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많지 않은 대북 전문기자들 중 ‘홍일점’ 으로 꼽히는 MBC 보도국 통일외교부의 김현경 기자. 우리 사회에서 여기자들이 주로 깐깐하고 전투적이라고 치부되기 일쑤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본 김현경 기자는 참 편하고 부드럽다. 그 부드러움 속에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카리스마 또한 함께 있다. 카리스마는 어쩌면 17년 동안 한결같이 북 문제를 다뤄온 전문가로서의 노하우와 안목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그 노하우와 안목을 가지고 《민족화해》에 ‘김현경 기자의 통일눈썰미’ 를 연재 중이다.
북 TV에서 나오는 장면은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17년 동안 북 TV를 모니터해온 베테랑, 김현경 기자의 생각은 다르다.
“잘 보면 만들어진 것 같은 장면 하나에도 북의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책을 오래 읽다 보면 행간을 읽는 능력이 생기는 것처럼 북 TV의 장면 속에서 지금 북쪽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죠. 그들의 고민과 갈등도 느낄 수 있구요. 그러다 보니 북 드라마를 보다가 눈물을 찔끔찔끔 흘릴 때도 있다니까요. ”
방송국 입사도, 대북문제 다룬 것도 모두 우연
1986년 MBC에 아나운서로 입사한 뒤 17년째 북쪽 문제만 다뤄온 많지 않은 대북전문기자 중의 한 사람인 김현경 기자가 방송국과 인연을 맺은 것도, 북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우연 ’이라고 한다.
“원래 방송이 꿈이 아니라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 남동생도 대학을 다닐 때라 돈을 번 뒤 유학가려고 취직을 하다 보니 MBC로 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하다 보니 방송이 재미가 있네요.”
1989년 12월 MBC의 통일 관련 간판 프로그램 ‘통일전망대’ MC를 맡게 된 것 역시 우연의 산물이라는데.
“출산 뒤 복직해 어중간하던 차에 동료가 하던 것을 물려받아서 하게 됐죠. 당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통일전망대’ 남자 MC를 하던 때였습니다. 아나운서로 있다가 1994년 기자가 되어 보도국으로 옮긴 뒤 다음해 통일부를 출입했는데 이 역시 정동영 전 장관의 후임이었습니다. 보도국 환경으로는 ‘통일전망대’를 제작하기에는 여건이 열악하지만 방송리포트가 1분 30초에 끝나는데 비해 남북관계의 묻어둔 뒷이야기들을 풀어나갈 수 있어 너무 좋습니다.”
시청률이 좋은 시간대는 아니지만 프로그램이 나름의 안목과 통찰력이 있다는 주변의 평가가 있기 때문에 보람도 있다는 김현경 기자. 그녀의 바램은 ‘통일전망대’를 통해 북 주민들의 사는 모습을 토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시청자들도 북쪽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는 안목이 생길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아직도 감격스런 평양 순안비행장 두 정상의 악수
아나운서로 시작해 방송기자로 영역을 확대한 김현경 기자는 그 동안 남북관계의 주요한 현장을 누벼왔다. 2000년 6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적십자 회담 취재를 통해 본격적으로 남북대화의 현장에 서게 된 김 기자는 그후 6차례나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2000년 평양에서 열린 첫 남북장관급회담은 물론, 미국의 부시행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2001년 3월의 2차 방북 취재나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을 일주일 앞둔 2002년 9월 평양 방문 등 한반도의 중요한 지각 변경이 일어나고 있을 때마다 김현경 기자는 현장에 있었다.
“그래도 가장 가슴에 깊이 남는 것은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던 때죠.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 내려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두 정상이 악수하는 장면은 지금도 머리카락이 설 정도로 감격스럽게 남아 있습니다. 그 외에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한 것이나 금강산 관광을 떠나는 첫배의 선상에서 생방송 진행한 것도 기억에 남는데 개인적으로 행복으로 여깁니다. ”
이러한 취재현장에 있다 보니 남북 관계의 변화와 더불어 북쪽 사람들의 고민과 속마음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남북장관급회담 등을 취재할 때는 대표단과 똑같이 움직이다 보니까 남북 관계의 속을 들여다 보게 되는 기회가 많아요. 남북 대표들이 어떻게 싸우고 협상하는지도 알 수 있구요. 또 가까이서 며칠 북쪽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지내다 보니 사람들과도 말을 하게 되고 의견을 나누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 사람들의 속내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
김현경 기자가 느낀 북쪽 사람들의 속내
“밖에서 보는 북은 변화가 더디고 답답해 보이지만 북쪽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재적 변화는 반세기 동안 겪어보지 못한 변화거든요. 그런 점에서 북쪽에서 남북관계를 다루는 사람들은 남쪽과도 싸워야 하고 북쪽 내 강경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고를 격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팍곱사등’이라고 말하기도 하죠. 그런 점에서 북쪽 사람들도 남쪽 사람들이 그런 것을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어요.”
겉으로 북이 미국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것 같지만 속내로는 미국과 어떻게든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북쪽 만큼 국제관계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드물겁니다. 하지만 미국과의 외교에서 자신들이 먼저 숙이고 가면 미국이 죽이려 들기 때문에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미국과의 끈을 유지하면서도 균형잡는 것은 북쪽으로서는 무척 어려운 과제일 겁니다. 최근 6자회담에서 북쪽이 대화를 천명하면서도 신중하게 처신하는 것도 그런 고민때문일 것이구요.”
북 취재는 그 사회 시스템의 이해로부터 시작해야
아무리 냉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할 기자지만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처음 북에 갔을 때는 좀 달랐을 것 같다.
“설레고 흥분됐죠. 하지만 그건 여기서 출발해 평양 순안공항에 내릴 때까지의 감정이었고 그 다음부터는 너무 자연스럽고 편했어요. 매일 북쪽 방송을 봐서 그런지 처음 가는 것 같지 않았죠. 평양 시내 풍경도 몇 구역 빼고는 대부분 아는 곳들이어서 모르고 있던 곳들을 확인해 보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도 옥류관 냉면, 김치 녹두지짐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본래 음식 먹는 걸 좋아하는데 북쪽 음식이 입맛에 맞았어요. 한번은 순대국이 너무 맛있어서 아침 먹자마자 저녁에 순대국 먹자고 북쪽 안내분들에게 제안했습니다. 미리 협의가 안된 부분이라 이분들이 열심히 그쪽 말로 ‘조직’을 했는데 우리가 갈 수 있는 식당 중에 순대국을 준비할 수 있는 곳이 없었어요. 북쪽 식당도 계획대로 움직이니까 순대국 재료가 준비된 식당이 없었던 거죠. 그런데 고려호텔에서 어떻게 어떻게 애를 써서 순대 요리를 한 상 차려주더군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고맙고 또 한편으로는 미안했습니다.”
‘순대국 사건’은 음식 하나에서도 북쪽 사회 특유의 시스템을 이해하게 되었고 또한 북쪽 사람들의 마음씀씀이를 알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아직도 남북 사이의 닮았지만 다른 점은 많다. 기자로서 2001년 11월, 11일간 평양에서 체류하면서 북쪽 사람들의 생활을 취재하는 과정에서도 다름의 문제는 돌출되었다.
“북쪽 사람들은 우리의 의도가 뭐냐를 대단히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나름대로 당신들을 나쁘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것이다라고 설명했지만 북쪽이 가진 언론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쉽게 극복이 안되더라구요. 예를 들면 우리는 북쪽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숨쉬고 있는 계몽기 가요를 취재하고 싶은데 북쪽 사람들은 계몽기 가요 취재를 위한 자료를 제공하고 북 전문가를 데려와 인터뷰하면 된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로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계몽기 가요를 즐기고 있는지를 보여줘야 하고, 그런 다양한 장면이 포착되어야 방송을 만들 수 있는데 북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구요.”
단순해 보이지만 북쪽에서 취재하다 보면 남쪽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런 과정을 몇 번 거치면서 김현경 기자는 북쪽 사회의 시스템을 이해하게 되고 그에 따른 취재방식을 찾게 되었다.
“북쪽에서는 방문하는 현장에서 최대한 기획을 만들어야 합니다. 학교를 간다고 하면 그 학교 내에서 북쪽 사람들이 보여줄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도와줍니다. 하지만 장소를 바꾸면 문제는 달라지죠. 제가 개성의 민속여관 앞에서 개성깍쟁이의 유래를 설명하고 음식점 봉사원들과 그런 얘기를 나눈 것을 방송으로 만든 것도 북쪽의 취재 환경을 고려하면서도 남쪽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한 겁니다.”
방북 취재는 북쪽 사회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북쪽 사람들이 가진 남쪽 언론에 대한 견해입니다. 북쪽 사람들 중에 냉전시대 남쪽언론으로부터 입은 상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적대하고 비방했던 일들이 과거에는 많았죠. 남쪽에서도 취재원과 신뢰가 없으면 고발프로그램을 만드는 것 아닌가 하고 두려워하면서 취재를 회피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신뢰 형성이 취재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죠.”
하지만 김현경 기자는 북쪽도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사람들은 매체에 나오지 않으면 없다고 생각하는데 북쪽이 자꾸 보여주지 않고 말도 하지 않으면 남쪽 사람들이 북쪽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작아질 겁니다. 보여줄 것은 보여주고 얘기할 것은 당당히 얘기해야죠. 언제까지 닫아놓고 살 겁니까.”
오래 동안 남북관계를 취재해온 김현경 기자지만 남북교류를 밝게만 보진 않는다.
“6·15공동선언 이전에는 남북교류가 거의 없었으니까 그 뒤 몇 가지만 해도 많이 발전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많은 부분에서 발전을 해왔잖아요. 하지만 앞으로 가면 갈수록 변화의 속도는 느릴 겁니다. 마치 30점 맞던 학생이 60~70점으로 끌어 올리기는 쉬워도 60~ 70점에서 80점으로 끌어올리기는 힘든 것처럼 처음엔 몇 가지만 해도 커보이던 것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남북이 접촉하고 교류하다 보니까 충돌해야 할 본격적인 문제들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전에는 남북관계를 풀자면 결단과 의지가 필요한 시기였다면 지금은 서로가 얼마나 다른지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다가기기 위해 고속도로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만나는 거니까 이제 막 시내로 진입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속도가 느려지겠죠.”
“누구는 신혼여행 다녀와서 신혼의 단꿈에서 깨어나 적금을 넣어서 집 장만해야 하는 현실에 부딪힌 부부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교류 과정에서 많이 으르렁거릴 겁니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그것이 해결해가는 과정이고 발전일 수도 있죠.”
김현경 기자는 남북관계가 발전할수록 어차피 피해갈 수 없는 부분들이 나오게 될 것이기 때문에 속도가 더디더라도 부딪혀서 풀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 기자가 생각하는 해법은 뭘까?
“뭐 별게 있겠습니까.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수 밖에요. 우리가 교류하는 것은 서로가 같아서가 아니라 같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만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더욱 서로를 바꾸려고 강요하지 말고 존중하고 설득하면서 구동존이(求同存異)의 방법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