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論
수인
2018. 7. 31.
대학 다닐 때 미술이론 수업을 몇 개 들었는데, 어떤 교수 한 분의 지론이 “붓글씨는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저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뒷말을 기다렸는데 별다른 논거를 제시하지는 않아서 황당했던 적이 있다. 과연 무엇은 예술이고 무엇은 예술이 아닌가? 인터넷의 바다를 유영해서 잡아낸 여러 ‘예술의 정의’ 중에 그중 무난한 것이 “우리의 감각과 관련해서 행복감과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만들어지는 일체의 것들”이다. 붓글씨는 나의 감각에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쓸 때나 감상할 때 행복감을 준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곧 사물을 지각한다는 것이다. 지각의 도구는 눈과 귀와 코와 혀와 피부와 마음이다. 사람은 이렇게 몸과 마음에 구비된 도구로 바깥에 있는 물건들을 접촉하고 변형하는 데서 재미를 느낀다. 이것이 유희본능이고 넓은 의미에서는 예술이라는 것이 나의 예술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냐 아니냐를 논할 것이 아니라, ‘어떤’ 예술이냐를 말해야 할 것이다. 미의식이라는 건 너무나 자의적이고, 주관적이며,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미대 교수님이 “붓글씨는 질이 떨어지는 예술”이라고 말했다면 논란의 여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발언의 고유한 가치는 보존되었을 것이다.
나는 선배들의 화론(畵論)이나 서론(書論)을 조금 훔쳐본 적이 있지만,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이 글은 서론이라기보다는 내가 글씨를 보는 관점을 세 가지로 정리한 것이다.
1. 기세(氣勢)
글씨에는 힘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힘은 태권도 중단 지르기의 타격보다는 태극권의 발경(發勁)의 힘과 비슷하다. 태권도의 지르기는 파괴력이 마지막 순간에 집중되는 끊어치기를 중시하는데 발경은 전신의 에너지를 집중시켜 밀고나가는 기세를 가리킨다. 태극권의 늙은 고수가 손바닥으로 슬쩍 밀어도 젊은 사람들이 2~3m 밖으로 나가떨어진다. 글씨를 밀고 나가는 기세도 그와 같다. 그것을 옛사람은 감각적인 두 마디로 표현했다. “획은 송곳으로 모래를 긋듯이 하고, 점은 진흙에 도장을 찍듯이 하라”(如錐劃沙 如印印泥)는 것이다. 앞의 인(印) 자는 ‘도장’이라는 명사고 뒤의 인(印) 자는 ‘도장찍다’는 동사이다. 글씨는 획과 점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획을 그을 때나 점을 찍을 때나 응축된 힘이 늘 유지되어야 한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벼루에 먹을 갈 때는 누가 슬쩍 건드려도 놓칠 정도로 먹은 느슨하게 잡아야 하지만, 글씨 쓸 때 붓대만은 누가 잡아 뽑아도 빼앗기지 않을 정도로 꽉 잡아야 한다고 배웠다. 이 때의 힘은 한갓 악력이지만 이 악력을 통해 전신의 기운이 글씨의 힘으로 구현된다. 연필이나 볼펜 글씨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종이에 똑같은 압력을 가해도 손으로 필기구를 꽉 잡고 쓸 때와 느슨하게 잡고 쓸 때 글씨의 힘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기세인데, 내가 생각하는 ‘예술로서의 글씨’를 가능케 하는 첫 번째 요건이다.
2. 운필(運筆)
기세가 충만하다고 해도 그것을 일정한 방향으로 끌고가는 의념(意念)과 또 그것을 수행하는 근골의 움직임이 없으면 글씨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붓이 움직이고 멈춤을 반복하면서 剛柔(굳세고 부드러움), 强弱(강하고 약함), 直曲(곧고 굽음), 廣狹(넓고 좁음), 潤渴(젖고 마름) 등 생동하는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글씨의 미학이다. 즉 어떤 형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념이 발동하는데 따라 전신(특히 어깨와 팔)의 신경과 근육이 간단없이 호응하여 심신이 일체가 되어야 운필의 변화가 자재할 수 있다. 글씨를 쓰는 사람은 쓰고자 하는 글의 성격과 그에 대한 해석, 용도 등에 따라, 강약과 직곡 등 다양한 운용의 묘를 살리는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위에서 말한 강한 기세와 유연한 운필의 조화이다. 강하기만 하고 유연하지 못하면 생동감이 없고, 강함이 없는 유연함은 나약하다.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운필을 위한 마음의 요건은 허정(虛靜)이요, 몸의 요건은 이완(弛緩)이다. 마음에 잡념이 없고 평온하면 따라서 몸의 경직도 풀린다. 거꾸로 몸의 경직이 풀리면 마음도 허정한 상태에 쉬 이르게 된다. 선정(禪定)에 이르기 위해 좌선(坐禪)을 중시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런데 마음이나 몸이 경직되어서 기운이 소통하지 못하면 글씨를 그릴 수는 있다손 치더라도 쓸 수는 없다. 운필에 있어서 심신의 유연성이 예술로서의 글씨를 만드는 두 번째 조건이다.
3. 품격(品格)
위의 1번과 2번의 묘리를 체득한다면 누구나 서예(書藝), 또는 서도(書道)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소위 “영(永) 자 팔법(八法)”과 같은 서법(書法)은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수천 년 간 수많은 사람들이 글씨를 논하면서 암묵적으로 합의한 미학적 보편법칙 같은 것이라서 함부로 무시해선 안 되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보다 중요한 것이 글 쓰는 사람의 사람됨, 품격, 안목, 성품, 인격... 뭐 그런 것이다. 그것은 화론(畵論)에서 말하는 소위 문기(文氣), 즉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와는 좀 다르다. 품격은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나의 관점에서는 글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품격인데, 이것은 학식이나 지위, 권세, 금력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사회적 지위가 낮고 ‘없어 보이는’ 사람 중에도 고결한 인간이 있고, 그와 반대되는 사례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나는 실제로 '높은' 사람의 낮은 글씨를 많이 보아왔다. 기교적으로는 뛰어난 글씨가 천박한 경우도 다반사이고, 붓을 많이 잡아보지 않은 사람도 ‘큰’ 글씨를 쓰는 예가 왕왕 있다.
<사족>
솜씨는 볼 것이 없지만, 내가 글씨에 관심을 기울여온 것이 거의 40년이다. 그 세월 동안 나름대로 발달된 감(感)을 통해 글씨를 보는 안목이 조금 생겼고, 간혹 글씨를 통해 쓴 사람을 대충 읽을 수 있다. * 늦깍이 대학생 시절 지금은 타계한 仲兄과 신림동 어귀에서 함께 자취를 했었다. 하루는 중형이 같은 학교 교감 선생님의 서예 전시회를 갔다가 도록(圖錄)을 들고 왔다. 내가 잠시 도록의 글씨를 보고 나서 교감 선생님이 이러이러한 분이 아니냐고 물어보았다. 중형의 대답: "니가 그 양반을 어찌 그리 잘 아노?" 계란을 낳지는 못하지만 계란의 신선도와 영양가는 판별할 수 있는 (아마추어 화가였던 처칠의 항변)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품격(이 바로 글씨의 품격인데)이나 재능을 바꿀 수 있는가? 어려운 물음이 아닐 수 없다.
글씨의 재능 역시 공자가 말한 학자(혹은 군자)의 세 부류에 비견된다. 첫째는 생이지지(生而知之)로 타고난 재능이다. 둘째는 학이지지(學而知之)로 배워서 성취된 능력이다. 마지막으로 곤이지지(困而知之)는 애쓰고 힘들여서 알게 되는 수준이다. 셋 중에 어느 것이 제일 나은가? 우문(愚問)이다. 타고 난 능력만 믿고 까불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고, 어렵게 배워서 체득한 공부가 더 값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곤이부지(困而不知) -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경우다. 공자는 그런 경우를 염두에 뒀는지 모르지만, 불교의 비실체론적 관점에서는 어떤 것도 정해진 바가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다. 기쁘지 아니한가!
노파심에서 부연하자면, 서법(書法)이 덜 중요하다는 것이지 불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서법이란 예컨대, 카레이서가 되기 위해 운전기술을 익히는 거나, 무사가 되기 위해 검법의 기본을 익히는 것과 같다. 수천 년간 수많은 서예가들의 시행착오를 거쳐 다듬어진 범형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는 편이 편하고 효과적이다. 이렇게 해서 기본기가 탄탄해지면, 자가류의 창조적 변형이 가능해진다. 오해가 있을까 해서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