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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 >
김영우 . 정신과 의사
(하늘비님 긴 책을 ,,, 오래 전 타이핑 치심 )
결혼은 생명을 준비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경외와 엄숙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준비하고 받아야 할 생명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만족적인 결혼을 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어렵게 됩니다. 쾌락만을 위한 성은 말할 수 없는 공허감이 있습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양육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쾌락적인 성은 새로운 집착입니다.
자녀를 키울 때에도 지속적인 희생이 없으면 자기 집착으로 끝나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됩니다. 모든 것을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나의 옳은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불가피한 것입니다.
당신의 역할은 계속해서 이러한 자료들을 제공하되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외형들을 다듬는 것에 주력하고, 이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 기대를 하지말고 큰 변화가 없다고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인가 이러한 일을 위해서 자신이 애써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지 마십시오. 되면 되는 대로 안되면 안 되는 대로 놓아 두십시오.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 때 지치게 됩니다. 이 일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성공적으로 진행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참여해야 할 과정에 잠시 참여했다고 생각하십시오. 지켜보는 눈을 가지십시오.
사람은 자기 생애, 주어진 생의 의미와 목적대로 사는 것, 원래의 자기를 인식하는 것이 도라고 합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놀라운 지혜나 초능력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자기를 자기 모습대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도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 자기를 볼 수 없기에 그것을 보기 위해 여러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참된 도다 저것이 참된 방법이다"하는말들을 많이 하지만,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적, 즉 자기를 살피고 "내가 누구인가"를 바로 아는 것이 수행이요 참선인 것입니다.
계율이나 율법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기를 가리려고 하는 요소들, 명예, 공명심, 욕심과 탐욕, 미움, 시기, 질투, 이 모든 것이 자기를 발견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주어진 하나의 한시적인 도구입니다. 참 자유는 자기를 바라볼 때,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바로 알 때에 주어집니다. 자기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도의 출발이요 완성입니다. 내 안에 있는 무한(無限)은 하늘나라를 담을 만큼의 공간들입니다.
원래 악하지 않은 인간을 스스로 악하게 했다라고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서경덕이라는 이름이 보이고 그는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원효대사 같은 사람도 저 높은 곳에 도가 있는 줄 알고 힘차게 달려갔지만.. 결국 "도"의 본질을 바로 알았기에 나중에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하나를 알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다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옷을 입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옷의 디자인이나 재질이나 색상을 보지만, 옷에 대해 바로 아는 사람은 그 옷이 어떤 실로 만들어졌는지를 보게 됩니다. 아무리 옷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도 옷이 짜이기 전 까지 그것은 한 가닥의 실이라는 것입니다. 도라는 것도 바로 그렇습니다. 그 본질적인 실에 집중하고 화려하거나 남루하거나를 떠나 그것이 모두 한 가닥의 실에서 비롯되었음을 바로 보고, 그것을 통합해서 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도를 깨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올의 실이 고기를 잡는 그물이 되기도 하고 몸을 감싸는 따스한 옷이 되기도 합니다. 그 어느 것도 본질적인 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나는 너이고, 너는 나라는 것을 알면 그로써 우리는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나를 나로 알지 못하고 너를 너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나로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너를 너로 볼 수가 없고, 너 또한 너를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를 바로 볼 수가 없게 됩니다.
서로가 모를 때 하나가 될 수 없고 둘 사이에 있던 본연의 것들이 접근이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용서와 화합은 내가 누구인지를 바로 아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진리의 출발은 내가 누구인가를 알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당신들이 알고 있는 도나 진리의 지식을 자꾸 비우십시오. 그만큼 새것이 찹니다. 진리는 썩지 않고 영원한 것인데 지식이 진부하다면 또 버리고 새로 채우십시오. 버리고 채우는 가운데 참 진리를 알게 됩니다. 부인과 부정의 역사는 끝나고 확장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당신의 마음을 넓히고 비워야 그 안에 상대의 사랑이 채워집니다. 누구를 처음 상대했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사랑할 때는 자신의 마음이 온전히 비워있게 됩니다. 무엇이든 가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오염시키게 됩니다.
마음의 공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어 있어야 합니다. 나를 알지 못할 때, 나를 알려고 무엇인가를 채우게 되고 그로 인해서 공명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를 알게 되면 더 이상 헛된 것으로 나를 치장하려 하지 않고 그럼으로 드디어 내 속은 텅 비어서 무엇이든지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내 속은 텅 비어서 내 것들을 더 크게 울려 냅니다. 그 공명은 더 커집니다.
가장 많은 그릇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가장 크게 비워져 있습니다. 지식이나 진리라고 말하는 것으로도 자신을 채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디딤돌이 될 줄로 알고 있지만 자신의 코를 괴롭히는 썩은 재료가 될 뿐입니다. 누가 가장 부끄러워하겠습니까? 더 많은 지식을 쌓으려 하고 더 많은 수행을 하려 했던 사람들이 도를 알았을 때, 그 자신의 헛된 노력들로 인해 부끄러움을 갖게 될 것입니다.
도를 닦는 것은 한가지 방법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법이 있으며, 작은 물고기를 낚을 때 쓰는 방법은 큰 물고기를 잡을 때는 쓸 수 없습니다. 즉, 크게 깨달으면 기존의 방법이나 교리와는 완전히 다른 방법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작은 것을 잡는데 익숙해져서 큰 고기를 낚는 법을 모릅니다. 참된 진리를 알고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기준을 버리고 규정짓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로 가는 길이다"라는 식으로 규정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생퇴행으로 마스터들의 목소리를 쌓아 놓지만 이것 또한 다 먼지와 같습니다. 이 메시지를 듣고 우리의 의식이 바뀌지만 때가 되면 이 역시 버려야 합니다. 절대로 쌓아 두지 마십시오. 버리지 못하면 자기를 썩게 만들고 새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수단이요, 과정이지 이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나 추구하는 가치는 아닙니다. 달걀이 병아리가 되려면 자기를 구성하고 있던 껍질을 부정해야 하는 것처럼, 참 진리에 이르는 길은 우리가 옳다고 여겼던 마스터들의 목소리조차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더 강한 긍정이 된다는 것, 부정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진리 수행의 기준으로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각자는 각자의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를 바로 보게 되면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당신의 마음을 역동하는 진리로 채우십시오. 살아있는 것으로 채우십시오. 지금까지의 마스터들의 목소리들은 이미 죽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죽었다고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새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그것을 받아 들였을 때 죽은 것처럼 여기고 자기를 비우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당신을 완성의 경지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집착하지 마시고 이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얘기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더욱더 확장되어야 하고 새것들로 채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당신을 그렇게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대하는 바가 당신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그 편협하지 않은 사고를 존중합니다.
정말 예수를 믿는 성자가 되려면 예수를 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를 존경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틀에 박힌 예수의 모습을 깨뜨리라라는 의미입니다. 참된 불교 신자라면 부처를 꺾어야 한다고 합니다. 요는 화석화 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에 집착하게 되고, 하나가 완전한 것이라고 보게 되면, 그것에 묶여서 지식이 화석화 된다고 말합니다. 전생 퇴행의 방법, 기도, 참선, 호흡 등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방법들이지 어느 하나만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에 집착하게 되면 다른 것을 닫아 버리게 되고, 열어 놓을 때, 모든 것이 생동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꿈에서 저승사자를 보기도 합니다만 이것도 상징에 불과합니다. 마음에 두려움을 두지 마십시오. 두려움은 자기의 마음이 지어낸 것입니다. 진리가운데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모든 기준을 명확히 세울 수 있습니다. 선조(先祖)들이 말해 왔던 무덤이나 조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염라대왕이라고 말해왔던 것들은 실제로는 자신의 영혼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심판들인 것입니다. 사후의 자기 평가는 감정의 치우침이나 이해관계에 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 아주 엄밀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단 영혼의 상태가 되면 모든 영혼의 통찰력은 동일한 수준이 됩니다. 그 동일한 수준에서 자기를 공정하게 내려다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신이 어떤 단계에서 다시 배워야 할 것인가를 엄밀하게 판단합니다. 예를 들어 아주 배우지 못한 자나 많이 배운 자나, 마음이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그 영혼은 동일한 수준의 판단력과 영성을 가지고 있기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엄격하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어디로 보낼 것인가를 요구하게 됩니다.
다만 생전과 다른 것은 생전에는 좋은 보직으로 보내달라고 하지만 죽은 영혼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전에 했던 행동들에 대해서 스스로 잘잘못을 가려 그에 합당한 배움을 줄 수 있는 환경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시 몸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중단되었던 카르마는 계속되고 다시 절차를 밟아 생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동물로 태어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만 귀하고 동물들의 영혼은 귀하지 않냐고 반문하지만 원래부터 그런 것이라고 말합니다. 동물은 그 영혼의 상태에 가장 적합하다고 합니다. 동물에 대해서는 카르마가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체적인 우주의 질서나 카르마에는 적용되지만, 인간과 같이 자발적이고 주도적인 카르마에는 적용이 안 된다고 합니다. 사람의 영혼이 하드보드 지라면 동물의 영혼은 일회용 휴지와 같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동물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지만 마스터들은 그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정작 알아야 할 것보다 지역적인 관심이 쏠리므로, 윤회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로부터 관심의 초점이 흩어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비밀을 알 수 있는데, 자꾸 엉뚱한 쪽으로 관심의 영역이 흐르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윤회에 관심을 가지고 탐구해 왔지만, 그 본질을 꿰뚫은 사람은 몇 되질 않고 또 그런 사람들은 잘 나서지를 않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영혼들의 윤회와 삶들에 관해서 이성과 논리적인 것으로 아무리 안다고 해도 절대적 수준에 아직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유치한 수준으로 머물게 됩니다. 그런 것들로 인해 자기 자신이 범하는 오류에 대해 좀더 겸손해지고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는데 너무 확신에 찬 나머지,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들이 혼재된 상태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신화와 비유와 진실이 혼합된 상태로 나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윤회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 자기의 공명심이나 개인적인 흥미로 추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칫하면 생의 반복으로 주어지는 가르침에 대해서 본질을 약간은 비껴가는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통해 또 많은 사람들이 교훈을 얻게 됩니다.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는 것은 사랑에 대해서인데, 그러나 그 사랑을 어떻게 해내야 될 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길을 바로 들면 목적지까지 곧바로 간다고 마스터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한 군데에 집중함으로써 시야가 좁아진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본류를 따라가면 모든 것이 다 밝혀진다고 얘기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신의 질서, 하나님의 질서 속에 자신이 편입되기를 원하는 것, 그 우주적 질서 속에서 그 질서의 흐름대로 세계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즉, 시야가 점차 넓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나 '석가' 같은 존재들은 우주의 한 좌표상에 실제로 실재하기도 합니다. 하나의 에너지 흐름으로서 개념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며, 육체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사람의 두뇌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진실의 서'의 내용은 옳지 않습니다. 그 정보들은 조작되어 있습니다. 악한 영들의 세력입니다. 진실과 위선이 교묘히 혼합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겸손이 빠져 있습니다. 많은 우주 연구가들과 UFO 연구가들이 잊어먹고 있는 사실이 그런 부분입니다. 흰두와 티벳 수행자들의 수행방법에도 상당부분 사랑과 겸손이 빠져 있습니다. 지금의 달라이라마는 상대적으로 앞서 있을 뿐, 절대적 기준으로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묵상을 많이 하라고 합니다. 명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구요. 하루에 30분 이상 하십시오. 그리고 체력을 단련하십시오. 일을 하기 위해선 육체가 먼저 준비되어야 합니다. 앞으로도 육체가 많이 시달릴 것인데. 지금부터 준비하셔야 합니다.
우주의 물질 작용인 '불'도 무어라 정의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진리를 하나의 획일적인 지식체계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는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담는 인간의 유한함이 있고 또한 진리는 인간의 합리성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을 분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진리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게를 구우면 껍질은 변화가 없지만 속이 익어서 죽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진리가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겉은 변화가 없지만 그것이 우리 속에서 작용하게 됩니다.
화학적 변화와 물리적 변화에 있어서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정말 화학적 변화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 화학 변화를 일으키는 입자 하나하나의 운동과 그 결합으로 말미암은 물리적 작용인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어느 것이 종속변인이고 어느 것이 핵심 변인인지입니다. 주종관계와 원인과 결과에 대해,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 지극히 알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진리를 '인식'하려 하지 마십시오. 진리는 주어지는 대로 실제로 행하면서 자기 모습을 확인할 때, 삶으로 느껴지는 것이지 두뇌로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틀이 아직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논리적 틀에 대해서 그것들이 침해를 받거나 그 근거에 흔들림이 올 때 당황하게 되고 어려워하지만, 그러나 진리는 하나의 모습으로 이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체계로 이해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삶이 변화되었다면, 변화된 내용으로 진리를 느껴보십시오.
중무장을 한 장군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무리 갑옷을 두껍게 두르고 얼굴에 투구를 쓰고 방패가 아무리 넓어도 화살이 들어올 곳은 있습니다. 목에 화살이 꽂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무장을 한 병사들도 목까지 둘러 채울 수는 없기 때문에 목을 내놓는다면 그곳으로 화살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과, 보다 나은 활동을 위해서 팔의 갑옷을 벗기면 그곳에도 다시 독이 묻은 화살이 날아옵니다.
모든 화살을 막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무장시켰을 때는 그 무게를 자신이 지탱하지 못해서 오히려 포로가 되는 경우.. 이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맞추려고 하면, 그것이 자기를 누르는 짐이 되어서 다른 것들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또한 아무리 정교한 틀을 만들더라도 그 사이는 허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천적인 한계입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체계 안에서 다른 것들을 바라보고 그 입장, 그 시각에서, 그 패러다임에서 모든 것을 보려고 한다지만 어쩔 수 없이 거기에는 허점이 있고 한계가 있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완벽한 패러다임을 구축했다고 생각했을 때 당신은 이미 그 생각 안에 갇혀서 다른 것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되고 지적 유희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시고 느끼십시오. 갑옷을 다 벗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갑옷을 다 벗으면 죽이지 않고 노예로 생존할 수 있다고 합니다. 포로로 잡혔다가 그곳의 지도자로 서게 된 사람들에 대해 얘기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 행복감을 느끼게 되지만 그런 행복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참된 행복은 소유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소유 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버린다'는 것은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것들이 내 안에 들어올 때 그것들을 맞을 준비를 한다는 뜻입니다.
보다 쓸모 있는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 지저분하고 쓸모 없는 것들을 버리는 것처럼… 물레방아는 그 내부를 비워놓지 않으면 돌 수가 없습니다. 받은 물을 자꾸 버리기 때문에 새물을 받게 되어 작용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지적인 체계나 진리에 대한 탐구조차도 채웠다면 다시 내버리고 채웠다가는 다시 내버리십시오. 그것이 당신을 작용케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하면 옳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볼 때는 오히려 그 이면의 작용들이 가치 있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 작업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지혜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면 그것을 하나의 작용이라고 보게 되겠지만, 우리의 관점은 그 뒤에 있습니다. 그 이면에 가려진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작용들에 대한 기대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이해할 때 제한하려 하지 마십시오. 흐르는 물과 같이 그냥 놔두십시오.
아직까지는 영적인 부분에서 세상이 많이 혼탁합니다. 이 시대에 악한 흐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흐름들을 역으로 뚫어낸다는 것이 힘들 것입니다. 세상을 누르고 있는 기운들이 있습니다. 지금 그 기운의 흐름들은 교만함과 탐욕과 미워함과 시기함, 그리고 두려움들.. 이런 에너지들이 실제로 이 사회와 삶들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런 에너지들의 짓누르는 힘이 제거되고 나면 치료효과가 탁월하겠지만 지금 현재로는 큰 효과는 없습니다. 일단의 교정을 하거나 좋지 못한 것들을 없애 버리더라도 그런 나쁜 기운들이 새로 들어가고 거기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가게 되고 맙니다. 인내를 가지고 시도하다 보면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한두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 시비를 가리거나 잘못되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너무 연연해 하지 많기를 바랍니다. 닭이 달걀을 낳을 때, 매일 또 같은 과정을 거치고 비슷한 모양의 달걀이 나오지만 각각의 달걀은 모두 다른 개체입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많은 사람들이 했던 좋은 말이나 깨달음을 위해 했던 말들도 요란함이 있는 다음에 나오지만 나중에 봤을 때는 다 비슷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가치가 있습니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모든 것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확신이 없으면 사랑할 수도 겸손할 수도 없습니다. 절대자에 대한 신뢰의 바탕이 없으면 사람은 기본적으로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뢰와 겸손과 희생 같은 것들이 서로 합하여 상승효과를 이루지 못한다면 어느 것이 어느 것에 우위 한다고 인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네 가지가 하나로 되면 강한 폭발력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서 이런 사랑의 폭발력을 터뜨리고 있는지 헤아려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사랑 받기를 원하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를 어려워합니다. 사랑에 굶주리고 관심에 굶주린 것이 집착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 집착의 대상을 서로 쟁취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갈등 하게 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남편에게서 사랑 받지 못하는 여인이 보석에 집착을 보이게 되면 원래의 문제에서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관심이 전이되는 것처럼, 마치 원래부터 자기가 보석을 사랑하고 거기에 모든 삶을 걸었노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은 사랑인데 사랑에 대한 좌절로 보석에 집착하게 되고 이제는 그것을 자랑하는 것으로 삶의 만족을 얻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것, 즉 학위, 재물, 자기의 갖가지 소유물들, 겉으로 드러나는 존경이나 명예, 형식적인 관계들에 집착해서 그것을 자랑으로 삼으려고 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고 있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사랑이고 영혼의 안정, 그리고 기본적인 신뢰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자랑하게 될 때 가지지 못한 자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고 이것이 하나의 갈등이 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돈을 가지고 있으면 마음을 놓게 될까요? 이것은 자기 신뢰의 근원에 대해서 확실하게 인지하지 못할 때 막연하게 돈을 자기의 생존을 안정시켜 줄 수 있는 수단이라고 보고 그것을 많이 쌓아 놓음으로써 안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학자는 자기 저작물의 연구와 업적으로, 사업가들은 많은 돈을 보면서 안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영혼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사랑과 절대자에 대한 신뢰들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으면 그런 허상들에 집착하게 됩니다. 자기의 근본적인 필요를 바로 알고 그 수요가 채워지면 많은 갈등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기가 받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됩니다.
자랑을 통해서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제 그런 일을 포기하게 될 것이고, 많은 돈을 자랑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인정 받으려는 사람들도 그런 일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부의 어리석음과 허영의 어리석음을 지적해 주고 가르치기 전에, 그들의 필요(사랑)를 채우는 작업을 하십시오. 가랑비가 옷을 적시듯이 뿌려지는 그것이 나중에 사람을 변화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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