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함께 2024년 겨울호>
숨은 저녁 노래/ 이학성
내 몸 어디에 숨은 악기 하나 있고
바람이 지나며 그것을 분다
내 몸 어딘가에 숨은 악기 하나 있고
별이 떠올라 저녁에 그것을 분다
하루 중 저물녘에만,
생각의 무릎을 꿇고 우는 소리
숨은 저녁의 노래, 보이지 않는
내 몸의 악기를 휩싸고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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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릅나무 동갑내기/ 유재영
느릅나무에서는 눈도 뜨지 못한 알몸뚱이들이 어미가 물어 온 방아깨
비 먼저 먹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아수라장이다 비좁은 둥지서 용
케 자라서 이소 준비로 다시 북적일 때 어린 자식 앞서 보내고 혼자 사
는 재종조모 자싯물 버리러 나왔다가 어둔 귀에도 무슨 소리가 들렸던
지 동갑내기 느릅나무를 바라보며 연신 머리를 주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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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화(墨畵)/ 임문혁
목련나무가 뜰에 묵화를 친다
굵고 가는 선(線)이 변화무쌍하다
그림자로 그린 그림
길어진 그림자 담 넘어 사라지면
하루가 간다
나무가 어찌 제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랴
그림은 빛에 따라 그려지는 것을
세상 뜰에 나를 세우신 하느님
내 그림자로 어떤 그림 그리시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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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편지/ 김영탁
나무는 일생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는 사실을
나만이 몰랐네 그저 편지를 보내면
낙엽인 줄 알고
빗자루로 쓸기만 했네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나무는
봄의 전령으로 꽃편지를 띄우고, 여름이면
초록 볼우물에서 시원한 우물을
퍼 올리듯 편지를 쓰고
가을이면 끊임없이 편지를 부치는 나무,
겨울엔 무장무장 눈을 맞으며
봄에 부칠 꽃편지를 쓰느라 지쳐
겨울 곰처럼 잠이 들기도 하네
이제야 나무에게 편지를 쓰는 밤,
하이얀 종이를 사랑하듯 사각거리는 연필은
오래전에 떠난 이들을 나무에게로 불러오고
세상의 나무들은 그리운 이들을 편지에 보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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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갓에게/ 전윤호
쑥갓이 꽃을 피웠다
생전 처음 보는 꽃
해바라기 닮은 국화였다
상추도 꽃이 핀다고
황금처럼 노란 꽃밭이 된단다
저도 시를 쓸 수 있을까요
타고난 재능도 없는데
꽃 피기 전엔 누구나 그렇다
쓰임새가 전부인 줄 아니까
굳은 생각을 뚫는 가지 하나
조금만 더 기다리자
타고나지는 않았지만
모든 사람은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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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비둘기에 대해/ 전원책
'내가 바람을 죽였다.
햇살을 죽이고 달아나는 바람을 단칼에 베었다.'
내가 한 자백은 처음엔 방안에 차갑게 내려앉았다.
이내 공기처럼 방안을 떠돌다
유리로 된 창을 통해 사라졌다.
마치 바깥세상과 이미 정을 통했다는 듯이
비둘기는 날개를 펼친 채 죽어 있었다.
죽은 것은 기껏 비둘기일 뿐이지만
나는 아무에게나 물을 수 있다.
당신은 무언가를 죽인 적이 있는가.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은 칼을 쓴다.
바람을 베어 버린 날 오후 비둘기는
죽어서도 날개를 펼쳐 멀리 날아갔으므로
아무도 그 죽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한때 참지 못한 살의(殺意)를
이제 감출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정장을 한 남자와 마차를 타고 간 옛사랑을 상상한다.
'허드슨 강가에서 달빛을 즐기며 커피를 마시리라'
어쩌면 오래된 집에 돌아와 대문을 활짝 열어둔 채
바닷가 모래톱에서 어린 고래를 기다릴지도 모르겠다.
물결이 햇살에 눈부시게 산란하는 가을날 오후
젊은 날 단칼에 죽였던
그리움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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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끼니가 아름답기를/ 한분순
정좌해 명상하는
잘 헹군 밥공기
달처럼 내어 주며
포만을 나른다
달그락 올리는 기도
품 넉넉히
밝은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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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서연정
씻은 마음 온전히 전할 길이 없을까
외로워 다리 놓고 두려워 다리 놓고
폭풍우 눈보라 쳐도 상록수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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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에 대한 예의/ 김미정
예감이 실감으로 도착한 이별 앞에서
두 손을 모읍니다, 남은 빛 그러모아
삼키고 되뇌어 보니 서로 다른 별입니다
어긋난 별들 속에 하늘은 높아가고
더 오래 바라보다, 그만큼 지워가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멀지 않은 새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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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 2024년 겨울호>
만추에 창을 여니/ 서연정
찬찬히 읽으라 하네 보이지 않는다 말고
걸린 문빗장마다 뜨겁게 새긴 넋을
돌보던 뿌리의 수고 뒷거울에 비치네
햇살처럼 별빛처럼 물들어 쏟아질 뿐
어느 그늘 아래 미련이 남았으랴
눈부신 희열을 안고 낙엽들이 날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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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이 철렁했네/이종문
하늘이 계시는 줄을 통 느끼지 못하다가
완두콩 꼬투리마다 꼭 일곱 알 든 걸 보고
하늘이 계시는구나! 내 가슴이 철렁했네
까다가 다시 보니 여섯 알 든 것도 있고
심지어는 한 알이나 빈껍데기들도 있어
하늘이 엉망이시군! 내 가슴이 철렁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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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지 사랑/ 정용국
제 곁에 다가오는 새침한 손님들도
언제나 마다 않고 품 안에 그러안는
둥글고 깊은 궁리는 어디에서 온 건지
햇김치에 밀려나고 군둥내 어설퍼도
마스크에 갇혀 있던 곰삭은 속내들을
쭈그렁 양은냄비에 옹골지게 펼친다
헐한 한 끼 컵라면도 쿰쿰한 홍어회도
살갑게 손 내밀어 뭉근히 잡아주는
너는 늘 내 편이었어 눈물까지 따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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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에 찔려보니 알겠다/ 이길옥
심마니도 아닌 것이
잡목 우거진 산을 뒤적이다가
적의를 품은 살기를 만난다.
없는 길 만들어가며
가파른 산허리를 넘자
날카롭게 독이 오른 가시들이
살점을 파고들며 아픔을 쑤셔 넣고
둥지를 튼다.
통증을 데리고 들어와 박힌 가시의
뾰쪽한 끝이
조용히 살고 있는데 건들었다고
생살 깊숙이 파고들며 성질을 낸다.
가만
나도 가시가 되어 남의 가슴에
뿌리내린 적 없었던가.
가시가 들어 지은 집터가 벌겋게 부어오르고
욱신욱신 쑤신다.
가시에 찔려보니 알겠다.
내가 가시였을 때
남이 피 흘리며 얼마나 아파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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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왜목/ 이문희
그곳에 여직 눈이 오나요 12번 버스를 타는 마음들은 왜 흰빛인
가요 처음 같은 눈발들은 왜 왜목에서 시작하나요 왜목은 왜 왜가
리의 긴 목을 닮았나요 왜목에선 사람들은 절망을 내려놓으며 눈
을 감는다지요 왜목의 어둠은 젖은 은하수 푸른빛인가요 왜 왜가
리의 목에 날리는 눈은 끝이 없나요 왜목은 목덜미가 뜨거운 한
사람을 왜 아파하시나요 늙은 개 한 마리 없이 산책하는 왜목은
왜 목터져라 외로운 걸까요 왜 왜가리의 긴 목을 보면 왜목이 그리
울까요 왜? 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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