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알아차리는 공부를 닦는 방법
세 번째는 알아차리는 공부를 닦는 방법입니다.
satipatthāna(사띠빳타나)는 알아차림을 앞세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는 말로 하면 주의 깊게 알아차리는 것이죠.
사띠 빠타나(satipatthāna)의 뜻
미얀마에 있는 한국 수행자들은 빨리어 원어를 그대로 사용해‘
사띠를 챙긴다’고 표현하고 있죠. 여기서 주의 깊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띠 빳타나(satipatthāna)가 지니고 있는 뜻입니다.
사띠 빳타나는 sati와 patthāna가 합해져 생긴 말입니다.
사띠는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알아차림’으로 옮기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빳타나의 뜻입니다. 보통 아비담마에서는 이 빳타나의 뜻을 두 가지로 옮기는데 하나는‘출발, 시작, 개시, 근원’이라는 뜻이고 또 다른 하나는‘돌봄, 시중듦, 확립’의 뜻입니다.
그러나 보통 빳타나의 뜻은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장소, 확립하다, 앞장서다’가 그것이죠.
이 세 가지 뜻에 따라 사띠빳타나를 옮겨 보면
첫째는‘사띠를 두는 네 가지 장소’로, 둘째는‘사띠의 확립’으로, 셋째는‘사띠가 앞장서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첫 번째‘장소’의 뜻을 취해‘念處’를 사띠를 두는 네 가지 장소로 옮기고 있죠.
두 번째 사띠의 확립이라는 것은‘신, 수, 심, 법’이라는 네 가지 사띠의 대상에 ‘강하게 밀착한다’는 뜻에서‘확립’이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그러나 빳타나는 마지막 세 번째 뜻인‘앞장서다’로 보는 것이 가장 알맞은 것입니다.‘앞장선다’는 것은 뒤따르는 것이 있다는 것이겠죠?
이것은 뒤에 알아차리는 공부를 하는 방법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바른 힘씀과 지혜가 함께 일을 하기 때문에 앞장선다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뒤에 자세히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에 지금 다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앞으로는‘사띠빳타나’의 뜻을‘사띠가 앞장서다’라는 뜻
으로 잘 알아두어야 합니다.
이 경을 공부하는데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주의 깊게 알아차린다.’는 말에서 ‘무엇을 알아차려야 하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부분을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했죠.
비구들이여, 여기에서 비구는 몸에서 몸을 계속해서 지켜보면서
열심히 노력하고 지혜를 갖추고 알아차림을 구족하여 세상에 대한
욕심과 분노를 없애면서 살아간다.
알아차리는 공부를 할 때 꼭 주의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몸에서 몸을 계속 지켜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에 대한 욕심과 성냄을 ‘힘씀과 지혜, 알아차림’으로 없애는 것입니다.
신념처는 빨리어 kāyānūpassanā satipatthāna(까야누빠사나 사띠빳타나)를 옮긴 말입니다. 여기서 kāyānūpassanā(까야누빠사나)는 몸을 계속 지켜본다는 뜻이고 satipatthāna(사띠빳타나)는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알아차려야 하는 까닭입니다.
왜 알아차려야 할까요?
그것은 세상에 대한 욕심과 분노를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신념처는 몸을 계속 살피면서 몸에 대해서 일어나는 욕심과 분노를 없애기 위해 알아차림과 힘씀과 지혜를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수념처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느낌에 대해서 느낌을 계속 살피면서 그 느낌에 대해서 일어나는 욕심과 분노를 없애기 위하여 알아차림과 힘씀과 지혜를 쓰면서 닦는 것이죠.
심념처와 법념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낱말들이 있습니다. 바로 욕심과 성냄, 그리고 세상이라는 낱말이죠.
먼저 욕심과 성냄이 지닌 뜻을 알아볼까요?
‘욕심’이라는 말은 간단하게 ‘마음으로 어떤 것을 간절히 바라는 상태’로 말할 수 있죠. ‘성냄’이라는 것은 ‘화’와 같은 뜻으로 마음으로 만족스럽지 않거나 화를 내는 것입니다. 결국 욕심과 성냄은 마음이 간절히 바라는 것과 싫어하고 화를 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욕심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람이 소유한 대상을 갖고 싶어하는 마음이고 성냄은 그것을 파괴하거나 없애고 싶은 마음입니다.
욕심과 성냄은 사람을 평화롭게 하지 못하고 이로움을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없애야 할 것들이겠죠?
알아차리는 공부는 이 욕심과 성냄을 없애는 것이 가장 큰 목적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림 하나로는 그 욕심과 성냄을 없앨 수 없습니다.
알아차림과 더불어 힘씀과 지혜가 뒤따라야 하죠.
그렇다면 알아차림의 뒤를 따르는 ‘힘씀과 지혜’는 어떤 일을 할까요?
없애는 일을 하겠죠. 욕심과 성냄이라고 하는 마음이 갈망하고 화를 내는 것을 없애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욕심과 성냄은 어디에서 일어나는 것일까요? 바로 세상에 대해 일어나는 욕심과 성냄입니다.
그럼 여기서 ‘세상’이라는 낱말이 지닌 바른 뜻을 살펴볼까요?
세상이란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세상은 빨리어 Loka(로까)를 옮긴 말인데 보통 생겨났다가 없어지기 때문에 Loka라고 정의합니다.
붓다가 말하는 ‘세상’은 단순히 바깥에 있는 공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움에 물든 무더기, 곧 오취온을 뜻합니다.
이 ‘오취온’이 어디에서 생길까요?
‘몸, 느낌, 마음, 법’이 네 군데 중 어느 한 곳에서 생기겠죠.
그래서
더러움에 물든 몸을 몸의 세상,
더러움에 물든 느낌을 느낌의 세상,
더러움에 물든 마음을 마음의 세상,
더러움에 물든 법을 법의 세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몸의 세상’이라고 하는 더러움에 물든 몸이 어떤 것인가 한 번 살펴볼까요?
‘몸’이라는 것은 몸을 이루는 각 부분들과 그 각 부분들의 움직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죠.
오취온에 해당하는 더러움에 물든 몸과 오취온에 해당하지 않는 몸입니다.
오취온에 해당하는 몸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기’에 관한 가르침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십이연기에는 몸과 관련된 갈래가 여러 개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취온에 해당하는 몸입니다.
오취온에 해당하는 몸과 마찬가지로 오취온에 해당하는 느낌과 마음, 법도 십이연기와 관련된 느낌, 마음, 법으로 알아야 하겠죠.
다시 한번 정리해볼까요?
‘몸’에서 몸을 계속 관찰하면서 더러움에 물든 몸에 대해 일어나는 욕심과 성냄을 알아차림과 힘씀과 지혜로서 없애면서 살아갑니다.
‘느낌’에서 느낌을 계속 관찰하면서 더러움에 물든 느낌에 대해 일어나는 욕심과 성냄을 알아차림과 힘씀과 지혜로서 없애면서 살아갑니다.
‘마음’에서 마음을 계속 관찰하면서 더러움에 물든 마음에 대해 일어나는 욕심과 성냄을 알아차림과 힘씀과 지혜로서 없애면서 살아갑니다.
‘법’에서 법을 계속 관찰하면서 더러움에 물든 법에 대해 일어나는 욕심과 성냄을 알아차림과 힘씀과 지혜로서 없애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네 가지 알아차리는 공부를 삶속에서 닦는 방법입니다.
알아차리는 공부를 할 때 알아차리는 대상인 ‘신, 수, 심, 법’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법에 대한 일관성 검토)
앞서 오온에 대해서 공부했었죠? 이것을 네 가지
알아차림의 대상과 연결 지어 복습해 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