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송이 지다
이재기(2021.8. 신인상. 대전)
눈발이 제법 강하다. 바람도 거세게 불고 있다. 하늘을 쳐다본다.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잿빛 공간이다. 잿빛 하늘과 내리는 눈송이들이 구별되지 않는다. 머리 위 높지 않은 곳에서 팝콘 터지듯 생겨나 일제히 떨어지고 있다. 도솔산 쪽으로 시선을 낮춘다. 암녹색 배경에 무정형으로 내리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풍향의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떼지어 몰려다닌다. 바람이 더 휘몰아치자, 방향성을 상실하여 각자도생하며 필사적으로 흩어진다.
눈송이들은 원래 물이었다. 자작나무 숲속의 맑은 호숫물이었다가 초원을 흐르며 양 떼의 목을 축여 주기도 했다. 햇볕이 따스한 오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구름이 되었다. 꽃 같은 삶은 길지 않았다. 매서운 북서풍에 떠밀려 원치 않는 긴 여행을 떠나야 했다. 낯선 고장에 도착한 그들은 지쳐서 낯빛마저 회색으로 어두워졌다. 이제 눈송이가 되어서 짧은 생을 마쳐야 한다.
영상의 기온에 떨어진 눈송이들은 쌓이지 않고 바로 녹는다. 정원 탁자는 이미 녹은 물로 흥건하다. 그 위로 또 다른 눈송이들이 떨어진다. 제비갈매기처럼 수직으로 낙하하기도 하고, 떨어지기 싫어 이리저리 몸부림치기도 한다. 중력은 이길 수 없다. 결국, 모두 떨어진다. 물 위에 떨어진 눈송이는 잠깐 형태를 유지하다가 곧 먼저 녹은 물에 흡수된다. 녹지 않으려고 버둥거려보지만 정해진 운명은 거역할 수 없다. 눈송이는 녹아 물이 되어야 한다.
얼마 전, 처남의 전화를 받았다. 요양병원에 계신 장모님이 위독하여 중환자실로 옮긴다고 했다. 세 번째 중환자실 입원이었다. 더 위독해질 경우 연명 치료를 할 것인지 의견을 묻는 전화였다. 사람의 생명을 두고 논의하는 것 같아 마음이 뜨끔했다. 누가 생명을 연장하는 또 멈추는 권한을 우리에게 주었을까. 의술이 발달하면서 깨끗하게 삶을 마감하기 힘들어진 세상이다.
장모님이 치매에 걸리신 지 십오 년이 지났다. 오 년 전 거동이 불편해지자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혼자서는 움직이지도 못한다. 수저로 떠먹여 드려야만 한다. 지금은 그것마저도 힘든 상태다.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효심이 남다른 처남이 매일 방문하여 수발을 들었다. 장모님을 뵈러 요양병원에 갈 때마다 병실의 노인들은 수시로 바뀌었다. 누구는 언제 돌아가셨고, 또 누구는 중환자실로 옮겼다고 세세히 알려주었다. 노인들의 눈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요양병원이 ‘죽음 대기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코로나19로 가족 면회가 금지된 지금, 장모님은 간병인에 의지하여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늦은 오후가 되자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 드문드문 내리던 눈발이 다시 세졌다. 바람은 여전히 세차다. 눈송이는 거의 수평으로 빠르게 날아가고 있다. 울타리 안에 있는 정원 탁자에도 여전히 떨어진다. 눈송이 녹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 밑부터 물에 녹기 시작하면, 잠시 비틀거리다가 이내 넘어진다. 그리고는 힘겹게, 천천히 물과 동화된다. 물이 고여 있지 않은 탁자 위 볼록한 부분에는 눈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한다. 녹은 물과 쌓인 눈 사이의 경계에는 생사를 다투는 공방전이 치열하다.생존한 눈송이들도 내일 아침이 되면 햇살에 의해 죽음이 집행될 것이다.
눈송이들이 녹은 물은 주검의 다른 형태다. 많은 눈송이가 죽어 탁자 위의 물이 되었다. 어떤 것은 빠른 죽음을 맞이했고, 다른 것은 고통과 함께 더 천천히 죽음을 겪었다. 요양병원의 환자들처럼 죽음이 얼마간 유예된 눈송이들도 있다. 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가족들은 장모님을 연명 치료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자식들을 가끔은 알아보시는데 냉정하게 선택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고통을 겪으면서 잠시 죽음이 유예된 장모님은 눈송이였다. 문득 시계를 거꾸로 돌려 젊은 장모님이라면 어떤 판단을 하셨을까 상상해 본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집에서 맞는 임종이 당연했다. 치료를 받다가도 마지막이라고 판단되면 집으로 모시고 왔다. 요즘은 대부분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다. 더 많은 의료 혜택을 받게 되고,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삶이 연장될 수 있다. 생명이 나가는 일은 고귀하다. 죽음의 성격과 관계없이 그 과정은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윤리와 의술이 너무 깊게 개입하는 것은 싫다. 백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곡기를 끊은 스콧 니어링의 경우와 같은 자발적 죽음도 원치 않는다. 때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떠나고 싶을 뿐이다. 가족들에게는 ‘연명 치료를 거부한다.’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하고 있다. 나중에 아들, 딸이 같은 입장이 되었을 때, 죄의식 없이 나를 보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밤이 깊어지자 기온은 더 떨어진다. 어느새 눈은 그쳤고 바람도 잔잔하다, 정원등을 켠다. 탁자뿐 아니라 정원 바닥까지 엷게 눈송이들로 덮여있다. 쌓인 눈이 불빛에 반짝거린다. 유예된 죽음의 그림자 때문인지 그 모습은 낮보다 더 차갑고 처연하다. 하늘에는 별이 몇 개 반짝이고 있다. 눈송이들이 별과 하늘의 아름답던 기억을 나누고 있을까. 장모님의 마지막도 소풍 같던 삶만 추억하는 짧은 행복이 되길 바란다.
첫댓글
이재기 선생님.
2021년 8월호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과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동시에 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원으로 환영합니다.
하계 세미나에서 만나뵙기를 소망합니다
등단작품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재기 선생님, <눈송이 지다>로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증발하는 수증기가 구름이 되고 눈송이가 되어 지상에 내려앉았다 물이되는 과정을 우리네 생으로 비유하신 등단작품 잘 읽었습니다. 왕성한 활동 기대합니다.
이재기 선생님 어서오셔요.
2021년 8월호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과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멋진 작가님으로 거듭나시기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