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리) 이렇듯 슬피우니 흥보 마누라가 현처라 가장이 만류하니 흥보의 맞은 자리를 붙들고 속으로 느껴 울다가 내외간에 서로 결심하고 품을 팔아 보는데.
(잦은 중몰이) 밤이면은 짚신 삼고 비가 오면 명석짜고 날이 들면 품팔제 어물 장사 길짐 지고, 산전야전 쟁기질과, 둑 고치고, 못자리 모 심고, 보리 베고 보리 타작, 김을 매고 나락 타작, 대장간에 풀무질과, 원산근산 시초 베기, 장작 패고 지엽 따기, 초상나면 부고 전 코, 출상 할 제 명정 들고, 신행 길은 이불 지고, 장가길은 함을 지고, 물가에 큰 물 나면 삵 받고 월천하고 춘하추동 사시절을 쉴 날이 전혀 없이 품을 판다.
시초: 땔나무로 쓰는 풀
(잦은몰이) 흥보 마누라 품을 판다. 빨래 푸새와 다듬이질, 용정방아 칭이질, 밀 갈 때는 키질과 소대상에 제물허고, 혼대사에 예물허고, 국 잘 끓이고, 밥 잘 짓고, 술 잘 빗고, 떡 잘하고, 적(炙) 잘 부치고 주야로 벌건마는 식구가 많아 놓으니 하루만 놀면 삼 사일씩 굶는구나.
용정(摏精)방아 칭이질: 곡식을 찧어 가루로 만드는 일 중 찧은 일을 이른듯 함
(아니리) 흥보 내외가 이렇게 벌건만은 살길이 망연하여 서로 붙들고 운것이 가난 타령이 되었던가 보더라.
(진양조) 가난이야, 가난이야. 원수 놈의 가난이야. 복이라 하는 것을 어찌하면 잘 타느냐? 북두칠성님이 점지를 하여 주고 산신 제왕님이 집자리에 떨어 뜨릴제 명과 수복을 마련하느냐. 승금상수(乘金相水) 혈토인목(穴土印木) 묘(墓)쓰기에 달렸느냐. 적선행인(積善行仁) 은악양선(隱惡楊善)에 마음 쓰기에 맡겼느냐. 어이하며 잘 사느냐. 나는 세상에 생겨나서 불의행사를 아니허고 밤낮으로 벌어 들여도 가장은 부황나고 자식들은 아사지경이네 그려. 우리 양주 곤한 신세 일년 사철 헌 옷이라. 가장이 다 죽게 되니 내가 차라리 죽으리라. 치마끈을 풀어 잡고 목을 매어 죽기로 작정을 허니 흥보가 보고 기가 막혀, 아이고 여보 마누라. 다시는 내가 안 그러리다. 제발 덕분 우지를 마시오. 양주 서로 붙들고 울음을 운다.
승금상수: 혈토(穴土)의 좌향(坐向)
혈토인목: 혈토는 안관지(安棺地) 인목은 포혈(抱穴)의 부분
은악양선: 악한 행동은 감추어 주고 착한 행실은 널리 선전해 줌
(아니리) 이렇듯 울으니 초상난 집이 되었구나. 예부터 마음씨 고와 착한 일 많이하면 하늘도 무심치 않는 법이라. 그때 도승 하나가 흥보를 살릴 양으로 내려오는데
(엇몰이) 중 내려온다. 중 하나 내려온다. 저 중의 호사(豪奢) 보아라. 저 중의 치레보아라. 행색을 알 수 없구나. 연년(年年) 묵은 중, 헐디 헌 중, 다 떨어진 청올치 송낙은 이리 총총 저리 총총 헌 짚으로 구멍 막어, 수바같은 머리에다 엄지 장지 힘을 올려 흠뻑 눌러 쓰고, 노닥노닥 지은 장삼, 율무 염주 목에 걸고, 한 손에는 절로 굽은 철죽장 또 한손에는 다 깨어진 목탁을 들고, 동냥을 얻어서 어디에다 넣을런지 목기짝, 바랑들물 하나도 아니 들고, 촌중을 들어 와서, 개가 쿵쿵 짖고 보면 두 손 합장으로 나무아미타불. 사람이 말 모르면 허리를 굽실굽실 관세음보살. 이집 저집을 다 버리고 흥보 움막을 당도허여 울음 소리를 듣느라 여기 가 기웃 저기 가 기웃, 끼웃끼웃 자주 걸어 문전을 들어서며, 이 댁에 동냥 왔소.
호사: 지나칠 만큼 호화롭게 사치 함
청올치: 겉 껍질을 벗겨낸 칡덩굴의 속껍질로 노나 베등의 자료로 쓰임
송낙: 중들이 쓰는 모자의 일종
목기짝: 나무로 만든 한 벌의 그릇
(아니리) 흥보가 울다 깜짝 놀라 버선발로 쫓아나가 [여보시오, 대사님. 제 집이 가난하여 시주를 못하오니 다른 댁으로 가시지요] 저 중이 하는 말이 [예, 주시고 아니 주시는 것은 주인의 처분이니 그저 가려니와, 통곡이 웬일이시오?] 흥보가 하는 말이 [가세가 철빈하여 여러날 자식들을 굶겨 놓으니 가련한 부부 목숨 차마 자식들 굶어 죽는 걸 보지 못해 양주 서로 붙들고 먼저 죽기를 타투어 울었네다] 저 중이 듣고 [허허, 신세 가련하고, 부귀가 임자 없어 적선하면 오느니, 소승의 말을 믿고 뒤 따르시면 집 터 하나를 잡아 드리리다] 흥보 듣고 좋아라고 중의 뒤를 따라 가니 집터를 재혈 할 때 명당수법이 완연하다.
(진양조) 감계룡 간좌곤향 탐랑득거문파며 반월형 일자안에 문필봉 창고사가 좌우로 높았으니, 이 터에다가 집을 짓고, 안빈하고서 지내오면 가세가 속발하고, 자손영귀 부귀공명 만세유전 하오리다. 정간 입주 자리에다 말뚝 네 개를 꽂아 놓고서 한 두 걸음 나가더니 인혼불견 간곳이 없네. 흥보가 그제야 도승인 줄을 짐작허고, 살던 집을 헐어다가 그 자리에 집을 짓고 벌거벗고 텅 빈 배로 아니 죽고 살아 날제
(중중몰이) 정월 이월에 해빙허니 산수경개가 장히 좋다. 유색황금눈 꾀꼬리는 노래하고, 이화백설향에 나비는 앉어 춤을 춘다. 산량자치 우는 새는 너 노는 때를 만났구나. 귀촉도 촉도. 포곡은 운다만은 논이 있어야 농사짓지. 대승아 날지를 말어라. 누에가 있어야 뽕을 따지. 집은 방장 새려는데, 저 소쩍새는 삐웃삐웃 쌀 한 줌이 없는 것을 저 새소리는 솥 적다. 목이 저리 말랐으니 물을 줄까, 뻐꾹뻐꾹. 짐승 살해를 아니 허니 미륵이 벗이로다.
유색황금눈: 버들은 연한 황록색이요
이화백설향: 흰눈같은 배꽃의 향기
산량자치: 산꼴짝 다리 밑에 모인 꿩
포곡: 뻐꾹새
대승: 오디새과의 오디새 [퐁퐁 퐁퐁]하고 움
방장(方將): 바로 지금
미록(攗廘): 고라니와 사슴
(잦은몰이) 삼월동풍 방춘화시 비금주수가 즐긴다. 강남서 나오는 제비가 흥보 움막을 날아 드니 흥보가 보고 좋아라고, 얼씨구나 떳다, 저 제비야. 네가 어디를 찾아와. 소박한 세상 인심 부귀를 추세 커늘 주란화각을 다 버리고 적막한 요 내집을 찾아 주니 반가워라. 저 제비 거동봐라. 그래도 성조라고 처마 끝에 집을 짓고 웅비종자 힐지항지 알을 낳고 새끼를 까 자모 구구 즐긴다.
삼월동풍: 삼월에 부는 춘풍
방춘화시: 바야흐로 봄이 한창 화창한 때
비금주수: 날짐승과 길짐승
추세: 어떤 세력에 붙쫓아서 따름
성조: 집을 지킨다는 신령
웅비종자: 자웅이 서로 사이좋게 남
힐지항지: 새가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며 나는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