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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Guernica)는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군이 스페인 게르니카 지역 일대를 1937년 4월 26일 24대의 비행기로 폭격하는 참상을 보고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그림의 이름이다. 독일군의 폭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250~1,600명 그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하였고 또한 부상당하였다.
거대한 벽화의 형상을 띤 이 그림은 사실 1937년 파리 세계 박람회의 스페인 전용관에 설치되도록 스페인 정부가 피카소에게 의뢰한 작품이었다. 그림은 사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수년 전에 의뢰된 것이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게르니카의 참상이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폭격의 공포와 피카소가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 근본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프랑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의 독재 체제에 대해 엘리트로서 느꼈던 비애도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의 진실을 꿰뚫어 본 사람은 저명한 석판화가이며 초현실주의 시인인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였다. 그는 그림 속의 충격적이고 끔직한 이미지들이 과거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미래의 다큐멘트(기록문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저 오래된 비극을 묘사하는 흑백 캔버스 위에서 피카소는 인간의 암울한 운명을 알리는 편지를 쓴다. 그 운명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곧 사라질 것이라고 예고한다. 우리는 그 운명에 맞서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여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모두 모아 영원의 아름다움을 창조해야 한다. 마치 숭고한 작별을 준비하는 심정으로……’ 이것은 정말 오싹한 예언이 아닐 수 없다. 레리스가 이 글을 쓴 것은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하고 베네룩스 국가들과 프랑스를 공격하여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이태 전의 시점이었는데, 정말 예리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미술평론-게르니카] 1937년 4월 26일 발생한 스페인 파시스트 반란군의 게르니카 마을 공습은 전쟁사전에 ‘공포 폭격’(terror bombing)의 대표 사례 가운데 하나로 올라가 있다. 당시 스페인은 한창 내전 중이었는데, 공화주의 정부의 전복을 꾀한 프랑코의 반란군은 스페인 북부의 공화주의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주요 근거지인 게르니카 일대를 폭격하기로 결정한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이 공습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대령의 지휘 아래 독일 콘도르 군단 주도로 2시간 넘게 진행됐다.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 건물 4분의 3이 완파됐고 나머지도 큰 피해를 입었다. 정확한 사망자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적게는 250여명, 많게는 1600여명의 민간인이 이 무차별 공습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르니카는 바스크족 공화주의자들의 주요 근거지이기는 했으나, 결코 공습의 타깃이 될 만한 마을은 아니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주변의 다리와 도로를 타격해 공화주의자들의 병력 이동과 보급에 지장을 줄 필요는 있었지만(그래서 애초에 작전은 여기에 목표를 두고 수립됐다), 민간시설밖에 없는 마을 중심부를 폭격하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더구나 마을의 장정 대부분이 전선에 나간 상태여서 폭격을 가할 경우 재난은 고스란히 여성과 아이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해 왜 파시스트들이 마을 중심부를 공습했는가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이고 잔인한 폭격을 통해 공화주의자들에게 위협과 공포감을 주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히틀러는 극우주의자들 사이의 연대를 과시하는 한편 독일 공군력에 대한 기술적 시험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이 공습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게르니카의 비극이 알려지자 유럽은 큰 충격에 빠졌다. 공습으로 무고한 민간인, 그것도 여성과 어린이가 대량으로 살육되었다는 사실은 문명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5월 1일, 파리는 그때까지 있었던 노동절 시위로는 최대 인파인, 100만명이 넘는 항의시위대로 도시가 거의 마비되어 버렸다. 스페인 출신의 피카소 역시 파리에서 신문을 통해 소식을 보고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마침 그해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출품할 작품 주제를 놓고 고민하던 그는 이 비극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석 달을 매달린 끝에 마침내 저 유명한 <게르니카>를 완성했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아이콘이 되는 그림이 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바로 그런 그림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 아이콘이 다빈치의 <모나리자>라고 한다면, 20세기 미술의 대표 아이콘은 피카소의 <게르니카>다. <게르니카>가 이런 지위에 오른 것은 그 조형적 성취가 탁월한 까닭도 있지만, 작품의 수용 과정에서 이 그림이 인류의 양심을 대변하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어버린 탓이 크다.
물론 게르니카의 비극은 다른 화가들에 의해서도 그려졌다. 미국화가 필립 거스턴의 <폭격>도 그런 그림의 하나다. 동그란 톤도 형식으로 그려진 이 그림에서 우리는 강렬한 폭발과 그로 인해 사방팔방으로 튕겨나가는 가엾은 몸뚱어리들을 본다. 당시 공화국 정부를 지키려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가 죽은 미술평론-게르니카] 1937년 4월 26일 발생한 스페인 파시스트 반란군의 게르니카 마을 공습은 전쟁사전에 ‘공포 폭격’(terror bombing)의 대표 사례 가운데 하나로 올라가 있다. 당시 스페인은 한창 내전 중이었는데, 공화주의 정부의 전복을 꾀한 프랑코의 반란군은 스페인 북부의 공화주의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주요 근거지인 게르니카 일대를 폭격하기로 결정한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이 공습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대령의 지휘 아래 독일 콘도르 군단 주도로 2시간 넘게 진행됐다.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 건물 4분의 3이 완파됐고 나머지도 큰 피해를 입었다. 정확한 사망자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적게는 250여명, 많게는 1600여명의 민간인이 이 무차별 공습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르니카는 바스크족 공화주의자들의 주요 근거지이기는 했으나, 결코 공습의 타깃이 될 만한 마을은 아니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주변의 다리와 도로를 타격해 공화주의자들의 병력 이동과 보급에 지장을 줄 필요는 있었지만(그래서 애초에 작전은 여기에 목표를 두고 수립됐다), 민간시설밖에 없는 마을 중심부를 폭격하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더구나 마을의 장정 대부분이 전선에 나간 상태여서 폭격을 가할 경우 재난은 고스란히 여성과 아이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해 왜 파시스트들이 마을 중심부를 공습했는가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이고 잔인한 폭격을 통해 공화주의자들에게 위협과 공포감을 주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히틀러는 극우주의자들 사이의 연대를 과시하는 한편 독일 공군력에 대한 기술적 시험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이 공습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게르니카의 비극이 알려지자 유럽은 큰 충격에 빠졌다. 공습으로 무고한 민간인, 그것도 여성과 어린이가 대량으로 살육되었다는 사실은 문명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5월 1일, 파리는 그때까지 있었던 노동절 시위로는 최대 인파인, 100만명이 넘는 항의시위대로 도시가 거의 마비되어 버렸다. 스페인 출신의 피카소 역시 파리에서 신문을 통해 소식을 보고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마침 그해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출품할 작품 주제를 놓고 고민하던 그는 이 비극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석 달을 매달린 끝에 마침내 저 유명한 <게르니카>를 완성했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아이콘이 되는 그림이 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바로 그런 그림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 아이콘이 다빈치의 <모나리자>라고 한다면, 20세기 미술의 대표 아이콘은 피카소의 <게르니카>다. <게르니카>가 이런 지위에 오른 것은 그 조형적 성취가 탁월한 까닭도 있지만, 작품의 수용 과정에서 이 그림이 인류의 양심을 대변하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어버린 탓이 크다.
물론 게르니카의 비극은 다른 화가들에 의해서도 그려졌다. 미국화가 필립 거스턴의 <폭격>도 그런 그림의 하나다. 동그란 톤도 형식으로 그려진 이 그림에서 우리는 강렬한 폭발과 그로 인해 사방팔방으로 튕겨나가는 가엾은 몸뚱어리들을 본다. 당시 공화국 정부를 지키려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가 죽은 미국 젊은이가 1천여 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얼마나 많은 지성이 이 사건에 공분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게르니카 이후에도 민간인 밀집 지역에 대한 공습은 스페인 내전과 2차 대전 내내 이어졌는데, 그 참상은 호라시오 페레르, 록웰 켄트 등의 화가들에 의해 잇따라 그려졌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이 화가들의 그림과 형식적인 측면에서 크게 구별되는 부분은 사실적인 묘사를 채택하지 않았다는 점과 흑백 단색조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관념적으로 전쟁의 비극을 전달하는 데는 생생한 사실 표현이 제일 나을 것 같다. 하지만 비사실적인 피카소의 <게르니카>만큼 전쟁의 비극과 공포를 강렬하게 전해주는 그림도 드물다. 그 과격한 해체로부터 비극의 외피가 아니라 본질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면, 죽은 아이를 팔에 안은 어머니, 황소, 창에 찔린 채 요동치는 말, 주검, 절규하는 여인 등이 보인다. 공간은 실내처럼 보이나 벽이 무너지고 한쪽에서는 불이 타오르고 있다. 그림의 해석과 관련해 피카소는 도상 하나하나가 특별한 상징으로 그려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성철 스님의 말씀처럼 “황소는 황소고, 말은 말”이라며, 느껴지는 대로 해석할 것을 관객에게 요청했다.
그럼에도 미술비평가와 미술사가들 사이에서는 큰 틀에서 해석의 일치를 보이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등장인물의 형상과 제스처가 저항을 나타낸다는 것과, 흑백 단색조는 음울함과 고통, 혼란을, 무너지는 벽과 타오르는 건물은 내전의 파괴성을 드러낸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이에 따르면, 천장의 등은 태양을, 부러진 칼은 민중의 패배를 상징하는 것이 된다.
만국박람회에 걸렸을 당시 이 그림은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박람회 직후부터 50년대까지 세계 각국에 빈번히 초대되어 전시되면서 20세기 반전사상과 양심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일화에 따르면, 나치의 파리 점령 직후 한 게슈타포 장교가 피카소에게 “당신이 <게르니카>를 그렸나?”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피카소의 답은 “아니, 당신들이 그렸지”였다. <게르니카>의 힘은 다른 무엇보다 인류의 양심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화가는 그런 식으로 강조했던 것이다.
프랑코 독재 체제가 막을 내리고 스페인이 민주화되어 1981년 스페인에 반환될 때까지 이 그림은 뉴욕 근대미술관(MoMA)에 수장됐다.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는 그림 앞에서 반전 시위가 벌어지는 등 반전의 상징으로서 제 몫을 톡톡히 했다.
이렇게 피카소의 그림을 통해 인류가 게르니카를 잊지 않는 동안 역사는 최근까지 게르니카의 한을 하나씩 풀어왔다. 1997년 공습 60년을 맞아 당시 독일 대통령 로만 헤어초크는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이 한 역할에 대해 사죄하는 편지를 게르니카의 생존자들에게 써 보냈다. 이듬해 독일 의회는 독일 군사기지에서 콘도르 군단 소속 군인들의 이름을 제거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2007년 공습 70년에는 바스크 의회가 히로시마, 아우슈비츠 등지의 대표들과 만나 ‘평화를 위한 게르니카 선언문’을 발표하고 게르니카를 ‘세계 평화의 수도’로 삼자고 호소했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게르니카 해부
게르니카의 여러 버전
게르니카 폭격 - 독일 측의 관점 게르니카(Guernica)에 대한 콘도르군단의 공습은 민간인을 상대로 한 테러 폭격으로 파시즘의 잔악상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독일 자료를 활용한 연구들이 나오기 전 까지는 민간인에 대한 테러 폭격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아래에 인용한 ‘타임라이프 2차대전사’의 기술은 그런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4월에 접어들자 내셔널리스트군은 북부로 이동하여 독일군의 위력을 빌린 폭격에 의해 이윽고 이목을 끌게 되는 작전을 개시했다. 콘도르병단은 소이탄과 고성능폭탄을 병용하는 새 전술의 연습지로서 바스크지방을 선정했다. 맨 먼저 폭격을 당한 곳은 빌바오와 그에 버금가는 공업중심지 두랑고였다.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폭격의 표적이 되고 이 내전 전체를 상징하는 도시가 된 것은 그 근처의 게르니카였다.
빌바오의 동쪽 30km에 위치하는 인구 약 7,000명의 게르니카는 가도와 철도의 분기점이었다. 도시에 있든 그 밖의 군사목표는 공화국군이 철퇴할 때 필요한 교량과 두개의 조그만 군수공장 뿐이었다.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 두 사람의 수녀가 경보의 종을 울리며 “비행기, 비행기”하고 외쳤다. 상공에 날아온 것은 하인켈 폭격기 한 편대였다. 그 가운데 1대가 몇 개인가의 250킬로 폭탄을 역전 광장에 모여있는 군중 속에 투하했다. “여자와 어린이의 일단이 하늘 높이 흩날렸다. 그들의 몸은 분쇄되고 발, 팔, 머리 따위가 산산조각이 난 채 곳곳에 흩어졌다.” 생존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도시를 습격한 8회를 넘는 비행기의 파상공격이 밤까지 계속되었다. 약 1600명이 살해되고 900명이 부상했다. 독일의 폭격기는 군수공장을 폭격하지 못했다. 그들의 폭격장치는 매우 원시적이었으므로 정확히 목표를 포착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외 제국의 공화국 지지자는 비무장 시민 대량살륙의 소식에 충격을 받고 무차별폭격을 비난했다.
로버트 T. 엘슨(Robert T. Elson), 『라이프 2차 세계대전 : 대전의 서곡』,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1, 172쪽
그러나 폭격을 주도한 콘도르 군단의 보고서 등 독일 사료를 활용한 연구들이 출간 되면서게르니카 폭격은 민간인을 목표로 한 테러폭격이 아니라 통상적인 전술폭격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게르니카에 대한 폭격을 지휘한 리히트호펜(Wolfram von Richthofen)이 게르니카를 폭격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이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르니카를 폭격해 이곳의 도로망과 철도를 마비시킨다면 바스크군이 빌바오로 철수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다. 게르니카 일대에 전개한 바스크군의 병력은 23개 대대에 달했고 빌바오로 통하는 주요 도로 하나가 게르니카를 지나고 있었다. 만약 게르니카에 주둔한 바스크군이 제때 철수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민군이 신속히 진격한다면 바스크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 것 입니다. 그리고 당시 국민군 측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게르니카에는 바스크군의 제 18 로얄라(Loyala) 대대와 사세타(Saseta)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만약 이 두 대대가 게르니카에서 저항을 한다면 국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주력 부대가 게르니카를 따라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도 있을 것이었다.
게르니카에 대한 폭격을 지휘한 리히트호펜(Wolfram von Richthofen)이 게르니카를 폭격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이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르니카를 폭격해 이곳의 도로망과 철도를 마비시킨다면 바스크군이 빌바오로 철수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다. 게르니카 일대에 전개한 바스크군의 병력은 23개 대대에 달했고 빌바오로 통하는 주요 도로 하나가 게르니카를 지나고 있었다. 만약 게르니카에 주둔한 바스크군이 제때 철수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민군이 신속히 진격한다면 바스크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 것 입니다. 그리고 당시 국민군 측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게르니카에는 바스크군의 제 18 로얄라(Loyala) 대대와 사세타(Saseta)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만약 이 두 대대가 게르니카에서 저항을 한다면 국민군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주력 부대가 게르니카를 따라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도 있을 것이었다.
게르니카 일대에 대한 공습은 4월 25일 시작됐다. 리히트호펜은 전투기 부대에 빌바오와 게르니카를 잇는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바스크군에 공습을 가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국민군이 게르니카 방면으로 진격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대로 게르니카의 교통망에 타격을 가해 바스크군의 퇴각을 방해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러나 1937년 4월 26일에 감행된 게르니카 폭격은 전술적으로 기대했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콘도르군단의 폭격기들은 주요 목표 중 하나였던 렌타리아(Rentaria) 다리를 파괴하지 못했으며 도로 및 철도에 대한 폭격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작전에 투입된 폭격기 중 많은 수를 차지한 Ju-52는 기본적으로 수송기 였고 초보적인 조준기를 장비했기 때문에 폭격의 정확도가 매우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하루 정도 게르니카의 도로망은 마비되었으며 리히트호펜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리히트호펜은 공습이 끝난 뒤 스페인 국민군의 느린 진격속도 때문에 게르니카 공습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바스크군에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고 불쾌해 했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독일 공군 지휘관들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 폭격이 정치적으로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독일공군 장교들은 빌바오나 바르셀로나에 대한 국민군과 이탈리아 공군의 테러 폭격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특히 국민군의 경우 자국의 국민과 산업기반을 파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문제는 게르니카 폭격의 후폭풍 이었다. 바스크 자치정부는 게르니카 폭격으로 1,654명이 사망하고 889명이 부상했다는 발표를 했다. 민간인에 대한 폭격이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온 것은 당연했다. 이상하게도 국민군이나 이탈리아군에 의한 테러 폭격이 아니라 테러 폭격에 관심 없었던 독일 콘도르군단의 전술 폭격이 테러 폭격의 대명사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독일 측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게르니카 폭격으로 영국의 전략폭격 지지자들은 공군의 위력과 민간인에 대한 테러폭격의 효과를 더욱 확신하게 됐다.
최근의 연구들은 게르니카 공습으로 250명에서 3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희생된 민간인들은 콘도르군단의 목표는 아니었지만 ‘군사목표’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리히트호펜과 콘도르군단에게 면죄부가 주어질 수는 없다. 리히트호펜의 전기를 쓴 코럼(James S. Corum)에 따르면 리히트호펜은 냉정한 군인으로 군사작전을 감행하면서 발생할 민간인의 피해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게르니카가 함락된 뒤 게르니카를 방문한 리히트호펜은 폭격의 성과에 만족하면서 특히 250kg 폭탄의 위력이 입증된 것에 주목했다고 합니다. 물론 민간인의 피해에 대해서는 별반 언급하지 않았다는 군요. (http://panzerbear.blogspot.com/2009/03/blog-post_03.html)
참고문헌 로버트 T. 엘슨(Robert T. Elson), 『라이프 2차 세계대전 : 대전의 서곡』,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81 James S. Corum, The Luftwaffe : Creating the Operational Air War, 1918~1940,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97 James S. Corum, Wolfram von Richthofen : Master of the German Air War,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8
폭격당한 게르니카
Deux ames au ciel, Op.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