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요한일서 3장 4-12절 누구에게 속했는가?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요즘 텔레베전에서 남자들의 로망이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에서 나오는 자연인이 되는 거라고 합니다. 아무도 없는 산 속으로 가서 혼자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에 등장하는 자연인들이 얼마나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를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그들도 홀가분하게 살기는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딘가에게 속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속하여 살면서 행복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복을 위해서 함께 사는 사람들이 서로 오해 하고, 다투기도 하고, 속상해 하기도 하면서 삽니다.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에 여러분들은 예배전에 평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 지에 대하여 들으셨습니다. 그에 대한 답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감사 무조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입으로 감사를 하다보면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감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가능하며 또한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감사라야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누구에게 속해있으며 누구 안에 거하고 있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삶을 만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은 악을 만들어가고 선한 사람은 선을 만들어갑니다. 마귀는 좋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자꾸만 나쁜 길로 인도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죄에 빠져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가 어떻게 살아왔든지 간에 예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하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구원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구원이지 않습니까?
현대인들은 많은 소속을 가집니다. 아마 여러분 역시도 많은 소속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가정, 교회, 자기가 믿는 종교, 직장, 동창회, 계모임, 또 어떤 경우는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무리를 이루면서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소속에서 잠시나마 행복을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나지 않은 모임 속에는 진정한 평화도 없고 진정한 행복도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그 목사님이 신학교 다닐 때 나이는 어리지만 같은 해에 신학교를 입학한 동기 전도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전도사의 인사가 사람들만 만나면 “할렐루야 전도사님은 지금 행복하십니까?”였다고 합니다. 물론 교수님들을 만나면 “할렐루야 교수님은 지금 행복하십니까?”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에 대답할 자신이 없어서 먼데서라도 그 전도사님을 보면 살짝 피했다고 합니다. 4년 내내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졸업과 함께 사역을 위해 그와 헤어진 후에는 전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20년이 지난 어느 날 그를 만났는데 이제는 목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연찮게 그와 만난 곳이 하필이면 엘리베이터 안이 었는데 그가 인사를 합니다. “할렐루야 목사님은 지금 행복하십니까?” 그래서 좀 언짢은 생각이 들더랍니다. ‘지금 자신이 전 세계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유명한 강사가 되었고 목회도 크게 하고 있는데 자기보고 행복하냐니?’ 하지만 무엇인가 당항해서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으로 가서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는 그와 헤어진지 20년이 지났는데 과연 행복한가?’ ‘왜 나는 선뜻 “그래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을까?’ 그래서 목사님은 하나님께 솔직한 기도를 드렸고 예수님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행복하십니까? 그 행복은 영원토록 계속될 것입니까? 아니면 잠깐만 맛보는 행복입니까? 예수님 안에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죄를 회개하고 버려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번제물을 드리려고 할 때 그들은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로 다양한 제물을 드릴 수도 있었지만 반드시 흠없는 것으로 드려야만 했습니다.
구약 시대의 흠을 신약성경에서는 죄와 허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죄와 허물을 없애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의 제물을 받으심과 같이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성도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본문 4절의 말씀을 보면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하십니다. 죄의 실체는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불법이라는 것은 과녁을 향해 활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과녁을 빗나간 것을 불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의 본분에서 빗나간 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이 말씀보다 삶을 더 명확하게 비춰주는 말씀이 있을까요? 이 보다 더 명확한 삶의 지침이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이 무엇인지 알수 없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로 인도하시는 성령께 도움을 구하고 가르쳐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에 의해 말씀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불법인 죄를 행하지 않고 명확한 표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이러한 삶이 불가능했습니다. 죄를 정복하여 이길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절망적이었고 그 절망에서 구원하실 하나님이 온 인류의 조상에게 말씀하신 유일한 구세주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적어도 죄를 짓지 않기를 원하며 또 죄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기다리는 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약속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에 대하여 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가 오신 것은 우리 죄를 없애주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잠시 숨겨놓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완전히 없애 주시는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누구도 예수님 안에 있는 여러분들의 죄를 찾을 수도 없고 범죄자로 정죄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씻김을 받았고, 죄가 사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취어져 있습니다. 그로인해 예수님 안에 있는 여러분들을 만나시는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아들의 피의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로운 자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서 거룩한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범죄를 하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아예 안짓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죄를 지으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에 대하여 이 세상을 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이 어디있어?”하면서 모두가 다 그렇게 사는데 나 역시 그럴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들의 고백은 나는 내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죄인줄 알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죄로 인해 인간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는 말은 듣기 싫어합니다. 그것이 자기의 문제인줄 모르다가 누군가가 가르쳐 줄 때 그들의 마음은 찔림이 되고 괴로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기 때문에 이 죄악 세상에 적당히 맞춰서 산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어도 죄없이 완전하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과녁에 정확하게 꽂히신 유일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자신의 마음에 믿음으로 영접한 사람은 불법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따르던 것에서 돌아켜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으면 교회를 떠나지 않고 교회에 그냥 앉아있기만 하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거기 있던 자리에서 떠나 예수님과 함께 가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그 부르심에 제자들은 배와 그물과 자기의 직업과 부모와 아내와 자식들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역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죄와는 멀리 이별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죄를 지을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6절을 보면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범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범죄하는 사람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음을 알기에 죄를 멀리하게 되며 버리게 됩니다. 그 죄가 예수님을 죽음에 몰아넣을 만큼 악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미혹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말은 그럴듯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육체적인 욕구를 만족시킵니다. 마귀는 말합니다. “네가 무슨 죄를 지었어도 너는 용서를 받게 돼 그러니 너는 무슨 일을 해도 괜찮아 예수님의 피로 다 용서받게 되잖아” 또 이렇게 말합니다. “죄짓고 또 회개하면 되지”.
그리고 또 다른 방향의 시험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는 다시 살아나지도 못했기 때문에 너처럼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을 구원할 수가 없어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믿음보다 네가 더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면 너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어 그러니 예수를 뭐하러 믿어 그냥 성실하게 살면되지!”하고 말합니다.
또 말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데 아무 값없이 구원을 주시겠어 결코 그렇지 않아 네가 죄값을 다 치루기 전에 결코 용서란 없어 그러니 그렇게 교회에서 열심히 해야 아무 소용도 없어!” 이것이 마귀의 책략이며 술수입니다. 처음 사람에게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어”하고 말했던 마귀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의만으로도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권고합니다. 7-8절입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
여기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나타내셨는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여러분들의 죄를 없이 하기 위해서고, 두 번째는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의를 행함으로 자기가 의로우신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받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범죄하는 사람은 자기가 마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마귀를 따라서 죄를 행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인 진리가 그 속에 들어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진리의 말씀의 증거를 받음으로 인하여 죄를 범하지 않고 오히려 경건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의를 행하기를 힘쓰고 마귀의 자녀들은 죄를 행하기에 힘씁니다. 1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마귀를 따르는 마귀의 자녀들은 의를 행하지 않고 또한 그의 형제를 사랑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처음부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이셨고, 예수님 자신 또한 사랑이셨고, 예수님 뒤에 오실 성령님 역시 사랑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날마다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증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지 않는 사람은 가인처럼 악한 자에게 속하여 동생을 죽였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죽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 행위는 악하고 동생의 행위는 선했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의인이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합니다. 그리고 미워합니다. 그리고 후에는 살인도 합니다. 자기의 불의를 의로운 자가 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아벨이 그렇다고 해서 가인을 공격한 것도 아닙니다. 의로운 자가 의롭지 못한 사람을 보고 잘못된 행동을 저질렀다고 공격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 속하여서 하나님 아버지를 진실하고 정직하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다보니 하나님이 그의 예배를 받으셔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에 이미 악한 행동을 했고, 아벨은 제사드리기 전부터 의로운 행동을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 3장 12절을 보면 이것을 입증합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이미 죽이기 전에 가인의 행위는 악했고, 죽기 전에 아벨의 행위는 의로웠다고 말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에 이미 드려질 마음과 드려지지 않을 마음이 나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드려지는 마음을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지금도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여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행하고자 하며 의의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임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