊임없이 중생의 병통을 이야기할 때 따라다니는 낱말입니다.
그렇지요. ‘나’ 라고 하는 것, ‘나’ 중심으로 생각 하는 것, 소위 Ego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잖아요. 사람이 어디 그것뿐입니까?
내면에 무한 광대한 참 나의 세계가 있고,
차별 없는 참사람, 제가 강의 할 때마다 늘 근본종지로써 차별 없는 참사람을 말씀드리는데요. 그 차별 없는 참사람의 무한 광대한 진여불성의 세계가 있는데요.
조그맣게 졸아들어서 我와 我所 = 나와 나의 것에만 집착하고, 그것이 나의 전부 인냥 그렇게 생각 하는 것, ←이것이 중생의 병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我와 我所를 멀리 떠나고, 그럼 어떻게 하느냐?
如實法印(여실법인)으로 印諸業門(인제업문)하며,
그랬습니다. 그것 줄그어야 됩니다.
如實法印으로 印諸業門, 그랬습니다.
如實法印이 뭡니까? 참 나의 세계 = 진여자성의 도장으로, 그렇습니다. 진여자성의 도장으로 諸業門에 도장 찍는다. 그 말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我와 我所로 살아갑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전부 我와 我所ㆍ我執. ←이것 하나로 나의 전부 인냥 하고 살아가는데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참 나의 세계 = 차별 없는 참사람 = 無位眞人의 세계. ←이것이 뭡니까? 如實法印입니다. 그것으로써 印諸業門이라고 하는 것은 我와 我所로 살아가는 그 업 덩어리입니다.
순전히 我와 我所로써 업을 짓는데요.
이 我와 我所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我와 我所도 하나의 진여불성 = 차별 없는 참사람의 작용이다.’ 이렇게 알면 문제가 없습니다.
부처님도 我와 我所를 떠나서 참 나의 삶을 펼치지 못합니다. 眼耳鼻舌身意 6근 가지고 법문하고,
眼耳鼻舌身意 6근 가지고 지혜를 작용하고, 말하자면 자비를 실천하고 그랬습니다. 그것 떠나서는 어떻게 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것이 전부 ‘참 나의 한 작용이다.’이렇게 아는 것이 좋은 겁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하니, 如實法印으로 印諸業門. 그것입니다. 諸業門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업의 문.
모든 업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我와 我所입니다.
그런데 그 我와 我所, 우리 我執을, 아집의 삶을 아집의 삶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차별 없는 참사람의 도장으로 말하자면, 찍어야 되는 겁니다.
이를테면 금을 가지고, 예를 들자면, 이것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서 그렇습니다. 금을 가지고 여러 가지 불상도 만들고, 비녀도 만들고, 반지도 만들고, 무슨 코끼리도 만들고, 사자도 만들고, 칼도 만들고, 온갖 것을 다 만들어 놨는데요. 我와 我所의 입장에서는 모양만 보는 겁니다.
‘아 저것은 불상이다. 아 저것은 비녀다. 반지다. 시계다.
저것은 칼이다.’아니면 ‘코끼리다. 사자다.’ 모양만 보는 겁니다.
모양만 보는 입장은 我와 我所, 아집의 입장만...
우리 보통 그동안 살아온 중생들의 삶의 모습이고요.
그것이 모양에 그치지 아니하고, ‘금부처다. 금비녀다.
금시계다.’ 전부 ‘금이다.’ 라고 하는 사실로 이해해버리면 금부처님도 금값이고, 금으로 사자를 만들어도 금값이고, 금으로 코끼리를 만들어도 금값이고, 그때는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냥 뭉쳐놔도, 금괴로 그냥 놔둬도 역시 금입니다.
아무 허물이 없습니다. 불상 만들었다고 값이 더나가고,
금괴로 그냥 뒀다고 값이 덜나가고 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집으로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것이 전부 우리 참 마음의 현현이다. 참 마음의 작용이다.
전부가 금으로 만든 그런 내용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印諸業門입니다. 如實法印으로써,
“여실한 진리의 도장으로써 업 문에 도장 찍는다.
모든 업의 문에 도장 찍는다.” 하는 말은 그 말입니다.
어떤 모양도 전부 금으로 본다.
우리 점안할 때 서두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게송 있지 않습니까? 栴檀木做衆生像(전단목주중생상)
전단나무가지고 중생모습도 짓고, 부처님모습도 만들고,
여러 가지를 다 만들어요. 여러 가지를 다 만들어 놨지만, 그것 뭡니까? 낱낱이 다 전단향기가 난다.
뭘 만들어도...
전단나무를 가지고 불상을 만들고 그 자른 토막, 나머지 버려놓은 그 토막도 전단나무이기 때문에 역시 전단향기가 나는 겁니다. 보살상을 만들었든ㆍ불상을 만들었든ㆍ나한상을 만들었든 전부 전단나무를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에 전단향기가 난다. 바로 그 이치입니다.
불상으로 보거나, 보살상으로 보거나 그런 이치가 아니고, 전단나무로 보는 겁니다. 그 형상을 통해서 진실한 전단의 향기를 맡는 안목. 바로 그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점안할 때 형상을 만들었든ㆍ그림을 그려놨든ㆍ뭘 로 해놨어도, 아무리 그림을 그릴 줄 모른 사람이 형편없는 그림을 그려 놨다하더라도 불상을 그렸으면
‘그대로 부처님으로 봐라.’이 말입니다.
그대로 부처님으로 봐라.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부처님인겁니다. 나무로 만들었든 뭘 로 만들었든 그대로 부처님으로 보면 부처님인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집의 삶도,
我와 我所에 집착하는 아집의 삶도 如實法印으로 모두가 우리 참 마음의 현현이다. 참 마음의 한 작용이다. ←이렇게 봐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래서 得法無生(득법무생)하야,
법이 생함이 없음을, 생멸이 없음을 얻어서
住佛所住(주불소주)하며,
부처님이 머무는 바에 머문다.
그럼 부처님경지하고 똑 같은 겁니다.
똑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부처님도 역시 똑 같은 삶을 살아가고, 보살들도 똑 같은 삶을 살고, 선지식들도, 조사들도 똑 같은 삶을 삽니다.
잠자고, 眼耳鼻舌身意가 있어서 먹어줘야 되고, 잠자줘야 되고, 입혀줘야 되고, 씻겨줘야 되고 똑 같습니다.
저~ 불보살에서부터 온갖 조사가 똑 같습니다.
우리하고 똑 같은 생활을 합니다.
왜냐? 眼耳鼻舌身意 6근을 가지고 살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하게 6근이라고 하는 아집에,
아집이라고 하는 한계에 갇혀 있느냐?
아니면 그것의 모두가 진여자성의 현현이다. 진여불성의 현현이다. 라고 이렇게 보느냐? 하는 단 그 차이일 뿐입니다. 그 차이일 뿐이지요. 그래서 住佛所住입니다.
부처님이 住하는 바에 머문다.
觀無生性(관무생성)하야,
생멸이 없는 성품을 관찰해서,
印諸境界(인제경계)일새. 모든 경계를,
생멸이 없는 성품은 뭡니까? 그것은 진여불성자리지요.
참마음자리 = 차별 없는 참사람자리고요.
바로 그것을 관찰해서 모든 경계에 印친다 = 도장 찍는다. 이것은 새기기를 옛날부터 印친다 그랬습니다.
모든 경계에 도장 찍는다.
‘아! 전단나무를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에, 像을 만들다가 버렸든지 말았든지 전부가 다 전단나무이고, 전단향기가 난다.’ 금을 가지고 금괴로 놔둬도 금이고, 무슨 칼을 만들어도 금이고, 창을 만들어도 금이고, 불상을 만들어도 금입니다.
|
첫댓글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감사합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사람사는 이야기]에 글번 12383번을 꼭 보시기 바랍니다.
@釋대원성 좋은 가르침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
如實法印 印諸業門..고맙습니다._()()()_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삼보께 귀의하옵고.
'南無大方廣佛華嚴經' _()()()_
부처님의 법[佛敎]은 베푸는 일이고, 나누는 일이고, 보시하는 일이고, 회향하는 일입니다..고맙습니다 ._()()()_
_()()()_
_()()()_ 고맙습니다_()_
모든 사람이 공히 苦海요 火宅이다. 그래서 --->
모든 사람에게 공히 苦海요 火宅이다. 그래서
녹취시 분명히 "모든 사람에게" 라고 들렸어요.
그런데 왜? "모든 사람이" 라고 했느냐?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공히 苦海요 火宅이다. ←저절로의 뉘앙스가 있고,
모든 사람에게 공히 苦海요 火宅이다. ←누가 주어서 받는 뉘앙스가 됩니다.
~~이,
~~에게는 내포된 뜻이 천양지차입니다.
@釋대원성 그건 복잡한 혼자생각이고, 스님말씀대로 '-에게'가 맞습니다
스님 말씀한 그대로 하세요. 단어의 순서를 자의적으로 바꾸지 말고... 예를들어 스님께서는 도치법으로 강조해서 한 말인데 ... 그런 것을 또 자의적으로 평서문으로 바꾸고... 그렇게 하지마시고 ... 말씀한 그대로 하세요... 화풍정님처럼!!! (물론 특별한 곳은 바꿀 수 있지만...)
소위 愛苦(애고)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잖아요.
---> 소위 ego(자기독단, 자만, 자기중심주의)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잖아요.
에고는 한문이 아니고 영어임....
마조스님이 비심비불이라 하거나말거나 나는 즉심시불입니다.
이상한 사람이네... 愛苦(애고)가 아니고 ego라니까... 중학교 고등학교 때 영어공부 안하셨나?
누구나 잘 못 들을수는 있어... 그것이 잘 못되었다고 지적당하면 받아들이고 고치면 되는 것인데....
나 원 참...이 잘못을 영원히 끌고갈 수 있는지... 궁금하네
앗! 실수.
아니아니 판무식. 낫놓고 기역자 모르는 무지랭이.
뭔가 찜찜해서 와 봤더니 이런 일이...
고맙습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법문" 속에는 한자만 수두룩 하다는 저의 잘못된 선입관이 문제네요.
@釋대원성 위대한 대원성님의 부단한 노력과 성의로 저를 비롯한 모두가 스님이 설한 법문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읍니다. ㅉㅉㅉ 감쏴합네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황머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
如實法印으로 印諸業門
나무대방광불화엄경,감사합니다.
如實法印으로 印諸業門...여실한 진리의 도장으로써 업 문에 도장 찍는다.
재의 실상을 보는 안목....고맙습니다._()()()_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고맙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
아! 고맙습니다 _()()()_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