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저무는 한해] 아들딸에게 보내는 부모의 편지
글 : 孔柄淏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글 : 權五勇 SK 브랜드관리부문 부문장 글 : 金文洙 경기도 지사 글 : 白喜英 여성가족부 장관 글 : 李在五 특임장관 글 : 崔球植 한나라당 국회의원 글 : 崔然惠 한국철도대학 총장 글 : 洪準杓 한나라당 국회의원
인생에서 대충 넘어가는 법은 없다
孔柄淏 ⊙ 1960년생. 고려대 경제학과 졸업. 미국 라이스대학 경제학 박사. ⊙ 한국경제연구원 산업연구실장, 자유기업센터 소장, 자유기업원 원장 역임. ⊙ 저서 : <공병호의 우문현답> <모바일혁명> <공병호의 내공> <공병호 미래인재의 조건> <10년 법칙> <공병호의 10년 후의 세계> <공병호의 자기경영 노트> 등.
민수, 현수에게.
왼쪽부터 둘째 아들 현수, 필자, 큰 아들 민수.
성공의 절반은 죽음의 위기에서 나왔고, 실패의 절반은 성공의 향수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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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五勇
올해 초 너희 사촌오빠가 낯선 휴대폰 하나를 쓰고 있더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대만의 ‘HTC’ 제품이더라. 아빠 탓(?)에 SK만 쓰는 우리 가족 사이에 이단아가 나타난 게지.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대만 스마트폰인데 삼성이나 애플보다 싸고 품질이 좋아요”라고 하더구나. HTC라…. 그땐 처음 들어보는 제품이었어. 그래서 이리저리 뒤져봤더니 나만 모르고 있었지, 보통 회사가 아니더구나. 지난해에만 5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올해는 상반기에만 5조8300억원으로 이미 지난해 수준을 넘어섰단다. 1997년에 설립된 회사인데 말이다. 어떻게 이런 승승장구가 가능했을까. 이 회사 최고경영자의 경영관이 가슴에 와 닿는구나. “사업은 협력이다. 겸손은 위대한 가치를 갖고 있다.”
‘숙이고, 숙이고, 또 숙여’ 고객을 위하며 시장을 찾은 결과였다. HTC의 승승장구 비결은 바로 ‘겸손’이었더구나. 너희 사촌오빠 덕에 아빠는 한 신생기업의 위대한 철학을 알게 됐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데, 사람뿐 아니라 회사도 마찬가지더구나. 겸손은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게 한다. 지난봄 아빠가 마라톤을 완주했었지. 그때 마지막 300m를 남겨두고 아빠는 한 열 명쯤 제치고 골인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안되더라. 건방진 생각이었지. 그렇다고 처지지도 않았다. 42.195km를 뛰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지만, 옆에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서로에게 힘이 돼주더라. 마라톤은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었다. 서로 아껴주고 배려해야 완주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더구나. 그러고 보니 마라톤 첫 출전 전날 너희와 한 ‘파이팅’ 구호, 스타디움에 들어설 때 너희의 열광과 박수. 이런 배려와 아낌없는 성원 없이 어찌 아빠가 완주의 기쁨을 누렸겠니.
마라톤 경기장에서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둘째딸, 큰딸, 필자, 아내.
한국인은 위대하다 아끼고 배려해 준다고 자신의 노력을 멈출 수는 없지. 자료를 보니 1954년까지 육상계에선 인간이 1마일(약 1.6km)을 4분 안에 뛰는 것은 불가능으로 여겼단다. 그런데 한 영국 선수가 1954년에 이 기록을 깼다. 3분59초04. 1마일을 4등분해 4분의 1마일을 1분 안에 뛰는 연습을 반복해 기적을 일으켰단다. 그런데 더 큰 기적은 그 이후에 일어났지. 2년간 무려 300명의 선수가 4분 벽을 넘어섰어. 수천 년의 금기가 깨진 게지.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인간이 달리기에 가졌던 마음속의 가설이 깨지면서 새로운 도전이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얼마 전 오은선씨가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해 큰 이슈가 됐지. 후에 논란이 되긴 했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세계에서 20여 명이 그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4명이 한국인이란 거야. 한국 사람이 세계에서 제일 많다. 그런데 알다시피 한국에는 2000m가 넘는 산이 하나도 없지. 사하라 사막에서 250km를 5박6일간 달리는 사하라 레이스라고 있어. 지옥의 레이스라 불릴 만큼 힘든 코스다. 세계에서 100여 명 남짓 참가하는데 한국에선 10명 정도가 참가해. 역시 제일 많다. 그런데 한국엔 단 한 평의 사막도 없지. 17세 이하 세계 1위에 오른 여자 축구선수들이 한국에서는 1450명에 불과해. 독일엔 105만명이나 있다고 하는데. 1등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이 가능한 일이겠니. 믿음 없이 자기 몸을 불살라 그리도 힘든 훈련을 이겨낼 수 있겠니.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서로 경쟁하며 노력해 내일의 나를 만들어 간단다. 믿음은 노력의 기본이고 흘린 땀만큼 정직한 보상이 돌아온다. 이 법칙이야말로 아직 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증거다. 노력은 실패와 같이 온다. 빌 게이츠(Gates)나 스티브 잡스(Jobs)를 탄생시킨 실리콘밸리는 승자의 요람이 아니라 패자의 무덤이다. 그럼에도 그곳이 아름다운 이유는 패자의 긍정으로 미래를 그리고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역사적 성공의 절반은 죽을지 모른다는 위기에서 나왔고 역사적 실패의 절반은 찬란한 성공의 향수에서 나왔다.
아인슈타인은 인생에서 실패를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새로운 시도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다. 에디슨은 1000번 실수한 것이 아니라 실패할 수 있는 1000가지 방법을 알아냈다고 얘기했다.
1+1=11, 10-1=0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를 이룬다”고 했다. 화엄경의 가르침이다. 두려워 말자.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도전하자꾸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방식대로 열심히 노력하면 우리는 각자 다른 사람이 된다. 다르다는 점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싸움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함께 어울리면 삶의 원동력이 되고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겸손하고 배려하면 나는 너고 너는 내가 된다. 네가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이 당신도 없다.
아이들아 밤이 깊었구나. 현실의 세계는 1+1=2고, 10-1=9가 된다. 그러나 아빠는 1+1=11이요 10-1=0이 될 수도 있다고 믿고 있다. 공동체의 힘이지. 열정으로 뭉친 너와 내가 스스로 겸손하고 서로에게 배려하는 공동체의 모습이다. 그 꿈을 꾸며 이 가을에 편지 속에서 너희를 만났다. 잘 자라.
네 삶이 꽉 채워져서 행복하기를…
金文洙 ⊙ 1951년생.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 서울노동운동연합 지도위원, 전노협 지도위원, 민중당 노동위원장, 14~17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기획위원장ㆍ공천심사위원장 역임. 現 경기도 지사.
사랑하는 딸 동주에게.
동주야! 안녕!
요즈음 주로 뭘 하고 지내니? 아빠가 너무 관심 많이 가지는 것도 부담스럽지? 그래도 아빠, 엄마는 늘 네 생각뿐이란다. 왜냐고? 너도 자식을 길러보기 전에는 아빠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옛날 부모님께서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너를 키우면서 생각해 보니 “자식이 속 썩이는 게 가장 힘들다”는 말씀 아니었을까 싶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는 말, 잘 알지? 자식은 부모의 품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부모는 자식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가지.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잖니? 그런데 사실 나는 부모님 속을 많이 썩여드렸지. 내가 스물다섯 살 때 어머님 돌아가시고, 스물일곱 살 때 아버님 돌아가셨으니, 지금 네 나이에는 부모님 다 돌아가셨지.
부모는 자식 걱정, 자식은 부모 걱정, 서로가 서로를 애틋하게 걱정하고 미안해하는 관계가 부모자식 관계 아닐까 생각되네.
딸 동주의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장난감 자동차의 기억 네가 한참 아빠를 찾을 나이에 나는 2년6개월 동안 감옥에 있었지. 23년 전, 동주가 여섯 살 때. 내가 감옥에서 처음 너에게 쓴 편지를 보면 지금도 난 너에게 미안한 생각을 지울 수 없구나.
<동주야 잘 있었나? 엄마도 안녕하십니까? 아빠는 동주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쓴다. 아빠는 동주가 편지를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빠가 바보라서 우리 동주가 글씨를 잘 읽는 줄 모른 게 아니라, 아빠와 동주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는데, 그동안 동주가 아주 많이 크고, 공부도 많이 해서 아빠 편지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을 모르고 있었단다. 그동안에 아빠가 동주한테 편지 한 번도 못한 것은 미안하다. 동주가 잘 봐주셔요. 지금 아빠는 아빠 방 책상 위에 동주 사진 4장을 펴놓고 보고 있다. 서점에서 찍은 것이 2장, 올해 봄에 진달래 활짝 핀 길가에서 찍은 것도 있다. 지금은 춥지만, 곧 봄이 오고, 진달래 피기 전에 아빠는 공부 그만하고 동주한테로 갈 것이다. 동주야 튼튼하게 잘 있어라. 안녕
1987.11.26. 아빠가.>
답답한 감옥에 갇혀 있던 시절, 나의 유일한 희망이자 기쁨은 너와 엄마를 보는 것이었다. 엄마와 함께 면회를 와서 만날 때면, 우리는 서로 서먹하기도 했지. 쇠창살 너머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서 아이들이 뛰어 노는 모습이 자그맣게 보일 때마다 그리움이 북받치곤 했었다. 너도 저 아이들처럼 잘 뛰어 노는지…. 잠깐의 면회가 끝나고 헤어질 때면 나는 이별의 아픔과 또 한편으로는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어린 딸이 철창 너머에 죄수복을 입은 아비를 보는 것이 정서 형성에 나쁘지나 않을까? 혹 교육에 문제가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접견실의 높은 창틀 너머로 잠깐 얼굴 보고 가는 것이 어린 동주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어린이는 어른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닐 텐데 나를 위해 동주를 데려오지 말라고 엄마한테 부탁하기도 했단다. 내가 감옥으로 면회 왔을 때, 과자봉지 속에 들어 있던 손가락보다 더 작은 플라스틱 장난감 자동차 한 대를 너에게 건네주었지. 동주 네가 25년도 더 지난 어느 날 그 장난감 자동차를 아빠에게 내밀었을 때, 나보다 더 속이 깊은 네가 애처로워 가슴이 찡했다.
古典을 많이 읽어라 동주야! 이제 너도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나에게 늘 아이로만 보이는 것은 내가 너의 아빠이기 때문이지. 아빠는 늘 너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 동주가 어릴 적, 쫓기고 구속되는 일이 많아 아빠 노릇을 못했는데 기특하게도 이렇게 밝고 맑게 잘 커 주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엄마와 나는 수원에서, 너는 부천에서 떨어져 사는데다가 내가 바빠서 자주 만나지도 못하니 미안하기만 하구나. 그래도 씩씩하게 생활 잘하고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도전하는 너의 모습이 대견스럽다. 동주야말로 우리 집의 희망이다. 아빠에게 읽어보고 평가해 달라고 보낸 너의 글을 보았다. 점수를 매기자면 95점은 되겠다.
첫째, 네 글을 보니 분량이 상당하더구나. 글은 부지런하지 않으면 못쓴다. 부지런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미덕이다. 특히 글을 쓰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게으른 글은 성의가 없고, 남을 감동시킬 수가 없지. 구석구석을 상세하게 묘사하려면, 살피는 번거로움, 글 쓰는 번거로움을 감당할 만큼 부지런해야겠지?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라고, 한번 부지런하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다. 옛날 우리 시골집 사랑채에 걸려 있던 현판 글이다. 너의 할아버지께서 가장 중시하시던 말씀이다. 또 네 글을 보면 너의 생각과 객관적인 관찰내용이 잘 교감하고 있다. 어느 한쪽만으로 치우치면 안 되지. 객관적인 사실만 쓴다면, 그건 사진이나 자료집과 다를 바가 없고, 자기 느낌만 적는다면, 방안에서 쓴 글과 다름없겠지. 무슨 일이든 잘 해내려면 먼저 100점을 받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발원(發願)이라고 하지. 기독교에서는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논어>(論語)에서도 ‘십유오이지우학’(十有五而志于學), 즉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고 했다. 한마디로 뜻이 있어야지. 자포자기 하지 않고, 자중자애(自重自愛) 하는 마음이 소중하다. 둘째, 고전(古典)을 많이 읽기 바란다. 고전이란, 성경(聖經), 불경(佛經), 사서삼경(四書三經) 등을 말한다. 2000년 이상 변함없이 빛을 발하고 있는 말씀을 읽고, 새기며, 실천해야지. 셋째, 깊이 생각해야 한다. 명상, 묵상, 다상량(多商量·많이 생각하는 것), 기도가 중요하다. 넷째, 많이 써 봐야 한다. 다작(多作)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생활 가운데 늘 메모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메모하는 습관이 정말 중요하단다. 아빠가 늘 말하듯이 “천재의 기억보다, 바보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
인생은 그리 길지 않다 동주야! 나는 네가 무엇보다도 시행착오(試行錯誤)를 적게 겪었으면 한다. 인생은 그리 길지 않으니까 말이다. 누구나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안고 인생을 살아간다. 어려운 일이 닥친다고 탄식할 필요도, 절망할 필요도 없다. 어려움에 부딪힐수록 더욱 힘을 내고, 지혜를 모으고, 더욱 겸손하면서도, 더욱 당당히 역경(逆境)에 맞서 이기겠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아빠가 살아온 삶도 한번 살펴봐 주면 좋겠다. 나는 감옥에 갔다 왔기 때문에 더욱 강해지고, 더욱 지혜로워졌다고 생각한다. 가장 낮은 곳으로 갔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운명은 역시 인간을 단련시킬 수도 있고, 좌절시킬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운명의 도전 앞에 어떻게 응전(應戰)하느냐이다. 동주야! 시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너는 알지? 아빠는 네 삶이 꽉 채워져서 행복하기를 바란다. 엄마 아빠는 무조건 동주가 최고다. 사랑해! 안녕!!⊙
일·가정 양립이 가능하기를 바라며
白喜英 ⊙ 1950년생. 서울대 식품영양학과 재학 중 도미, 미시시피 여대 식품영양학과 졸업. 하버드대 보건대학원 영양학 박사. ⊙ 숙명여대 식품영양학과 조교수, 서울대 생활과학대학 부학장, 대한가정학회장, 한국영양학회장,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 국제영양학회 이사 역임
엄마가 대학원생일 때 태어난 아들, 시간강사 시절에 태어난 딸. 어느덧 너희가 성장하여 이제 ‘혼기’에 해당하는 나이가 되었구나. 엄마는 가슴 뿌듯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너희 남매가 그동안 이렇게 잘 성장해 준 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처럼 느껴져 감사하기만 하다. 되돌아보면 그동안 엄마가 하는 일에 대해 실은 잘 알지 못하면서도 잘 아는 것으로 확신하고 추진했던 경우도 적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너희를 키우고 공부시키는 일도 마찬가지란다. 다시 할 수만 있다면, 무엇보다도 너희에게 좀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기울이고 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너희가 반려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리고 ‘분가’해 나간다는 것은 아직은 엄마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구나. 그러나 그 일이 머지않아 일어나기를 또한 내심 기다리고 있단다. 너희 결혼을 기다리며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시간을 되돌아보면, 언제나 바쁘게 직장을 다니느라 너희의 어려움과 고민을 이해하고 살펴주는 살뜰한 엄마 노릇을 하지 못한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엄마들이 겪는 어려움을 나 역시 고스란히 겪어온 셈이지. 하지만 앞으로 너희 세대는 일과 가정의 양립이 남녀 모두에게 그다지 어렵지 않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아쉬움을 달래 본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결혼과 아이 낳아 기르는 일을 인생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로 여겨왔었지.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과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에 대해 과거와는 생각이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어른들이 바쁘고 힘들기만 할 뿐 여유라고는 좀처럼 없는 삶을 사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너희를 낳아 키우면서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행복하고 기쁜 일은 없었단다. 엄마는 대학생 시절에 학생회장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다가 좌절되어 유학길에 올라 학위과정을 마치고 여성과학자가 되었단다. 그 후 오랫동안 대학교수를 하다가 공직자가 된 엄마의 경력을 보고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하는 삶을 살아왔다고들 한다. 또한 대학에서 교수를 하다가 이제는 또 고위공직자로서 일하는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이루어낸 강한 여성으로 보는 이들도 있단다.
너희가 태어나기 전까지 엄마의 생활이나 생각은 극도로 ‘일’ 중심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 어떤 일을 해야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을까? 등등…. 학창시절 친구들과 비교적 잘 사귀었고 특히 대학교에서 학생회장을 하면서 동료 학생들과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학생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항상 나의 장래나 일 혹은 내가 원하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중심으로 생각했단다. 너희 아빠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었지. 그런데 이러한 엄마에게 너희가 차례로 태어나면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는 계기가 주어졌단다. 아예 세상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1991년 유럽 여행 중 두 자녀와 함께
너희를 통해 이웃과 서로 돕는 것의 소중함을 알았다 엄마가 처음 임신했을 때는 박사논문을 쓰는 시기였는데 너무 입덧이 심해 매우 힘들었단다. 양쪽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도 옆에서 돌봐주거나 조언해 주는 사람 없이 첫 아이를 임신하게 되어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먹으면 토하기 일쑤였고,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몰려와 수업이나 회의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다행히 학위과정에 필요한 과목들은 모두 수료한 후였고, 연구원 중에 임신한 사람이 있어 내 사정을 잘 이해해 주었단다. 큰 배를 안고 다니는 엄마에게 여러 가지 경험담도 들려주고 자기가 입었던 임부복도 빌려준 이웃도 있었다. 이처럼 주위에서 어렵고 힘든 내 사정을 알고 배려해 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엄마도 가능한 한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구나. 내가 어려울 때 사정을 이해해 주는 이웃들의 작은 배려가 얼마나 고마운지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지. 그 후에 너희가 유치원과 학교에 다닐 때에도 이웃이나 다른 학부모들에게서 도움도 받고 협력도 하면서 서로 배려하고 소통하는 삶을 배우게 되었다. 실제로는 내 생활이 바빠서 과연 얼마나 실천하면서 살아왔는지는 의문이다만. 다만 엄마는 영양학자로서 열심히 연구하는 일도 이웃을 돕는 길이라고 생각해 왔단다. 어느 책에서 영양학을 “인간을 사랑하는 과학”이라고 표현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먹는다는 것은 인간들에게 가장 근본적이고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이나 몸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이런 즐거움을 느낄 수 없겠지. 영양학자는 이 즐거움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주기 위해 연구하고 실천하는 과학자라고 자부한다.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사랑과 배려가 좋은 영양학자가 되는 기본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과학 선진국의 영양학을 익히되 어디까지나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영양의 문제가 무엇인가에 초점을 두어 연구하고 처방하려고 노력해 왔다. 단순히 직업으로서의 영양학, 외국이론의 소개, 실험을 위한 실험이 아니라, 우리 한국인들의 영양문제를 찾아내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단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주변 이웃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늘 유지하려고 노력했단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너희 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주위 사람들과의 교감과 소통을 통해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라 믿는다.
너희를 통해 행복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너희를 차례로 낳았을 때도 그랬지만, 엄마 아빠가 교수로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음에도 바쁜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바빠졌다는 것이 좀 더 사실에 가깝다. 그에 병행하여 너희는 엄마 아빠보다는 돌봐주시는 아주머니들과 보내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질 수밖에 없었고. 퇴근길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시장에 들러 너희 옷이나 먹을 것을 사 가지고 들어가자, 현관문 앞으로 뛰어나와 매달리는 너희가 바로 엄마의 기쁨과 행복이었고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어린 너희를 두고 피치 못하게 한 달간이나 출장을 가야만 했는데, 돌아와 보니 둘 다 감기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는 어찌나 속이 상하던지 울음까지 나오더구나. 그런가 하면 다음 날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돌봐주시는 아주머니가 갑자기 나가셔서 밤새 여기저기 부탁해 오실 분을 찾아야만 했었지. 너희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다가 길을 잃어 버렸다가 친절한 분을 만나 돌아오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천식이 심해 기침하느라 잘 자지 못하는 너희를 두고 출근해야 했을 때, 돌봐주시던 할머니가 너희 신문을 자꾸 버린다고 화를 낼 때, 그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그 할머니 편을 드느라 어쩔 수 없이 너희를 야단쳐야만 했을 때…, 어린 너희를 잘 키우겠다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대로만 할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열이 나는 너희를 맡겨두고 나가야만 했던 때의 안타까움이란. 그러나 몇 번을 뒤돌아보더라도 그동안 너희를 키우면서 느꼈던 행복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알게 해준 너희가 정말 고맙다. 일·가정 양립이 어렵지 않은 사회를 위하여 엄마의 세대는 20대 중후반이 되면 결혼을 하고 결혼하면 아이들은 당연히 낳는다고 생각했었다. 결혼과 출산은 자신의 행복한 미래 설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단다. 엄마도 26세에 결혼했는데 어른들께서는 좀 늦었다고 걱정들을 하셨지. 그 후 공부하느라 5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않자 주위에서는 걱정을 하셨었어. 요즈음 너희 또래의 젊은이들이 결혼과 출산을 미루거나 아예 하기를 꺼린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얼마 전까지 젊은이들에게 꿈과 미래였던 결혼과 출산이 왜 너희에게는 미루고 싶거나 심지어 포기하고 싶은 일이 된 것일까? 이것은 아마도 기성세대의 삶이 너희에게 결코 쉽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엄마도 일하는 엄마로서의 힘든 삶을 살았다만, 지금 우리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란다. 젊은 부부들이 함께 일하면서 함께 가정생활을 꾸려가는 이른바 ‘일·가정 양립’이 가능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엄마가 지금 일하고 있는 여성가족부도 이러한 사회가 앞당겨 실현되도록 하기 위한 정책을 펴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을 봐주는 보육시설을 확충하고, 여러 가지 ‘돌봄 서비스’를 확대하기 위한 정책들을 개발하고, 무엇보다도 직장에서 근무하는 시간과 장소를 조절할 수 있는 ‘유연근무제’를 확산시키는 데 노력하고 있는 중이란다. 이러한 제도들이 점차 확산되면 너희 세대 젊은이들은 결혼하고 자녀를 갖는 일이 엄마세대에 비하면 훨씬 쉬워질 것으로 믿는다. 부부가 함께 직장을 갖고 함께 가사 일을 분담하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일이 엄마 시대에 비해 훨씬 쉬워지기를 기대한다.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이른바 ‘가족친화적인 사회’를 만들어 너희는 보다 행복한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도록 엄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하마.
‘出所해서야 알았구나. 네가 그렇게 피아노를 치고 싶었다는 걸…’
李在五 ⊙ 1945년생.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고려대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 ⊙ 민중당 사무총장, 국회의원(15~18대), 한나라당 원내총무, 한나라당 사무총장ㆍ원내대표ㆍ최고위원, 국민권익위원장. ⊙ 저서 : <함박웃음> <백의에 흙을 묻히고 종군하라> <물길따라 가는 자전거 여행> <긴 터널 푸른 하늘> 등.
아들에게! 민호야, 네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한 지도 벌써 6개월이 되어가는구나.
18대 총선을 앞두고 네 친구가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어학연수를 간 지 3개월 만에 아버지 선거를 도우려고 귀국했다가, 아버지가 낙선하자 다시 미국으로 가는 것을 포기했지. 그때 아버지는 무척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가 돈이 있어서 어학(語學)연수를 간 것도 아니고 네 친구 집에 있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학연수를 하려고 했는데 그것마저 중단되고, 그것이 네 외국생활의 처음이자 끝이 될 줄 아버지는 몰랐다. 지금에 와서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말을 전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그 후 18대 총선에 낙선한 아버지가 홀로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대학원에 연구원 겸 객원교수로 있을 때 나는 네가 아버지와 함께 워싱턴에 있으면서 아버지가 다니는 대학에서 어학연수도 하고 미국생활을 체험할 것을 권유했지. 그때 너의 그 단호한 태도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너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지. “아버지, 서울에 있는 ‘썬’이라는 외국계 벤처회사에 인턴으로 합격했습니다. 졸업 후 진로를 생각해서라도 지금 워싱턴에 있기보다 서울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순간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들아!
시간이 조금 흘러서 지금은 회사원이 되었지만 아버지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네가 태어나서 겨우 걸음을 걸을 때 나는 다시 감옥에 갔지. 네 번째 감옥에 갔다 나와서 다섯 번째 감옥에 갔을 때 겨우 너는 세 살인가 되었지.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서울구치소에 면회 와서 한쪽 손은 엄마 팔을 잡고, 한쪽 손가락으로 면회대를 똑똑 두드렸지. 나중에 아버지가 출소(出所)해서 너의 어머니에게 그때 손짓의 의미를 물었단다. 네 어머니는 “다른 아이들은 피아노를 치는데 집에 피아노도 없고, 아니 놓을 자리도 없고, 친구 따라 음악학원에 가면 다른 애들은 피아노를 치는데 자기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온다면서 피아노를 사달라고 졸랐는데 그때는 끼니를 걱정할 때인데, 엄두가 나야지. 민호가 그때부터 손가락 놀림이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구나. 그 후 내가 출소했을 때 내 제자들이 찾아와서 “선생님 출소 기념으로 선물을 제자들이 하고 싶은데 무엇이든지 부탁하십시오. 우리도 이제 다들 살 만합니다”라고 했지. 나는 염치없이 “민호가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했단다. 마침 삼익피아노 회사에 다니는 제자가 조그만 중고(中古)피아노 한 대를 마련해 주었지. 그때, 좋아하던 네 모습이 지금도 선하구나.
그리고 그 후 많은 세월 아버지는 정치인이 되어서 한 번도 너와 마주앉아 이야기 나눌 기회가 없었다. 네가 무엇을 하는지 눈여겨볼 겨를도 없는 무심한 아버지였지. 그러나 너는 친구 관계도 좋고 좁은 집에 네 친구들과 와서 잠을 자고 갈 때는 집이 너무 좁구나 생각을 할 정도였지.
아들 민호와 함께 지리산 천왕봉에서.
회사에 충성해라 아들 민호와 함께 지리산 천왕봉에서. 사랑하는 민호야! 이제 너는 군대도 갔다 오고, 취직도 하고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 가끔 술을 먹고 밤늦게 들어와서 네 어머니랑 말다툼을 하고, 어떤 때는 핸드폰이랑 지갑을 몽땅 잃을 정도로 술에 취해서 들어올 때도 나는 그것이 네가 사회생활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아. 이제 너는 철없는 청년이 아니다. 네가 근무하는 직장을 위해서 네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 사람이 어떤 일을 이루려고 하면 그것이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사회정의(正義)에 반하지 않으면 자기 회사에 전부를 바쳐야 한다. 신입사원이 회사를 보는 눈은 충성(忠誠)이다. 어려운 경쟁을 뚫고 들어간 회사가 사회에서 신뢰받는 직장이 되려면, 그 직장 구성원이 그 회사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단다. 자기가 다니는 회사를 그 회사 직원이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소비자들에게 자기 회사 제품을 사달라고 할 수 있겠느냐. 회사는 또 하나의 공동체(共同體)다. 월급만 기다리고, 월급 액수만 세고 있는 회사원만 있으면 그 회사도, 그 회사에 근무하는 개인도 모두 불행한 것이다. 네가 다니는 회사가 어떠하든 네가 선택한 회사가 아니냐. 최선을 다해라. 젊었을 때는 어딘가에 전력(全力)을 다할 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우선 직장이란다. 너는 너의 회사의 상사(上司)들에게 그들의 사회적 경험을 배워라. 그리고 동료들과 따뜻하게 지내고, 어떤 비판도 애정을 갖고 해야 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그리고 너는 가정을 생각해라. 네 두 누이는 결혼을 해서 나갔고 집에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너 민호 이렇게 셋만 있다. 아들이 아무리 커도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까지 걱정이 된다. 아버지도 퇴근이 늦는데 아버지가 집에 갔어도 네가 들어오지 않으면, 그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는 불안하단다. 습관은 처음부터 잘 들여야 한다. 늦으면 언제까지 들어간다고 반드시 전화해야 한다. 그것은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구성원의 의무이다. 아버지가 너무 자잘한 것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생활의 근본이다. 너는 지금 가정, 직장, 나라라는 세 개의 틀 안에서 너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현실에 얽매여 있지만, 그리고 지극히 막연하지만 미래에 대한 꿈, 희망을 잃지 마라.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 네 곁에 있는 것도 아니고, 너는 또 우리 집의 외아들이다. 먼 훗날 네 인생을 되돌아볼 때가 있을 것이다. 지나가는 것은 잠깐이고, 미래는 아득한 것 같지만 미래라는 것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기다림이 있는 것이다. 아들아, 오늘 저녁에 일찍 오너라. 언제 식구들 다 모여 밥 한번 먹자꾸나. 사랑한다. 아들아.
사람은 시련을 통해 단련되는 법이다
崔球植 ⊙ 1960년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영국 뉴캐슬대 대학원 정치학과 수학. ⊙ 17·18대 국회의원,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대우, 한나라당 원내부대표,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 저서 : <신식구식 행진곡>.
사랑하는 내 아들아.
수능(修能)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청명한 하늘 아래 선선한 가을바람도 부는데 우리 아들 얼마나 놀고 싶을까. 친구들은 대학 캠퍼스 생활을 즐기다가 이제는 또 군대 간다고 하겠구나. 우리 아들도 내년에는 대학생이 돼서 친구들처럼 멋진 캠퍼스 낭만도 즐겨보고, 멋진 여자친구도 만나고 늦지 않게 군대도 가야할 텐데 말이다. 우리 아들은 소위 말하는 삼수생. 재수(再修)할 때는 재수생이라서 힘들었고, 삼수할 때는 삼수생이라서 얼마나 힘이 드느냐. 이제는 수험생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3년 동안 수험생 아빠는 그리 힘들지 않았지만, 수험생 엄마는 참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국회의원 아내 노릇 하랴, 수험생 엄마 하랴, 고생한 엄마를 위해서라도 꼭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그 결과가 어떠하든 아빠는 아들의 선택에 대해서 절대 지지를 보낼 것을 약속한단다. 우리 덩치 좋은 아들을 보면서 참으로 뿌듯해 하는 것이 있단다. 내가 늘 두 아들을 자랑할 때 우리 수종이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우리 수종이는 힘이 참 좋다’는 것이다. 커다란 샌드백을 집에 걸어두고는 넘치는 힘을 조절하는 튼튼한 아들을 보면서 흐뭇해했다. ‘나는 약한 체력으로 덩치 큰 놈들과 맞서 참으로 고달프게 살아왔는데 우리 아들은 힘이 좋으니 뭐든 하긴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체력이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3 수능 치르는 기간을 지켜보면서 체력 좋은 아들에게 시간을 좀 더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력이 좋으니 잘 버틸 테고, 시간이 지날수록 공부의 방법을 터득하고 잡념에서 벗어나는 것 같더구나. 언젠가 너의 좋은 체력은 어떤 식으로든 너의 목표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부모가 욕심을 부리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내가 못한 것까지 자식이 이뤄주기를 바라는 부모도 많다.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다. 하지만 내가 우리 아들에게 부리고 싶은 욕심은 하나밖에 없다. ‘원하는 것을 하라’는 것이다. 당장의 시험성적과 그 성적에 맞춰 어떤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인생의 목표를 향해 건강하게 나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단다. 내 가난한 아버지는 내게 재수의 기회를 주셨다. ‘가난한’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피부에 와 닿을지 모르겠다. 너도 알다시피 과거에 많은 사람이 가난했다. 그 가난한 사람 가운데서도 가난한 집이었으니 설명이 좀 됐을까 모르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가난한 아버지도 내게 한 번의 기회를 주셨으니, 나는 너에게 한 번 이상의 기회를 주는 것은 당연하다. 너도 너의 아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아버지가 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왼쪽부터 아내 강선자, 첫째 지호, 둘째 수종.
내년은 멋진 가을 하늘을 맘껏 즐길 수 있기를 벌써 스물한 살인 우리 아들, 늘 품 안의 자식이라고 생각했는데, 건장한 청년이 되었구나. 너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네가 네 살 되던 해에 1년 동안 영국에서 생활했었지. 그전까지는 기자라는 직업이 그토록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지 모른 채, 일에만 몰두했단다. 너도 읽었겠지만 내가 쓴 책에 ‘둘째 아들을 품에 안아주려 해도 도무지 아빠에게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참 죽겠더군요’, ‘영국 생활이 없었더라면 저는 가족에게 버림받고 있다는 그 무서운 사실조차 모르는 채 세월만 보냈을 것이고, 그런 상태로 아이들은 성장했을 것이고, 아이들과 점점 멀어졌을 것 아닙니까’, 지금도 그 시간이 우리에게 없었다고 생각한다면 아찔하단다. 이제는 건장한 청년이 된 두 아들이 있어 이 아빠는 너무나 행복하고 든든하다.
아들아. 국회의원 아들로서 힘든 일도 많다는 것을 안단다. 선거 때마다 가슴 졸여야 하고 언론에 나온 아빠의 발언으로 우리 아들의 마음에 상처가 된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느냐. 2008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천 발표에서 떨어졌던 날이 기억나는구나. 낙천 소식을 듣고 울면서 너는 아빠에게 “아빠 같은 국회의원이 왜 떨어져요” “아빠는 훌륭하게 잘하셨잖아요”라고 말했다. 아빠는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법이다”고 말했던 것 같구나. 그날 이후 선거 끝날 때까지가 우리 가족이 겪었던 가장 힘든 시기였다. 특히 고3이 되자마자 당한 아들이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고3 아들 혼자 남겨 놓고 짧은 편지 한 장 써 아들 책상 위에 두고 집을 나서면서 아빠는 참으로 힘들었다. ‘아빠는 지금 진주에 내려간단다. 진주에 가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겠지만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는 쪽이 될 것이다. 아들아. 우리 가족은 지금 일종의 시련이자 기회를 맞은 것 같구나. 아빠도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하면 훌륭한 정치인으로 성장할 것이고 수종이도 이번 기회를 잘 넘기고 시련을 극복하면 멋진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깊게 생각하고 굳게 마음먹어라. 아빠와 엄마의 가장 큰 걱정은 고3인 수종이를 혼자 두는 것이다. 너무 마음이 아프구나. 수종아. 내 아들은 튼튼하고 용감하니 잘 버틸 것으로 믿는다. 늘 사랑한다. 잘 챙겨 먹어라.’ 네가 새벽까지 인터넷을 뒤지며 아빠의 선거 관련 기사를 챙겼다는 말을 뒤에 듣고는 참으로 미안했다.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우리 아들이 크게 힘이 되어주어 아빠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단다. 힘든 일은 언제나 찾아올 수 있고, 그 힘든 일들을 극복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아들도 제법 극복의 힘을 배웠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람은 시련을 통해 단련되는 법이다. 아빠는 그랬다. 내 아들도 그럴 것으로 믿는다. 이제 수험생으로서는 ‘마지막 가을이다’라고 생각하고 남은 시간 열심히 할 것이라 믿는다. 아마도 재수, 삼수의 경험은 우리 아들이 살아가는 삶에 큰 의미가 될 것이다. 사람의 경험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아들이 원하는 학교에 꼭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사랑하는 우리 아들 파이팅! 내년엔 멋진 가을 하늘을 맘껏 즐길 수 있기를 바라며…. 아빠가.
사랑하는 민지의 천생연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崔然惠 ⊙ 1956년생. 서울대 독문과, 同 대학원 석사 졸업. 독일만하임대 경영과 석ㆍ박사. ⊙ 한국철도대학 운수경영학과 교수, 한국철도공사 부사장 역임. 세계철도대학교협의회, 도시철도협회 회장. 한국철도협회 부회장.
나의 큰딸 민지! 큰딸은 재산 밑천이라는 말도 있지만, 너는 내게 단순한 딸 이상의 특별한 존재란다.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엄마, 아빠 따라 유학길에 나서 유모차에 실려 대학을 함께 다니며 낯선 환경에 적응했으니, 엄마의 절친이자, 동반자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너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속을 썩이거나, 말썽을 부린 적이 없고, 떼를 쓰거나 성질을 부린 적도 없는 천사표 딸이었어. 유학 마치고 귀국해서 엄마가 열심히 사회생활을 잘하게 된 것도 모두 다 우리 큰딸 덕분이야. 무엇보다 만일 네가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더라면 우리 식구는 다시 독일로 돌아갔을 테니 말이야. (편집자 注 : 독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민지 양은 서울대 독문과를 수석졸업했으며, 현재 주한(駐韓) 독일상공회의소에 근무 중이다.) 독일에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 아홉 살 차이 나는 동생을 키울 수 있었던 것도 민지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거야. 그때 진 마음의 빚 때문에라도 ‘민지가 결혼해서 아기 낳으면 엄마가 키워줄게’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데, 민지는 아직 결혼하겠다는 말이 없네!
왼쪽부터 큰딸 강민지, 필자, 둘째딸 현지.
인생 마라톤에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준 딸 너희에게 가끔 들려주었듯이 엄마는 아빠와 연애결혼을 했단다. 캠퍼스 커플로 몇 년을 함께 강의 듣고 공부하다 결혼에 이르게 되었어. 상대의 조건을 따져본 적이 없어, 학교에서 보던 모습 이외에는 별로 아는 것도 없고, 결혼 후 생길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결혼했으니, 요즘의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용감무쌍했다는 생각도 들어. 그래도 훌륭한 인품과 예의범절을 갖추고 집안 인심도 좋은 아빠를 만나 한평생 잘살고 있으니 엄마는 참으로 운이 좋은 것 같아. 역시 천생연분이라는 특별한 인연은 따로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물론 이런 말들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할 만큼 요즘 세태는 많이 달라졌지. 사귀기 전에 조건부터 따지고, 또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것 같아. 여성들이 30세가 넘어 결혼하는 것이 대세이고, 결혼은 더 이상 필수가 아닌 선택사항, 게다가 결혼 자체를 기피하는 현상도 심각한 수준이라지! 여성들의 자아실현 욕구가 커지고, 또 여전히 여성에게 불리한 가족제도나 육아 문제 등 결혼에 따를 수 있는 희생을 감내하는 게 두렵기 때문일 거야. 엄마는 그래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 더 낭만적이라 좋은 거 같다고 하면, 민지가 세대차이 난다고 할까?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한다고 하지만 어쨌든 엄마는 민지가 빨리 결혼했으면 좋겠어. 엄마도 나이가 들수록 가정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구나. 기쁜 일이 있을 때도 그렇지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가족만큼 큰 힘이 되어주는 게 없는 거 같아. 그래서 엄마는 결혼하고 너와 네 동생을 낳은 것이 내가 지금까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매일매일의 날씨가 다른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서도 같은 날은 단 하루도 없지. 셀 수 없이 많은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우여곡절을 거치게 되는데, 혼자보다는 둘이 함께하는 것 자체가 인생의 보람이란 걸 느낄 때가 많단다. 그리고 가정과 직장을 양립하는 게 어렵다고들 하지만, 엄마는 가정에서 성공한 여성은 사회생활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 엄마가 유학할 때, 사람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하는 게 대단하다고 했지만, 엄마는 네가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공부를 잘할 수 있었어. 어린 민지를 위해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하고, 먹기 싫더라도 잘 챙겨 먹어야 하고,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다 보니 내 생활도 건강해진 거지. 마치 기나긴 마라톤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페이스 조절이 가장 중요하듯이, 인생이란 마라톤에서 너는 나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주었단다. 너는 인생을 순리대로 살아가는 법도 가르쳐주었고, 인생이 언제나 내 마음대로 되지만은 않는다는 것도 알게 해주었어. 상대를 배려하고, 인내하는 법, 자신의 소중한 것을 함께 나누는 법을 알게 해주었어. 한마디로 내가 결혼하여 너와 현지를 얻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믿어. 1+1이 2보다 훨씬 커질 수 있는 것이 바로 가족이라고 믿고 있어.
엄마는 ‘우리 민지의 신랑감으로 어떤 사람이 좋겠다’라고 미리 정해 놓은 것은 없어. 무엇보다 너의 선택을 믿기 때문이야. 다만 우리 민지가 아직 인생의 반려자를 정하지 않았으니, 몇 가지 조언을 해주고 싶어. 우리 딸은 신중하고 책임감 강한 성격 그대로 사람을 사귀는 데도 조심스럽기만 하지.
목숨 걸고 함께 ‘거사’를 도모할 배필 만났으면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지만, 그중에서도 결혼은 가장 무거운 책임감이 따르는 선택이야. 쉽게 무를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선택이며,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지. 오죽하면 바다에 나가려면 한 번 기도하고, 전쟁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을 앞두고는 세 번 기도하라는 말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무겁게만 생각하지 않기 바라.
어떠한 이성적 잣대보다 독일 속담에 있듯이 함께 말을 훔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일단 합격이라고 생각해. 옛날 서양에서 말을 훔치다 들키면 죽임을 당했으니, 함께 말을 훔친다는 의미는 목숨 걸고 함께 ‘거사’를 도모할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이니까 말이야. 게다가 유머와 여유가 있는 청년이면 좋겠어. 살면서 수많은 난관을 헤쳐나가야 하는데, 힘든 순간마저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삶이 행복해질 거야. 그리고 훌륭한 부모님, 재력이나 좋은 학벌 같은 조건보다도 사람의 됨됨이와 잠재력이 중요해. 부모가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재물은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고, 지금 우등생이라고 해서 평생 우등생이라는 보장이 없거든. 누구든 현재의 모습이 평생 가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세월에 따라 외모가 변하듯이, 실력, 가치관이나 인격도 변하기 마련이야. 한 사람은 발전해 나가는데, 다른 한 사람은 처음의 모습에 머물러 있다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겠지. 둘이 함께 서로를 갈고 닦으며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단다.
그리고 결혼은 두 사람의 만남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배우자의 가족에 대한 책임도 지게 되는 거야.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가정을 지키고, 가문을 일궈내는 것은 언제나 여성들의 몫이었어. 신사임당도 그렇고, 서양에서도 훌륭한 가문을 보면 남자들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 가족을 지켜내고, 나라를 지켜낸 건 여성들이잖아. 나는 민지가 그런 책임도 기꺼이 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 현대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정말 무거운 거 같아. 단순한 맞벌이 이상으로 자기계발과 가사, 자녀 양육에 이르기까지 일인다역의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하지. 엄마도 아이 키우면서, 공부하고 직장 다니고 어떻게 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은데, 수퍼우먼의 욕심을 버리면 된다고 생각해. 어릴 때부터 자기 일은 자기 힘으로 하는 걸 당연시하고, 오히려 바쁜 엄마를 도와주며 씩씩하게 자라준 너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 사랑하는 딸 민지, 너는 항상 현명한 선택을 하였고, 무엇보다 그 선택이 올바르게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야. 민지, 네가 독일에서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치고 귀국해서 중학교를 배정받기 위해 치렀던 첫 시험이 생각나니? 한국어 실력이 턱없이 부족해서 주어진 시간에 시험문제를 다 읽지도 못해, 선생님께서 아예 채점을 포기했었잖아. 독일서 전교 1등에 학생대표를 도맡아 하던 네가 마음고생 하는 게 가엾어서 엄마가 독일로 돌아갈까 물었을 때, 민지가 했던 대답을 엄마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엄마, 돌아가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지금 돌아간다면 나는 영영 한국사람이 될 수 없겠지요, 내가 한국사람으로 살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조금만 더 노력해 볼게요.” 그리고 1학년이 끝날 무렵에는 성적도 성적이지만 친구도 많이 사귀고 한국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해 엄마를 감동시켰지. 사랑하는 천사표 딸! 지금 네가 열정을 쏟고 있는 공부도 사회생활도 중요하지만,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선택하는 일도 무엇보다 중요하단다. 엄마는 결혼적령기가 된 우리 민지의 천생연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몹시 궁금하구나. 너무 신중하지만 말고, 너와 함께 미래를 개척해 나갈 천생연분의 짝을 찾아, 네가 그동안 엄마 아빠에게 선물했던 것보다 더 큰 행복을 찾기 바라.
세상은 모함과 질시로 가득 찬 혼돈의 場이지만…
洪準杓 ⊙ 1954년생. 고려대 행정학과 졸업. ⊙ 15~18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원내대표, 제17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 대한태권도협회 회장 등 역임. 現 한나라당 최고위원. ⊙ 저서 : <홍검사, 당신 지금 실수하는거요> <이 시대는 그렇게 흘러가는가> <변방> 등.
사랑하는 내 아들 정석, 정현에게. 강보에 싸여 잠자는 너희를 안고 마냥 즐거워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 졸업, 취업까지 해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딛는 너희를 보면서 아버지는 참으로 기쁘고 장하기 그지없다. 아버지가 살던 세상과는 달리 물질적 풍요함 속에서 곱게 자란 너희에게 아버지는 과연 무엇을 너희 가슴에 새겨주고 떠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왔다. 아버지가 사는 세상과는 달리 지구가 하나가 되는 큰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너희에게 아버지는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다. ‘내 것’을 좀 더 양보하고 남을 배려하고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온 의미가 무엇인지 항상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것이란다. 아버지는 그 판단하에 검사 시절이나 정치인 시절을 거치면서 늘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아버지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너희 인생에 미칠 영향을 생각해 왔다. 내 자식들에게는 당당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단다.
왼쪽부터 둘째 아들 정현, 필자, 아내, 큰아들 정석.
인간적, 세속적 성공 모두 이루길 ‘홍정석, 홍정현의 아버지는 바른 사람이고 그 사람의 자식이면 믿을 만하다’는 세상 사람들의 평가만 받을 수 있다면 내 자식들에게 이 아버지는 큰 유산을 남기고 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내 아들 정석, 정현아. 세상은 모함과 질시로 가득 찬 혼돈의 장(場)이다. 그러나 바른길을 가다 보면 일시적인 모함과 질시는 반드시 이길 수가 있다. 남이 너희를 모함하고 질시한다고 해서 같이 대들면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아버지는 내 두 아들이 지금처럼 정직하고 바른 생활을 하여 세상에 이(利)로운 사람으로 살아갔으면 한다. 그러나 너희는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과 달리 고난과 역경이 없는 순탄한 인생을 살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위기를 기회로 삼는 현명한 처신으로 인간적인 성공도 이루고 세속적인 성공도 이루기를 빈다. 한국의 회사생활은 스트레스의 연속이고 참기 어려운 순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힘든 순간을 보내고 나면 그것은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도 있다. 사랑하는 내 아들 정석이, 정현이는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바른 사람으로 성공을 할 것으로 아버지는 믿는다. 자랑스러운 내 두 아들의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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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