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요한계시록 2장 12-17절
설교제목 : 사탄의 왕좌 한복판에서
베네딕트 규칙서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다리며 경건과 절제의 삶을 살아가는 사순절을 맞이했습니다. 이 사순절의 시간을 통하여 낡은 태도와 구태의연한 자세는 벗어내고 영혼이 맑아지고 다시 태어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베네딕트 규칙서에서는 세 가지 가르침이 있습니다. 순명(oboedientia), 정주(stabilitas), 정진(conversatio)입니다. 순명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훈련입니다. 수도원의 규율에 순복하는 자세를 가지며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순명은 경청으로 통하여 시작하고, 들은 바를 실행함으로 성취합니다. 순명을 위해서는 잘 듣는 것이 우선해야 합니다. 정주는 머무는 것입니다. 수도자는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머무는 것입니다. 나무가 성장하고 꽃과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우리 또한 잠시 멈추고 그 자리에서 머무는 태도를 통하여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정진은 우리의 푯대를 주님삼고 그 길을 따라가는 훈련입니다.
이 세 가지 훈련의 가르침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됩니다. 진정한 권위에 순복하지 않고 경청하지 않으면 갈등과 불화가 생기고 발전할 수 없습니다. 최근 불거진 국가 대표들간의 다툼에서 벌어진 사태에서 순명의 태도를 곱씹게 됩니다. 경청하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순명을 이룰 수 없습니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은 이미 발전의 가능성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 시대에는 한곳에 뿌리내리려 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이것저것을 하면서 자신의 욕망과 이상을 쫓아 배회합니다. 멈추어서 머무르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진실함으로 뿌리 내려 하나를 진득하게 해내는 태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정진의 자세에서 중요한 것은 그 방향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는 참된 푯대도 보다는 유혹하고 미혹하는 푯대가 도처에 있습니다. 불나방처럼 화려한 불빛에 이끌리면 우리는 타서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정진하되 내가 바라보고 나아가는 푯대가 무엇인지를 잘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사순절의 기간을 통하여 우리에게 순명, 정주, 정진의 태도로 성숙하고 다시 태어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양날 칼을 가진 분
요한은 밧모섬에서 주님께 계시를 받고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편지합니다.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에 이어 버가모 교회에 편지를 씁니다. 버가모 교회를 향한 서신의 발신자이신 주님을 가리켜 “날카로운 양날 칼을 가지신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리한 양날검을 가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이 검은 심판과 판결, 분별을 상징합니다. 무디지 않고 날카롭다는 것은 이 검의 공격성과 신속성, 파괴성, 확실함과 명료함을 암시합니다. 칼을 든 주님은 한편으로 모든 불의함을 심판하고 판결하시는 분이시고, 다른 한편으로 분별하고 분리하여 새로운 삶의 이행을 돕는 분이십니다. 날카로운 양날칼을 가지신 분의 형상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느냐가 중요한 듯 보입니다. 주님과 온전한 연결이 되지 않은 자는 양날검을 가진 분 앞에서 두려움과 불안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연결된 자는 양날검을 가진 분 앞에서 해방과 변화, 기쁨의 때가 될 것입니다.
사탄의 왕좌 한복판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어디서 거주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13)”
버가모 성도들이 거주하는 장소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라고 일러주십니다. 사탄의 왕좌는 인간의 정신을 압도하는 악마의 세력의 중심이며, 강력한 권력의 자리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엄청난 핍박의 상황에 놓여 있었고, 버가모 교회 지도자로 추측되는 안디바는 거기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당시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고 믿음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탄의 왕좌 한복판에서도 안디바는 주님을 향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죽임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적 공격과 핍박은 없지만, 현대 대중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는 사탄의 권력은 여전히 인간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대중의 무의식적 투사를 짊어진 이상적 지도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가 개인과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무의식적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선판에 다시 등장한 도날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인기는 여전합니다. 여러 경선에서 승리를 거두며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미국사회의 대중들은 경제부흥과 넉넉한 살림살이를 더욱더 보장하려는 국수주의의 형태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지도자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권력 콤플렉스의 화신을 향하여 우리도 모르는 사이 절대적 지지를 보내고 있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스스로 단순히 예배 잘 드리고, 교회 잘 다니는 것으로는 이 무의식성을 탈피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사탄의 왕좌에 머리를 조아리는 형국인 것입니다. 우리가 경배하고자 하는 것이 사탄의 왕좌, 권력의 표상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살피는 태도가 어느 때보다 요청되고 있습니다.
니골라당의 가르침
그런데 사탄의 왕좌가 더 무서운 것은 눈에 보이는 권력의 핍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발람이 발락을 시켜서 올무를 놓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하는데 있습니다(14). 민수기에 보면 발람왕은 발락 예언자를 시켜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 했습니다. 돈으로 매수하여 거짓 예언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형태의 모습을 니골라 당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니골라는 신약성서에서 일곱 집사 중 한명으로 사도행전에 등장하고, 요한계시록 2장 6절과 2장 15절에 등장합니다.
니골당의 행위를 두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는 헬라식 이분법적 영향 하여 육체를 열등하고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육신으로 죄를 지어도 영혼이 깨끗하면 죄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둘째는 돈을 받고 가르침을 전수하려는 발람의 행태가 바로 니골라당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왕좌가 판을 깔아놓는 은밀한 유혹입니다. 돈에 사로잡히는 형국입니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식입니다. 문명의 전환기에 자원이 축적되고 통용되는 화폐가 생기면서 돈은 막강한 힘을 행사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자본이 가진 힘은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돈이 왕좌에 앉아서 사람들의 마음을 조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왕좌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최대의 위험일 수도 있습니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고, 돈으로 뭐든 살 수 있다고 확신하며 자본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려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미 사탄의 왕좌 한복판에서 끊임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돈이 왕좌에 앉아서 뭐든 할 수 있다고 거짓된 가르침으로 미혹당한 버가모 교회에 던지 말씀을 오늘 우리의 가슴으로 새겨야할 메시지입니다. 버거모 교회를 향하여 회개하라 말씀하십니다. 방향을 전환하라는 것입니다. 근본이 흔들리고 미혹될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다시 주님으로 향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감추어진 만나와 흰 돌
그런 사탄의 왕좌 한복판에서 권력과 돈에 미혹된 자들에게 회개하여 이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감추어 둔 만나를 주겠고, 흰 돌도 주겠다. 그 돌 위에는 새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돌을 받는 사람 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17).”
이기는 자에게 감추어진 만나와 흰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만나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사십년동안 하늘이 기적적으로 먹이신 하나님의 양식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할 때 하늘에 하얀 이슬같은 것을 내려서 40년 동안을 그들을 먹이신 하늘의 양식이자 기적의 음식이었습니다. 이기는 자에게 금생과 내생에 하늘의 양식, 기적의 음식으로 영혼의 배고픔을 해결하시어 영적 자양분을 공급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 양식으로 풍족하고 배부르게 살고 있습니다. 먹방 투어와 먹튜버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더 맛있는 것을 찾아 다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트렌드이고 소비성향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배부르게 먹고 있지만, 실상은 허기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이 영적 허기까지 채울 수 없는 법니다. 정신적 만족과 배부름은 창조적인 삶에서 우리 나오고, 내 가치를 누군가에게 아름답게 공여될 때 발생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자들에게 자신의 천복을 따라 운명의 길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자에게 그 하늘의 양식을 주실 것입니다. 그 만나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과 접촉된 자만이, 자신의 운명의 곡진하게 수행하는 자에게 그 만나는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것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새 이름이 적힌 흰 돌은 무엇입니까? 흰돌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있습니다. 당시 풍속에서 재앙을 막기 위해 흰돌에다 이름을 새긴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재판 과정에서 배심원들이 무죄표시를 했던 흰돌로 보기도 합니다. 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우승자의 이름을 새긴 흰돌로 봅니다. 연회장에서 초대의 표식물로 사용한 흰돌로 보기도 합니다. 개연성이 있어보이는 것은 신앙의 경주에서 이기는 자에게 승리한 자의 이름을 새긴 흰돌의 의미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잔치에 참여하는 표식으로서 흰돌입니다. 새이름을 적는다는 것은 정체성의 변화이자 인격의 재탄생을 표현합니다. 이기는 자는 새로운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고 변환의 표식물(연금술에서는 알베도, 백화, 결정화)인 흰돌에 새겨져 자신의 존재를 확고히 보증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궁극의 지향점일 것입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감추어진 만나를 먹고, 인격의 변환을 통하여 새 이름이 적힌 흰돌을 가지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