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축하할 일이 하나 있다. 우리 반 평균을 다 깎아먹은 전체꼴찌가 우리 반에서 나왔다! 천상재, 이리 나오렴."
"예? 예, 선생님."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간다. 가는 길에 들레를 힐끔 쳐다본다. 입을 막고 웃고 있다. 약
간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지만, 들레에게 미소를 선사해주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대 만족
이다.
반 아이들이 수군거린다. 뭐, 그럴 만도 하지. 그래도 이 학교에 전학오기 전까지는 전국에서 날렸
던 애였으니까. 난 그 애가 아니니 실망하지들 말라고. 또, 난 기억상실증에 걸렸거든.
수군거림도 잠시, 곧 박장대소가 터진다. 벽이 무너지듯 깔깔거리며 박수를 쳐댄다. 그런 아이들을
지긋이 째려봐 준다. 남자아이들은 모두 기죽어 금세 웃음소리가 멈춘다. 하지만 여자 애들은 내
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다.
신선한 타격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상고에 있을 때는 뒤에서 20등은 했는데, 여기서는 꼴등이라
니. 내 참 어이가 없어서 말이 다 안 나온다. 2등이라면 모를까, 꼴등은 너무 심했다. 내 찍기 실
력이 모자랐던 것일까.
그래도 남자란 자고로 모든 일에 당당해야만 한다. 선생님 앞에 나가 씨익 웃는다. 딱, 오른 손에
들려있던 막대기가 내 머리에 작렬한다. 별로 아프지는 않지만, 이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면 골로
가는 수가 있다. 매우 아프다는 표정을 짓고, 손으로 머리를 쓱쓱 문댄다.
"조회 끝나고, 교무실로 잠시 따라오세요, 천군."
"예, 선생님."
이런 개망신도 없을 것이다. 장차 대 남조선파의 지주가 될 이 몸인데, 이까짓 공부 하나에 망신
을 당해야된다니. 쿡쿡 거리는 남자 새끼들에게 다시 한 번 날카로운 시선을 보낸다.
지루해마지 않던 오전 수업이 끝이 나고, 드디어 그렇게도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종이
땡 치자마자 모든 아이들은 황소 때처럼 우르르 급식 실을 향해 몰려나갔다.
난 왠지 이 학교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손수 점심식사를 싸왔다. 하나
가 아닌, 두 개. 들레를 위해서 늘 한 개씩은 더 싸 갖고 다닌다.
오늘은 같이 점심을 먹을 수 있겠지, 라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려있었지만, 무심하게도 들레는 어
제와 같이 친구 손을 붙잡고 교실을 나간다. 오늘도 실패다. 끅, 언제쯤이나 들레는 이런 내 마음
을 알아줄까.
들레가 밖으로 나가고 몇 분 뒤, 한 무리의 인간들이 교실 안으로 들이닥친다. 내 눈이 찡그려지
는 것은 당연하다. 며칠 째 이 모양이다.
"형님! 저희들을 받아주십시오!"
"받아주십시오!"
오리와 그 무리들이다. 그때 그 불곰파 사건이 있은 후로 매일 같이 점심시간이 되면 이 지랄 궁
상들을 떤다.
"너네, 내 비밀 누설하면 알지? 다 죽여버릴 거다. 입구녕에 드라이기 쳐 넣고 침 말려서 죽여버
릴 거야. 거짓말 아녀. 난 진짜 한다면 하는 성격이거든."
"어디서 감히 그런 망발을 밖으로 토해내겠습니까, 형님."
"토해내겠습니까, 형님."
180도로 변하는 것도 모자라 540도로 변해버린 오리와 그 무리들. 나에게 깎듯이 대하는 게 그리
싫지만은 않다. 오히려 학교 생활이 더 편해진 듯 싶다.
"흠흠, 형님이란 말은 집어치우고, 그냥 예전처럼 상재라고 불러라. 그리고 옥동자!"
"네, 네. 형님… 아니, 상재야?"
얼굴 크기가 어깨너비와 맞먹는 일명 옥동자. 생긴 건 옛날 신석기 시대 때나 볼 수 있는 고인돌
처럼 생겨서, 형태는 요즘 인기 리에 방영중인 모TV의 옥동자와 무척이나 많이 닮았다. 그래도
옥동자보다는 얘가 더 낫다.
내 앞에 다가와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옥동자. 피식 미소지으며 주머니에서 천 원 짜리 한 장을
옥동자 손에 쥐어준다.
"아, 목 말리다. 가서 딸기우유나 하나 사와라."
"알았어, 상재야."
자기에게 무엇을 시킨 게 그리도 좋은지, 좌우로 입가가 찢어지게 벌어진다. 옥동자는 헐레벌떡
교실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뽕오하고, 영만이는 우리 반 애들 올 때까지 교실 좀 깨끗이 청소해놔라."
"아, 알았어."
내 말에 즉시 행동을 보이는 그들이다. 잽싸기도 하지. 이제 오리 한 명 남은 건가. 자기에게는 무
엇을 시킬 지, 두 눈에 기대감이 충만하다.
"오리 너는… 음, 시킬 게 없다. 그냥 가봐라."
"그, 그냥 가라고?"
내 말에 심히 당황한 오리다. 기쁘다고 빗자루를 쓸고 있는 놈들에게 부럽다는 시선을 보낸다. 그
리고는 내게 더욱 얼굴을 구기며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가, 같이 청소라도 하면 안될까, 상재야?"
"청소? 그럼 그렇게 하든가. 아, 씹. 밥에 먼지 들어가겠네. 야, 야! 먼지 안 나게 조심히 쓸어."
뽕오와 영만이와 동참한 오리는 먼지가 이쪽으로 올까, 조심스레 빗자루 질을 한다.
오늘도 또 혼자구나. 또, 혼자 먹어야돼. 이제는 밥을 혼자 먹는 게 많이 지겹다. 그렇다고 꼭 누
구와 같이 밥을 먹고 싶지는 않다. 한 명만 있으면 된다. 단 한 명만.
도시락을 까니 푸짐한 반찬이 그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내가 정성껏 만든 음식들이다. 들레에
게 먹여주기 위해 아줌마도 물리치고 손수 만든 음식들이다.
젓가락을 들어 천천히 밥을 집어 입에 구겨 넣는다. 밥은 이렇게 많은데, 또 나 혼자 다 먹어야된
다. 밥을 남기면 죄인이 되는 거지. 지금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는 하루에 굶어죽는 아이들이 몇
명인데, 음식을 남기면 그건 몹쓸 인간이라고 난 생각한다.
"야!"
"억! 우엑… 퉤퉤. 어떤 새끼야, 씨발."
갑자기 누군가 등을 후려갈기는 바람에 입안에 들어간 젓가락이 목구멍 근처까지 들어갔다 나왔
다. 먹었던 밥알을 바닥에 뱉어낸 후, 신성한 내 점심식사를 방해한 장본인이 누군지 뒤로 돌아본
다. 방긋 웃고 있는 한 예쁜 여자애가 서 있다.
"누구냐?"
"누, 누구냐? 너 정말 죽을래! 네 약혼녀 김지혜 양이시다! 어쩔래?"
"야, 약혼녀 김지혜? 네, 네가 무슨……."
"네, 네가 무슨? 이게!"
주먹으로 내 머리를 때린다. 누구이기에 내 머리를 때리는지, 참나 어이가 없네. 김지혜라? 김지
혜, 김지혜. 서, 설마 그 김지혜? 그렇다면 내 약혼녀가 맞기는 맞네.
두 눈을 부릅뜨고 날 내려다보는 게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마녀의 모습이다. 또 깻잎머리다. 깻잎
머리 소녀. 깻잎을 좋아하나 보다.
"여, 여기는 웬일이야?"
나도 모르게 말이 떨린다. 황당할 만도 하지. 두 손을 허리에 대고 씩씩거리는 모습이 가히 선녀
를 닮은 마녀라고 볼 수 있다. 치마는 쫙 줄여 가지고 엉덩이 굴곡이 훤히 다 드러난다. 그래도
몸매 하나는 예쁘네. 얼굴도 예뻤던가?
내 말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씨익 웃는 지혜. 탁, 또 한 번 머리에 주먹이 내려쳐진다. 이, 이런
망할! 어따 대고 손찌검이야!
"네 마누라 될 사람이 남편 만나러 오는데 그런 이유를 꼭 따져야돼?"
"아니죠."
마누라가 지 남편을 만나러 왔다는데, 꼭 그 이유를 밝힐 필요는 없지. 백이면 백 보고싶어서 온
것일 테니까. 아, 아니지. 지금 이 상황에 왜 이런 말이 나오는지.
"내가 왜 네 남편인데? 난 엄연히 쏠로야! 너 같은 마누라 둔 적 없어. 알아?"
"그럼 뭐 할 수 없네. 너네 할아버지한테 이르는 수밖에……."
그러면서 핸드폰을 꺼낸다. 쳇, 지가 우리 할아범을 어떻게 알아. 잘 나가는 척은. 핸드폰을 귀에
대고 방긋 웃는 모습이 여간 얄미운 게 아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뭐? 지 남편? 만난 것도 몇 번
안 되는데, 뭐가 어쩌고 저 째!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저 지혜예요. 기억하시죠? …글쎄 상재가…"
가만히 귀기울여 들어보니, 전화기 속 목소리 주인공이 아무래도 낯이 익다. 결국 난 그 목소리가
우리 할아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잽싸게 지혜 귀에 닿아있는 핸드폰을 닫아버린다. 아니, 닫
아버린 것도 모자라 아예 전원을 꺼버린다.
"너, 너, 너!"
"흥! 내 말이 구라 같았냐? 앞으로 잘해. 할아버지한테 이르기 전에!"
"이런 독한…. 어떻게 그 성질머리 더러운 할아범하고… 아니, 착한 우리 할아버지하고 친분이 있
는 거야?"
"그것까지 네가 알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와∼ 밥 많이 싸왔네? 일부러 나까지 생각해서 그런
거야? 나 점심 아직 인데, 잘 됐다! 상재야, 우리 빨리 밥 먹자."
쪽팔리게 남자가 할아버지라는 사람 때문에 여자한테 꿇리냐. 하지만 그 할아버지가 남조선파 짱
이라면 또 틀리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지혜가 들고 있는 수저와 젓가락. 들레에게 주려고 깨끗이 닦고, 그것도 모자라 먼지가 묻을까, 비
닐봉투 2개에 꽁꽁 묶어왔는데, 지금은 지혜의 손에 들려있다. 들레에게 주려고 싸온 밥과 반찬이
지혜의 입에 들어간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 아니야. 어서 먹어라."
"이거 너무 맛있다! 상재야, 이거 네가 만든 거야? 엄청 맛있다."
"어? 어……."
젓가락으로 밥알을 깨작거리며 조금씩 입에 집어넣는다. 왜 이렇게 허탈한지. 내 손으로 직접 만
든 점심을 오늘은 누군가가 먹어주고 있다. 고마워해야 하는데, 그런데 혼자 그 많은 밥을 다 먹
을 때보다 기분이 더 안 좋다. 들레 입에 들어가야 할, 들레 손에 들려져야 할, 들레의 미소를 보
고 있어야 할 나. 지금은 어느 낯선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야이 새끼들아, 먼지 날아오잖아!"
"머, 먼지? 미안해, 상재야. 우리 진짜로 열심히 할 수 있어!"
"에이 씨발. 밥 맛 다 떨어졌네."
젓가락을 탁, 밥그릇에 올려놓는다. 그 소리에 지혜는 화들짝 놀란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옥동자의 손에서 딸기우유를 낚아챈다.
교실을 나간다. 갑자기 왜 이런 것일까. 갑자기 기분이 왜 이렇게 변한 것일까.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지혜에게 미안해지는 건데, 그런데 난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을
수 없을 것 같다.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담배와 라이터를 서로 엇갈려 만진다.
옆으로 들레가 친구와 지나간다. 눈이 마주친다. 잠시뿐이다. 들레의 두 눈은 금세 내 시야에서 벗
어난다.
첫댓글 음~재밌네요!!!!!!!
미칠것만같아요 넘재밌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