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빙고는 냉장고 역할을 하는 인공적인 구조물이다. 현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냉장고는 얼음이나
냉기를 인공적으로 만드는 기계장치이지만 빙고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겨울에 채집해 두었던 얼음을
봄, 여름, 가을까지 녹지 않게 효과적으로 보관하는 냉동 창고이다. 사실 얼음을 보관하는 시설은 돌로
만든 석빙고만이 아니라 목재로 만든 목빙고도 있었다. 그러나 목빙고는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없고
구전으로만 전해오므로 여기서는 석빙고에 대해서만 설명하겠다.
석빙고는 외견상 고분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빙실이라는 공간이 주변 지반과 비교하여 절반은 지하에
있고 나머지 절반은 지상에 있는 구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순한 형태의 석빙고를 보고 이게
무슨 대단한 과학이 들어있느냐고 반문할 지 모른다. 단지 얼음을 저장하기만 하는 단순한 시설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막 지대인 이집트나 일부 중동 지역에서 한여름에 기계 시설 없이도 얼음을 만들어
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석빙고에 대해 더욱 평가 절하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석빙고의 우수성은 가정의 필수품이라는 냉장고의 예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많은
집에서 부모가 항상 하는 말은 냉장고를 열면 항상 문을 꼭 닫으라고 한다. 아무리 냉동고에 아이스크림이나
얼음을 꽉 채워 놓더라도 냉장고문이 조금만 열려 있다면 몇 시간 내에 모두 녹아버린다. 그런데 석빙고는
겨울에 얼음을 캐어 기계적인 장치 없이 다음해 가을까지 얼음을 저장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석빙고가 얼마나 우수한 작품인가를 알 수 있다.
석빙고는 중국의 『시경』에 능음(凌陰)이라 하여 '음을 저장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고 우리나라의
석빙고도 『삼국사기』에 기술되어 있을 정도로 오래된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노례왕(24∼57년) 때
이미 얼음 창고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도 지증왕 6년(505)에
‘시명소사장빙(始命所司藏氷)’이라는 기록이 있다. 지증왕이 얼음을 보관토록 명령하였다는 뜻이다.
고려 시대의 경우 『평양속지』에 의하면 평양의 석빙고는 내빙고, 외빙고로 나뉘어 내빙고는 사간도무사
(四間都務司)의 남쪽 언덕에, 외빙고는 십칠간육로문(十七問六路門) 밖에 있었다. 문종 3년(1049년)에는
매년 6월부터 8월 초까지 벼슬에서 물러난 공신들에게 3일에 두 차례씩, 좌 복시, 육부상서 등의 고급 관리들
에게는 일주일에 한 차례씩 얼음을 나누어주도록 제도화하였다.
하지만 신라나 고려 때 만든 빙고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경주 석빙고와 안동 석빙고, 영산 석빙고, 창녕 석빙고,
청도 석빙고, 현풍 석빙고도 모두 조선 시대 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조선 시대에는 태조 5년(1396년)에 둔지산 밑에 서빙고를 세우고 두모포에 동빙고를 세웠다. 서빙고는 지금의
서빙고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했지만, 동빙고동은 서빙고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일 뿐 빙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실제의 동빙고는 지금의 옥수동에 해당하는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 있었다.
빙고는 동빙고와 서빙고가 있었는데 예조의 속아문에서 관장하였고 광무 2년(1898년)에 양빙고가 폐지될 때까지
500년 가까이 운영되었다. 동빙고에는 얼음 1만244정(丁), 서빙고에 13만4,974정을 보관했으므로 서빙고가
동빙고보다 13배 이상의 얼음을 저장했다. 실제로 동빙고의 창고는 1동이었던 것에 비해 서빙고는 8동이었다.
궁궐 안에는 별도로 내빙고를 두어 궁궐의 얼음 수요를 맡았다. 얼음의 보관과 반출은 종6품인 빙고에서 관장했으며
제향에 올리는 얼음은 봉상시에서 맡았다. 동빙고는 음력 3월 1일부터 가을 상강(霜降)까지 왕실의 제사에 필요한
얼음을 공급했으며 서빙고의 얼음은 왕실과 고급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편 18세기 영·정조 시대 이후에는 물동량의 왕래가 많았던 한강변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생선 보관용 얼음을
공급하던 사빙고가 존재했었다. 조선 단종 2년(1454년)에 사헌부에서는 ‘국가의 빙고에서 저장하는 얼음에 한도가
있어 신하들에게 골고루 나눠줄 수 없으므로 정1품에서 종4품의 대부(大父) 이상과 각사(各司)에서 얼음을 보관할 수
있게 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얼음의 저장과 반출은 엄격히 규제됐다. 만약 얼음의 보관을 소홀히 하여 저장한 얼음이 녹아 없어지면 파면시키는 등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이제 석빙고의 구조를 보자. 빙고는 고을의 규모에 따라 크기가 정해지나 대부분 30평이 넘었고 규모가 적은 경우에도
10평이 넘었다. 현존하는 빙고의 빙실은 폭은 대개 4∼6미터, 길이는 폭의 2∼4배 정도이다. 빙고에 저장하는 얼음은
두께가 12센티미터 이상이 되어야만 했다.
빙고의 바닥은, 흙다짐이나 그 위에 넓은 돌을 깔아 놓았고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어 얼음이 녹아서 생긴 물이 자연적으로
배수되게 하였다. 빙고 구조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빙실 천장을 아치로 만든 것이다.
골격이 되는 아치의 틀을 먼저 만들고 그 사이를 장대석처럼 다듬는 판석을 치밀하게 축조해 천장을 완성시키는 방식인데
골격에 의지하고 그 위에 덧쌓아서 골격과 천장돌 사이에 요철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형식은 전체를 아치로 만든 구름다리나
성문들과는 달리 일정 간격으로 세우고 이를 구조재로 하여 그 사이를 석재로 쌓거나 판석을 얹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석빙고의 아치는 같은 크기의 돌을 아치로 쌓아 올려 무지개 형상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정상부에 다른 돌보다 조금 크기가
다른 석재를 꽂아 마감했는데 아치 종석이라 부른다. 석빙고에 사용된 석재는 화강석으로 규격은 대체로 0.5톤 정도이다.
또한 냉기에 의한 전열 면적과 공기 체적을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기 위해 천장에는 요철이 있었다. 아치 구조로 빙실을
만들면 기둥이 없으므로 얼음을 취급하는데 편리하다.
천장에는 빙실 규모에 따라 환기 구멍을 만들었다. 이러한 환기공은 봉토 밖으로 나오게 하여 그 위에 환기공보다 큰
개석을 얹어 빗물이나 직사광선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였다. 환기공은 대체로 30×30센티미터로 2∼3개가 일반적이다.
출입문은 특정한 규칙이 없이 보통 바깥 지반보다 낮은 위치에 설치하였다. 출입문의 크기도 얼음의 출납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크기로 출입구를 통한 열 손실이 최소화되도록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빙고 건축 때 철물과 회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철물은 석재와 석재 사이가 서로 분리되지 않도록 삽입하였고
회를 많이 사용한 것은 봉토 조성 때 진흙과 함께 혼합하여 외부에서 물이라든가 습기가 침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용도였다.
봉토에는 잔디를 심어 열의 손실을 막고 봉분이 수해에 의해 손상되지 않도록 하였다. 빙고 외곽으로는 담장을 설치하여
외기를 막았고 일반적으로 빙고 설치에 관련된 석비가 남아 있어 빙고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얼음의 채취와 보관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겨울이 춥지 않아 채취가 불가능하였고 때로는 보관상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결국 많은 얼음을 겨울에 채취하여 봄부터 사용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겨울에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실록에는 빙부(氷夫)가 동상에 걸리거나 물에 빠졌기 때문에 의원을 보내 치료케 하고 음식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얼음의 용도가 반드시 음식 저장 등의 실용적인 측면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얼음을 보관했다가 여름에 사용함으로
여름철에 극성하는 양기를 억제하여 자연의 조화를 회복시켜 보겠다는 동양철학적인 발상도 큰 몫을 했다. 그러므로
겨울이 춥지 않아 얼음이 얼지 않으면 동빙고의 북쪽에 있었던 사한단(司寒壇)에서 얼음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기한제
(祈寒祭)를 지냈다.
성종 17년(1488) 12월, 날씨가 따뜻해 얼음이 얼지 않자 홍문관에 명해 기한제를 지내게 했고 영조 45년(1769)
12월에는 기한제를 지낸 후 날씨가 추워져 얼음을 채취할 수 있었다고 제관이 상을 받기도 하였다.
성종 24년(1493)에는 군관들이 술을 마시고 얼음 저장하는 일을 아랫사람들에게 맡기는 바람에 얼음이 녹아 물이
창고 밖으로 새어나왔다. 이에 성종이 크게 노해 관원 전원을 파직시켰다. 이듬해에는 관원들이 정성 들여 얼음을
관리했기 때문에 연산군 1년(1495) 성종의 대상(大喪)과 명나라 사신의 접대에 쓰고도 가을까지 남아돌았다고 한다.
세종 5년(1423) 11월 장빙군에게 술 830병, 생선 1,650마리를 하사했고 세조 13년(1467) 11월에는 환관과 선전관을
동서빙고에 보내 군인 가운데 동상이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게 한 것을 보면 국가에서 빙고 제도에 각별한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