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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숲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버섯들이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는 군락지를 발견했습니다. 둘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아들은 한 버섯을 바라보며 예쁘다고 소리쳤습니다. 아버지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나쁜 독버섯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대답을 들은 버섯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아, 나는 나쁜 독버섯이었구나!”라는 신음을 쏟아놓았습니다. 동료 버섯들이 절대 아니라고, 예쁘고 착하다고, 자신들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친구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자신은 분명히 나쁜 독버섯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소리치면서 슬프게 흐느꼈습니다. 그때 동료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다른 버섯이 나섰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판단에 불과하다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독버섯이냐 아니냐의 여부는 존재가 보유保有하고 있는 고유하면서도 절대적인 가치보다는 식용이 가능한지의 여부 곧 활용 가치를 먼저 생각하는 인간의 다분히 편협하면서도 왜곡된 판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파생한 모든 존재는 단 한 가지도 빠짐없이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작고 연약하며 이름조차 얻지 못한 들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깨달아 알지 못할 뿐입니다. 한편,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1:27)라는 증거대로,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간직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재입니다. 원하는 것을 스스로 취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세상 무엇도 비교될 수 없는 절대 가치를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닮았지만 하나님과 분명하고 확실하게 구별된 존재입니다. 동료인 다른 사람들과도 구별된 존재입니다.
여호와께서 오직 한 분인 것처럼, 인간 개개인 또한 오직 하나 뿐인 존재입니다. 나도 하나, 너도 하나입니다. 특히, 인간은 지극히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자유와 관련해서는 유일한 주체입니다. 하나님마저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밖에 없는 두렵고 떨리는 일이 발생할 것을 뻔히 내다보면서도 바른 방향을 제시하셨을 뿐 선택만큼은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온전히 맡겨둘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당신이 최고의 선물로 허락해 주신 자유 의지만큼은 감히 침범할 수 없으셨습니다. 인간은 각자 유일한 “나”로 살도록 허락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물론 또 다른 “나”라는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는 “너”라고 불릴 수도 있기는 하지만, 본질은 바뀔 수 없습니다. 여전히 “나”입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유일한 “나”로 살 때 가장 행복합니다. 다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나 됨을 위하여 당신의 능력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무모할 정도로 쏟아 부으시는 이유입니다.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일하시는 이유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여전히 확신이 넘치는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도 바쳐서 섬길 수 있습니다.
그는 둘째였습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열일곱 살 정도였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미혼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는 “몫μερος”을 미리 나눠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몫”은 “할당, 운명, 전체 중 한 부분” 등의 뜻입니다. 운명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려고 했었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자기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확대 해석할 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쉽게 간과되는 부분입니다.
아무튼 몫은 유산이었습니다. 동산과 부동산 전체가 포함되었습니다. 부모와 직계 자녀들로 구성된 가족에게 주어졌습니다. 아버지 사후에만 아들들 각자에게 해당되는 몫을 나눠줄 수 있었습니다. 가족에게 주어진 유산은 많은 가족들로 구성된 친족들에게 주어진 유산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친족들에게 주어진 유산은 많은 친족들로 구성된 부족에게 주어진 유산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부족에게 주어진 유산은 많은 부족들로 구성된 민족에게 주어진 유산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몫”은 단순히 한 가정이 아니라 민족이라는 공동체의 장래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째의 요구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고 있던 전통은 물론 생활 방식과의 결별이었습니다. 아버지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겠다는 협박이었습니다. 곧 “아버지! 저는 당신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당신과의 인연을 끊기로 결정했습니다.”라는 의미였습니다. 민족 공동체의 근간根幹을 뿌리째 흔들어놓는 행위였습니다. 민족 공동체를 버리는 반역이었습니다. 유산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특히, 개인에게 보장된 몫은 장래를 위한 기본적인 자산이었습니다.
방대한 양의 구전 율법을 집대성한 유대 법전Mishna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몫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째가 합법적인 권리의 획득과 행사를 통해서 장밋빛 미래를 도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겨우 열일곱 살에 불과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 관습에 따르면,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유언이었습니다. 죽기 직전에 이루어졌습니다. 다른 하나는 증여였습니다. 살아있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장자에게는 두 몫의 분깃을 물려주었습니다.
둘째에게는 한 몫의 분깃을 물려주었습니다. 아들들은 증여를 통해서 분배 받은 자신의 몫을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는 처분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몫을 통해서 얻은 수익收益에 대한 권리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아버지의 권리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역시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었습니다. 실질적인 주인은 아들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혹, 이러한 금기 조항을 무시하고 매매가 이루어졌을 때도, 소유권은 아버지 사후가 되어서야 산 사람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상속의 효력은 어디까지나 아버지 사후에 발생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가 자신의 몫을 물려받는다 할지라도 당장은 의미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현실의 벽 앞에서 고민했습니다.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미리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한 가지뿐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입니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내용에 따르면, 아버지는 두 눈 시퍼렇게 살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죽었을 때를 가정해서 자신에게 돌아올 몫과 관련된 권리 일체를 상속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빨리 죽어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모욕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파렴치한 죄였습니다.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죄였습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마저 저버린 패륜悖倫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저질렀습니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전제했습니다. 둘째에게 돌아갈 몫은 물론 처분할 수 있는 권리 일체를 상속해 주었습니다. 수익에 대한 권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야말로 어리석게 보이는 행위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나 아버지나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둘째는 자신이 합법적으로 확보한 권리를 백분 사용했습니다. 물려받은 분깃을 며칠 지나지 않아 다 처분했습니다. 멀쩡히 살아있던 아버지를 죽은 자 취급했습니다. 분깃을 요구할 때보다 훨씬 심각한 모욕이었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예 먼 나라로 떠나버렸습니다. 지리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부담이 전혀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습니다. 하늘이 맺어준 천륜을 어떤 미련도 없이 끊어버렸습니다. 거기서 허랑방탕ἀσώτως했습니다. 이는 “부정불변사ἀ”와 “구원하다σώζώ”라는 뜻을 가진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구원의 손길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보통 둘째가 무분별하게 먹고 마시면서 성적으로도 타락했었다는 의미로 해석하곤 합니다. 그 근거로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눅15:30a)이라는 첫째의 말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첫째의 생각일 뿐입니다. “사려 깊은 아들과 탕자”라고 표현한 초대 교회의 교부Jerome 역시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정황에 따른 짐작 정도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쾌락 추구는 낯선 곳에서 엄습한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많은 방법들 가운데 하나 정도는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방탕”이라는 단어Prodigal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낭비하다, 제 멋대로 굴다” 등의 뜻입니다.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풍부하다, 야심차다 대담하다. 모험적이다” 등의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단히 긍정적입니다. 각각의 뜻은 극단적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이제까지는 주로 부정적인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매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술자리를 배설하지 않고는, 접대부들과의 난잡한 행위를 즐기지 않고는 결코 적지 않은 재산을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복 재생산되는 과정을 통해서 아예 정설定說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목사, 신학자,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인 동시에 “탕부 하나님”으로 번역된 책THE PRODIGAL GOD의 저자인 그Timothy Keller의 해석은 다릅니다.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픈Merram Webster's Collegiate Dictionary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같은 단어를 지극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픕니다. 조금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다 쏟아 부어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의 여부를 전혀 상관하지 않고 아낌없이 쏟아 부어주십니다.
낭비라고 생각할 정도로 거침없이 쏟아 부어주십니다. 샘솟듯 끝없이 솟구치는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과의 관계를 시작하십니다.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과의 관계를 이어가십니다.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과의 관계를 유지하십니다. 당신 안에 넘치도록 풍성하신 사랑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다 탕진하십니다. 아니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곧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미 당신 자신을 탕진하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탕진하고 계십니다. 이후로도 영원히 탕진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사랑이 차갑게 식어지거나, 적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까지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거니와 이후로도 그럴 일이 절대로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역시 방탕했습니다. 긍정적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전통적인 방식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집니다. 그는 사치스러웠습니다. 호화스러웠습니다. 낭비하는 면도 있었습니다. 소위 가졌다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삶의 특징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죄 받아 마땅할 정도로 부도덕하고 타락했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대단히 무모했습니다. 누구보다 도전적이었습니다. 평범한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성공을 추구했습니다. 아버지, 가족, 친족, 부족, 민족과의 관계를 깨뜨리면서까지 받아냈던 자신의 몫 전부를 조금도 아끼지 않고 전부 다 쏟아 부을 정도였습니다. “한 번만 더 심사숙고한 다음 투자했다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을 정도로 서둘렀습니다. 얼마든지 문제 삼을 수도 있는 태도였습니다.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머물기로 작정한 환경이었습니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와 사랑이 넘쳤던 아버지 집과는 완전히 딴판이었습니다. 꿈꾸는 장밋빛 미래에 대해서 함께 의논할 대상 하나 없었습니다. 조언을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 도움을 청할 사람도 하나 없었습니다. 덩그러니 둘째 혼자뿐이었습니다. 거기다 그곳에서는 약육강식, 적자생존, 우승열패 등의 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치열한 싸움터였습니다. 한 번 밀리면 그대로 끝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능과 경험과 출중한 지혜로 무장했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렇게나 버려졌습니다. 밀어붙이는 성격 특성으로 무장한 둘째는, 처음 접해보는 낮선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망설이거나 주저하는 기색氣色이 전혀 없었습니다.
도착한 즉시 거침없이 무한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자금이 넉넉했던 처음에는 그런대로 견딜만했습니다. 주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비어갔습니다. 급기야 준비해 갔던 몫을 모두 탕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채무자들의 눈을 피해서 도망 다녀야하는 처지까지 몰리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고난은 한꺼번에 밀어닥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설상가상 온 나라에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커다란 흉년이 들었습니다.
가족과 친척 또는 친구는 물론 돈까지 없는 최악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가난하다는 표현만으로는 제대로 다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한 상황으로 내몰렸습니다. 먼 나라에서, 그것도 유대인들이 부정한 개나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기며 무시했던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중근동 지역에서는 원하지 않는 식객을 에둘러 쫓아내기 위해서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일을 시켰습니다. 둘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돼지는 접촉 자체가 완전히 금지된 부정한 짐승이었습니다. 그런데 돼지 치는 일이 주어졌습니다.
거절해야 되는데,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안식일 준수는 물론 금식이나 기도 등의 경건 생활은 아예 엄두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돼지 먹이로 주어지는 열매도 배부르게 먹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거칠고 쓴 열매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것마저도 제 때에 맞춰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꿈을 쫓아왔다가 생명을 부지하기조차 힘든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정신을 차렸습니다. 성경은 이를 “이에 스스로 돌이켜”(눅15:17a)라고 표현합니다. 직역하면 “(그동안 잃어버리고 있었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입니다.
영역본들 역시 “자신에게로 돌아오다come to himself”RSV, “그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갔을 때When he came to himself”NRSV라고 번역합니다. 그는 스스로의 힘과 능력과 노력만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절망에 빠지자 비로소 정신을 차렸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 집에는 무수히 많은 일꾼들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양식이 있는데 자신은 이방인의 땅에서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한 채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한탄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어떤 이유에서건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었습니다.
살아계신 아버지를 죽은 자 취급했습니다. 상속 받았지만 여전히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소유권이 있었던 재산을 완전히 다 말아먹었습니다. 지옥의 땔감 정도로 하찮게 여기던 이방인의 종으로 들어갔습니다. 부정한 짐승을 쳤습니다. 짐승의 먹이로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자아성취, 자아실현, 자아만족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과 동시에 선물로 주어졌던 가정과 친척과 부족과 민족이라는 안정된 울타리를 파괴하고 뛰쳐나가더니 실제로는 성민이라는 거룩한 정체성마저도 훼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또 자신은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다시는 회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연히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종들 가운데 하나로 들어갈 수도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난감했습니다. 그야말로 절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살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했습니다. 사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넘어야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그 많던 재산을 완전히 다 말아먹고 상거지 꼴로 돌아오는 자신에게 보낼 따갑고, 굴욕적이며, 적대적인 시선을 견뎌야했습니다. 신성모독은 물론 민족을 버리고 떠난 그에게 돌이나 던지지 않으면 다행이었습니다.
남아 있는 재산의 실질적인 주인이면서 자신이 돌아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싫어할 형이 보내는 비웃음과 조롱과 멸시를 견뎌야했습니다. 비록 얼마간은 떨어져 있겠지만, 아버지 집이라는 공간을 형과 함께 사용하기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굶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까짓것 어떻게 되는지 한번 부딪혀나 보자고 결심했습니다. 마음이 조금은 안정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큰 산은 아버지였습니다. 반드시 넘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했습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 내내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품꾼μισθιοι”이었습니다. 품꾼은 제한된 기간만 고용되는 일용직을 가리킵니다. 비록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꾸준하게 일한다면 일정한 수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안정된 생활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비록 언제가 될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원래 꿈에 재도전하기 위한 밑천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따로 방을 얻어 살림을 꾸릴 수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잘해 주어도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는 형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으로 인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을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위로해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능력만으로도, 자신의 수고만으로도, 자신의 노력만으로도 얼마든지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다는 확신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 품꾼이면 충분해! 비록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죽을죄는 아니지 않은가? 가난 때문에 한동안 고생은 했지만 몸도 여전히 건강하고, 나이도 잃어버린 기회를 회복하기에 충분해! 아버지에게 품꾼들 가운데 하나로 살겠으니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자!”라고 외쳤습니다.
“품꾼들 가운데 하나로 살겠다.”는 구절을 짚고 넘어가야합니다. 품꾼들 가운데 하나로 써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품꾼들 가운데 하나로 봐달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품꾼들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달라는 의미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자신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반드시 증명해 보이고 말겠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충만합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질 몫과 권리들을 챙기고 유산을 다 처분해서 집을 떠날 때 보였던 모습과 거의 흡사합니다.
굶어죽기 직전의 상거지 꼴을 하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작은 희망이 보이자, 타락한 자아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께 은혜를 구걸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마치 자신을 위해서 이미 예비 되어 있던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 당당하게 요구하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그는 이미 한 번의 이혼 경력이 있습니다. 그를 어릴 때부터 지켜본 동네 어른들은 이구동성으로 “예쁘고, 키도 크고, 참하기까지 한 본처를 버리고 새장가 가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면서 핀잔을 주었습니다. 도망치듯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소식을 알리지 않고 숨어 지냈습니다.
한 때는 크게 번창했던 사업을 완전히 말아먹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더 이상 기댈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본가로 들어오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서 안채를 대대적으로 수리했습니다. 당신은 별채로 내려갔습니다. 몇 년 동안 얼굴조차 볼 수 없었던 아들을 환영했습니다. 어머니는 더없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얼굴에 조금씩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로 들어온 며느리와의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다른 아들과의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집을 나왔습니다.
사람은 이렇습니다. 조금만 살만하면 타락한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둘째는 자신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아버지 집을 향해서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습니다. 동구 밖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그동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동구 밖을 바라보고 있었던 아버지가 둘째를 발견했습니다. 미처 신발도 신지 못한 상태에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아들을 먼저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들에게 쏟아질 수도 있었던 돌을 자신이 대신 맞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들과의 화해를 공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버지는 둘째가 미처 인사도 꺼내기 전에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자신이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숨을 몰아쉬며 달릴 때부터 쭉 지켜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누구나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종들을 불렀습니다.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아들에게 입혀주라고 명령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각종 절기나 연회 때 갖춰 입는 화려한 옷이었습니다. 손가락에는 반지를 끼워주라고 명령했습니다. 인감도장 역할을 하는 반지였습니다. 때와 각질로 완전히 덮여 있던 더러운 발에는 신발을 신겨주라고 명령했습니다.
종은 신발을 내밀며 “당신을 주인으로 받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같이 둘째가 아버지와 화해했다는 의미였습니다. 잃어버렸던 아들의 신분과 지위와 권리를 완벽하게 회복했다는 의미였습니다. 또 가장 살진 소를 골라잡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향해서는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15:23b-24a)라고 외쳤습니다. 동시에 둘째를 환영하는 성대한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일들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둘째가 미리 준비해 놓았던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이루어졌습니다.
아니 아버지는 둘째로부터 어떤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아들의 지위를 회복한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아들이, 아들된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의지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버지는 자신의 몫을 당장 나눠달라는 아들의 요구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들어주었습니다. 유산 전부를 완전히 처분할 수 있는 권리 일체까지 넘겨주었습니다. 자신으로부터 멀리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곳에 마음대로 투자할 수 있도록 맡겨두었습니다.
단 한 번도 아들에게 주어져 있던 자유를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돌아오기로 결정할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주었습니다. 풀이 죽은 채 돌아오고 있던 아들을 맨발로 달려가서 기꺼이 환영해 주었습니다.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모든 지위를 온전히 다 회복시켜주었습니다. 아들이 보무步武도 당당하게 “나는 나다”라고 선포하며 자신답게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었습니다. 아들로부터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마을 사람들의 조롱과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단 한 번도, 아니 눈을 깜박이는 순간 지나가 버리는 경각頃刻이라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락한 교회들이 일 년 열두 달 쉬지 않고 줄곧 요구하고 있는 일 년 된 송아지보다, 천 천의 숫양보다,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보다,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맏아들보다,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서 맺은 소중한 열매들보다 내가 나 되는 것을 훨씬 더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십니다. 진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탕부라는 참람한 소리까지 들어가면서도 당신 안에 흘러넘치고 있는 사랑을 무모할 정도로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목적입니다. 오늘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모든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뛰어넘어서 오래 참으시고, 오래 견디시며, 오래 기다려주시는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방주를 짓는 동안 줄곧 함께 동행 하셨습니다. 모든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셨습니다. 전무후무한 홍수 속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인류의 새로운 시조始祖로서 무사히 첫발을 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해주셨습니다. 이미 24년 전에 믿음의 여정을 시작했고, 이제는 거의 완숙한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던 아브라함에게는 달랐습니다. “너는 나보다 앞서 걸으라Walk on ahead of Me”(창17:1a)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당신보다 앞서 걸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믿음, 스스로 새로운 무엇인가를 하려는 믿음, 스스로 남들이 걷지 않으려는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믿음, 스스로 누구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 속으로 뛰어 들어갈 수 있는 믿음,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삶이 눈앞에 펼쳐진다 할지라도 스스로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살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믿음을 가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당신이 창세전부터 작정하신 아브라함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답게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답게 살 수 있었던 바로 그 믿음으로 무장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고전15:10a)라는 사도의 고백대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세상 그 무엇도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자신의 절대 고유 가치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반드시 나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나의 나됨을 위하여 언제나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무엇보다 나다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회복한 진정한 나로 거듭나는 복된 삶,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나는 나다.”라고 선포할 수 있는 복된 삶, 나다운 삶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인지 세상에 보여주는 복된 삶, 탕부라는 참람한 소리까지 들어가면서도 나답게 살 수 있는 은혜를 무모할 정도로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