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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늦가을쯤 예배당 현관문 힌지를 교체했습니다. 그동안, 문이 어긋나게 닫혀서, 겨울이면, 찬바람도 들어오고, 외부 소리도 잘 들렸지만, 이제는 힌지를 교체함으로, 정상적으로 잘 닫히면서, 찬바람도, 외부 소리도 차단되었습니다. 목회자 모임에서 이와 비슷한 경우를 경험하신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오래 된 예배당 문이, 예배를 앞두고 갑자기 고장났다고 했습니다. 징크스와도 같이, 저도, 평소에는 잠잠하다가 토요일이나 주일예배 직전에, 이렇게 난처한 상황을 경험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목사님은, 예배를 앞두고,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그런데, 앞 주에, 새신자로 등록하신 분 가운데, 열쇠수리를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께 급하게 연락해서, 예배당 출입문이 고장난 이유를 말했더니, 자신이 고치겠다며, 급히 와서는 문을 분리하고는, 고장난 부위를 말끔하게 고쳤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감사해서, 그 분의 헌신이, 무안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교회 설립감사주일에 만들어서 교우들과 나누었던 지갑을 선물했습니다. 그리고는, “감사합니다. 교회의 선물입니다. 받아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새신자는, 교회에 대한 봉사나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라는 말의 뜻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목사님이 지갑을 선물하는 것에 대해, 섭섭해 하면서, 수리비로 10만원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목사님은, 고맙다는 말을 하며, 그 지갑에 넣어둔 30만원 가운데, 10만원을 주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사실, 새 신자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지갑에 30만원을 넣었던 겁니다. 저는 그 분의 말 속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소천하셨지만, 1974년 개그작가 1호로 데뷔하여, “웃으면 복이와요, 유머 1번지”등,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개그 프로그램의 대본을 집필했던 주영광교회의 전영호 권사님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70년대에 성행했던 날들 가운데, “쥐 잡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에는 모든 집들이 일제히, 쥐약을 놓습니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 학교에서는 잡은 쥐의 꼬리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렇게, 쥐를 잡기 전날이면, 꼭 들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개들의 울부짖는 소리입니다. 이유는, 주인이 먹이를 흔들며, 강아지를 부릅니다.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강아지가, 주인의 손에 들려있는 먹이에 입을 대려는 순간, 주인은 미리 준비했던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립니다. 세상에 어째 이런 일이 있습니까? 먹이를 준다길래 왔다가, 개 패듯 맞은 겁니다. 깨갱거리며 도망가는 강아지는, 아마도 분했을 겁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또다시, 주인이 먹이를 흔들며 부릅니다. 이유를 모르는 강아지는 또다시,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서 먹으려는 순간, 매질을 또 당합니다. 영문도 모르고 얻어터진 강아지는, 그 먹이만 봐도 치가 떨렸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다른 고양이와 개들은, 거품을 물고 죽었지만, 이 강아지만큼은, 온 동네에 놓인 쥐약 묻은 먹이를 멀리함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강아지를 사랑하는 주인들의 고육책이었다고 합니다. 시 119: 71을 보시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전영호 권사는, 삶 속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출세 길을 달릴 때, 작가로서가 아니라, 사업을 하겠다며, 자기가 꿈꾸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만 같았을 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고교 시절, 학교 선생님 아들과 함께 절친으로 지내는 가운데, 수업을 빼먹고 빵집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려서, 선도부로 끌려간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선도부 선생님이, 자기는 출석부로 몇 대 때리고는 훈방했지만, 그 친구는 죽지 않을 만큼 때렸답니다. 그래서, 자기는 교회를 다니기에,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런데, 다음날 교내 게시판에, 그 친구는 특별지도 7일, 자신은 정학 7일을 알리는 공고가 붙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선도부에서 맞지 않는 것이 그렇게 후회가 되더랍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니까, 그때의 정학 7일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고백이 되더랍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고백과 경험이 있죠? 본문은 패역해서, 목이 곧은 백성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에게, 냉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사망의 심판을 할 수 없기에 동행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쥐잡기 전날, 개 패듯 맞은 강아지는, 자신을 때린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또, 급하게 달려와서 예배당 문을 고쳤는데, 교회 설립감사주일에 주었던, 지갑을 주는 목사님의 마음을, 초신자가 몰랐던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이끌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 – 3절을 보시면,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기에 동행을 거부하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킵니다. 우리가 때때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지 못할 때가 있어도,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약속은 깨지지 않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본문 앞의 32장에 있습니다. 여기를 보시면,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과거 애굽에서의 생활 형태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고, 광야 길을 인도하며, 생수를 공급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완악한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32: 9을 보시면,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진멸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이 때, 그들을 위해, 모세가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애굽 사람들이 여호와가 자기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의도로 인도했다”라며, 하나님을 조롱하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함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진멸하지 않는 대신 그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이 행한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맹렬한 진노를 멈춥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사랑하셨는지, 내가 이토록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사랑을 입어도 되는 지를 생각해 볼 때, 우리의 중보자이며,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진노케 한 이스라엘의 행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겁니까?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지 않은 겁니까?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섬긴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빼낸 죄악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던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를 모두 삭제했습니다. 십계명을 보면, “안식일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보다 앞선 것이,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겁니다. 그랬기에, 우상 숭배를 하는 이스라엘과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어떻게 왔는데, 또, 남은 길을, 어떻게 가야하는 데,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기하셨습니다. 밤 하늘의 아름다움에 빠져 매일 밤, 하늘을 바라보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들의 모습을 보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엇을 보고 있니?”라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달을 보고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왜? 달을 보고 있니?”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아들은, “달에 가보고 싶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허황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너는 충분히 갈 수 있어. 달에 대한 네 꿈을 잃지 말라”며, 그를 위해 기도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후, 아들은 30년이 지나서, 달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아폴로 15호를 타고 달에 도착한 “제임스 어윈”입니다. 그는, 달에 도착해서, “내가 달에 도착하자마자, 맨 처음 느낀 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였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어윈은, 이 꿈을 위해 30년간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30년간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더디고 안 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함께가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본문 뒤에 있는 14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야 할 그 곳에 먼저 가셨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세요. 내가 하나님의 사랑 밖에 떨어져 있다고, 하나님의 관심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침묵하시지만,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이 아닌 송아지로, 하나님이 아닌 장신구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우리를 혼잡하게 하는 일들이 있지만, 거기에 휩싸이지 않고,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내 길을 미리 준비하심을 믿고 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 가시고, 앞서서 준비하시며,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면 됩니다. 친히, 가나안 족속을 물리치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는, 신실하신 하나님만 믿고 행할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마음과 그 사랑을 간직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 우리의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본문은, 동행을 거부하는 하나님의 징계가, 동행하는 사랑으로, 축복으로 바뀌는 전환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지만, “불의”와 함께 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모두가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에 속했기에, 그들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고,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 사울, 아합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 안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징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공의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공의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후 5: 21을 보시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준엄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앞의 3절에서,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를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준엄하다”는 말을 사용할 때는, “매우 엄격한 것”을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슬픔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가 자신들의 몸에 둘렀던 모든 단장품들을 해체했습니다. 그리고는, 슬픔에 쌓였고, 근심에 쌓였습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은, “이스라엘과의 결별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최악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몸을 단장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애통하는 일이 있거나 회개하는 일에서, 머리에 재를 뿌리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렇게, 외모를 꾸미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 곳에도, 아무에게도 생각을 두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애굽에서 탈출할 수도 없었습니다. 또, 홍해가 가로막음으로, 뒤쫓아 추격하는 애굽 군대에게 죽던가 다시 끌려가서 종살이를 했어야 합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지내온 날들을 되돌아 볼 때, 하나님이 없는 미래에서는, 자신들의 존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랬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 앞에서, 자신들의 처지를 인식했습니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배역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아론으로 하여금, 금송아지를 만들고, 모세를 비판하게 했던 자들과 협작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 앞에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들이 처한 상황에서는, 어떠한 소망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 곳에 있는 것은, “원망과 즐거움의 유희”뿐이었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들처럼,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바로 보고, 바로 깨달았던 종교 개혁자가 있습니다. “마틴 루터”입니다. 그는, 당시의 교회들이 행하는 어리석음을 보았습니다. 교회가 행하는 면죄부 판매를 비롯하여, 다른 무모한 행동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에 대한 시금석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루터는, 롬 5: 1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는 구절을 대하면서, 지금껏 교회가 행했던 일들 속에서, 교회의 섬뜻한 상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죄와 타협된 우상숭배였습니다. 그것이, 교회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참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우리가 행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의 시금석은, “성경”이어야 합니다. 성경을 떠나, 다른 것을 시금석으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루터 당시의 교회는, 성경이 아닌 다른 것에 시금석을 두었습니다. 또, 본문 속의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에 시금석을 두었습니다. 시금석을 성경이 아닌 다른 것에 둔 교회나 다른 것에 두었던 시대나 다른 것에 둔 사람들에게서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슴으로 아는 지식,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증거되어지는 하나님의 임재들을 붙잡아야 합니다. 또, 이것은, 교회가 교회로서 나가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은,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내가 생각하는 이것이, 내가 계획하는 이 계획에 대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지를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가 천국가기를 희망하며, 천국가는 것을 당연시 합니다. 그런데, 천국 가기 전에 들려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것이 씻겨졌다는 것으로 안일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목사로서, 신목교회에서 목회함에 있어서의 모든 결정, 모든 언행에 대해, 하나님은 물으실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 우리의 생각, 우리의 계획에 대해, 그 이유를 물으실 때, 우리는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따라 우리의 삶을 바꾸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 – 6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에게 용서의 길을 알려주며,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몸에 지닌 “장신구를 떼어내라”며 공개적으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즉흥적으로, 징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 중에는, 자신이 범행할 때, 하나님은 잠자코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으나, 침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장신구를 모두 제거하라고 명령하신 곳은, “호렙산” 즉, “시내산”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인 쳐졌습니다. 바로 이 곳에서, 하나님이 이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장신구를 떼어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제껏 두르고 있던 장신구들은 애굽에서의 장신구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전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를 했던 겁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있었던, 모든 모양, 모든 풍습, 모든 생활양식들을 전부 버리라는 겁니다. “할례”는, “몸에서 부정한 것을 제거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육체적인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요구하셨습니다. 너희의 몸을 꾸미지 말라고 한 것은, 너희의 마음, 너희의 생각을 애굽에 두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성경을 암송한다고 해서, 찬양을 부른다고 해서, 성도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롬 12: 1을 보시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릴 수 있겠습니까? 찬 94장의 가사를 보시면,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세상의 부귀와 명예와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이 전에 즐기던 세상일이나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내 맘은 변치않네”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호렙산에서, 장신구들을 떼어 냄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며, 장신구를 떼어 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네 장신구를 떼어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대답은,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장신구들을 떼어냄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