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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01월23일(안) (일몰: 오후 5시 45분)
제4과 성령(聖靈)의 열매인 화평(和平)
<핵심본문> : 빌 4:7
<연구범위> : 마 8:23~27 11:28~29, 롬 5:1~11, 12:9~21, 골 3:13~15, 히 12:14.
<기억절(記憶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학습목표(學習目標)>
(깨닫기) :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평안>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을 믿는다.
(느끼기) : <하나님과 함께 하는 평안>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을 받아들인다.
(행하기) : <화평케 하는 자>
여러 관계들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평안함을 나타낸다.
<등(燈)불>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平康)은 인간스스로 만들어 내거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평강은 기도(祈禱)의 결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膳物)로 하나님과의 화해(和解)와 그의 은총(恩寵)에 참여함과 그와의 연합(聯合)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은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확연히 구별되는데 세상의 평화는 일시적이고 표면적이며 불안한 것인 반면에 하나님의 평강은 영원하며 본질적(本質的)이며 완전(完全)한 것이다.
<요점(要點)>
우리는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화평을 누리고 그것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화평을 유지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평안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일요일(1월 17일)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롬 5:1)>
◈ “더불어”라는 말은 <함께>라는 뜻이다.
즉 함께하면 결과가 극대화(極大化) 된다는 뜻으로 예(例)를 든다면 “혼자 사는 것 보다 부부(夫婦)가 함께(더불어), 또한 이웃과 함께(더불어) 살면 더 극대화되어 좋다는 것과 같이, 인간의 삶이란 더불어 살라는 뜻으로 한문(漢文)으로 해석(解釋)하여 보고 싶다. 인간(人間)이란 인(人)자(字)를 보자, 인간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기대어 사는 것이 즉 더불어 사는 것이 인간이라는 뜻으로 해석 하고 싶다. 그러나 특히 화평을 누리려면 하나님과 함께하여야 하여야 온전한 화평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이다.
화평(和平) = 화목(和睦)하고 평온(平溫)함을 말한다.
영어로는 <Peace> = 1. peace 2. harmony 3. placidity 로 경우에 따라서 사용되고 있다.
◈ 완전한 화평은 양심의 평정(平靜)을 의미하며,
이것은 생명과 선악(善惡)의 근원인 절대자와 자신이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만 시작된다.
여기서 평화는 단순한 감정의 평온(平穩)을 말하거나 하나님과 인간과의 경계선을 넘어선 황홀한 도취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뇌(苦惱)하는 양심의 평화를 말하는 것으로 '양심의 즐거운 휴식'을 의미하며,
'조용한 양심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信賴)'를 뜻하는 것이다.
◉. 로마서 5:1~11에서 중요한 핵심은 .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 죄인을 위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和睦)한 사람>
“하나님과 동료들로 더불어 화목 하는 사람은 불행해질 수 없다. 시기심(猜忌心)이 그의 마음속에 있지 않을 것이며, 좋지 않은 추측이 발견될 여지가 없고, 증오심(憎惡心)이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과 조화(調和)를 이루고 있는 마음은 이 세상 생애에 속한 괴로움과 시련(試鍊)을 초월(超越)하게 된다.”(증언보감, 2권, 190)
◉. 우리 하나님께서는 죄인과 더불어 화목하기를 원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주셨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우리는 오늘날 은혜의 왕국의 시민이 되고, 그분의 재림 때에 영광의 왕국의 시민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시는 인생은 실패와 산산조각이 난 소망과 꿈들로 꽉 채워진 삶이 아니다. 성장의 삶이요, 구주와 함께 성공적으로 동행하는 삶이다. 사랑, 희락, 화평(和平),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갈 5:22, 23)―자신의 생애를 당신께 의탁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예수님이 나누어주시는 관계의 열매-를 점점 더 나타내는 삶이다. 그 누가 이러한 선물을 거절하겠는가?”(교리, 57)
◉. “새 언약, 중생의 체험은 그리스도의 의를 가져다주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체험을 갖게 한다. 이것이 제공하는 심령의 새롭게 됨을 통해 "사랑과 희락과 화평(和平)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23) 등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로 변화된다.”(교리, 95)
◉. “참된 변화.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의 의지, 마음, 소망, 그리고 품성을 일변시킴으로써 사람들을 당신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신다. 성령은 신자들의 사고방식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여전히 썩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남아 있지만 성령의 열매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和平)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23)가 이제 그들의 생활 방식이 된다.”(교리, 125)
◉. “분열시키는 태도를 피하라. 이기심, 교만, 자기 과신, 자만, 우월감, 편견, 비평, 비난 그리고 신자들 사이에서의 흠 찾기는 교회를 분열시킨다. 그리스도인 경험에서의 첫사랑의 상실이 흔히 이런 태도를 유발시킨다. 갈바리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때 서로에 대한 사랑이 새롭게 될 수 있다(요일 4:9-11). 성령을 통하여 전달된 하나님의 은혜는 육신적인 마음 가운데 있는 이러한 분열의 근원을 정복할 수 있다. 신약 시대에 한 교회에서 분열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바울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 5:16)고 그 교회에 권면하였다. 계속적인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를 연합으로 이끄실 성령의 지도를 구해야 한다. 성령 안에서의 행위는 분열에 대한 효과적인 해독제인 성령의 열매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和平)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맺는다(갈 5:22, 23).”(교리, 171)
◉. <필수불가결한 차원(次元). 그러나 성령의 은사들은 그 자체로는 충분치 못하다.>
“성령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소멸되어 버리지만 성령의 열매는 영원하다. 그것은 사랑, 화평(和平), 양선, 그리고 사랑이 가져다주는 의의 영원한 미덕으로 구성되었다(갈 5:22, 23; 엡 5:9). 예언, 방언, 그리고 지식은 사라질 것이지만,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다. "(고전 13:13).*”(교리, 199)
월요일(1월 18일)
<평안(平安)을 발견함 - 1 (마 11:28~29)>
<평안 = 무사히 잘 있음. 걱정이나 탈이 없음>
◈ 발견(發見)한다는 말은 찾아내는 것을 뜻하는데 이 말은 또한 긍정적인 경우에 한하여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
그 한 이야기로 마태복음 13장44절에 기록된 말씀으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寶貨)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이처럼 무엇을 발견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 그 행복을 지칭하는 평안의 반대말은 불안(不安)이다. 그 불안은 죄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평강의 원천이시며 근원이 되시는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께 나아가 우리의 모든 생애를 그분께 맡기면 우리에게 그분의 평화가 깃든다. 우리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평안의 주인이시며 원천이 되시는 예수님을 발견한다는 것은 우리의 최고의 발견이며 축복이며 선택인 것이다.
◈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인 우리는 그 짐을 내려놓는 길은 오직 한길 밖에 없다.
마태복음 11:28-29의 예수님의 초청의 말씀을 살펴보자
‘수고하고’는 능동태(能動態)이고, ‘무거운 짐은’ 수동태(受動態)이다. 또한 양자(兩者)다 그 시제가 동작과 상황의 계속을 암시(暗示)하는 현재의 분사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에 예수님은 스스로, 또는 타인에 의해서 세상 짐에 억눌려있는 가련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심을 알 수 있다.
◈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태복음 11장29의 말씀에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말씀은 유대인 사회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훈육(訓育)관계를 가리킬 때 이 표현을 관용적(慣用的)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구원(救援)을 주지 못하는 세상 멍에(율법(律法) 멍에)를 내어버리라고 하시는데 이는 곧 예수님 자신의 선(善)하고 즐거운 멍에로 대치시켜 주시기 위함이다.
한편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꼭 짝(pair)이 되어 두 사람이 함께 매었는바 예수님께서 주신 멍에를 멘다는 것은 곧 예수님과 함께 메는 것이 된다.
‘쉼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은 쉼은 만족(滿足)과 평안(平安)과 휴식(休息)과 즐거움, 등을 총칭(總稱)하는 것으로써 이미 천국이 건설 중에 있으나 (막 4:26-29) 종말(終末)에 가서야 완성되듯이 성도의 영혼의 쉼도 점점 더 확산되어 가는 점진적 쉼을 말씀하는 것이다.
◉. <불안(不安)이 일어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전적으로 예수님의 보호하심에 영혼을 맡기고 또 그분의 명령에 생애를 맡기는 자들은 평강과 평온함을 얻을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임재로서 그들을 기쁘게 하실 때에는 세상의 아무것도 그들을 슬프게 하지 못한다. 완전한 순종에는 완전한 쉼이 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 이다.’(사 26:3).”(시대의 소망, 330~331)
◉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삶은 언제나 불안하고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은 참된 평안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떠나서 스스로 평안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 “성령의 채움을 입은 신자는 "육신(肉身)을 좇지 않고 그 영(靈)을 좇아 행"(롬 8:4, 8:1 참조)해야 한다.
그들은 변화되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롬 8:6)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내재를 통하여 그들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다."(롬 8:9)”(교리, 123)
◉ 성경은 "여호와의 법(法)에 행하"여 (시 119:1)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시 1:2) 모든 자들을 "복되다"고 선언한다.
순종의 축복들은 많다: (1) 명철과 지혜(시 119:98, 99), (2) 평안(시 119:165; 사 48:18), (3) 의로움(신 6:25; 사 48:18), (4) 순결하고 도덕적인 생애(잠 7:1-5), (5) 진리의 지식(요 7:17), (6) 질병에 대한 보호(출 15:26), (7) 장수(잠 3:1, 2, 4:10, 22), (8)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리라는 확신(요일 3:22; 시 66:18 참조).”(교리, 230)
◉ <우리에게 편안(便安)한 안식(安息)을 주시는 예수님>
“예수께서는 인간의 약점과 필요가 무엇이며 어디에 시험을 대항할 힘이 있는지를 경험을 통하여 아시는 바 이는 그분이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는 없으시다. 예수께서는 무서워 떠는 하나님의 자녀인 그대를 지켜보신다. 그대는 시험을 당하고 있는가? 그분이 구원하실 것이다. 그대는 연약한가? 그분이 힘을 주실 것이다. 그대는 무지한가? 그분이 깨우쳐 주실 것이다. 그대는 상처를 입었는가? 예수께서 고쳐 주실 것이다. … 그대의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그것을 지시는 그리스도께 맡김으로써 더욱 편안한 안식의 축복을 얻을 것이다.”(시대의 소망, 329)
◉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기고 순종할 때 진정한 쉼과 평안이 이르러 온다.
우리는 자신을 의존하는 대신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뢰함으로 참된 쉼을 누리자.
화요일(1월 19일)
<평안을 발견함 - 2 (요 14:27)>
◈ 평안(平安)과 화평(和平)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리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 이다. ((시편 119:165)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 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公義)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이사야 48:18).
평안과 화평은 또한 보혜사 성령의 열매로서 그리스도인의 내적(內的)성품으로 부여(附與)되는 것이기도 하다. (갈라디아서 5:22 참조)
(요 14:27). 세상이 주는 평안과 예수께서 제공하시는 평안은 다릅니다.
◈ 마태복음 8:23~27, 마가복음 4:35~4, 누가복음 8:22~25에서의 말씀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의 교훈은 예수님의 이적(異蹟)사건에서 1차적으로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이 초점이 되지만 우리는 동시에 그 이적에 관련된 인간의 태도와 상황에도 유의해야 합니다.
영적(靈的)인 의미로 볼 때 인생은 여기 제자들이 타고 있던 망망대해(茫茫大海)에 떠있는 조각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광풍(狂風)과 노도(怒濤)가 우리들 인생에게 덮칠 위험은 언제나 잇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은 창조주이시며 전능자 이신 예수님과 함께 한 배에 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심(深)히 두려워하여 떨고 있었다는 점에 유의(留意)해봅시다.
폭풍과 풍랑이 밀려오는 그때 에도 예수님께서는 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들은 있지만 그들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으며 예수님을 깨우시자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폭풍을 잠잠케 하셨다. 이후 제자들은 두려워하였는데 그 두려움에는 다음과 같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두려움은 폭풍을 두려워하던 그 두려움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이 주무시는 상황에서의 폭풍과 풍랑의 두려움은 = 세상의 위력에 대한 버려야할 육적 두려움의 비유이며, <두 번째>두려움은 그 모든 것을 능히 이기시는 우주의 주권자에 대한 영적(靈的)경의심의 두려움인 것입니다. 우리는 능력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버릇처럼 하면서 전자(前字)의 어부들처럼 능력의 주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세상으로 나가기만 하면 걱정과 두려움에 짓눌려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는 제자 어부들의 경우에서처럼 예수님과 함께 한배에 타고 있어도 누리지 못한 불안과 염려가 마치 우리들의 삶속에서 매일매일 평안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폭풍 속에서도 편히 주무시며 폭풍과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을 잊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이에 진정한 평안은 천지만물의 주제이신 예수님과 우리 모두가 한배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할 때 평안이 보장되며 그분만이 평안의 주인이시라는 점을 영적으로 교훈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 예수께서 폭풍 가운데서도 평안히 주무실 수 있었던 것은 절대적인 믿음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만 한다면 어떠한 주변 상황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안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오는 능력과 평안>
“우리는 생각하고 행하는 생활, 조용히 기도하고 열심히 일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얻는 능력은 사려 깊고 주의성 깊은 마음을 훈련시키는 열렬한 노력과 합하여 사람을 일상생활의 의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고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모든 환경에서 마음을 평안하게 지켜준다.”(가정과 건강, 335)
◉ 예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비교할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함으로써 이 평안을 소유해야겠다.
수요일(1월 20일)
<가정(家庭)에서의 화평(和平) (히 12:14)>
◈ 고사 성어(故事成語)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가정은 행복의 기초(基礎)가 되는 곳이다.
그러한 중요성을 감안할 때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시대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들도 가정의 중요성을 글로서 남기고 가르치는 것을 볼 때, 가정은 하늘의 축소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는 한자성어(漢字成語)로,
家 : 집 가
和 : 화할 화
萬 : 일만 만
事 : 일 사
成 : 이룰 성
모든 일은 가정에서부터 비롯된다는 말이다.
가정은 공동생활이 이루어지는 최소 단위이자, 사회생활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근간인 가정이 화목하지 않으면 가족 구성원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의심(疑心)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 결국 서로 반목(反目)하게 된다.
예부터 가정의 화목은 가정을 다스리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자 사회생활의 근본으로 중시되었다.
《대학(大學)》에서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8조목으로
삼아 집안의 다스림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격물(格物)부터 수신(修身)까지는 개인적(個人的)인 것이고,
제가(齊家)부터 평천하(平天下)까지는 공동체를 말하는 것으로,
가정을 화목하게 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 치가(治家)편에도 "자식이 효도하면 양친이 즐거워하고, 가정이 화목하면 만사가 이루어진다(子孝雙親樂 家和萬事成)."는 말이 나온다.
또 조상(祖上)이 덕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후손에게 경사(慶事)가 따른다는 뜻의 한자성어
'적덕지가 필유여경(積德之家必有餘慶)' 역시 가화만사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밖에도 가정의 화목과 관련된 고사나 글 등은 유교 경전이나 서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효백행지본(孝百行之本)'이라 하여 효를 모든 행실의 근본으로 보는 것도 가화만사성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러한 중요한 가정에 화평이 어떻게 실현 될 수가 있을까?
이는 부부(夫婦)는 남남으로 성별(性別)이 다른 사람으로 자라난 환경과 성별이 다른 남녀가 함께 사는 곳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근본부터 전혀 다른 남녀가 합하여 사는 것 자체가 기적(奇迹)중에 기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그 행복할 수 있는 진리와 원칙을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 창세기 2:18-25절에 말씀 하시기를 "돕는 배필(配匹)"로 인간을 지으셨다고 기록 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부지간에도 서로가 돕는 배필로 살아야지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을 때에는 화목이 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부부는 남녀의 차별이 아니라 기능의 차이 일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매뉴얼(설명서)대로 실천해야 화평과 평안이 온다.
◈ 모든 평안은 주권적(主權的)인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사 45:7, 참조. 신 6:26; 대상 23:25; 시 147:14).
따라서 평안은 의(義), 순종(順從), 정의(正義)를 통해서 경험(經驗)이 가능하다.
(시 119:165; 사 32:17; 48:18; 59:8).
평안은 모든 사람이 함께 가져야 할 목표이다. (롬 12:18; 고전 7:15; 히 12:14)
◈ <가정(家庭)은 모든 활동의 중심임>
사회는 가정들로 구성되고 그 가장(家長)들의 행위에 따라 좌우된다.
“생명의 근원”(잠 4:23)은 마음에 있고 지역 사회와 교회와 국가의 중심은 가정(家庭)에 있다.
사회의 행복, 교회의 성공, 국가의 번영이 가정의 감화에 달려 있다. ― 치료봉사, 316.”(가정, 15)
“가정에서의 연합. 교회에서의 연합을 이룩하기 위한 이상적인 훈련장은 가정이다(본서 22장 참조).
가정에서 우리가 지혜로운 경영, 친절, 온유, 인내, 그리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사랑을 배울 때,
우리는 이런 원칙들을 교회에서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교리, 171)
◈ <거룩함의 비밀(秘密) (히 12:14)>
“날 때부터 거룩함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서 거룩함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거룩함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구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 그들은 그분의 영적 자녀들로서 거듭나고,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새롭게 된다. 그들의 마음은 변화되었고, 보다 분명한 시력으로 영원한 실재(實在)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속으로 입양되었고, 그분의 형상을 따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된다. 자아에 대해서 최고의 사랑을 품고 있던 것을 떠나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최고의 사랑을 품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의 모본을 따라 자기 부정의 길을 따르는 것 이것이 거룩함의 비밀이다(사인즈 1902. 12. 17).”
◈ 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러나 원칙(原則)에 충실할 때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적대감(敵對感)을 유발(誘發)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18절에서 "할 수 있거든"이라는 조건을 덧붙인다.
사도바울의 생애의 기록은 거의 계속적인 투쟁의 기록인데 이는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항상 가능한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단이 임금인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군병(軍兵)들은 모든 것이 평화로우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평화가 깨질 때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지 확인해야한다.
(본교 성경주석(한) 11권758-759p)
⑵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에게 손상(損傷)을 가져오는 일을 피해야 한다.
즉 다른 이들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과(벧전 3:10 참조).
다른 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벧전 3:11 참조)를 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찾아야 한다.
(본교 성경주석(한) 14권214p)
⑶ <악(惡)을 버리고>
그리스도인 삶에는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 둘 모두가 존재한다.
우리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해야한다. 단순히 악을 행치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선(善)을 행해야만 한다.(본교 성경주석(한) 6권220p)
⑷ 죄는 도덕적 부패(腐敗)와 영적타락(靈的墮落)의 결과를 초래(招來)한다.
다윗은 범죄 후에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 이다."(시 51:7)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자신이 죄로 오염되었음을 깨닫고 자신에게 정한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懇求)하였다. (시편 51:10)다윗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죄인은 누구든지 도덕적 정결을 필요로 한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그의 마음이 깨끗해져야만 한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악한 마음을 씻을 것(렘 4:14)과 죄악에 젖은 손을 깨끗이 할 것(약 4:8)을 요구하신다.
그분은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을 쓰시고(렘 31:33) 사람을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요일 1:9)이라고 약속 하신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고 요구하였는데, 이는 부정한 자들이 더 이상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사 52:1).
요한은 속된 것은 무엇이든 거룩한 성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계 21:27)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마음에 심어주고자 애썼던 교훈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는 그의 백성이 거룩하기를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죄를 그치라고 요구하셨다. 그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도 거룩해야만 하였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악이 제거되어야만 한다. 하늘의 순결한 환경 속에는 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리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의의 옷을 입게 될 것이다.
⑸ <선(善)을 배우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악(惡)을 미워하고 선(善)을 사랑하게" (암 5:15)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소극적인 선 곧 악행을 삼가는 것을 행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경건은 능동적 원칙이며 의의 수련은 죄악을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보증이다.
사람이 이전에 어떤 경향을 가지고 있었든 관계없이 그는 이제 악을 그칠 뿐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위한 신실한 노력까지도 기울이고자 의도할 것이다.
이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게 스스로의 단호한 결심과 더불어 하늘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완전한 성품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서서히 그러나 근면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부지런한 연구와 불굴의 인내 그리고 결심과 연습을 통해서 그들은 때가 이르면 바른 삶의 습관을
습득할 수 있다.
지금 잘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잘하는 법을 배우는 점진적이고 근면한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다.
누구라도 바른 삶이 그의 습관이 되기까지는 잘 행하는 법을 다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 (본교 성경주석(한) 7권79-80p)
◉ 예수께서는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하고 남녀노소의 차별 없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셨다.
그러나 교만(驕慢)한 위선자(僞善者)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책망하셨다.
우리의 실생활에서 실천하기 어려운 것은 자기 정서 중심으로 화평을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평안하게 해 주려는 진정한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닐까.
◉ 로마서 12:9~12의 말씀은 식구들 사이에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며,
존경(尊敬)은 사랑을 유발(誘發)하고 우애(友愛)하게 할 것이다. 그런 정신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참으며 기도(祈禱)에 항상 힘쓰는데, 특히 화평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 <하늘 다음 가는 평화와 행복의 장소로>
“부모들은 자신의 품성과 가정생활에서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선행의 모범을 보이고자 노력해야 한다. 가정에 햇빛이 넘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토지나 돈보다 훨씬 가치 있을 것이다. 가정에 대한 사랑이 저희 마음에 생생하게 간직되어 저들로 하여금 저희 유년 시기의 가정을 하늘 다음 가는 평화와 행복의 장소로 돌아보게 해야 한다.”(재림교 성경주석, 창 24:1-67)
◉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은 화평을 실천하는 훈련장이다.
가까운 가족들과 더불어 진정한 화평의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평화의 사자(使者)들이 될 수 있다.
목요일(1월 21일)
<교회에서의 화평(和平) (마 5:23~24)>
◈ 인간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그 인간이 있으면 안 될 사람과 (Trouble make)
(둘째) 그 인간은 있으나 마나 한 사람과 (Nominal make)
(셋째) 그 분은 꼭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Peace make)
⑴ 첫째 부류는 = 가정과 이웃, 교회, 사회, 국가 등등과 만나는 사람들에게 물심양면으로 해(害)를 끼치며 트러블 메이커 (Trouble make)의 사람으로 정말로 태여 나지 말아야 될 사람이며,
⑵ 둘째 부류는 = 그 인생은 있으나 마나 한 사람으로 자기 혼자와 자기 가족만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면서 이웃이나 친구 친척 국가에 아무런 유익이 안 되는 (Nominal make) 사람으로, 나 혼자와 내 가족만을 생각하며 돼지처럼 동물처럼 사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 이구요.
⑶ 셋째 부류는 = 한 가정의 아내나 남편으로써 자녀들의 부모로써 또는 자녀로써 가정과 이웃과 교회와 시회와 국가와 인류에게 꼭 필요로 하는 (Peace make)의 사람이지요.
이러한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며 어떻게 태어날까?
이는 (Peace make)의 원천이신 예수님과 포도나무와 가지로 사는 사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죄와 허물로 태어났고 그 세상 주관자인 사단의 올무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 (마태복음 5:23~24).의 말씀은 예배보다 인간관계 회복이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성실하지 않은 자가 어찌 더욱더 엄정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예배의 진정성과 순결성, 유효성에 관해 말한 것이다. (이사야 1:10-17).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새로워지고 또 인간관계를 통하여 실천되어야 함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교우 간에 화목(和睦)하는 것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자존심(自尊心)과 교만(驕慢)한 생각 때문에 교우간의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 <“화평(和平)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
그리스도의 화평은 진리에서 나온 것이다. 진리는 하나님과 일치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율법과 원수이며 죄인은 그들의 창조주와 원수이다. 그 결과 그들은 피차에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 이다.”
(시 119:165)고 말한다. 사람은 화평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인간이 개인이나 사회를 깨끗하게 하고 고상하게 하려고 계획하나 화평을 이루어 내지 못하는 것은
이런 계획이 심령을 울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된 화평을 창조하시고 영속시키실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은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이 은혜가 마음에 심기워지면 그것은 분쟁과 불화를 일으키는 악한 정욕을 내쫓을 것이다.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며,
인생의 사막은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할 것이다(사 55:13, 35:1).”(소망, 302-305)
마태복음 5:9
답: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이는 예수께서 화평하게 하시는 분으로 오신 것을 지적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셨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무를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생활 특성이다.
◉ 골로새서 3:13~15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의 말씀은
(1)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납하여 피차에 용서하라.
(2)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3)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 <먼저 화해(和解)하고 예물(禮物)을 드리라>
“많은 사람들이 저희와 형제들 사이에 화해해야 할 불행한 알력을 그대로 지닌 채 종교적인 봉사에는
열심을 낸다. 하나님께서는 화합을 되찾기 위해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요구하신다.
이렇게 행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봉사를 받으실 수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명백히 지적되어 있다.”(시대의 소망, 310)
◉ 예수께서는 형제와 화목(和睦)하는 일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함을 말씀하셨다.
성도간(聖徒間)의 화목을 위해 작은 일부터 내가 먼저 실천해 보자.
평강(平康)과 감사(感謝)는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평강은 감사의 생활로 말미암아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에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유산을 위탁하셨다. 그분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말씀하셨다. 이 평화는 세상과 타협함으로써 얻는 평화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악과 타협함으로 평화를 얻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맡기신 평화는 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내적인 것으로서, 그분의 증인들이 시련과 난관을 통과할 때 그들과 항상 함께 할 평안이었다.”(사도행적, 84)
◉ “으뜸이 되려는 투쟁은 마침내 하늘 왕국에서 제외될 자들의 정신을 나타낸다. 단순히 상대편 사역자가 내가 제일 좋다고 생각하는 방법대로 일하지 않거나 나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상대방을 비난하고 허물을 찾는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깃들 수 없다. 자기 형제들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자는 사단의 일을 하는 자이므로 주님께서는 그를 결코 축복해 주실 수 없다.”(복음전도, 102)
<초점(焦點)>
성령의 열매인 화평(和平)은
죄인과 더불어 화목(和睦)하기를 원하셔서 이 땅에 화목제물(和睦祭物)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으며, 예수님께 온전히 맡기고 순종할 때 진정한 쉼과 평안이 이르러 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은 화평과 평안을 실천하는 훈련장이 되어서 평화(화평)의 사자(使者)로서 죄악 된 세상과, 교회에서도 성도들과 화목을 위해 실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이며, 이로써 성령의 열매인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
<말미부록(末尾附錄)>
† 십자가(十字架)가 흘려낸 끈끈한 사랑은 속이 다른 사람들을 한마음으로 엉기게 하여,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행복한 백성을 산출(産出)한다.
<가장 선(善)하고 가장 즐거운 것>
세상에는 이런 저런 즐거움이 여기저기에 있지만, 즐거운 모든 것이 모두 선(善)한 것은 아니다.
또한 선한 것도 적지 않지만, 그것들이 모두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선하면서도 즐거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표제가 붙여져 "다윗의 시(詩)"로 돌려진 시편 133편은 세 절(節)로 된 짧은 시(詩)로 이 절실한 관심사를 실속 있게 대답하고 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同居)함이 얼마나 선(善)하고 얼마나 즐거운[아름다운]일인가!" (시편 133:1)
그렇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도 즐거운 일이다.
그것이 바로 행복이 아닌가!
마음이 맞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집에서 같이 사는 것, 그것이 결혼으로 이루어진 자정의 행복이며, 마음이 같은 부모와 자식이 함께 지내고, 마음이 통하는 형제와 이웃이 어울려 사는 것, 그것이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요 행복인 것이다. 이러한 즐거움, 이러한 행복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으며 또 이르러 오는가?
<보배로운 기름의 흐름 같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시편 133:2)
대제사장 아론의 머리에 부어져 옷깃까지 적신 보배로운 기름 이야기는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가장 큰 행복을 보장하고 있는가?
고달프고 괴로웠던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인도를 따라 외롭고 황량한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발길을 끌고 있었다. 그때에 그들을 연민(憐憫)하신 하나님의 절절(切切)한 심정이 모세에게 전달되었다. "내가 그들 중에 거(居)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출애굽기 25장8절)게 하라는 말씀이었다. 외로워하고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거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중심의 발로된 것이다.
마침내 하나님이 친히 인간을 찾아오셔서 동거하시려고 짓게 하신 성소를 성별(聖別)하시고 거기서 봉사할 첫 번째 대제사장인 아론에게 직분을 위임(委任)하는 날이 왔다.
이 때 쓰여 진 특별한 기름을 관유(灌油)라고 하는데 감람유에 몰약(沒藥)과 육계(肉桂), 창포(菖蒲)와 계피(桂皮) 등 특별한 향(香)기름이었다.(출애굽기 30:22-25절 참조).
이러한 위임식 만을 위해 제조된 특별한 기름이 마침내 대제사장 아론의 머리에 흠뻑 부어졌다. (출애굽기 29:4-9). 머리를 적신 기름은 긴 수염을 타고 흘러내렸으며 어깨와 가슴을 적신 기름은 다시 에봇 아래 받쳐 입은 겉옷의 옷의 옷깃까지 흘러내린 후 발등에까지 뚝뚝 떨어진 것이다. 이처럼 인상 깊은 대제사장 아론의 위임식(委任式)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놀랍게 예고(豫告)된 오순절>
제단(祭壇)을 쌓고 속죄 제물을 드렸던 원시적인 제단성소(祭壇聖所)시대를 지나 초초로 성막성소(聖幕聖所)가 광야에 세워진 뒤 최초의 대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은, 승천하신직후 하늘의 참 성소에서 범죄 한 인류를 자신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보혈(寶血))로 구속(救贖)하시기 위해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表象)하고 있었다.(히브리 4:14-16)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직전에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는 당부를 남기신 예수님께서는(사도행전 1:2-5) 승천하신지 10일 만인 오순절에 그 약속을 지키셨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하늘의> 장막<성소>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십자가에서 흘리신> 자기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12-12)
마침내 범죄한 인류를 죄로부터 온전히 구속(救贖)하실 수 있는 대제사장과 죄 값을 넉넉히 치를 수 있는 속죄의 피와 이 일을 차질 없이 진행시킬 수 있는 구속의 기획원인 성소가 하늘에 마련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이미 값이 치러진 인간의 구속(救贖)을 끝마치기 위한 성소가 드디어 하늘에서 그 기능을 시작하는 날이 왔다. 그것은 광야에서 성소가 그 기능을 시작 하던 날 성소와 제사장을 성별하기위하여 피와 기름<관유(灌油)>을 바르고 제사장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위임하던 표상이 하늘 성소에서 실연(實演)된 것이다.
그 일이 이루어진 오순절,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는 아론의 머리에 부어졌던 그 관유가 흠뻑 부어졌다. 그 기름은 열 두 지파의 이름이 나이대로 새겨진 양 어깨의 견대(肩帶) 보석과 앞가슴에 붙여진 흉패(胸牌)의 열두 보석을 적신 후 겉옷의 옷깃을 거쳐 발등에 떨어졌으며 그 아래 발등상(足登床)까지 뿌려졌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 (이사야 66:1; 마태복음 5:34-35)이라고 선언하신대로 오순절날 하늘에 있는 성소의 보좌에서 베풀어진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위임식 관유가 그 분의 발등상인 땅위에까지 흘러내려 기름으로 상징된 성령이 다락방의 불길로 번진 것이다. 이처럼 보배로운 제사장 위임식의 관유는 땅 위 어디에 흘러내렸으며 그 결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슬이 내림 같도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편 133:30)
갈릴리 최북단에 위치한 가장 높은 산 헐몬(Hermon)은 요단강에 물을 공급하는 수원지이며 남단으로 세로 뻗은 중앙 산맥에 연결되어 지중해의 습한 바람을 막아 샤론 평야에 비를 뿌리고 저 먼 발치인 시온의 산들에 이슬을 내리게 한다. 그것은 저 북극 높은 하늘에 차려진 하늘 성소의 보좌로부터 보내신 이슬과 같은 성령의 임하심을 시(詩)로써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승천(昇天)하신 '예수 그리스도'게서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으로 위임되시던 오순절에 그 머리에 흠뻑 부어진 관유는 시온산 기슭의 작은 다락방에 모여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120명 제자들의 머리위에 떨어지면서 오순절 성령의 불길이 일어난 것이다. (사도행전 1:12-15 21장1-4절)
아론의 수염을 타고 옷깃까지 흘러내린 대제사장 위임식의 관유가 헐몬산의 산기슭에 정확히 뿌려진 것이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시어(詩語)로 표현된 놀라운 표상의 극적인 성취인가 ! 기원전 천년 경에 기록된 다윗의 시편에 …….
<매 맞아 찢기고 벗겨져 상처(傷處)난 몸은 계피(桂皮)와 육계(肉桂)가 되고, 흘리신 그 진한 피와 땀과 눈물은 창포(菖蒲)가 되어 감람유에 섞어져 관유(灌油)가 된 것이다.>
<마음이 같아진 사람들>
세상을 온톤 변화시킨 이처럼 놀라운 오순절의 도래(到來)를 위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는 동안 제자들은 시온산 기슭의 다락방에 모여 무엇을 경험하고 있었는가?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 (사도행전 1:14)며 그 후에도 계속 "서로 교제하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讚美)하"(사도행전 2:46-47)였다.
얼마 전까지 길을 가다가도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마가복음 9:34)을 일삼던 그들이 아니었는가?
마지막 송별회 자리인 성만찬(聖晩餐)에서도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 (누가복음 22:24)을 벌여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제자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시기심으로 충ㄱ동된 그러한 다툼은 사라졌다.
이제는 곁을 떠나신 구주에 대한 온갖 회상이 그들의 심금(心襟)을 울렸으며 주님이 생전에 그처럼 철부지였던 자신들의 처신이 그분의 마음을 얼마나 슬프고 아프게 해드렸는지 생각할 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셨던 주님의 그 겸손, 그 온유, 그 인내(忍耐), 그 사랑 모두가 뼈에 사무치는 회상(回想)이 되어 밀물처럼 몰려왔다.
모두 십자가(十字架)가 초래한 충격이었으며 영원한 감격이었다.
지난날의 잘못을 서로 고백하며 서로 용서하고 서로서로 얼싸안은 그들은 이제 서로 마음이 맞뚫린 한마음이 되어 연합함으로써 시편 133장1절을 성취하고 있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同居)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지!"
<영원히 함께하는 행복>
이처럼 선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며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제는 모두 모여 영원히 함께 살아도 되겠구나. 저렇게 서로 마음을 맞추어 더불어 살줄을 알게 되었으니.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으니 곧 영생이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은 죽지 않고 오래만 사는 그런 장수(長壽))가 아니라,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영원히 함께 "연합하여 동거하는" 그러한 행복한 영생인 것이다.
그러한 인생이 진정한 행복인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은 영원한 행복을, 범죄로 불행해진 인간들에게 가져다주시려고 상처받은 나무가 흘러내는 고통의 진액인 쓰디쓴 몰약(沒藥), 죽음의 악취(惡臭)를 영원히 제거하는 몰약(沒藥)을 흘러내시려고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셨다. 매 맞아 찢기고 벗겨져 상처(傷處)난 몸은 계피(桂皮)와 육계(肉桂)가 되고, 흘리신 그 진한 피와 땀과 눈물은 창포가 되어 감람유에 섞여져 관유가 된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뤄진 구속(救贖)이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마침내 초래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십자가가 흘려낸 끈끈한 사랑으로 마음이 엉켜져 영원히 함께 삶으로 참으로 행복할 수 있는 백성을 마침내 산출한 것이다.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행복한 사람들을…….
<신 계훈 著 ; "참으로 행복하려거든" 325-330p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