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선비 최부 표해록' 이야기를 다시 잡고 손질을 하고 있습니다... 방금 고친 글입니다....이 글은 느닷없이 왜? 그냥... 아내가 책 낼돈을 안줘서 항변하듯 슬픈 음악 틀어놓고 다시 읽으며 신세한탄 중.......최부의 후손인 탐진 최씨 집안에도 연락을 했는데 회장님이 90이 넘으신 분으로 마음은 굴뚝이라 하시던데 여직 소식이.....'4박5일 심양록'이나 '베이비부머를 위한 세레나데' 같은 글 집을 공짜로 내자면 최부선생 글이 우수문화콘텐트라나 뭐 그런데 당첨이 되어야 그 밑돈으로 낼 수가 있는데 올해 미끄러지고 말았네요... 내년 한 번 더 해보고 안되면 최씨 집안에 그냥 무료로 증정할까 생각 중...이 글을 아내가 보면 정말 좋으련만...
25. 장보와 최부의 인연
윤1월 23일 파총관은 최부로 하여금 42인을 모두 이름을 불러 세우도록 했다. 그리고 천호인 적용과 군리 20명을 차출하여 호송을 맡겼다. 육십 명도 넘는 인원이 떠나는 행렬이니 아마도 그 모습은 장관이었으리라. 더욱이 최부와 그의 배리등에게는 가마도 대령해 주었다. 그런데 호송군 중 한 사람이 병을 핑계되고 걸을 수 없는 척을 하자 그에게도 가마를 대 주었다. 최부는 그에 대해 간교한 자라고 했다. 알다시피 호송군들은 대개 인사고과가 C 아니면 D등급인데 그자는 당연 D등급을 받은 자로서 양산해란 자였다. 가는 길은 묘하게 지난번에 끌려갈 때 지나갔던 포봉리를 다시 가는 바 허청과 적용이 그곳 이장을 국문하여 말안장을 빼앗은 사람을 잡아서 관사에 보고하고 말안장을 돌려받게 해주었다. 이를 보아서도 국법이 올바르게 존재하는 시대 상황이다.
윤 1월 24일 새벽에 천암리를 지났는데 마을 서쪽에 있는 산 위쪽으로 석벽이 높게 솟아있는데 홍문처럼 보이는 동굴이 있었기 때문에 천암이라 불린다고 했다. 그리고 다다른 곳, 건도소. 그곳에서 최부 일행은 건도소의 천호인 이앙을 만났다. 천호 이앙(李昻)은 체구가 장대하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갑옷과 무기를 갖추었다. 이앙이 이끌고 성문으로 들어갔는데 문은 모두 겹성으로 되어 있었고 고각(鼓角, 북과 뿔피리)과 총통(銃熥, 총과 화약)의 소리는 바다와 산을 진동시켰다. 그 크고 작은 피리는 끝이 모두 굽어서 부는 사람의 미간과 눈 사이를 향하였다. 성안의 사람과 물건, 저택은 도저소보다 더 풍성해 보였다.
이앙은 최부를 이끌고 한 객관에 이르렀다. 적용 · 허청 · 왕광 · 왕해(玉海) 등과 건도소에 있는 그 이름은 잊었지만 성이 장(庄)이니 윤(尹)이니 하는 성품이 중후한 노관인(老官人)과 함께 모두 탁자의 좌우에 둘러서서 표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앙은 당(堂)에 올라 빈주의 예를 행할 것을 청하여 이앙은 서쪽계단으로 올라가고 최부는 동쪽계단으로부터 올라가서 서로 상대하여 두 번 절한 다음에 다과를 접대 받고 또 종자들에게 술과 고기를 먹이고 자못 정성의 뜻을 보였다.
성이 윤인 노관인은 정보 등을 이끌고 사택으로 가서 음식을 먹이고, 그 처첩과 자녀들에게 예를 표하도록 하니 그 인심의 순후(淳厚)함이 이와 같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어떤 한 사람이 병오년(1486)에 등과한 소록(小錄)을 가지고 와서 최부에게 보이며 자랑을 했다. “이것은 내가 과거에 급제한 방록(榜錄)입니다.”라고 하더니 방록 중에 장보(張輔)라는 2자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내 이름이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묻기를
“그대의 나라 역시 등과한 자를 귀하게 여깁니까?”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나라 제도는 초야의 선비로서 등제한 자는 모두 관에서 봉록(俸祿)을 지급하고, 문려(門閭)를 정표(旌表)하여 ‘진사급제 모과 모등인’이라는 글을 써서 내려준다.”고 으쓱하며 말을 하였다.
그는 최부를 이끌어 그의 집에 이르렀는데, 그 집 앞 거리에는 과연 용을 새긴 석주로 2층 3칸의 문을 만들었는데 금색과 푸른빛이 눈부시도록 빛났다. 그 위에는 크게 ‘병오과 장보의 집’이라는 표액(標額)이 쓰여 있었다. 장보는 대개 자신이 등과한 것을 신에게 과시하였다. 최부 또한 지지 않으려 부탄(浮誕, 경박하고 허황함)한 말로 그에게 자랑하였다.
<“나는 거듭 과거에 급제하여 쌀 2백 석을 받았고, 정문은 3층이니, 족하는 나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장보가 그것을 어찌 알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최부가 나의 정문은 먼 곳에 있으니 보일 수가 없으나 나는 여기에 문과 중시소록이 있다고 하고는 곧 (소록을) 펼쳐 보이니 장보는 소록 증의 관직과 이름을 보고 꿇어앉아 말하기를 “내가 정말로 당신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상황에서 보듯 조선이나 명나라는 제도와 관직이 성성한 시대 사회였다. 최부가 중시소록을 지참하고 다닌다는 것이 참 이채롭고 얼마나 중시 여겼는지 알 듯도 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윤 1월 25일 이앙, 허청, 왕광 등등이 배를 타고 떠나는 최부 일행을 전송하기 위해 나왔다. 드디어 월계순검사( 수상한 자의 검문과 체포등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는 곳)에 이르러 짧은 교류지만 그들은 석별의 정을 나눈다. 이앙이 먼저 손을 잡고 천 년 만에 만 리 밖에서 한번 만났다가 곧 헤어지니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자 최부가 말을 잇는다. 이럴 때 청산유수라 하고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비유를 하는 것이 아닐까. 격을 갖춘 최부의 말이 의젓하고 참 맛깔스럽다.
<제가 올 적에는 장군께서 수백 내지 천여 명의 군인으로 성을 둘러싸 깃발이 어지럽게 펄럭이고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으니 이는 장군께서 먼 지방 사람에게 위엄을 보이신 것입니다. 제가 사관에 머물 적에는 당에 오르게 하였는데 예절이 틀림없고 음식을 대접하는 데 뜻이 더욱 두터웠으며 마음을 터놓고 성의를 보여서 처음 보고도 옛 벗과 같이 친밀하였으니 이는 장군께서 먼 지방 사람을 관대하게 대하신 것입니다. 제가 떠날 적에는 성 서쪽 까지 걸어 나오고 멀리 바다 모퉁이까지 전송하여 저를 부축하여 배에 태우고 글을 지어 작별하였으니 이는 장군께서 먼 지방 사람을 보내심이 후하신 것입니다. 서로 만난 지 하루가 못되었는데 엄함으로써 위엄을 보이고 관대함으로써 웅대하고 두터움으로써 작별하였으니 그것은 반드시 뜻이 있어서일 것입니다.(중략)
저는 조선의 신하요 장군은 천자의 지방을 맡은 신하인데 천자의 자소지심(소국을 아끼고 어루만진다는 뜻)을 체현하여 먼 나라 사람을 대우하심이 이처럼 지극하시니 이 또한 충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의 두터운 온정은 제가 이미 깊이 느낀 바이지만 하루도 장군 및 장, 윤 두 관인과 함께 조용히 담화하며 회포를 풀 짬을 얻지 못하였으니 백 년 한 평생을 만 리 밖에서 만날 수 없는 그리움이 어찌 그치겠습니까.>
사람의 인연,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 인연은 억지로 이어지거나 이루어지는 것 같지도 않다. 그들 또한 이별을 하면서 불식 중에 그런 의미의 말을 서로 담고 있다. 만남 그리고 이별, 이에 뒤이은 회한에 덧붙여 떠나보낸 추억의 미련이 그들처럼 이 세상에는 꽤 즐비하다. 그리면서 그리움과 기다림을 낳는다. 어쩌면 인생살이란 죽을 때까지 기다림의 미덕 내지는 미학이 아닐까. 연경을 오가던 북학파의 많은 이들도 연경을 찾아 만남의 연을 맺고 후손들도 그 뒤를 총총 이으려 무던히 애썼지만 이어지지를 못하였다.
삶의 환경이 다르고 삶 자체가 다른데 온전한 기억의 애틋한 추억으로 남아 있기가 어디 쉬운가. 하다못해 연행록이니 조천록이니 하여 명청시대 연경을 쉬이 오가던 사람들의 어느 우정의 정표가 지금 혹여 남아 있다면 이는 기적에 가까울 일이고 미련으로서 빚은 남긴 글 한 자락이라도 남아있다면 이는 정말 국보급 자산이 될 것이다.
유일하게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그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고 할까.그런 점에서 보자면 기억의 기록은 소중한 가치를 갖는다. 최부는 천암리를 지나며 산 위쪽으로 석벽이 높게 솟아있는데 홍문처럼 보이는 동굴을 보았다고 했다. 그가 글로 남긴 덕분에 우리는 그 형상을 확인 할 수 있다. 글이 매개체가 되어 우리와 그 석벽이 인연을 맺은 셈이다.
천암산 정경..... 최부가 적은 그대로 홍문이 난 모습이 여전하다.
이 세상은 세월 따라 어느 새 사연 담은 애틋한 인연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추억담긴 유물만이 남아 애타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렇듯 유형의 것은 글로써 생기가 되살아나고 의미를 되찾는다. 인류의 역사는 인연의 연속이고 글이 역사에 미치는 의미는 실로 지대하고 전부라고 해도 가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시간의 자취이면서 인연의 흔적이기도 하다. 글과 형상으로서 연이 맞닿는 흔적의 면면을 살피지만 진정한 사람 간 맺어진 인연의 종적은 지척이면 몰라도 무수한 시간 흐름과 거리로 인하여 다시 봉합되기는 실로 어려울 것이다.
대개는 모두 사라져 흔적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때로는 무수히 흐르는 시공간 속에서 어느 한 가닥 푸드득 살아남아 인연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경우도 더러 생긴다. 살다보면 때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바로 최부 선생과 장보 선생이 그렇다. 그런데 정작 그 둘은 글로써 다시 연을 맺고 그들을 추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마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에서 그들의 자취는 역사적인 사실로서 우선 받아들일 것이지만 그 이전 그들은 인연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만난 인연도 기이하고 겨우 잠시였는데 그리고 주고받은 말이 고작 과거급제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였으며 시답지 않게 과거급제가 조선이 더 후하니 명나라가 더 후하니 겨누더니만 영원히 글로써 서로를 사모하고 있다. 장보(張輔)의 《送朝鮮崔校理序》라는 제목의 미담의 글은 청나라 광서 년간의 영해현지(寧海縣志)에 그 기록이 있는데 이는 최부의 표류사건에 대한 중국문헌의 귀중한 기록으로서 취급되고 있으며 최부의 표해록의 이 서술 내용으로 그 글이 허황되지 않은 따사로운 글이었음을 바로 알려주게도 되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제목: 조선 최교리를 보내며(送朝鮮崔校理序)
글쓴 이: 장보(張輔)/작성일자: 1488년
옮긴 이:최현호(崔賢鎬)?1995년
출전: 중국 절강성 임해현지(臨海縣誌)조선 홍문관 부교리인 최부(崔溥)는 자(字) 연연(淵淵)으로 왕명을 받들어 그의 나라 제주도에서 호구를 조사하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돌아오던 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 우리나라 건도로 들어오게 되었다.변방을 지키던 관리가 최부에게 가서 물은즉, 최부는 그 연고를 설명하였다. 마침내 그가 인솔하였던 43명을 공관에 묵게 한 후, 번부(藩府: 지방의 軍鎭)의 조사 후 북경을 거쳐 환국하게 된다. 나의 아우인 방직(邦職)이, "오늘날 조선은 옛날의 고려로 기자(箕子)의 유허(遺墟: 남은 옛 터)로 우리나라의 동번(東藩:동쪽의 제후의 나라)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예의를 지키고 있다." 라고 말하는 바, 그를 찾아가 동정을 살펴보니 그의 행동이 침착하고 음성과 얼굴에는 슬픔과 근심이 어려 있었다. 환난(患難)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상례(喪禮)를 지키고 있으니 더욱 공경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에게, "당신의 이번 행차는 이른바 동쪽에서 잃은 것을 서쪽에서 찾은 것이 아니겠소? 이 말은 비록 풍랑 때문에 돛이 꺾이고, 노를 잃은 데다 눈물과 낙담으로 어찌할 바 없이 물고기에 먹힐 것으로 여겨졌으나, 도리어 중국의 큰 모습을 알게 되었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소? 또한 조선의 신하가 매년 공무로 중국에 오는데, 대개 요동의 한 길을 통해 들어오기 때문에 넓은 중국의 영토(廣:동·서, 輪:남·북으로 輿地廣輪之博은 영토의 넓음을 뜻함), 많은 인구(版籍은 호적, 生齒는 인구, 蕃은 繁으로 많다는 의미), 성벽과 성호{城池: 城池는 城墻과 城河(護城河, 城壕)의 의미}, 예리한 병갑(兵은 兵器, 甲은 甲胄로서 병기와 갑옷을 의미), 문물의 아름다움, 고금흥망의 흔적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없었소. 그런데 당신은 앞으로 회계(會稽)로 올라가 전당(錢塘)을 건너고, 연능(延陵)을 따라 천참(天塹: 江河)을 건너 여량(呂梁)의 험난을 겪고, 가풍(歌風)의 대(臺)에 올라 우뚝 솟은 태산과 공림(孔林: 곡부)의 울창한 숲을 보고, 웅장한 황도(皇都)를 보게 되니, 조선을 통 털어서 견문이 넓다고 자부하는 자라도 당신보다 앞선 이는 없을 것이거늘, 이 또한 이번 행차에서 잃고 얻음이오. (중략)>
*(인터넷 교양사회( goodsociety.pe.kr) 의 표해록이란 코너에는 1995년도에 개최된 최부 관련한 학술세미나 발표 글을 모아 놓았다. 본 코너에 게시된 글 중 장보의 글은 최현호(崔賢鎬), 배화여고 교사가 쓴 글을 발췌한 것임을 밝혀 둔다. 교양사회에 모셔둔 세미나 발표문은 내게 여러 모로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