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이시돌 길(2)
2021.12.8
이시돌길의 시작
성 이시돌센터 전시관
밝은오름(금악리)
붉은오름, 명악, 적악 등 여러 별칭이 있다.
모두 이 오름을 구성하는 흙이 붉은색을 띠는 데세서 유래한 명칭으로,
한림읍에만 같은 명칭의 오름이 3개나 있다.
정물오름
금오름
금오름은 제주 서부 중산간 지역의 대표적인 오름 중의 하나이다.
산정부에 대형의 원형 분화구와 산정화구호(山頂火口湖)를 갖는
신기(新期)의 기생화산체이며, 남북으로 2개의 봉우리가
동서의 낮은 안부로 이어지며 원형의 분화구 (깊이 52m)를 이루고 있다.
분화구내의 산정화구호 (일명 今岳潭)는 예전에는 풍부한 수량을 갖고 있었으나
현재는 화구 바닥이 드러나 있다.
`검, 감, 곰, 금` 등은 어원상 신(神)이란 뜻인 `곰(고어)`과 상통하며,
동일한 뜻을 지닌 `곰`係語(계어)로서 고조선시대부터 쓰여 온 말이라고 한다.
즉 `금오름`은 神이란 뜻의 어원을 가진 호칭으로 해석되며,
옛날부터 신성시 되어 온 오름임을 알 수 있다.
해송, 삼나무, 찔레, 보리수, 윷노리나무 등 원형 분화구와 산정화구호이다.
* 표고 427.5m, 비고 178m, 둘레 2,861m, 면적 613,966㎡, 저경 1,008m
금악리 웃동네 마을터
금악리 상동이라는 뜻에서 웃동네라고 불렸다.
38호 141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1948년 11월 21일경 소개령에 의해 마을이 전소되었고,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야했다.
그 와중에 주민 8명이 희생되었다.
1949년에 이르러 무장대에 대한 대토벌이 종료되어
인근 마을이 복구되는 와중에도 당국에서는 금악마을을
계속 위험지구로 여겨 복구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1953년 7월에 이르러서야 금악주민들은 마을 복구를 허락받았다.
하지만 1948년 이전에 38가호가 모여 살던 금악 웃동네(금악 상동)는
복구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이 되어버렸다.
주민들이 본동을 재건해서 그 곳에 모여 살다보니
웃동네는 자연 폐촌이 되어버린 것이다.
금악 웃동네는 아직도 대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서
당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대문없는 마을 상명리 / 월림리
조수공소
한경면 조수리에 위치한 신창성당 관할의 공소.
1957년 11월 3일 신창본당 소속으로 설립되었고,
2001년 1월 11일 새 성전이 봉헌되었다.
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민박동과 교육관을 갖추고 있다.
청수공소
한경면 청수리에 위치한 고산성당 관할의 아름다운 공소.
1956년에 설립되었고,
2,000년 북제주군 건축상(특선)을 수상한
현재의 경당은 2,000년에 신축되었다.
이시돌길의 마침이자 김대건길의 시작
고산성당
한국 전행 후 고산지역에서 형성된 신앙 공동체는
1955년 4월에 한림본당 소속 '고산공소'로 설정되었다가
1957년 4월에 신창 본당이 부활되면서 신창본당 관할로 이관되었으며,
23년이 지난 1990년 2월 22일 '고산본당'으로 승격되었다.
현재 청수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첫댓글 성지순례- 이시돌 길(2)을 둘러봅니다.
감사합니다.
세잎크로버 님의 인생기가
성지술례 입니다
감도입니다
감사합니다.