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시즌 시애틀로 트레이드 된 후 한 달 여 사이에 5승을 챙긴 앤드류 앨버스. 그 배경으로 건강함을 꼽았다.(사진=이영미)>
하위 리그 전전, 그래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잘 알려졌다시피 앤드류 앨버스는 200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지명을 받고 프로에 데뷔했다. 이후 독립리그와 마이너리그, KBO리그, 윈터리그, 메이저리그 등을 돌며 무려 14개 팀의 유니폼을 입었다(거의 해마다 팀을 옮겼고, 시즌 중에 다른 팀으로 트레이이드 되기도 했다). 순탄치 않은 야구 인생이었고 중간 중간 포기하고 싶었던 위기와 유혹도 많았다고 한다.
“2009년 팔꿈치 부상으로 토미존 수술을 받고 재활을 시작했는데 그 과정이 매우 고통스러웠었다. 팔을 펼 수도 없는 상태라 그냥 공을 잡고 팔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일들을 겪고 나면 마운드에 올라가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얼마나 감사한 일이지를 깨닫게 된다. 당시의 수술과 재활했던 경험은 이후 내 야구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떤 일을 겪어도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게 만들었다. 공만 던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순간들을 떠올릴 때마다 곧장 마음이 편안해지고, 경기를 즐기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독립리그인 캐나다-아메리카 리그 산하 팀과 베네수엘라 윈터리그에서도 선수 생활을 했던 앤드류 앨버스. 리그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그가 가졌던 마음가짐의 형태가 궁금했다.
“단 한 번도 빅리그로 올라갈 거란 믿음을 버린 적이 없었다. 설령 그 믿음이 헛된 꿈으로 끝난다고 해도 야구를 그만두기 전까진지 내가 노력해야 하는 목표였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 마음을 갖고 버텼던 것 같다.”
높은 초구 스트라이크 비율, 앨버스의 무기
앤드류 앨버스는 초구 스트라이크 비율이 높은 선수로 꼽힌다. 올시즌 시애틀 매리너스에선 70.8%를 기록했다(통산 67.9%). 초구에 스트라이크를 잡고 시작하는 것은 투수에게 굉장히 유리하다. 초구를 스트라이크로 시작한 경우 메이저리그 평균 피안타율은 .223에 불과하지만 볼로 시작한 경우는 .272가 된다. 평균자책점도 초구를 스트라이크로 시작하면 3.38이지만 볼로 시작한 경우는 5.59로 높게 나타났다. 앤드류 앨버스는 대부분의 타자들이 초구에 스윙을 하지 않는 이점을 이용했다.
“초구 스트라이크는 내게 의미가 큰 편이다. 내가 빅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한 몇 가지의 방법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모든 종류의 공들을 다 잘 친다. 이럴 때는 유리한 카운트를 유지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유리한 상황이고, 약간의 찬스가 생기면 좀 더 공격적으로 투구할 수 있다. 난 매 투구마다 상대 타자를 빨리 아웃시키고, 팀을 이기기 위해 집중했다.”
건강함 유지, 좋은 투구의 비결
앤드류 앨버스는 구속이 빠른 선수가 아니다. KBO리그 시절에는 ‘외국인 유희관’이란 별명이 붙었을 정도이다. 2014년 3월 21일 두산 베어스와의 시범경기에 등판해선 최고 구속 137km/h의 패스트볼로 1,2이닝 동안 김현수 오재일 양의지 최주환 등 4명을 연속 삼진으로 잡아낸 적도 있었다(메이저리그 평균 패스트볼 구속 142km/h).
“릴리스 포인트를 좀 더 앞에 두고 던지는 편이다. (KBO리그 시절과)구속 차이는 크게 못 느끼겠다. 부상만 없다면 지금과 같은 투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캐나다 새스캐처완 주의 노스 배틀포드 출신인 앤드류 앨버스는 이 지역의 유일한 메이저리거이다. 켄터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시애틀 매리너스 제임스 팩스턴과는 대학 동문. 앨버스는 2008년, 팩스턴은 2009년 드래프트에 지명됐다.
앤드류 앨버스는 원래 200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밀워키 브루어스의 지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전체 12라운드 346순위). 그러나 지명을 거부하고 켄터키 대학에 진학했고, 이후 2008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밀워키의 지명을 거부한 이유를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나 자신조차 프로에 가서 잘 할 자신이 없었다. 내 실력에 의구심도 들었다. 한 마디로 준비가 잘 안 돼 있었던 것이다. 웨이트트레이닝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대학에 먼저 진학하는 게 더 나은 결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대학에서 공부도 했고, 야구를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11년 트라이아웃을 통해 미네소타 트윈스의 지명을 받은 앤드류 앨버스는 2013년 8월, 빅리그로 콜업된 후 감격스런 첫 등판에 나서는데 당시 캔자스시티 로열스전에서 8⅓이닝 4피안타 무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된다. 그리고 다음 등판이었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전에선 9이닝 2피안타 완봉승까지 거뒀다. 빅리그 데뷔전과 두 번째 경기에서 17⅓이닝 연속 무실점이란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며 미네소타 팬들을 열광시켰던 앨버스의 환상적인 투구는 이 두 경기가 전부였다. 이후엔 최악의 투구, 최다 실점 등을 기록하며 2013시즌을 2승5패 평균자책점 4.05로 마무리했다.
<한화 이글스 시절의 앤드류 앨버스.(사진=연합뉴스)>
앨버스가 기억하는 KBO리그, 그리고 팬들
앤드류 앨버스는 2014년 한화 이글스로 오게 된 상황을 떠올렸다.
“2013시즌에 40인 로스터에 포함됐지만 마이너리그 옵션이 있었기 때문에 이듬해 빅리그에 남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한화 이글스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다. 계약 조건이 좋았다. 그걸 놓치면 분명 후회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새로운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생소한 언어, 낯선 문화,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등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허리 통증으로 시즌 초반부터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 게 많이 아쉬웠다(2014년 28경기 151⅓이닝 6승13패 평균자책점 5.89).
KBO리그 타자들을 상대하려면 가끔 창의적으로 마운드 운영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구속도 많이 끌어올리지 못했는데 그나마 제구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버텼다고 생각한다. 몸이 건강했더라면 좀 더 재미있게 야구했을 것이다. 모든 선수들에게 각각의 응원가가 있고, 팬들이 그 응원가를 함께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했었다. 도대체 그 응원가를 어떻게 다 외우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웃음). 한화 선수들은 나를 가족처럼 챙겨주고 배려해줬다. 그들만의 끈끈한 정이 있었다. 그들을 위해 내가 더 잘했어야 하는데 몸 상태가 도와주질 못했다.”
박석민의 근황을 물은 앨버스
앤드류 앨버스는 NC 다이노스의 박석민의 안부를 궁금해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 선수가 내 공을 다 쳐냈다. 어떤 공을 던져도 안타를 만들어냈다”면서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삼성 시절의 박석민은 앤드류 앨버스를 상대로 8타수 5안타 2득점 1홈런 2타점 0.625의 타율을 기록했다. 박석민이 FA를 통해 NC 다이노스 유니폼을 입었다고 하자 앨버스는 크게 놀랐다. KIA 타이거즈 팻 딘과는 절친이라 종종 연락하면서 지낸다는 얘기도 들려준다. 그는 KBO리그와 관련해서 궁금증이 많았다. 삼성 라이온즈의 홈구장인 라이온즈파크와 넥센의 고척 돔구장이 팬들로부터 어떤 반응을 얻고 있는지를 묻기도 했다.
앤드류 앨버스는 시애틀의 부상당했던 선발 투수들이 복귀하면서 자연스레 불펜으로 내려갔다. 아쉬움이 없느냐는 물음에 “이전에도 불펜에서 뛴 적이 있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면서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가 되고 싶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팀에 도움이 된다면 보직은 크게 상관없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마이너리그가 아닌 빅리그 무대에서 만난 앤드류 앨버스가 무척 반가웠다. 유니폼 숫자가 늘어난다고 해도 그가 야구를 계속해 나간다면 그 많은 숫자조차 스토리로 남을 것이다. 물론 그는 메이저리그 유니폼만 입고 싶겠지만 말이다.
<2013시즌 후반기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환상적인 투구를 선보였던 앤드류 앨버스. 당시 트윈스 팬들은 2경기에서 보인 앨버스의 투구를 잊지 못했고 이렇게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을 펼치기도 했다. 2008년 이후 14개 팀을 돌며 그가 배운 건 노력과 기다림이었다. 내년 시즌 그의 또다른 모습을 기대하면서...>
<이영미 기자, 통역 황상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