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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수는 소파에 앉아 커피잔을 들었다. 박주경이 머리가 깨져 중상
을 입고는 병원에 실려간 것은 큰 사건이다. 그의 운전사에게 시켜 박
주경을 차에 실은 다음 고속도로 근처에서 차를 벼랑 아래로 밀어뜨리
고는 차 사표로 위장해 놓았지만 진땀이 났다. 운전사는 요령이 있는
놈이고 경호원 또한 이쪽과 말을 맞춰 놓고 있어서 일단은 언론에 그
렇게 보도는 되었으나 께름찍했다.
장규식은 어디로 도망쳤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박회장이 아직 의식이 없답니다. 이거 죽으면 큰일인데‥‥‥‥"
이성철이 흔잣소리처럼 말하자 유장수가 버리를 들고 입맛을 다셨
다.
"어차피 이곳이 알려지지는 않을테니까 이사장은 걱정할 것 없어
요."
. "조한철이는 태워 버리는 것이 남습니다. 그래야증거를 찾지 못하
니까요."
조한철은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각각 한쪽씩 부러지는 중상을 입
고 지하실에 있다.
유장수는 잠자코 커피잔을 들었다. 박주경이 저 꼴이 되었으니 이제
까지의 일은 허사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번 일이 없었다면 박주
경은 며칠 후에 납치된 이자영을 자신이 심문하는 비디오 태이프를 보
게 될 것이고 그것으로 유장수의 꼭두각시가 되었을 것이다.
"이봐요. 이사장. 한 사람 더 화장을 시킵시다. "
커피잔을 내려놓은 유장수가 이성철을 바라보았다. 이성철이 눈을
끔벅미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자영이 말이오, 이젠 필요 없으니까 조한철이하고 같이 태워 버
립시다. "
유장수가 자르듯 말하자 이성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차라리 그것이 낫습니다. 이곳에 잡아 두고 골치를 썪느니보다는."
이곳이 자신의 별장이므로 더욱 그럴 것이다.
바깥쪽에서 자동차의 경적이 울렸으므로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부하들은 별장 앞에서 자동차의 경적을 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더니 부하가 들어섰다.
"이천 경찰서의 김경감이 오딘습니다. "
유장수가 찌푸린 얼굴로 이성철을 바라보았다.
"왜?"
이성철이 거칠게 묻자 부하가 당황해서 머리를 저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
"혼자 왔어?"
"아닙니다, 두 사람입니다. "
이성철이 유장수를 바라보았다.
"아는 사람이오. 내가 키워 주는 놈인데, 아마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고 인사하러 온 모양입니다. "
유장수는 잠자코 그를 바라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백만 원쯤 넣어서 봉투를 만들어 놔. 그리고 이쪽으로 데려와."
부하에게 던지듯 말한 이성철이 입맛을 다신다.
"지난 달 말에도 주었는데 이놈이 재미를 붙인 모양이군. 돈이 꽤 나
갑니다. "
잠시 후에 부하의 안내를 받아 건장한 체격의 사내 두 명이 방 안으
로 들어웠다. 앞장 선 사내는 경감 계급장을 어깨에 붙인 정복 차림이
었다.
"여어, 김경감, 갑자기 웬일이시요? 연락도 않고."
김경감의 시선이 이성철을 스쳐 유장수에게 머물렸다.
"이사장님, 잠깐 여쭐 말씀이 있어서요."
"그거야 얼마든지. 자, 여기 앉아."
그러나 김경감이 옆에 선 사내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보다 우선, 이분은 서의 이영길이라는 분인데, 인사들 하시지
요."
그제서야 유장수와 이성철의 시선이 옆에 서 있는 사내에게 유심히
꽂혔다. 건장한 체격에 사복 차림인 그는 유장수와 이성철을 번갈아
바라보며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분이 이사장님과 유회장님께 급하게 물어 보실 말씀이 있다고 하
셔서요.."
김경감은 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밖았다. 그들은 자리에 앉을
생각도 없는 눈치였고 이성철과 유장수도 엉거주춤 서 있는 분위기였
다.
"김경감님, 저기 문을 닫으시오."
사내가 택으로 문 쪽을 가리키자 김경감이 서둘러 다가가 문을 닫았
다.
"물어볼 말씀이 뭐요?"
이성철이 무쪽뚝하게 물었다. KIA건 cia건 이런 나이쯤이면 조무
래기일 것이다. 그러나 KIA가 찾아온 것은 처음이어서 가슴이 뛰었
다.
"우선 앉읍시다. "
사내가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으므로 유장수와 이성철은 앞쪽 자리
에 앉았다. 김경감은 열중 쉬어 자세로 문을 가로막듯 서서 이쪽을 바
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또한 마음에 걸린 이성철이 힐끗거리며 그를 바라보았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나는 KfA의 고문 자격을 가진 사람이지 정식 직원이 아닙니다. "
사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이성철과 유장수를 바라보았
다.
"신문은 읽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이번에 새로 임명된 로스
만 국장이 이곳 KIA에 협조를 요청해서 고문 자격을 갖게 되었습니
다. 이번 일만 끝나면 그만둘 것입니다. "
사내의 시선은 밝았고 표정은 자연스러웠다. 소파에 둥을 기대고 앉
아 있는 모습도 어색하지가 않다. 유장수는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것
을 느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우리는 지금 바빠서. "
이성철이 이제는 긴장한 듯 이맛살을 혀푸리며 물었다. cia의 로스
만 국장 이야기가 이 순간에 나온 것은 뜻밖이었고 그것도 그를 불안
하게 하는 것이다.
"여러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마약거래요. 특히 당신, 유장수씨는 한
국의 마약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시던데."
"말도 안되는 소리."
유장수가 번쩍 턱을 들었다.
"당신이 cia인지 KIA의 첫인지는 모르지만쓸데없는 소리 집어치
우시오.내가 문제가 있다면 당신 같은 조무래기한테 심문을 받을 리
가 없어."
그는 눈을 치켜 뜨고 앞에 앉은 사내를 쏘아보았다.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런 일은 극히 중요한 문제야.
정치적인 문제라구. 딘데없이 나타나서 유도심문을 하지 마. 내가 곧
당신 실장한테 알아볼테니까, "
그러자 사내가 입술 끝만 움직여서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그는 머리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고 선 김경감에게 말했다.
"김경감, 데리고 들어와요."
"알았습니다. "
그는 고분고분하게 대답하고는 방을 나갔다. 이성철은 이맛살을 피
푸리며 유장수를 바라보았다. 유장수의 표정도 굳어져 있었다.
"두 번째 일이 있는데, 그것은 당신이 이자영이라는 사람을 납치해
서 감금하고 있다는 것이오."
사내가 말하면서 방 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아마 이 집 안에 있을텐데, 그렇지 않습니까?"
이성철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이제는 온몸이 조여드는 것 같이 굳어
진다. 그는 어금니를 물었다.
문이 열리더니 김경감과 사내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머리를
든 유장수가 눈을 치켜 뜨고는 입을 벌렸다. 서울의 본사에 있어야 할
전우석인 것이다.
그는 곧장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사
내의 얼굴이다.
"부르셨습니까?"
사내 앞에 다가선 전우석이 정중하게 물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유장
수의 가슴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많았다.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유장수씨가 마약거래를 한 사실이 없다고 해서."
"말도 안됩니다. 지금도 창고에는 마약이 있고,이제까지 거래해 온
장부가 제 손에 있는데요."
전우석은 유장수에게 옆모습만 보인 채 말을 이었다.
"마약자금의 사용처까지 제가 모두 기록해 두었습니다. "
"이놈의 새끼, 나를."
안깐힘을 쓰듯 그렇게 말한 유장수가 말을 멈췄다. 얼굴을 일그러뜨
리고 있었는데 충격 때문에 배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당신은 한국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인물이야. 거기 당신, 당신도 그
렇고, "
사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으나 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는 분명하게 들렸다.
"그래서 여러가지를 생각해 보았지. 당신들을 어떻게 할까 하고."
"개수작하고 있네, 이 자식이."
이성철이 버럭 소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가 원데 이 자식아, 젊은 놈이 건방지게! 당장 꺼지지 못해!"
그러자 갑자기 적 하는소리가들렸고 이성철이 소파에 엉덩이를 렇
으며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숙여 한쪽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어
깨에 5백 원파리 동전만한 구멍이 났고 금방 피가 솟아올랐다.
유장수가 눈을 치켜 뜨고는 자신의 가슴으로 향해 있는 총구를 바라
보았다.
"넌 누구냐?"
유장수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어이구."
그때서야 어깨를 움켜쥔 이성철이 신음소리를 내었다.
사내가 그의 시선을 받더니 표정 없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고영무, 쓰레기들을 청소하러 한국에 왔다. "
유장수가 단단하게 상체를 굳혔고 이성철은 신음을 멈췄다.
고영무가 입 안에 물었던 것을 빼내자 둥글게 휘어진 철사 끝에 조
그만 플라스덕 덩어리가 끼워진 물체가 나왔다. 이제는 신문에서 보았
던 고영무의 얼굴이었다. 양쪽 볼의 두들한 부분이 없어진 그의 얼굴
을 바라보며 유장수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너희들 둘만 없어지면 되겠더군.그 래서 김경감에게 부탁을 했다.
김경감이 이사장과 친하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지."
고영무가 머리를 돌려 유장수를 바라보았다.
"유장부, 할 말이 있으면 해라."
"일이 더럽게 되었어, 내가 너 같은 조무래기에게 당하다니."
던지듯이 말한 유장수가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놈이라고 들었다. 어서 죽여라."
고영무가 머리를 끄덕였다.
"과연 보스답다. 너는 이성철이와 서로 맞잖아 죽는 것으로 하겠다.
그래서 ‥‥‥‥"
고영무는 가음 호주머니에서 소형 권총 하나를 꺼내더니 그것으로
유장수를 겨누었다.
"할 말은? 남길 말이 있다면 전해 주마."
"너하고는 원한이 없다. 넌 꼭 빚을 감는 놈이라고 들었는데 이번은
내 몫을 가로채려고 죽이는 것이구나."
"그란건 그럼 저승에 가서 물어 보아라. 너 때문에 누가 죽었는가
를."
리볼버의 총구에서 불꽃이 튀었고, 문 앞에 서 있던 김경감은 무의
식중에 어깨를 흠칫 치켜 을렸다가 내렸다.
이마 한가운데에 추멍이 들린 유장수는 벌컥 머리를 소파 뒤쪽으로
젖혀 놓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살려 주십시오, 형님, "
이성철이 온 얼굴을 찌푸리며 고영무를 바라보았다. 그는 상체를 탁
자 위로 숙였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제발, 저는"
"피라미 같은 놈."
"형님, 저는 유장수가 시키는 대로."
고영무의 오른손에 쥐고 있던 충구에서 불꽃이 튀었고 가슴에서 솟
아나는 핏줄기를 바라보던 이성철이 탁자 위로 상체를 떨어뜨렸다.
고영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우석과 김경감이 긴장한 얼굴로 그
를 바라보았다.
"시체는 저회들이 처리하겠습니다. "
김경감이 서두르듯 말했다.
"제가 서로 맞잖아 죽는 현장을 목격했으니까요. 염려 마십시오."
"이자영이는 어디로 돌려 보낼까요"
전우석이 묻자 고영무가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고영무가 이윽고 머리를 끄덕였다.
"집으로."
"넌 여기서 기다려."
차 밖으로 따라나온 최대광에게 발하고 난 고영무는 앞쪽의 아파트
를 바라보았다. 오후의 햇살을 비스듬히 받은 유리창 한 장이 이쪽에
빗발의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반짝였다.
"오래 걸리실거지요?"
불쑥 최대광이 물었으므로 고영무가 그를 바라보았다. 최대광의 입
술 끝이 치켜 올라가다가 내려왔다.
"왜?"
"아닙니다, 그냥."
고영무는 몸을 돌렸다.
김영지는 아파트 현관을 나와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햇살이
비치고 있었으나 바람이 제법 세게 부는 날씨였다. 가벼운 스웨터 차
림의 그녀가 양 손을 스웨터 주머니에 찌르고는 어깨를 움츠리고 있
다.
고영무가 그녀 쪽으로 다가가자 김영지는 주춤 움직임을 멍추었다.
어깨 위까지 닿은 머리칼이 바람애 날려 볼 위를 덮고 있었다. 화장기
가 없는 얼굴은 창백하게 보였다.
그가 다가가 그녀의 바로 앞쪽에 멈춰 서자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제는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과 곧은 콧날의 윗부분만
보였다.
바람결에 그녀의 냄새가 코에 스며들고 있었다. 맑고 아늑한 냄새였
다. 부드럽기도 했다.
"아버지한데 이야기를 들었어."
그녀의 이마를 향해 고영무가 말했다.
"바람이 세어서 많이 날려.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자."
고영무가 그녀의 팔 쪽으로 반쯤 손을 뻗었을 때 김영지는 몸을 틀
어 아파트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헐렁한 긴 치마는 곁은 감색이
었다. 치마 사이로 두 다리가 힐끗 보였는데 가벼운 단화를 신고 있었
다.
어중간한 시간이어서 카페에는 손님이 한 사람도 없었다. 남자 종업
원이 커피를 그들 앞에 내려놓고 돌아갈 때까지 그들은 입을 열지 않
았다.
"어머니는 차도가 있다면서, 민선생님한테 들었어."
고영무가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놀랐는데, 아버지 말씀을 듣고 나서야 영문
을 알 수 있었어."
"나한데 직접 물어 볼 수도 있었을텐데."
고영무는 찻잔을 들고는 잠시 검은 액체를 내려다보다가 잔을 내려
놓았다.
"널 보고 싶었어. 네가 없어서 무척 허전했어."
문득 김영지가 머리를 들었다.
"그 여자, 밀리카 그 여자한테도 그런 말을 하셨어요?"
그녀의 말소리는 또렷했는데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머리를 돌렸다.
"나한테 한 말과 똑같이,"
고영무는 그녀의 옆얼굴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리고 날 만난 것은 동정심 때문이라고."
"난 당신을 믿었어요. 당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모두."
"그 여자는 당신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고 했어요. 3개월째라고. 그
런데 어떻게 나에게‥‥‥‥"
말끝이 떨려 왔으므로 그녀는 침을 삼키더니 찻잔을 쥐었다. 그러나
마실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고영무는 그녀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과 안의
핏기가 붉게 비치고 있는 투명한 손톱이 눈에 들어 왔다.
문득 머리를 든 김영지가 고영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손
가락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시선을 보자 찻잔에서 손을 떼고는 주먹
을 쥐었다가 이내 탁자 밑으로 손을 내렸다. 고영무는 시선을 그대로
둔 채 들지 않았고 입도 열지 않았다. 김영지는 그의 얼굴이 차갑게 느
껴지도록 굳어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신이 밀리카를 나에게 보했다고 하더군요. 나도 당신이 직접 오
지 않았던 것에 실망했었어요."
"당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도 했어요, 나 때문에 괴로워한다고
도 했고."
김영지는 탁자에 가슴이 닿도록 상체를 붙였다.
"날 사랑하세요? 지금도?"
머리를 든 고영무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한동안 둘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고 먼저 시선을 띤 것은 고영무였다. 이 여자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수없이 했었지만 한 번도 듣지 못하다가 죽는 순간에
억지로 들었던 여자도 있다.
"모두 내 잘못이야. 어떤 인연이건 내가 이렇게 만들었다. "
고영무가 머리를 돌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짐숭처럼 본능에 따라 움직이기만 했는데, 난 다른 사람의 감정 따
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어. 난 죄책감을 느편다. 나는 내 욕심만 채웠
어."
고영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김영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얼굴
이 달아올랐고 치켜 뜬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카페를 나서는
그의 인기척만 들었다.
이자영은 젖은 수건으로 조한철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었다.
"머리 아픈건 어때요?"
조한철의 검은 눈이 이쪽을 물끄러미 을려다보았다.
"괜찮아, 자영씨. 이젠 그만 돌아가 봐."
"괜참아요. 잘되고 있으니까요. 유장수와 이성철의 부하들 대부분이
이쪽으로 흡수되었어요."
이자영이 수건을 내려놓고는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
다. 이젠 지역의 보스들도 따라 들어을 것이다. 장규식과 이성철만 제
거하면 편다고 조한철도 생각해 온 터였다.
"난 자영씨가 이렇게 날 간호해 주리라고는‥‥‥‥"
조한철이 성한 팔을 들어 이자영의 손을 쥐었다.
"고마워, 자영씨."
이자영의 손 한쪽이 다시 그의 손둥을 덮었다.
"같이 있을게요. 한철씨가 희원하고 나서도."
"날 위해 목숨을 바치려고 했던 남자여요, 당신은 내 무엇을 드려도
모자라요."
"보상받을 생각은 없었어."
"알아요. 나도 그것 매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난 다시 시작하겠
어요. 한철씨와 함께."
조한철이 그녀의 손을 힘주어 쥐었고 이자명은 그것을 감싸 쥐었다.
이자영의 눈이 갑자기 치켜 떠지며 그것이 빛을 내었다.
"알아요? 이제까지 나를 감동시킨 남자는 한 사람도 없었어요. 아무
도. "
이자영이 눈을 깜박이며 조한철의 이마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있어요. 나만큼, 아니 나보다 나틀 더 아끼는
사람, 그것이 당신이었어요. 난 이제 다시 시작하겠어요. 당신과 함
께, "
"당신을 사랑해, 자영씨."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만크ㅁ, 당신처럼 되도록 노력할게요. 그
렇게 될거예요."
구름 한 점 떠 있지 않은 파란 하늘이었다. 11월 초순이어서 날씨는
제법 쌀쌀했으나 햇살은 밝았다.
공항 대합실의 유리벽을 통해 비행기의 이착륙을 바라보던 고영무
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전 11시가 되어 있었다.
"고향에서 부모님이 올라오셔서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모셔다 드리
고 온다고 했으니까 곧 올검니다. "
옆쪽 의자에 앉아 있던 신용만이 말했다.
최대광의 부모님이 장성에서 올라와 사흘간 최대광과 함께 보내고
었었다. 호강시켜 드리겠다면서 일급 호텔의 스위트룸을 잡아 드렸으
나 부모님은 하루가 지나고 나자 진저리를 내고는 호텔을 나왔다. 도
무지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없는데다가 호텔 안에 쉴 곳도 없다는 것이
다. 사람구경도 사람 나름이지 외국 사람 보기가 징그럽다면서 그들은
이틀째 되는 날은 아예 변두리 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영무는 다시 유리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규식과 이한기 등의
보스들이 공항에 배웅을 나왔다가 조금 전에 돌아갔다. 그들은 이제
서울에서 단단히 기반을 갖춘 조직이 되었고 걸릴 것이 없었으므로 표
정들이 밝았다.
이자영은 공항에 나오지 않았는데 그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이
쟤 조한철과 함께 있겠다면서 일에서 손을 떼었다. 신용만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세 시간 전에 여관에서 나갔다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상관없다, 비행기야 기다릴테니까."
활주로에는 콜름비아에서 페르난도가 보내 준 20인승 장발 제트기
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한국에서 보고타로 들어갈 때에는 LA
와 맥시코시터를 거친 기역자의 비행이었다. 그러나 지긍은 서울에서
보고타까지 직행하게 되어서 시간이 열 시간은 절약될 것이다. 패르난
도는 벌써 제조된 마약을 걷어 놓고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용만
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형님, 형님이 언젠가 그러셨지요. 엘도라도(ELDORADO)는 황금
의 땅이라고. 그때는 그냥 넘겨 들었는데‥‥‥‥"
그의 얼굴에 웃음이 떠을랐다.
"그곳에서 우리는 황금 대신 엄청난 것을 얻었습니다. 그렇지 않습
니다."
대합실 입구 쪽으로 머리를 돌린 고영무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최대광이 계단을 을라오는 것이 보였다. 머리와 상반신이 드러나더
니 하체가 치솟아오른다. 그리고 그 다음에 솟아오르는 것은 김영지의
모습이었다.
모래색 바바리 코트를 걸친 그녀는 머리가 나타났을 때부터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신용만이 힐끗 이쪽을 바라보고는 따라 일어섰다.
"형님, 모시고 왔습니다. "
다가선 최대광이 커다랗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저, 이것저것."
힐끗 최대광을 바라본 고영무가 김영지에게로 다가갔다.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으나 그녀의 눈가는 조금 젖었다.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
았는지 입술은 물기에 젖어 있었다. 그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같이 가겠어요."
그녀가 조그맣게 말했는데 대합실의 소음 속에서도 그 발은 고영무
에게 분명하게 들렸다.
"당신이 절 받아들여만 주신다면요. 왜냐하면 전 당신을 사람하기
때문에 ‥‥‥‥"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떨리지는 않았다. 고영무는 어금니를 물
고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 두 눈의 근육이 팽팽
하게 굳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가슴에 가득 무엇이 들어차 있었으므
로 주먹으로 내려치고 싶었다.
"당신한테 강요하지 않을게요. 그냥 옆에만 있을게요."
최대광은 밀리카가 호텔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밖에 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영지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는 그는 내용에 대
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최대광이나 신용만에게 털어놓고 이
야기해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영무가 반 걸음쯤 다가섰다.
"미안해, 영지,"
김영지가 불안한 듯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 눈이 두어 번
깜박였다.
"하지만 나하고 같이 가 주겠다면‥‥‥‥"
고영무는 크게 습을 들이마셨다.
"같이 가."
머리를 끄덕인 김영지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쥐었다
"제가 당신의 가슴을 채워 드릴게요, 그분 대신."
그녀를 내려다본 고영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최대광과 신용만이 다가왔다.
"형님, 가시지요.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
머리를 끄덕인 고영무가 김영지를 돌아보았다.
"어디로 가요?"
그의 팔을 끼면서 김영지가 물었다. 둔한 최대광은 그것도 이야기하
지 않은 모양이었다.
"엘도라도, 황금의 땅으로."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자 김영지가 상체를 그에게 붙여 왔
다.
신용만이 그것을 보더너 얼굴을 활짝 펴면서.웃었고 최대광은 휘적
거리는 걸음으로 앞장을 쳤다.
(끝)
저자 후기
70년대부터 거의 20년 가깝게 수출업을 해온 나에게는 책을 쓴다는
것이 생산활동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는 수출이 곧 애국이었다. 생산량 증가를 외
치며 우리는 달러를 벌어들였다.
나는 열심히 살아 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까지 내가 하는 일
에 대해서는 열정적이었다. 뒤를 돌아보고 멈춰 서서 주춤거린 적은
없다. 지금도 그렇다. 도무지 시간이 아까워서 세 시간 이상 잠을 자지
못한다.
그것이 버릇이 된 지 2년이 되었다. 바쁜 인생 아닌가? 내가 잠을 자
고 있는 동안 경쟁자들이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글을 쓰고 있는 때가 행복하다, 놈들은 자빠져 자고 있을테니
까. 화창한 일요일 오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가족과 함께 야외에 있
거나 놀러 갔을 확률이 높다.
나는 읽히는 책을 쓰기로 작심하였는데, 이것은 곧잘 팔리는 책을
쓴다는 말과 같다. 나에게 독자는 바이어고 나는 제품을 생산해 내는
생산자라는 고정 관념이 배어 있는 것이다.
경쟁사회에서 다른 생산자를 누르고 판매량을 늘리려면 끊임없는
제품개발이 펼요하다. 투자 없는 제품개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OOD MAKER'는 바이어에게 미래에의 비전을 제시해.줘야 한
다. 이를테면 좋은 품질과 좋은 가격, 그리고 더 나아가서 희망이다. 꿈
이다.
상품만 믿고 제품개발을 게을리하다가 쇠고랑을 찬 생산업자를 나
는 부지기수로 보아 왔다.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내 상품을 구입하는 바이어들에게 이것 하나는 분명히 심어 주
었다고 자부한다. 미래에 대한 의욕이다.
꿈이 없는 사람이 없고 희망을 잊어버린 사람 또한 없다. 설령 당치
도 않을 것 같은 꿈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것을 이루겠다는 집념을 품
는다면 나는 그 사람의 인생의 반은 성공한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
는 도달한다.
만일 이루지 못하고 죽는다 손치더라도 그는 꿈 없이 방황하는 사람
들보다는 행복한 삶을 산 것이 된다.
나는 내 상품을 사 가는 바이어들에게 그러한 꿈을 심어 주고 싶었
다. 성취의 만족을 상상하게 해서 잃었던 의욕을 찾게 하고 싶었다. 그
리고 미리 성공의 연습을 시켜서 나약해져 가는 세태에 자극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나도 그것이 필요했다.
나는 이제 바이어들의 반응으로 내 의도가 그들과 통하고 있다는 것
을 확신하고 있다. 우리는 다시 20년 전의 꿈과 의욕에 불타는 시절로
돌아갈 것이다.
4월에 돌아가신 어머니께 이 책을 보여 드리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칠순의 어머니는 언제나 내 책의 첫 독자였는데, 잘난 주인공을 보
시며 흐뭇해하셨다. 암인 것을 아시면서도 마지막 날까지 투쟁하신 어
머니, 나는 어머니의 은혜를 갚을 수가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고 있
다.
끝까지 참아 주신 김래경 사장과 황경회 부장, 그리고 여러분에게도
감사드린다.
1993. 9.25
이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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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언제 보아도 시원시원한 스토리 잘보았습니다
몇날 몇일을 넋놓고 정신없도록 재밌게 잘 읽었네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역시 추리소설은 이원호 작가십니다.두번째 즐독햇습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