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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난적과 매카시즘 그리고 한국의 근현대사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우익잡지인 한국논단의 대통령후보 초청 사상검증 토론회를 끝으로 사라졌던 매카시즘(McCarthysm)이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나타나 요즘은 온 나라를 짙게 뒤덮고 있다. 사례를 몇 가지 들어보자;
신판 매카시즘(증거 없는 용공음해)
1. 2008년 2월 서울대학교에서 20년간 마르크스경제학을 가르치던 김수행 교수가 정년퇴임하자 서울대학교는 빈 자리에 마르크스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을 아직도 뽑질 않는다. 따라서 박사학위 6명, 석사학위 4명 등 연구원을 지도할 교수가 없는 실정이다. 경제학과 교수 정원은 34명이나 모두가 주류경제학 전공이다(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 시대의 창, 145쪽)
2. 2008년 10월 국방부는 서적 23종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하였는데, 이 가운데는 베스트셀러는 물론 대학교 참고서적도 들어 있다. 나아가 국방장관은 이에 대항하여 헌법소원을 낸 군 법무관 2명을 파면 결정을 내린다.
3. 지난 1월12일 연세대 총동문회(회장 박삼구 금호그룹 회장)는 국민행동본부(전 대령연합회 회장) 서정갑 회장에게 ‘2010년 자랑스러운 연세인상’을 주었다. 그는 노무현 장례식이 끝나자 회원들을 이끌고 분향소를 강제로 철거하고 가스총 시위를 한 사람이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는 당당히 말한다. 노무현 정권은 좌파정권이었기 때문이란다.
4. 2010년 1월29일 한나라당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여상규 한나라당 사법제도개선특위 위원은 “우리법연구회의 연구논문집을 봐도 순수 학술단체가 아니라 거침없이 좌편향된 의견을 피력하는 정치세력화 지향단체임이 명백히 들어났다“고 비판하고, 법개정을 통한 연구회 해체를 공언했다.
같은 사안을 두고(강기갑 민노당 대표에 대한 법원의 무죄 선고)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이런 판사 전체를 싸잡아 ‘판사 노무현의 후예’라고 딱지를 붙인다.
5. 2010년 2월3일 권태신 총리실장은 친이명박계 의원모임에서 “도시전문가들 말로는 ‘원안대로 하면 사회주의 도시가 된다’고 한다. 세종시 원안은 그 자체가 수도 분활로 50년, 100년 뒤에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고 주장.
6. 2010년 1월16일 학술단체협의회 새 상임대표로 선출된 조돈문 카톨릭대 교수는 ‘지금의 대학 사회가 군사정권의 교수해직으로 비판적 학문의 존립이 위태롭던 1980년대와 비슷하다. 이대로 방치하면 대학 안에 진보학맥 자체가 끊길 수 있다’고 경고.
백범의 정치 이념
이러한 현상의 폐해를 꿰뚫어 보신 백범 김구선생은 그는 저서 ‘나의 소원’ ‘정치 이념‘ 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거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는 심히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그 보다도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반정치도 일종의 계급독재거니와 이것은 수백 년 계속되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가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다. 수백 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독재는 유교, 그 중에서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다만 정치에 있어서만 독재가 아니라 사상·학문·사회생활·가정생활·개인생활까지도 규정하는 독재였다. 이 독재정치 밑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는 소멸되고 원기는 마멸된 것이었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쳤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왜 그런고 하면 국민의 머리 속에 아무리 좋은 사상과 경륜이 생기더라도 그가 집권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상, 또 그것이 사문난적이라는 범주 밖에 나지 않는 이상, 세상에 발표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어떻게나 중요한 것임을 통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오직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이하 생략
사문난적(斯文亂賊)
1623년(광해군 15) 3월12일 권좌에서 밀려난 서인세력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강화도에 유배하고 집권하던 대북파를 몰아낸다. 국사에서 배운 인조반정인데, 이들은 반정 명분을 들어내기 위해 전임 정권 때의 일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나간다. 따라서 명과 후금 사이의 중립외교정책을 버리고 친명배금정책으로 선회한다.
인조 5년에 정묘호란에 이어 인조 15년에는 청태종이 이끄는 12만 대군에 항복하고, 소현세자와 수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청에 끌려가 인신매매 등 갖은 고초를 겪는다.
그럼에도 국왕을 비롯한 집권세력은 잘못된 사상과 정책에 대한 반성은 뒤로한 채, 천하를 통일한 청과의 교류(사실은 세계와의 교류)를 금하고, 8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가 갖고 온 서양의 책과 기구를 모두 수색해서 불살라 버리고, 그도 모자라 세자를 독살하고, 세자빈과 그 자식들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한다.
효종은 북벌정책을 세워 궁핍한 재정을 군비증강에 쏟아 붓는데, 이는 대민통제와 체제안정 외에는 설득력이 없다. 소중화(小中華)를 자부하는 조선의 사대부들은 숙종 때에는 서원건립에 열을 올리고, 명이 망한지 60년을 기념해 창덕궁 후원에 명의 신종과 의종을 위해 대보단(大報壇)을 짓고 국왕이 제사를 올린다. 아울러 민에서는 충북 괴산 화양동 계곡에 만동묘를 짓고 유생, 수령 촌민들이 모여 제사를 올린다.
어떠한 사고의 유연함도 허락하지 않았던 당시 조선사회에서, 서계 박세당은 주자의 이론만 고집하는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사문난적(유교의 도리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비난하여 일컫는 말)으로 몰려 75살의 나이에 귀양을 떠났다가 숨진다. 진짜 이유는 형이상학에 집착하는 성리학이 아니라 실용지학을 강조했던 그의 사상 때문이었다. 그의 저작 ‘사변록’과 ‘색경’은 모두 찟기고 불태워졌다. 이 밖에도 ‘중용주해’를 지은 윤휴 등 사상적 반란을 시도했던 수많은 선비들이 그렇게 사라졌다. 중세시대 종교재판과 다름없는 사상재판이었다.
이러한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는 개혁군주 정조(1776~1800) 시대 조금 나아지는가 싶더니 정조의 급서 이후 1801년에 일어난 천주교 축출을 빌미로 한 신유사옥에서 규장각 출신 남인 학자들이 모두 처형되거나 귀양가고, 노론벽파세력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세상이 된다. 이후 더욱 혹독한 사상통제가 이뤄지고, 60년의 세도정치 끝에 나라는 결단나고 국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결과로 막을 내린다.
흥선대원군에게 위정척사를 건의한 이항로는 “주자의 말이 아니면 감히 듣지 않으며, 주자의 말이 아니면 감히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는 등 민족과 국가의 주체성을 버리고 오직 중국과 유교의 정통만 고집하는 편협한 사대사상을 대변한다.
매카시즘의 시조
매카시즘은 원래 미국에서 일어났던 특유한 반공사상이다. 1950년대 초 미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가 미국 정부의 고위직에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체제전복을 꾀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고발을 해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는 상원의원의 신분을 벗어난 천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동료의원들로부터 공식적으로 비난을 받았다(1954.12.2). 이로써 한 시대를 풍미한 매카시즘 시대는 4년 만에 막을 내렸다.
미국에서 매카시 선풍을 확실히 잠재운 것은 CBS TV의 뉴스 프로그램 ‘See it Now'를 제작하여 전국적으로 36일간 방영한 머로(Edward R. Murrow)가 맥카시의 야만적이고 잔혹한 질문전략을 상세하게 폭로한 결과였다.
일제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8.15 공간’에서 각축한 세력들을 크게 분류하면 ① 여운형, 안재홍 중심의 사회주의 계열의 좌파 민족주의 세력 ② 김구 중심의 상해임시정부계열이 주가 된 보수적 우파 민족주이 세력 ③ 이승만을 중심으로 재결합한 한민당 계열의 토착지주계급, 친일파 세력, 그리고 북한에서 쫓겨 온 친일세력 집단 ④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뒤에 남로당) 세력으로 대별할 수 있다.
8.15 공간의 가장 중요한 사명의 하나가 친일파 척결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력과 달리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은 이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는 일제경찰이 지배하고 있던 군정경찰의 물리력과 친일세력 집단으로 비난받던 한민당의 재정력 그리고 미군정의 도움을 받는 이승만 이 3자가 지배연합을 형성하고 다른 정치세력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박헌영의 공산주의자는 물론 김구의 임정세력 등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세력을 제거하는 데 매카시즘을 남용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후 친일파 숙청을 위한 국회의 [반민족행위자처벌법] 제정에 반발하여 그들은 방자하게도 국회회의장에 침입하여 ‘친일파 숙청 주장자는 공상당의 주구’라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실로 8.15공간은 친일파의 금의환향의 무대였으며 민족정기의 화장장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반세기 이상 지속되고 있는 한국 정치과정에서 매카시즘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일제 식민지시대의 친일 인사 그리고 역대 독재정권 창출·유지에 헌신했던 세력이 참회와 사죄는커녕 오히려 탐욕스런 지배자를 옹립하여 권세와 영화를 영구히 누리고자 민주·통일 지향세력을 매도 유린하기 위하여 기획·연출하는 한국 사회의 특유한 ‘지배정치 이데올로기’라 할 것이다( 이상, 분단한국의 매카시즘에서 인용, 진방식 지음, 형성각)
매카시즘의 대물림
역대 정권이 권력유지를 위해 써 먹은 매카시즘의 사례 몇 가지를 되돌아보자.
1. 이승만은 그의 정적 여운형과 김구를 암살하고, 조봉암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사형.
2.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친일파 중용을 반대하여 일어난 국민들의 「10.1」「4.3」사건과 「여순 군 반란사건」등 애국적인 의거에 반공을 내세워 과도한 양민학살 자행.
3. 반공을 내세워 국회프락치사건(1949), 국제공산당사건(1952), 인도 뉴델리밀회사건(1954) 등 매카시즘 사건을 터뜨려 고비를 넘기면서 권력을 유지.
4. 1960.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일어난 전국적인 규탄대회에 대하여 이승만은 4월12일 특별담화에서 “이 난동 뒤에는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인데, 난동은 결국 공산당에 좋은 기회를 주게 할 뿐”이라 발표.
4. 5.16 군사쿠데타의 혁명공약 제·1조를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는다’로 함.
5. 3선 개헌 이후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 직전, 중앙정보부는 4월19일 간첩사건을 발표. 재일교포 대학생 서승과 서준식 형제 등이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 암약한다는 내용. 그 덕에 열세였던 박정희가 당선.
6. 1980. 5.22 광주민주화 운동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계엄사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 내용은 “김대중은 공산주의자이며 과도정부를 구상, 학생을 선동해 정부전복을 계획했다” 이어서 계엄군법재판에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
7. 1987.11.29. 14:05 북괴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가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바그다드를 떠나 방콕으로 향하던 KAL858기를 액체폭탄을 이용해 안다만해 상공에서 폭파. 김승일은 자살, 김현희는 김포공항으로 압송. 그 덕에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
8. 1995. 6.14 당시 서강대 총장 박홍은 한국통신노동조합 간부들이 쟁의와 관계없는 일로검찰이 구속하려 하자 조계사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농성한 것을 두고 이는 “북한이 조종한 것이다”라고 발언.
9. 1995. 7.25 「문제성향판사 형사부 보직 배제 필요」라는 안기부 보고서가 있은 이후, 법무부는 1996. 2.23 검사직을 지망한 수료자 가운데, 실형전과가 있는 3명을 임용에서 떨어뜨리고, 1998. 1.5. 대법관 간담회에서 “우리사회의 최후의 보루인 법원에 급진적인 사상이 어울리지 않으며, 개인의 특수한 경험이 공정한 재판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학생운동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경력이 있는 사법연수원생들의 법관임용을 허락하지 않기로 하자, 학생운동으로 집행유예 이상의 형을 받은 사법연수원생이 성적과 관계없이 판검사 임용에서 탈락하는 일이 벌어짐.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카스 R. 선스타인 지음, 박지우·송호창 옮김, 후마니타스)
누군가 거리 한복판에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주변 사람들은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세 명이 모여 허공을 바라보자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 함께 허공을 바라보았다. 동조 현상이다. 이런 인간행동 대부분은 정보와 평판에 따른 사회적 압력의 산물이다. 다른 사람들의 행위와 진술을 통해 전달된 정보와 다른 사람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으려는 보편적 열망 때문이다.
동조는 재판과 같은 사회적 현상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덜 보수적인 판사가 보수적인 두 명의 판사와 함께 판결을 내린다면, 그 판사가 보수적인 판결을 내리는 경향은 강화된다. 그 반대 사황도 마찬가지다. 이 처럼 동조는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해 이견을 내지 못하게 한다. 사회적 압력은 개인과 조직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의 은폐, 히틀러에 대한 네빌 체임벌린의 유화정책,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챌린저호를 발사하겠다는 나사의 결정, 1941년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등은 모두 이런 ‘집단사고‘의 결과다.
동조가 유행처럼 번지면 사회적 쏠림이 일어나고, 더 심해지면 집단 편향성으로 나타난다. 이는 일정한 유행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과장된 사회적 공포, 극단적 견해의 대립, 공황 등을 부른다.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는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나는 동조현상의 피해를 지적하고, 이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지은이는 “집단 영향과 그것이 내재하고 있는 유해한 효과를 잘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다양한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실마리를 던져준다”고 주장한다. 집단 간 다툼, 극단주의, 테러, 전쟁, 기업의 실패와 성공, 언론자유의 중요성과 핵심적 본질, 결사의 자유가 가진 장점과 단점, 법에 대한 순응과 불응, 여론과 헌법 해석 사이의 긴장관계, 고등교육에서의 적극적 시정조처를 둘러싼 논쟁 같은 사례들을 들고 이견의 중요성을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벌거벗은 임금님’(사람들은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으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판단을 따른다)을 바라보는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기만적인 동조현상은 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쉽게 물리칠 수 없다. 지은이는 “이런 부정의, 억압, 집단 폭력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선량한 사람들이 침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잘못된 관행에 경종을 울리겠다고 집단적 합의에 내포된 모순점을 밝히고자 한다면 그들은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또 직장을 잃거나 따돌림을 당할지도 모른다.
이견 없는 사회, 갈등 없는 조직은 없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과 통념에 자극을 주는 것이 이견이다. 이견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다. 이견을 억압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큰 손실을 낳는다. 억압은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회공동체와 인류의 미래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를 ‘강도질’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셈이다.
조직이나 국가가 사회적 건강을 유지하려면 이견을 환영하고 개방성을 높여야 한다. 사회가 잘 작동하려면 구성원들이 무조건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좀 더 활발하게 이견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인의 의견이 사회의 지배적인 의견과 달라도 개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사회 전체에 이익에 도움이 된다.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교수로 미국 오바마 정부 규제정보국에서 일하고 있는 지은이는 “잘 작동되는 사회는 이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제도를 갖춰 동조가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한겨레, 이충신 기자)
마치는 말
올해는 겅술국치 100주년이요, 해방 65년이 되는 해이다. 동족상잔의 끔직한 6.25를 거치면서도 이 나라는 산업화·선진화를 이뤄 OECD회원국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에 걸맞게 이 사회가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넘치고 있나 돌아보면 실상은 다르다.
정부정책과 다른 소리를 한다고 연구 연구원들이 파면을 당하고, 온갖 불법과 강압으로 방송사, 문화단체 임원들이 코드가 다르다는 이유로 자리에서 쫒겨난다.
광우병 미국산 쇠고기 수입, 4대강 대운하, 세종시 건설, 미디어법 개정, 대북·통일정책, 노동조합 문제 등 국정 전반에 걸쳐 소통과 대화는 없고 오직 불법과 힘으로 밀어붙이기만 있고, 대화와 소통은 찾아보기 어렵다.
마치 30년 전이나 200년 전으로 역사가 후퇴한 느낌이다.
역시 김구 선생의 글로 마치려 한다. “어느 한 학설을 표준으로 하여 국민의 사상을 속박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여 국민의 신앙을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지 아니한 일이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크리스트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으로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서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 이러한 자유의 나라에서만 인류의 가장 크고 가장 높은 문화가 발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