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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7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세계 최초 10점 만점 대기록을 세우다
1976년 7월, 제21회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캐나다 몬트리올의 체조경기장. 루마니아 대표로 참가한 14세의 소녀 나디아 코마네치(Nadia Comaneci, 1961~)가 2단 평행봉 경기를 펼치고 있었다. 관중들은 키 153cm, 몸무게 39kg의 작은 소녀가 2단 평행봉 위에서 한 마리 나비처럼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소녀가 자신만의 특별한 기술인 코마네치 내리기로 완벽하게 땅에 착지하자, 사람들은 그제서야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요정과 같은 소녀의 마법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마법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경기점수가 전광판에 표시되자 장내는 순간 술렁였다. 그토록 완벽한 경기를 펼친 소녀의 점수는 고작 1.00. 사람들은 당황했다. 루마니아의 체조코치 벨라 카롤리가 어이없는 점수에 항의를 하기 위해 거칠게 일어섰다. 그때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열 손가락을 펴 보이며 일어나 외쳤다. “1점이 아니라 10점! 10점 만점에 10점이오!’”
체조에서 그 어떤 인간도 10점 만점이라는 완벽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이전까지 체조경기장의 점수 전광판은 9.99까지만 표기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코마네치의 완벽한 경기에 감탄한 심사위원들의 10.00점은 전광판에 부득이 1.00으로 표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어떤 이견도 없이 심사위원 전원 10점이었다. 이로서 루마니아 국가대표 체조선수 나디아 코마네치는 세계에서 최초로 10점 만점에 10점을 받은 선수로 기록되었다.
10점 만점을 받은 코마네치의 모습. 전광판은 10점 만점을 제대로 표기하지 못해 1.00으로 되어있다.
이후 코마네치는 6번이나 더 10점 만점을 받아내 총 7번이나 10점 만점을 받았다. 10점 만점 행진이었다. 세계는 루마니아에서 날아온 14세의 작은 소녀가 보여준 인간 이상의 완벽에 열광했다. 미국의 <타임>지는 그녀를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요정”이라고 극찬했다. 그녀의 완벽한 경기는 여성 체조를 그저 여성미를 보여주는 눈요깃감으로만 여겼던 기존의 선입견을 완전히 깨뜨렸다. 여성체조를 ‘스포츠 예술’로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코마네치는 개인종합, 평균대, 2단 평행봉에서 금메달을 따내 3관왕이 되었고 마루운동에서는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녀의 활약으로 조국 루마니아는 체조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총 5개의 메달을 따낸 것이다. 그녀는 바야흐로 몬트리올 올림픽의 히로인이었으며, 세계인의 마음속에 영원한 요정으로 남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1위 단상에 올라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는 나디아 코마네치
나디아 코마네치는 1961년 루마니아의 작은 마을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에서 기계공인 아버지와 노동일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 ‘나디아’는 희망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코마네치의 회고에 의하면 그녀는 어린 시절 평범한 말괄량이 소녀였다고 한다. 그녀가 체조라는 운명을 만난 것은 6살 때 인근지역에 체조학교를 세운 벨라 카롤리 코치의 눈에 띄면서부터였다. 4000여 명의 아이들을 테스트하여 체조선수를 선발하던 벨라 카롤리의 눈에 비친 코마네치는 자신이 찾던 다이아몬드 원석 그 자체였다.
카롤리의 체조학교에 들어간 코마네치는 어린 소녀의 삶을 반납하고 체조선수로 단련되어 갔다. 벨라 카롤리는 훌륭한 체조선수를 키워내는 불세출의 코치였지만, 그의 훈련스타일은 훗날 아동학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혹독했다. 그는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에게 하루 평균 8시간 이상의 훈련을 요구하였으며 체조에 적합한 작고 귀여우며 유연한 몸을 만들기 위해 식사를 엄격하게 제한했다. 생활은 규칙에 의해 통제되어 시간별로 짜여져 있었고, 이를 어기면 실력의 고하를 떠나 학교에서 방출되었다. 코마네치와 그녀의 어린 소녀 동료들은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벨라 카롤리의 지도 아래 마치 체조 하나만을 위해 태어난 인간처럼 변모해갔다.
코마네치의 선수 생활은 8살이 되던 해인 1969년, 루마니아 전국 청소년 체조선수권대회에 참가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참가한 대회에서 코마네치는 실수를 거듭한 끝에 전국 13위에 올랐다. 이 대회는 코마네치가 경험한 최초의 실패였으며 이때의 뼈아픈 경험으로 그녀는 더욱 훈련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이듬해 같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1972년 공산주의 국가연합 청소년 체조선수권대회에 참가하면서 국제무대에 데뷔하였는데, 이 대회에서 그녀는 3개의 금메달을 따냈고 이후 1973년, 1974년 대회에서는 전 부문에서 우승을 기록했다. 청소년이 아닌 일반 선수 자격으로 참가한 1975년 세계 대회에서는 당시 가장 촉망 받는 체조선수였던 소련의 투르시체바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이때 그녀는 이미 자신의 이름을 딴 체조 기술인 코마네치내리기를 완성하였다. 이 기술은 반바퀴 비틀어 뒤로 공중돌기를 하며 착지하는 고난이도의 기술이었다. 이 모든 성공의 뒤에 코마네치의 피땀 어린 노력과 이를 요구하는 벨라 카롤리의 혹독한 훈련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코마네치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그 시절이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았다고 하였으나,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 그녀가 서방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경기가 끝나면 실컷 먹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싶다고 한 말에는 나이에 맞지 않는 훈련을 무리하게 감당해낸 10대 초반 어린 소녀의 고뇌가 담겨있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신기에 가까운 경기를 펼치는 나디아 코마네치
몬트리올 올림픽에서의 성공 이후 코마네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벨라 카롤리 코치를 떠나 루마니아의 수도 부크레슈티로 간다. 그녀는 벨라 카롤리의 혹독한 훈련에 염증을 느꼈고, 루마니아 정부는 그녀를 벨라 카롤리와 떼어내어 좀 더 효과적으로 정치 선전에 이용하고자 하였다. 결과는 엉망이었다. 10대 후반 사춘기를 맞고 있던 코마네치는 그 동안의 절제를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폭식을 거듭하는 방만한 생활로 살이 쪘고 선수로서 재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2년 뒤 절망에 빠진 그녀에게 벨라 카롤리가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훈련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훈련에 임했다. 그리고 재기에 성공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코마네치가 다시 나타났다. 4년 전보다 몸이 조금 더 불고 귀여운 자태는 사라졌지만 이제는 요정이 아닌 한 사람의 체조선수로서 그녀는 훌륭히 경기를 치러냈다. 결과도 좋았다. 그녀는 평균대와 마루운동에서 금메달 2개를 획득했고, 개인 종합 2위로 은메달도 땄다. 이 경기에서 코마네치는 힘차면서도 부드럽고, 과감하면서도 우아하게 인간 육체가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몬트리올과 모스크바 두 올림픽에서 코마네치는 세계인들에게 너무나 큰 인상을 남겼지만, 그녀 자신은 스스로 이루어낸 엄청난 성공을 감당할 수도, 실감할 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그녀는 금메달리스트 체조선수이기 전에 10대의 어린 소녀에 불과했을 뿐이고, 그녀의 조국 루마니아는 차우셰스쿠의 독재 치하에서 세계 어디에도 유래가 없는 완벽한 통제사회였기 때문이었다. 코마네치는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의 우위를 선전하는 훌륭한 선전도구로 충분히, 그리고 매우 자주 이용되었지만 실제로 그녀에게 돌아오는 대접은 형편없었다.
당시 루마니아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실정으로 상당한 경제적 위기에 빠져있었고, 국민 대부분은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다. 코마네치도이러한 국민 전체의 궁핍과 무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올림픽에서의 성공으로 자신들과는 다르게 호의호식 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실제는 달랐다. 그녀 또한 궁핍한 생활 속에서 가족을 부양하고 자신의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20대를 맞고 있었다. 루마니아 정권은 코마네치를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웠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삶을 일일이 감시하고 통제하였으며 심지어는 핍박까지 하였다. 그런 와중에 그녀가 차우셰스쿠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니쿠 차우셰스쿠의 정부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코마네치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니쿠 차우셰스쿠와의 관계는 단지 악성 루머일 뿐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그녀도 어느 부분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어 소문의 진상은 코마네치 자신만이 아는 비밀이 되었다.
이즈음 허울좋은 국민영웅으로 비참하게 살고 있던 코마네치의 삶을 한번 더 힘들게 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녀의 스승인 벨라 카롤리가 차우셰스쿠 정권과 갈등을 빚다가 결국 미국으로 망명해버린 것이다. 이 망명의 여파는 코마네치에게도 여지없이 미쳤다. 벨라 카롤리의 망명 이후 코마네치는 다시는 외국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핍박과 감시도더욱 강도가 심해졌다. 그녀에게는 하루하루가 감옥이고 지옥이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차우셰스쿠 정권에 소모만 당하고 사는 자신의 삶을 되찾겠다는 의지로 스물 여덟 나이에 그녀는 망명을 결심한다. 1989년 11월 추운 겨울밤 코마네치는 루마니아 출신의 미국 시민권자였던 콘스탄틴 패니의 도움으로 얼어붙은 벌판을 몇 날 며칠을 헤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국경수비병의 총알을 맞을 수도 있고 겨울 들판에서 얼어 죽을 지도 모르는 목숨을 건 위험한 망명길이었다.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권이 혁명으로 무너지기 불과 20여일 전의 일이었다.
미국 망명에 성공한 코마네치가JFK 공항에 도착해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다.
여권도 없이 루마니아를 탈출했지만 ‘나디아 코마네치’라는 이름은 그 어떤 여권이나 비자보다 강력했다. 그녀의 망명수속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 미국 대사관은 그녀가 망명의사를 밝히자마자 두 시간 만에 미국으로 가는 팬항공의 1등석을 마련해주었다. 코마네치가 미국의 JFK 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는 죽음을 불사하고 독재 정권을 뛰쳐나온 왕년의 체조요정을 보기 위한 인파로 붐볐다. 그러나 그녀가 카메라 앞에 나타나자 코마네치에 대한 동정과 호의는 삽시간에 적의와 경멸로 뒤바뀌고 말았다. 카메라 앞에 나선 그녀의 복장과 화장은 너무천박했으며,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탓에 인터뷰는 무성의하고 무뚝뚝했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망명을 도와준 콘스탄틴 패니가 아이 넷을 둔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이 약점잡기 좋아하는 옐로 저널리즘의 훌륭한 먹잇감이 되었다.
애초 코마네치의 망명을 도운 콘스탄틴 패니의 의도는 100% 순수하지 않았다. 그는 코마네치를 미국으로 빼내와 그녀를 돈벌이 삼을 계획을 가진 사람이었다. 콘스탄틴 패니는 실제로 코마네치를 독점하기 위해 그녀가 선수시절 알던 미국 지인들의 연락처도 전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자유를 찾아 이런 저런 것을 따질 새 없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콘스탄틴 패니의 도움을 받은 코마네치의 명성은 치명적 스캔들 앞에 무너졌다. 그녀는 콘스탄틴 패니가 잡아오는 싸구려 행사에 천박한 화장을 하고 나가야 했으며 그때마다 서툰 영어 때문에 면박을 당하고 오해를 샀다. 그녀에게 동정적이었던 일부 언론도 그녀를 외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엄격한 통제사회에 살던 코마네치에게 갑자기 찾아온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새로운 고통이 되었다. 그녀는 결국 콘스탄틴 패니와도 결별하고 캐나다에서 칩거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남편 버트 코너와 함께 한 최근의 나디아 코마네치
그녀에게 뻗은 구원의 손길의 주인공은 그 자신도 체조선수이며 올림픽 금메달 3관왕인 버트 코너였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부터 세계대회 때마다 간간히 만나 얼굴을 익혀온 사이였다. 버트 코너는 코마네치를 개인적으로 알기 전부터 그녀의 체조선수로서의 업적에 깊이 감명받고 존경해왔다고 한다
버트 코너는 은퇴 후 자신이 하고 있는 스포츠 관련 사업에 코마네치가 동참해줄 것을 제안했다. 미국 사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그녀를 이용해왔던 사람들과 달리 버트 코너는 동등하고 정당한 사업파트너로 그녀를 존중했다. 둘 사이에 애정도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마네치와 버트 코너 두 사람 다 서두르지 않았다. 망명 후 사람들로 인해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은 코마네치는 자신의 사랑에 조심스러웠고 버트 코너는 그녀의 그런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리고 4년간의 기다림 끝에 1996년, 마침내 나디아 코마네치는 버트 코너와 루마니아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현재 코마네치는 버트 코너와 함께 오클라호마에서 체조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스포츠언론계와 모델계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더불어 그녀는 세계적인 자선사업을 통해 불우한 사람들을 돕고 있다. 2008년 6월에는 우리나라에서 체조 갈라쇼를 총연출 하기도 하였다. 코마네치의 인생은 현재 진행형이다. 1976년 몬트리올의 영광, 14세의 코마네치를 인정하고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긴 세월을 보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코마네치는 여전히 14세의 체조요정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40대 후반의 코마네치에게는 14세의 자신도, 현재의 자신도 소중하다.
니다아 코마네치가 미국으로 망명하기 훨씬 전인 1983년에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나디아(Nadia)>(감독 알랜 쿠크)가 미국에서 제작되었다. 영화는 어린 시절의 혹독한 훈련, 사춘기 시절의 방황,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마침내 한 사람의 체조선수로 거듭나는 성장에 대해 다루고 있다. 코마네치의 회고에 따르면 영화 속에서 그녀가음독자살하는 장면은 영화적 재미를 위한 허구라고 한다.
<미래의 금메달리스트에게> 는 나디아 코마네치가 직접 쓴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이다. 금메달리스트를 꿈꾸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최근까지 자신의 삶을 비교적 담담하고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화려해 보이기만 하는 금메달리스트의 삶 이면에 그녀가 겪은 인생의 굴곡들이 체조선수 나다아 코마네치를 넘어 인간 나디아 코마네치를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