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1월5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수원] 주고받는 사람의 구별이 사라진 세상 -
수원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독서 : 필리 2, 1 - 4
† 복음 : 루카 14, 12 - 14
★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서로 일치하고 존중하며
살아가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겸손의 모범이신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본받을 것을 당부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식사에 초대할 때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
곧 소외된 이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베푼 사랑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일반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식사에 초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에게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잔치에 사람을 초대하여
식사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병들고 소외된 이들은 현세에서는 호의나 은혜를
갚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현세에서
보답할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대신 세상 종말 때에 의인들에게
갚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선우경식 선생은 무료 진료 병원인 ‘요셉 의원’을 설립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환자들을 돌보다가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평소 그의 삶을 보고 그를 ‘노숙자와 행려자들의
대부’(代父)라고 불렀습니다. 언젠가 기자가 그에게 “왜
그렇게 힘들게 노숙자와 행려자들을 보살핍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들은 나에게 보답을 할 수 없는
이들이기에 보살펴 주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짧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진정으로 노숙자와 행려자들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고 하는 선행은 참된 선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거래입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이 참된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훗날 자녀에게서
보답을 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이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조건 없는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감사드리는 일입니다.
-매일 미사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주고받는 사람의 구별이 사라진 세상
2012년 나해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
복음: 루카 14,12-14
< 주고받는 사람의 구별이 사라진 세상 >
평화신문 2012. 10. 28일자 1188호에 ‘가톨릭 신자들 나눔 활동
으뜸!’이라는 제목으로 기분 좋은 기사가 실려서 함께 나눕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종교인ㆍ비종교인을 통털어 기부와 자원봉사
활동에 가장 적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아름다운재단(이사장 예종석)이 1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제12회 국제 기부문화 심포지엄에서 강철희(연세대 사회복지대학원)
교수는 '누가 이웃을 돌보는가?' 발표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의
기부 참여율은 68%(2011년)로, 개신교(61%)ㆍ불교(60%) 신자보다
높다"고 밝혔다.
강 교수에 따르면, 1인당 기부금액 또한 천주교 신자는 37만
1100원으로, 개신교(21만 3400원)와 불교(10만 6000원)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또 천주교 신자의 자원봉사 참여율은 49%로,
기독교(34%)ㆍ불교(27%) 신자보다 높았다.
자원봉사 시간 역시 천주교 신자들은 36.5시간으로, 타 종교
신자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천주교 단체가 조사한 것이 아니라 더 객관적인 것 같고 그래서
더 기분 좋은 소식 같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는 앞으로도 우리나라의 가톨릭은 미래가 밝다고
생각이 됩니다. 인천에서 노숙자와 빈민들에게 8년째 ‘민들레
국수집’이란 것을 시작해 지금도 400명가량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계신 서영남 베드로 선생의 평화방송 강의를 보았습니다.
본래 그 분은 순교복자수도회에서 참 행복하게 살아가시다가
47세에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어서 수도회를 나와 국수집을
차리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민들레 꿈 공부방도, 또 노숙자를
위한 집도 운영하고 주기적으로 교도소를 방문하고 계십니다.
그 분이 공원이나 역 근처에서 노숙자들에게 무료급식을 한다고
하면서 줄을 길게 늘어서게 하고 약간은 무료급식을 받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적으로 따듯한 식사를 제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돈이 300만원밖에 없어서 많은 반찬을 준비할 필요가 없는
국수집을 하기로 했고 3개월 동안 한식 요리학원도 다녔습니다.
정말 정성어린 밥상을 만들어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6인 테이블 하나로 시작한 것이 지금은 하루에도 150킬로 정도의
쌀로 밥을 지어야 할 때가 있을 정도로 손님이 많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뷔페식으로 되어 있어서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 먹고
하루에도 두세 번 먹어도 자기 집처럼 편안한 공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분이 원주에서 사셨던 생명운동가 무위당 장일순(요한)선생의
말을 소개했는데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장일순 선생을 찾아와서 식당을 내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를 물었습니다. 장일순 선생은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식당을 잘 운영하려면 자네 집에 찾아오는 사람을 하느님처럼
대접해 드리면 돼. 다른 것은 걱정할 필요 없어. 대접 받으신
하느님들께서 가만히 계시겠어?”
정말 오늘 복음말씀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손님들을
초대할 때 보답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답해 줄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우셔서 이미
보답을 받은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해 줄 필요가 없지만, 보답을
받지 못했다면 당신이 직접 상을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손님은
밥만 먹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들어 올림까지 받았습니다.
그것은 돈으로는 환산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느님께서
따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장사가 안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서영남 베드로 선생의 자선에 대한 정의는 이러했습니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구별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 같습니다.
만약 엄마가 아이에게 밥을 먹이려고 쫓아다니고 있다면 아이는
밥을 먹어줌으로써 엄마를 만족시킵니다. 엄마는 아이가 밥을
먹어주는 것만 보아도 기분이 좋고 아이를 먹이고 나서야 자기가
밥을 먹습니다. 여기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너무 훌륭한 말 같습니다. 마지막 날에 구원받는 사람들이
“우리가 언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것은 본인들이 주는 입장이 된 적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엄마가 엄마의 역할을 한 것이지 아이에게 자선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자선을 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냥 엄마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덕분에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에 부자들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선행 덕분으로 상을
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다
갚아주어 주님께서 갚아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는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들에게 해 준 것이 곧 그리스도께 해 준 것이
되는데, 보잘 것 없는 형제들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보답을 해 줄 수 없는 사람들이
곧 우리 구원을 도와주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주고받는 것이고 자선을 하는 사람도 자선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저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을 저 혼자
먹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저는 받아줍니다. 그렇지만 주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받아주는 저에게 감사를 합니다.
감사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저인데 말입니다. 서로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도 인간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성체를
받아 모셔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분을 모시지 않는다면
그 분은 더 이상 구원자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실 수가 없고
당신 수난의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매우 큰 고통을 당하십니다.
예수님도 받아주는 인간이 있으니 구세주가 되시는 것이고 그래서
인간에게 주시기 위해 엄마처럼 쫓아다니시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로 걸인을 그리스도로 보면서부터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처럼 보게 될 때,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주게 될 때’ 참으로 보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유유상종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연중 제 31주간 월요일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 루카 14,12-14
유유상종
“성인의 무심한 은혜는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인은 자기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잘
안됩니다. 내가 베푼 것은 꼭 기억하고 남이 나에게 베푼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보답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행복하다”(루카14,1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 보답을 받지 못하지만 우리가 베푸는 하나하나는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이 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려자들을 위해
무료급식을 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본당에서도 한 달에 두 번
봉사활동을 가지만 그들을 돕는다는 것보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큽니다. 매번 정성껏 마련한 음식이 모자람이 없다는 것도 하느님의
안배입니다. 행려자들 앞에서 목사님은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아직 저는 그런 용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좋든
나쁘든 구애 없이 말씀을 선포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이 그립습니다.
그저 음식을 전해주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신
체면에 매여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화려한 잔칫상을
뒤로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분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의 수고와
땀으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가끔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왕래하며 사귄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끼리끼리 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만 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과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내색도 없이 그리고 요구도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모두를 품기를 주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소외된 이를 먼저 챙김으로써 하느님을 차지하는 행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우리는 창조적인 잔치 방법을 익혀갈 의무가 있다.
오늘 복음에 장애인, 가난한 이, 눈먼 이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초대받아 차별 없이 식탁에서 편하게 즐기는 모습을 상상한다.
예수님은 탕자와 소외당한 이, 스스로를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들과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을 초대하여 손님으로
후대하는 분이시다.
식사는 우리가 한 식탁에 둘러앉아 자양분을 얻고 기쁨을 함께
나누는 일상적인 축제다. 사랑을 담은 음식을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한국계 미국 프로 축구선수 하인스 워드의 어머니
김영희씨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아들을 위해 아침을 준비해
놓고 출근했다가 저녁 무렵에 돌아와 저녁상을 차려주고는 다시
야간 근무를 하러 갔다고 한다. 하인스 워드의 힘은 어머니의
사랑이 듬뿍 담긴 ‘밥 힘’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무척 무뚝뚝하셨다. 다함께 하는 아침식사는 마치
예의범절 교육시간 같았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좋은 반찬이 있으면
늘 자식들에게 양보하셨다. 워낙 식구가 많다 보니 고깃국을
끓여도 고기는 몇 개밖에 돌아오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국그릇에는
좀더 넉넉하게 넣어드리는 것이 우리집 예의였다. 아버지는
그것을 남김없이 건져 하나씩 우리들 그릇에 넣어주시면서
‘나는 밖에서 많이 먹으니까’ 하셨다.
수녀원의 식사시간은 반나절, 또는 하루를 새로운 마음으로 보게
하는 영적이고 창조적인 자리다. 나이·취미·성격이 모두
다르지만 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신비스럽기도 하다.
공동체는 때로 희생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희생은 우리가
공동체에서 얻을 수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특별히
침묵을 지키는 때가 아니면 우리 수녀원의 식사시간은 늘
시끌벅적하다. 이야기 소재는 자신이 읽은 책, 알고 있는 상식,
본가 방문 때 배우고 느낀 것, 새로운 소식 등 무궁무진하다.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날마다 재미나는 이야깃거리를 준비해
두었다가 오락시간이 되면 형제들을 웃겼다고 한다. 그는
천성적으로 유머 감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결코 주목의
대상이 될 만한 사람도 아니었지만 형제들을 사랑했던 까닭에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우리는 창조적인 잔치 방법을 익혀갈 의무가 있다. 소비자적
자세(사랑받고 용서받고 받아들여지는)가 아닌 공동체의 적극적
생산자로서 좀더 활기있고 신나는 노래와 이야기, 짤막한
소식을 알아내야겠다. 이런 것이 제대로 준비되면 식사를 비롯해
공동체의 삶과 나눔, 맡은 사명이 촉진되고 모두가 마음을 활짝
열게 된다.
- 김희자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
◈ [인천]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기억하면서
얼마 전, 교구청 마당에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어디에서
사는지 또 누가 키우는지 모르는 조그마한 고양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께서 이 고양이가 예쁘다고 먹을 것을 갖다 주어야겠다면서
사제관 주방으로 힘차게 뛰어가시더군요. 하지만 저는 바로 이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저렇게 먹을 것을 주면 이곳 교구청 마당에 이 고양이가
계속 나타나지 않을까? 고양이 소리가 밤에 들으면 애기 울음소리
같던데……. 혹시 밤마다 저 소리를 듣게 되는 것 아냐? 저 신부가
지금 괜한 짓을 하는 것 같은데…….’
이러한 생각을 하는데 같이 있던 한 신부가 “내일 비 온다고
하지요?”라는 말을 꺼냅니다. 순간 걱정이 됩니다. 내일 밖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비가 오면 상당히 힘들어지거든요. 그리고
동시에 부끄러운 제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생명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면서, 비 올까봐 걱정하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이
과연 맞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길가에
피어있는 이름 없는 풀 한 포기까지도 신경을 쓰시는 주님, 이
주님을 닮겠다고 말하면서도 생명에 대해서 나의 불편함만을
떠올리며 소홀히 하고 있었던 저였던 것이지요.
생명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마음을 가지고 임했을까요?
나의 생명만 소중하고, 다른 이의 생명은 무시하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다른 생명을 파괴하는
우리들의 모습 역시 부끄러운 또 한 모습은 아닐까 싶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나를 기준으로 하다 보니 가장 중요한 이 생명을 소홀히 하곤
합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우리가
함부로 할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초대할 때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말라고 하시지요. 대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초대하라는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우리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들에게 소홀히 할 때가 많은 우리들이었습니다.
기왕이면 나와 연관이 있는 사람, 또는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우리가 받을 상을 직접 하늘에서
마련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으로부터 외면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도록 주님께서 하신 사랑의 초대를 우리 역시 하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기억하면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누구도 소외되고 배제되지
않도록…….
꿈을 날짜와 함께 적으면 목표가 되고, 목표를 나누면 계획이
되고,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꿈은 실현된다(그레그 S.레이드).
신학교를 지원할 수험생들을 위한 미사가 있었습니다.
좋은 결과를 기도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어느 성당에서 강의를 부탁해서 간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생각보다 도로 상태가 좋지가 않은 것입니다.
여유 있게 출발을 한다고 했는데 도로가 너무 막혀서 강의 시작
직전에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착을 했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성당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일정을
잘못 알고 있었나 싶어서 일정을 확인했지만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게 강의를 부탁한 분께 전화를 했더니, 강의 장소가
성당이 아니라 교육관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네요.
이 교육관 역시 미로 같은 성당 구조 덕분에 빨리 찾지 못해서
원래하기로 했던 강의 시간보다 10분 정도 늦었습니다. 특히
어디에서 강의를 한다는 안내 표지 하나 없는 주최 측에 대한
불만이 생겼지요. 하지만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하나의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쎄 이 교육관 강당에
계신 분은 20명도 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도 대부분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들뿐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본당 자원의 교육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본당의
기도 모임이 있는데, 어디에선가 제 강의를 들었던 한 자매님의
추천으로 저를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본당이라고 해서,
당연히 본당 전체 강의인 줄을 알았는데 이러한 소규모의 모임이라는
사실에 맥이 빠지고 화도 났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이 화를 강의를 듣는 분들에게 쏟아 부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20명도 되지 않는 아주 적은 숫자이지만,
그래도 저의 부족한 강의를 듣고자 어렵게 오신 분이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되었지요. 또 만약 화가 난다고 그리고 숫자가
적다고 대충대충 강의를 했다가는 그렇게 했던 제 자신에 대해 더
화가 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화가 나고 미움의 감정이 생길 상황은 우리에게 자주
일어났었습니다. 문제는 그 뒤의 일입니다. 그 상황에 대해서 또
다른 화와 미움으로 확대시킬 것인지, 아니면 그 상황을 나에게서
멈추고 오히려 좋은 쪽으로 만들 것인지는 바로 내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청주] 초대받은 당신
때때로 인간관계 안에서 겪는 갈등은 ‘기대’에서 비롯됩니다.
서로 바라는 바가 다른 것에서 비롯되는 갈등입니다. 부부도
서로에 대해 바라는 바가 달라 갈등이 시작됩니다. 부모와
자녀도 이와 같습니다. ‘기대’를 온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지만
‘기대’에만 집착하다 보면 실망을 느끼곤 합니다.
내가 바라는 바를 상대방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기대’라면
‘희망’은 그 사람이 바라는 바를 그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한테는 ‘기대’보다 ‘희망’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잔칫집에 초대받은 이들의 모습을
통해 신앙인의 ‘자선’과 ‘봉사’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할 경우
친구나 친척,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루카 14,12) 왜냐하면 그들은 잔치 후에 상응하는 보답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4,13)
그들은 잔치에 상응하는 보답을 할 수 없고 이들을 대신해서
부활 때 예수님께서 보답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4,14)
우리가 실천하는 ‘자선’과 ‘봉사’는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이 실천하는 ‘자선’과
‘봉사’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일이며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 드리는 정성입니다.(마태 6,4)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 세어 두시는 우리 아버지는 우리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마태 10,30) 내가 실천하는 ‘자선’과 ‘봉사’
는 무엇에 기대를 두며 하고 있습니까?
- 김선영 신부(청주 성모병원 원목실장)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