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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瀾亭遺墟碑記[洪良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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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瀾先生遺稿事蹟卷之二 / 實記
觀瀾亭遺墟碑記[洪良浩]
嗚呼。此古學士元先生觀瀾亭遺址也。先生以我 世宗四年登第。歷事文宗。官至集賢殿直提學。 端宗初服。謝病歸原鄕。逮端宗遜于越之淸泠浦。先生卽其江上流。築土爲臺。因樹爲亭。名以觀瀾。逐日登臨。望君所。寓丹忱。與夫人手灌園鋤圃。取蔬果納空匏。有時浮于江。達于浦。端宗上賓。先生就墓傍。泣血居廬。朝夕哭拜。盡喪三年。乃歸原州之霧巷。閉戶不見人面。從子原城君孝然。以光廟勳臣。屛其騶徒。踵門請見。先生拒而不納。光廟特除戶曹參議。矢死不起。坐必東向。臥必東首以終。蓋莊陵在東故也。方先生之在亭也。隣有嫠婦。爲人洴澼。日往江干。則先生常常先已出坐亭上。其女異之。請聞其意。先生泫然曰。忠臣不事二君。烈女不更二夫。吾之來此。不忘吾舊君故也。其女聞而泣曰。妾早齡失天。獨居難行。意將適人。今聞先生之言。身雖微賤。於心有戚戚焉。遂終身守貞云。雖愚夫愚婦。聞先生節義。莫不感激欽慕。所謂頑懦可變者。非耶。嗚呼。乙丙之際。至艱之會也。先生先見幾於未然。超然遠引。旣得大雅之明哲。末又盡節遂志。以畢君臣之義。其視六臣。所謂殊塗而一致者也。然見幾於初。猶可及也。盡節於終。泯然無跡。尤可爲難。箕子之明夷利艱貞。允爲協矣。先生諱昊。字子虛。遭時不幸。自焚其詩章著述。隱晦其跡。故事蹟無傳焉。肅廟戊寅。追復 莊陵。褒當時節義之士。特旌先生閭。又躋享于原州耘谷書院及咸安西山書院。正宗甲辰。贈諡曰貞簡。越之人。慕先生之義不已。就觀瀾亭遺墟。願以表章。而爲不泯其卓然之迹。先生之傍孫羽孫。方守原州。損廩伐石。方伯沈侍郞晉賢助成之。走人請文於余。余嘗高先生之節。而悲先生之志者久矣。書其本末。系之以辭。辭曰。淸冷之水。上有白雲如蓋。有鳥有鳥啼何苦。前有百鳥羅拜。王孫遊兮不歸。春草生兮芊綿。小亭巖臨水。水流人去何年。水無盡兮名將傳。
崇祿大夫。原任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洪良浩。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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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충신관란원선생유허비(朝鮮忠臣觀瀾元先生遺墟碑)
시대 조선
연대 1845년(헌종 11)
유형 비문
크기높이 174cm, 너비 54cm, 두께 25cm
소재지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27
서체 해서(楷書)
찬자 홍양호(洪良浩)
각자 미상
서자 임효헌(林孝憲)
지정사항 시도기념물
원호유허비
조선충신관란원선생유허비(朝鮮忠臣觀瀾元先生遺墟碑)
아아! 이곳은 옛날 학사(學士) 원공(元公)의 관란정(觀瀾亭)이 있던 옛 터이다.
공은 우리 세종대왕 4년(1422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이어 문종을 섬겨 관직이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단종이 처음 정사를 보실 때에 병으로 사직하고 원주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단종이 청령포로 물러나게 되자 공도 그 강 상류로 가서 흙을 쌓아 누대(樓臺)를 짓고 이어 정자를 만들어 관란(觀瀾)이라 이름 짓고는 날마다 올라가서 임금이 계신 곳을 바라보며 마음속의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부인과 함께 밭에 물주고 김매어 채소 과일을 거두어 빈 박통에 넣어서 수시로 강물에 띄워 (청령포로) 보냈다.
단종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묘소 곁으로 가서 여막을 짓고 피눈물을 흘리며 거처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곡하며 절하고 3년상을 치른 다음 이에 원주의 무항(霧巷)으로 돌아가서 방문을 닫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조카인 원성군(原城君) 효연(孝然)이 세조의 공신이었는데 하인들을 물리치고 문 앞에 서서 공을 뵙기를 간청하였으나
공은 거절하고 들이지 않았으며 세조가 특별히 호조참의를 제수하였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앉을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하고 누우면 반드시 동쪽으로 머리를 두다가 일생을 마치니
이는 장릉(荘陵 : 단종의 능)이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공이 정자에 거처할 때에 이웃에 과부가 있어 남의 빨래를 해주느라 날마다 강가에 가면 공이 언제나 먼저 나와서 정자위에 앉아 있었다. 그 여인이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듣고자 하니 공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나의 옛 임금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 여인이 이 말을 듣고 울며 말하기를 “제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혼자 지내기가 어려워 장차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공의 말씀을 들으니 몸은 비록 미천하나 마음에 슬프고 미안합니다.” 라 하고 마침내 죽을 때까지 정절을 지켰다고 한다. 비록 어리석은 남녀라도 공의 절의를 듣고는 감격하고 공경하여 흠모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완고하거나 나약한 사람도 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을해년과 병자년(1455~1456년)은 지극히 어려운 때였다.
공은 일이 있기 전에 미리 그 기미를 알고 초연하게 멀리 떠나갔으니 이미 큰 선비의 명철함을 보였으며 마지막에는 또 절개를 다하고 뜻을 이루어서 군신간의 의리를 다하였으니 사육신(死六臣)과 비교하면 이른바 길은 달라도 뜻은 일치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처음에 기미를 아는 것은 그래도 미칠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절개를 다하는 것은 기록이 없어져 자취가 없으니 더욱 알기가 어려운 일이다.
기자(箕子)의 명이리간정(明夷利艱貞) 어려운 때에도 절개를 잃지 않는 것이 이로움이 여기에 꼭 부합할 것이다.
공의 이름은 호(昊)요 자(字)는 자허(子虛)이다.
불행한 때를 만나서 저술한 시와 글을 스스로 불사르고 자취를 숨겼기 때문에 일과 행적이 남아서 전해지는 것이 없다.
숙종 무인년(숙종 24, 1698년)에 단종을 복위하고 당시의 절의있는 선비들을 표창하였는데 특별히 공에게 정려하였으며 원주의 운곡서원(耘谷書院)과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하였으며
정조 갑진년(정조 8, 1784년)에는 시호를 내리어 정간(貞簡)이라 하였다.
영월 사람들이 선생의 절의를 사모하는 마음 금할 수 없어 관란정의 옛 터에 표식을 하여 그 높은 자취가 잊혀지지 않게 하고자 하였는데
선생의 방손(傍孫)인 우손(羽孫)이 그 때 원주의 수령으로 녹봉을 덜어내어 돌을 다듬고 감사 심진현(沈晉賢)이 찬조하여 일을 완성하고는 사람을 급히 보내어 내게 글을 청하였다.
내가 일찍이 선생의 절개를 높이 추앙하고 선생의 뜻을 슬퍼하여 온지 오랜 터이라 그 전말을 적고 이어 글을 붙이는 바이다.
글을 올리니,
청령포 물 위에 흰 구름은 일산 같은데
새가 있어 그 새가 애달피 우는데
그 앞에 온갖 새 날아들어 절하는구나.
전에 놀던 그 왕손 돌아오지 않는데
봄풀만 해마다 나서 마냥 우거지구나.
정자와 바위 물가에 섰는데
물 흐르고 사람간지 몇 해인가
저 물이 끝없이 흐르듯 임의 이름 길이 전하리라.
숭록대부 원임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홍양호(洪良浩)는 글을 짓고,
통정대부 행 영월도호부사 겸 원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 토포사 임 ~마멸~ 는 글씨를 쓰고 아울러 전액한다.
이 기문(記文)은 받아서 간직한지는 오래 되었으나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지금까지 비석을 세우지 못하였다.
선생의 12세손 형진(衡鎭)과 정손(定孫)이 여러 종인들과 상의하여 재물을 모으고 돌을 다듬어 몇 백년간 이루지 못한 일을 능히 처리하니 그 추모하는 정성이 족히 사람을 감동시킴이 있다.
그 족질인 재인(在寅)을 보내 와서 졸필을 간청하니 사양할 수 없어 이미 기록한 것과 아울러 그 일을 위와 같이 적는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을사년(헌종 11, 1845년) 11월 일에 세움
유사(有司) 영희(永禧)·재형(在亨)·영인(永寅)·석창(碩昌)·유항(有恒)
朝鮮忠臣觀瀾元先生蹟墟碑」
嗚呼此古學士元公觀瀾亭遺址也公以我 世宗四年登第歷事 文宗官至集賢殿直提學 端宗」
初服謝病歸原鄊逮 端宗遜于越之淸泠浦公卽其江上流築土爲▨因樹為亭名以觀瀾逐日登臨」
望君所寓丹忱與夫人手灌園鋤圃取蔬果納空匏又有詩浮于江達于浦 端宗上賔公就墓傍泣血」
居廬朝夕哭拜盡喪三年乃歸原州之霧巷閉戶不見人靣從子原城召▨然以 光廟勲臣屛其騶徒」
踵門請見公拒而不納 光廟特除戶曹叅議矢死不起㘴必東向臥以東首以終盖 荘陵在東故也」
方公之在亭也隣有嫠婦為人洴辟日徃江干則公常常先已茂㘴▨上其▨異之請聞其意公泫然曰」
忠臣不事二君烈女不更二夫吾之来此不忘吾舊君故也其女聞而泣曰妾早㱓夫夭獨居難行意將」
適人今聞公言身雖㣲賤扵心有戚戚焉遂終身守貞云雖愚婦愚夫聞公節義莫不感激欽慕所請頑」
儒可變者非耶嗚呼乙丙之際至艱之會也公先見㡬於未然超然遠引旣得大雅之明哲末又盡節遂」
志以畢君臣之義其視六臣所謂殊塗而一致者也然見㡬扵初猶可及也盡莭扵終泯然無跡尤可為」
難箕子之明夷利艱貞允爲恊矣公諱昊字子虗遭時不幸自焚其詩章著述隐晦其迹故事蹟無傳焉」
肅廟戊寅追復 荘陵褒當時莭義之士特㫌公閭又躋享于原州耘谷書院及咸安西山書院 正」
宗甲辰 贈謚曰貞簡越之人慕公義不已就觀瀾亭遺墟願以表章而爲不民其卓然之迹公之傍孫」
羽孫方守原州捐廪伐石方伯沈侍郞晋賢助成之走人請文於余余甞髙公莭而悲公志者乆矣書其」
本末系之以辤辤曰淸泠之水上有白雲如盖有鳥有鳥帝何苦前有百鳥羅拜王孫遊方不歸春艸▨」
方芉綿小亭嚴臨水水流人去何系水無盡方名将傳」
崇祿大夫原任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 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㧾府都㧾管洪良浩 撰」
通 政大夫行寧越都護府使兼原州鎮管兵馬同僉節制使討捕使」
此記文受而藏之乆矣事力不逮迄未竪碑先生十二世孫衡鎮定孫謀於諸宗鳩財伐石能辦㡬百」
年未遑之事其追慕之誠有足感人遣其族侄在寅来懇㧓筆辤不獲旣爲書之并識其事如右云」
有司永禧」
在亨」
永寅」
碩昌」
有恒」
崇禎紀元後四乙巳十一月 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