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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명회>- 강화도 전등사, 교동도 화개정원, 24년 춘절행사 -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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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보기보다는 인터넷 PC로 보면 크고 웅장한 모습에 기절하지 않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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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傳燈寺), 傳전할전, 燈등잔등, 寺절사, ▶개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 근처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의 말사이다. 강화도 남부 정족산 정족산성 안에 있는 사찰로 원래는 경기도 사찰이었으나, 1995년에 강화도가 인천광역시로 편입된 뒤로는 인천 소속 사찰이 되었다. 전라도와 더불어서 전국에서 불교의 세력이 약한 지역인 인천 내에서 인천을 대표하는 사찰이기도 하다. ►살펴보기 상세: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시절 아도화상이라는 승려가 창건하였다. 고려왕조 때 수축하였다가 17세기 초 광해군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고 일제강점기 때 중수된 적이 있다. 고려시대부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로서 중하게 여겼고, 정화궁주가 절에 대장경과 함께 옥으로 만든 법등을 기증하면서 진종사(眞宗寺)라는 절 이름을 전등사(傳燈寺)로 바꾸었다. 정화궁주는 본래 충렬왕의 왕비였으나,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에게 밀려 둘째 비로 강등당하여 제국대장공주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하며 살았던 비운의 여인이다. 1605년과 1614년 큰 화재로 타버렸으나 재건하여 1621년에야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왕실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고, 1719년(숙종 45)부터는 주지승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임명하여 우대하였다. 1726년(영조 2) 영조가 직접 전등사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을 쓰고 1749년(영조 25) 중수불사(重修佛事)에는 목재를 시주하여 이때 지금의 대조루(對潮樓)의 모습으로 지었다. 1909년 보관중이던 실록을 서울로 옮겨 사고로서의 지위를 잃었으나, 강화와 개성의 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피해를 보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정족산성외부의 암자와 건물들이 프랑스군의 방화로 사라지고, 불상과 법전 등 문화재가 약탈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곳이 관군과 프랑스군의 교전지였다. 대웅전에 들어가 보면 얼핏 낙서처럼 보이는 묵서(墨書)들이 곳곳에 적혀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병인양요 당시 참전했던 조선군 병사들의 이름이다. 프랑스군과의 교전을 앞두고 전쟁에서 이기고 또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빌면서 병사들이 대웅전 불단이며 기둥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고. 물론 이후 다들 살아남았다. 출처-나무위크 ▶문화재 보물 제178호 강화 전등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79호 강화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93호 강화 전등사 철종(鐵鍾) 보물 제1785호 강화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보물 제1786호 강화 전등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木造地藏菩薩三尊像 및 十王像 一括) 보물 제1908호 묘법연화경 목판(2016)(妙法蓮華經 木板)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3호 강화 전등사 약사전 현왕탱(藥師殿 現王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4호 강화 전등사 약사전 후불탱(藥師殿 後佛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6호 강화 전등사 청동수조(靑銅水槽)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7호 강화 전등사 업경대(業鏡臺)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8호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수미단(大雄寶殿 須彌壇)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7호 강화 전등사 약사전 석불좌상(藥師殿 石佛坐像)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1호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신중도(大雄寶殿 神衆圖)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2호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후불탱(大雄寶殿 後佛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강화 전등사 강설당 아미타불탱(講說堂 阿彌陀佛幀) 인천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7호 강화 전등사 대조루(對潮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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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막 휴젠리조트 이모저모 사진과 개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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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사찰(내) 이모저모 사진과 개요도,
▶은행나무,
전등사에는 두 그루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백 년이 넘는 나무들이다. 한 나무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는가 하면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강화도령 철종 임금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을 스무 가마나 바치라고 요구한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기껏해야 열 가마밖에 열매를 맺지 않는데
스무 가마를 요구하니 관리들의 횡포가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다.
이 지시를 듣게 된 동승이 노스님께 고했다. “스님! 정말 관가에서 너무들 하는 것 아닙니까요?”
“허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얘야,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미워해선 안 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
노스님은 이렇게 타일렀지만 자신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은행 스무 가마를 내놓을 수도 없었고 관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욱 더 불교를 탄압할 것이 분명했다. 노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백련사에 있는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추송 스님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며칠 후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났다.
곧 전등사 일대에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두 배나 더 열리게 하는 기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추송 스님의 3일 기도를 지켜보았다.
그 중에는 관리들도 섞여있었다. “어떻게 은행이 두 배나 많이 열린단 말인가?” “맞아! 추송 스님이 제 아무리 정성을 드려도 소용없는 짓이겠지.” 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윽고 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갑자기 추송 스님의 기도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버렸다.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 추송 스님이 기도를 끝내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때 아닌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덮더니 비가 무섭게 내렸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 스님은 물론 노스님과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믿게 되었다.
그 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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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 주요사항 |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 | 아도화상이 진종사眞宗寺 창건 |
1266년(고려 원종7) | 진종사 중창 |
1282년(고려 충렬왕 8) | 정화궁주가 인기스님을 통해 송나라 대장경을 가져다 두게 함 정화궁주가 옥등시주. 전등사傳燈寺로 사명이 바뀜 |
1319년(고려 충숙왕 6) | 전등사 중건 |
1341년(고려 충혜왕 복위 2) | 전등사 중창 |
1605년(조선 선조 38) | 화재로 전등사 절반이 소실 |
1614년(광해군 6) | 12월 1일 화재로 전등사 전소 |
1615년 | 4월에 중창불사 시작 |
1621년 | 지경스님이 윤 2월 7일에 중창을 완료하는 상량식 봉행 |
1660년(현종 1) | 강화유수 유심이 선원각과 장사각을 전등사로 옮김 |
1707년(숙종 33) | 강화유수 황흠이 장사각 보수 및 별관 신축 |
1719년 | 전등사 중수 |
1726년(영조 3) | 영조대왕 어필“취향당” 편액을 내림 |
1734년 | 사고史庫 관리비용으로 선두포 답을 받음 |
1749년 | 초윤楚允, 청민淸敏, 보학寶學 스님이 대조루를 고쳐 지음 |
1761년 | 대연大演 스님이 법당의 삼존불을 개금 |
1767년 | 한영스님이 시왕상 보수 |
1784년 | 전등사 안에 정족창 설치 |
1828년 | 정족창 설치에 따른 여러 시행규칙인 <정족창시설절목>을 만듦 그에 대한 내용은 현판에 담겨 전해져 옴 |
1839년(헌종 5) | 서룡瑞龍스님이 시왕전을 중수 그에 대한 내용은 <전등사 시왕급각전 중수기> 현판에 담겨 전해져 옴 |
1841년 | 연홍演弘스님이 대조루 중건 |
1846년 | 전등사에서 서유방과 이곤수의 <애휼승도비>를 세움 |
1855년(철종 6) | 규영스님이 대웅전 중건 |
1865년(고종 2) | 총섭 찬성贊性스님이 관아에 건의하여, 전등사 인근 50여 호戶에서 바치는 세금을 받기로 함 |
1868년 | 진무중군鎭撫中軍 벼슬인 이용의李容儀가 정족산성 수리. 10월에 전등사에서 이에 대한 공덕불망비를 세움 |
1871년 | 포량고 설치 |
1872년 |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어 나라에 진상하는 약재창고 와 정족산성을 관리하는 산성 별장소를 전등사 남쪽에 둠 |
1873년 | 강화 백성들이 병인양요때 활약한 순무 총섭 양헌수 기념비를 대조루 남쪽에 세움 |
1876년 | 효월스님이 약사전 중수 |
1880년 | 효월스님이 명부전 후불탱과 시왕상 보수 |
1884년 | 효월스님과 경운스님이 지장탱을 개금하고, 시왕탱을 봉안 영담스님이 관음전 중건 |
1905년 | 서룡스님이 법당 불상을 개금하고 불화를 보수 |
1911년 | 사찰령 반포. 전등사가 본사가 되어 강화, 개성, 김포, 통진, 교하, 교동 등 34개사찰을 관리함. 지순스님 주지 취임 |
1913년 | 창환스님 주지 취임 |
1915년 | 창환스님이 대웅전 중건 |
1916년 | 창환스님이 시왕전과 대조루 증축 |
1917년 | 지영스님 주지 취임 |
1918년 | 지영스님이 지장보살 개금하고, 시왕상 보수 8월에 명부전 새로 짓고, 적묵당 수리 |
1919년 | 명부전 단청 |
1922년 | 정해스님 주지 취임 |
1930년 | 보인스님 주지 취임 |
1932년 | 대조루 중수 |
1933년 | 보인스님이 삼성각 새로 지음 |
1934년 | 정섭스님 주지 취임 |
1935년 | 정섭스님이 경성교무원을 운영하느라 진 빚을 갚고, 전문강원 설립 |
1973년 | 원광스님이 적묵당 해체 및 복원 완료 |
1977년 | 월탄스님이 명부전 해체 이전. 종각 신축 |
1979년 | 월탄스님이 명부전 중건 |
1986년 | 장윤스님이 극락암, 삼성각 해체 및 증개축 |
2001년 | 계성스님이 제1회 삼랑성역사문화축제 실시 |
2005년 | 장윤스님이 제1회 이주민 문화축제 및 제1회 게이트볼 대회 실시 |
2007년 | 장윤스님이 템플스테이 요사체 증개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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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성 이모저모 사진과 개요도,
▶삼랑성 이야기,
단군의 세아들이 쌓은 삼랑성 남한에는 단군과 관련된 유적이 두 곳밖에 없다. 그런데 그 두 곳이 모두 강화도에 있다.
단군께서 나라의 안녕과 백성들의 평안함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참성단(전국체육대회의 성화를 이곳 참성단에서 밝히는 이유도 단군과 관련된 이유에서다.)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이 그것이다.
삼랑성의 원래 이름은 발이 세 개 달린 솥을 엎어놓은 모습이라는 정족산성(鼎足山城)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군의 아들과 관련된 삼랑성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옛날 단군께서는 세 아들이 있었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은 단군은 정족산에 성을 쌓기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큰 규모의 공사이기에 간단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단군은 항상 생각을 기울여 끊임없는 꿈만이 젖어 있었다. "정족산에 성을 쌓아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아야만 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으나 좀처럼 좋은 방법이 없었다. 너희들 좋은 방책은 없겠느냐"
단군은 어느 날 세 왕자에게 의논을 했다. 왕자들은 어이하려는지 자신 있게 답을 한다. "크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희 세 사람이 힘을 합쳐 반드시 훌륭한 성을 쌓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에 단군께서는 "성을 쌓으려면 많은 돌과 흙을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될터 인데..?" 이에 아들들은 "하늘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저희가 힘을 합치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생각 합니다"라고 말하자
"그러면 너희들에게 일임한다." 세 왕자는 재빨리 다음날 아침부터 성 쌓기를 시작하였다. 시작하고 보니 뜻밖에 응원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전국 각처에서 구름같이 큰 남자들이 공사장으로 모여들었다.
"단군의 왕자들은 스스로 축성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재빨리 달려왔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동일한 말을 하면서 나타난 사람들은 가지런히 체격 좋은 사람들과 근력이 두드러진 장사들이었다.
주변에 있는 산으로 나갔으리라 생각했는데 큰 바위를 주먹으로 두드려 쪼개 내여 적당한 돌을 만들어 이쪽 산으로 던지는 것이었다. 그 돌은 하나하나가 들어맞는 중량으로 보이는 즉시 성벽이 되어 진다.
공사는 점점 박차를 가해 진척되었는데 겨우 한 달도 못되어 난공사인 산성이 이루어 졌다.
이에 단군은 "어찌되었던지 참으로 훌륭히 쌓아 올렸다. 이로써 베개를 높이하고 잘 수 있겠다. 너희들의 충성은 후세 자손들까지 반드시 말로 이어질 것이다. " 단군은 공사에 관계한 장사들에게 두터운 인사를 베풀고
세 왕자에게는 정족산의 봉우리를 각각 하나씩 안겨주고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세 왕자들은 축성하고 각기 세 봉우리를 지킴으로써 이 성을 삼랑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강화도 남단 정족산 산등성이를 따라 단군의 세아들 부소(扶蘇).부우(扶虞).부여(扶餘)가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전등사(傳燈寺)는 이 성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현재 이 성의 문(동문,남문)들이 전등사의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
►전등사 일대를 에워싸고 있는 삼랑성은 국가사적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성은 고대 토성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단군의 세 아들인 부여·부우·부소가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토성 자리에 표면이 거친 할석(割石)으로 성을 쌓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은 성 안팎을 할석으로 겹축했으며 할석 사이마다 할석 부스러기로 쐐기를 많이 사용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해발 222m인 정족산의 정상에서 동향한 계곡을 포용하고, 동남향한 계곡에 수구와 남문이 있다. 북문은 북벽의 서쪽에 치우쳐 산봉우리 사이의 안부에 있고, 서문도 서남쪽 안부에 있으며,
동문은 남문의 북쪽으로 해발 107m의 봉우리 북쪽 안부에 있다. 성벽이 꺾어 도는 곳마다 10여 개의 곡성을 이루며,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치성(雉城)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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